카자흐스탄 의료선교여행기 ③ - 황무지에 세워지는 교회

아스타나 선교지 탐방 - 11. 아스타나 장로교회 건축과 사역 현장 (2005.8)

이번에 소개할 아스타나 장로교회는 우리 가정이 출석했던 교회이기도 합니다. 저희 가정이 아스타나에 정착한 것이 2001년 8월이고, 아스타나 장로교회가 첫 예배를 드린 것이 2001년 2월이니까... 장로교회가 세워지고 6개월 후에 저희 가정이 합류한 셈입니다.  따라서 비교적 초창기의 기억들을 공유하고 있지요.

초기 아스타나 장로교회에 관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저희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사연 많고 추억 깊은 교회를 1년 10개월 만에 다시 방문했습니다.

아스타나 장로교회는 교회당 건물이 없기에 2001년 교회 설립 당시부터 현대회화미술관의 홀을 빌려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김명희/이영분 선교사님은 바울선교회 파송 선교사인데 한글학교, 구제, 교회개척 사역으로 5년째 활동 중이십니다.

 아스타나 장로교회가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현대회화미술관 홀에서 진료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교회당 건물이 없다 보니 진료 안내 광고를 내기도 어렵고, 공공 기관인 미술관에서 장시간 진료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올해도 수요일 저녁, 두 시간 남짓만 홀에서 진료했을 뿐입니다. 아스타나 장로교회가 다른 지역 교회들처럼 예배당을 가지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번 선교여행기간 동안 아스타나 장로교회당 건축 현장을 방문했습니다. 황량한 벌판 위에는 사진처럼 빨간 벽돌의 새 예배당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2003년 10월, 한국으로 귀국하기 전... 아스타나 장로교회 건축 예정 부지를 선교사님 부부와 함께 방문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둑어둑해지던 저녁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정말 황량했던 에브라지야 시장 뒷쪽 벌판...주변에는 그저 앙상한 벽돌 건축물 몇 개만 띄엄띄엄 보이는 그 곳에 장차 교회가 세워진다는 소식에 함께 기대하며 기도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교회가 세워지는 주변 땅은 아주 옛날에는 바다였나 봅니다. 마치 눈이 소복 내린 것처럼 하얀 소금들이 땅에 깔려 있었으니까요.. 그 소금밭에 교회가 세워지는 초기 설계 작업이 이뤄질 때 우린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들어설 터만 보고 떠났던 우리 부부였기에 이렇게 예배당이 실제 건축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남다른 감격과 감사가 밀려 왔습니다.

'하나님..정말 이 일을 이루고 계시는군요. 대단합니다.당신의 열심은...'

 사진에서 보는대로 예배당은 비교적 큰 규모입니다. 아스타나 장로교회는 이 건물을 단지 예배당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선교센터' 라고 지칭합니다. 이 안에는 예배당 뿐만 아니라 신학 교육이나 기타 교육 활동이 이뤄질 수 있는 교육관, 단기팀이 묵고 갈 수 있는 숙소, 사택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교회 마당 한 구석에는 농구대도 세워질 계획입니다.

이 예배당 건축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열정이 필요했는지 말도 못합니다. 이 곳에 예배당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불하받는 일에서부터 시작해서 1년 가까이 설계 도면을 기획하고 완성하는 초기 단계동안에도 수 많은 어려움과 장애물들이 찾아 왔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선 예상대로 이루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그렇게도 놀라운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바람 많은 이 지역은 나무보다는 철로 된 지붕을 얹는 것이 안전하다며 기존 설계를 변경하라는 통보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건축의 1단계인 '땅 파기',' 기초 다지기' 는 이곳 건축 회사 한 곳과 계약을 맺고 추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일 추진이 더딘지...2단계 벽돌을 쌓고 건물을 올리는 작업은 선교사님 가족과 교회 식구들이 직접 했었다고 합니다. 일일이 벽돌, 시멘트, 철근 등을 자재상에서 구입하고...건축에 필요한 중장비를 직접 가서 임대하고...실제 인부들을 데려다가 함께 벽돌을 쌓았다고 합니다.

그 2단계 작업이 지난 1년 내내 이어졌습니다. 기도 편지 속에 보이던 빨간 예배당 건물을 직접 이곳에 와서 보니...그제서야 이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이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건축 자재를 지키기 위해 교회 청년들이 콘테이너 안에서 밤새 지내야 한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귀하던지...잠시 깜빡 잠든 사이 엄청난 분량의 스티로폼을 차떼기로 도난 당했다는 얘기를 들으며 얼마나 가슴 아팠는지 모릅니다.

뜨거운 카자흐스탄의 햇볕...잠시도 참을 수 없는 그 햇살 아래에서 벽돌을 쌓아 올리느라 까맣게 그을린 장로교회 여학생들의 얼굴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면 이 아이들이 이렇게 자신을 희생할까...' 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맨 왼쪽이 아스타나 장로교회의 자매 '자밀라' 입니다. 가운데가 얼굴이 검기로 유명한 우리 팀의 우형 형제인데..자밀라와 우형 형제의 얼굴 색이 비슷합니다. 매일 매일 건축현장에서 햇볕에 그을린 자밀라의 얼굴이 얼마나 검게 탔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맨 우측 우리 팀 경인이의 얼굴빛과 비교해 봐도 알 수 있죠.

 

교회당 내부를 보여 주기 위해 굳게 닫힌 교회당 문을 여셨습니다. 최근 3년 동안...이 교회당 건립은 선교사님의 지상 과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에 반응하게 하셨고 많은 기도와 물질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사실 예배당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모두 확보한 상태에서 이 공사를 시작했다면 이렇게 힘들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넉넉한 재정만 있다면 적당한 건축 회사에 의뢰해서 몇 개월만에도 끝낼 수 있는 공사니까요. 하지만 교회당 건립은 꿈만으로 시작된 일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상태에서 교회당 부지를 불하받기 위해 시청을 드나들며 시작된 이 일은...그 해 가을, 바울 선교회에수 부쳐온 바자회 수익금을 기반으로 실제 설계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는 계속되었고, 벽돌 하나 하나...철근 하나 하나가 모두 다...한국에서 보내 준 후원금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벽돌 100장 분의 후원금이 모이며 그 만큼 쌓아 올렸습니다.

여기까지 공사를 끌고 오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눈물과 피말리는 어려움이 있었는지...그 누구도 당하지 않고선 꿈꿀 수 없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선교사님 조차..."이렇게 어려운 일인줄 미리 알았더라면 애시당초 시작하지 않았을 거예요.." 라고 말할 정도니까요.

본당은 단층으로 짓고 그 옆으로 3층짜리 건물을 붙여 올리고 있는 이 건물 내부 모습입니다. 아직도 여기 저기 쌓여 있는 건축 자재에서 현장의 열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영하 40도에 육박하는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벽은 벽돌로 두껍게 쌓여 있습니다.

선교사님에게서 이 건축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를 듣는 동안 모두의 맘 속에는 이 엄청난 역사에 대한 기대, 안타까움, 슬픔, 비장함...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밀려 왔습니다. 사실 선교지에 이렇게 매머드 예배당을 지을 필요가 있는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견해를 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은 이 자리에 이 교회당을 세우시고 계시고 이 일을 위해 김명희 선교사님 가정을 사용하고 계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예배당의 건축을 위해선 45만불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까지 15만 불 정도의 재정이 이곳에 투입되었습니다. 앞으로도 30만불이라는 어마어마한 자금이 필요합니다. 이미 선교사의 손도 떠나갔고...사람의 열심이 해낼 수 있는 한계도 벗어나 있습니다. 최근에 저는 갈대상자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선화가 권해주기 망설이며 권한 책이었습니다. (선화 보기에는 저도 대형 사고를 칠 수 있는 위험 인물이라는 거죠.) 한동대의 시작이 그랬던 것처럼, 선교사님 부부는 김총장님 부부가 겪었던 것과 같은 고난의 시간들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멋지게 이루실 것입니다.  

 모두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팀이 아스타나에 들어오던 날... 차 안에서 선교사님은 건축을 추진하며 얻게 된 확신에 대한 얘기를 해 주셨습니다. 김명희 선교사님이 카자흐스탄에 오게 된 것도 선교사로 헌신하고 준비하던 중 전에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던 카자흐스탄에 대한 정보을 계속 접하게 되면서 시작된 일이라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카자흐스탄과 관련된 사람들만 계속 만나게 되더라고 합니다. 우연같지만 하나님이 이끄신 일이었습니다. 이번에 이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난공불락의 어려움들이 수 없이 많이 찾아 왔지만..이 모든 문제들을 신기한 방법으로 해결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며 기적의 하나님이 이끌고 계심을 느꼈고 이제는 그저 그 분이 해 주시는대로 그저 따라가기만 한다는 배짱이 생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도 우리의 일은 기도입니다. 모두가 함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황무지 같은 아스타나에 세워지는 이 건물을 통해 하나님을 아는 백성들이 수 없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요. 하나님 이 역사가 하나님의 시간에 맞춰 완성되도록 수 많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주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다음 날 우리는 아스타나 장로교회가 매달 시행하는 구제품 전달 일정에 맞춰 가정 방문 진료를 하게 되었습니다. .

얼마 전 남편이 돌아가시고..홀로 된 할머니가 사시는 가정입니다. 저희 가정이 아스타나에 살 때는 매 달 선교사님과 함께 이 가정을 방문해서 할머니의 건강을 살피고 약도 드리곤 했었는데...정말 오랜 만에 다시 방문한 셈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절 잊지 않고 계셨습니다.

 혈압은 조절되지 않고 있었고..아마도 최근 있었던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인지 깊은 상실과 우울에 빠져 있었습니다. 며칠 간의 진료로 인해 약품이 거의 바닥 난 상태로 할머니에게 충분한 약품을 드릴 수 없는 것이 안타까왔습니다. 옛날처럼 내가 이곳에 있다면 잘 돌봐드릴 수 있을텐데... 그래도 자식처럼 위로해 주시는 선교사님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많은 도전을 받았습니다.

아스타나에 살고 있을 당시에도 돌아 볼 사람들은 주변에 참 많았었는데...그러지 못했던 게으름과 교만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다음으로 찾아 간 집은 7남매가 사는 집입니다. 아스타나 장로교회가 구제품을 제공하는 가정들은 아스타나 시청의 종교 담당국에서 알선한 가정들입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가정들이 아닙니다. 선교사님이 처음 이 집을 찾아갔을 때...도무지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집 안 모습에 많은 충격을 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환경에서도 홀어머니와 7남매, 그리고 큰 딸의 아기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곳은 방문자가 찾아가도 앉을 자리가 없어 늘 서 있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곳입니다.

이 날도 우리 팀원들과 함께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선교지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수 많은 영혼들의 영적인 필요와 아울러 육적인 필요도 채워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옛 말에 가난은 나랏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지만...그렇게도 가난하고 굶주렸던 전 후 한국 땅에서 장미가 핀 된 것처럼 이 땅에도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과 함께 그들 삶의 빈핍한 부분들이 해결되어지도록 모든 이의 노력이 모여야겠습니다. 물론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의 각성이 앞서야겠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는 많은 크리스챤들의 관심이 아쉬운 곳이라 하겠습니다. 더욱이 카자흐스탄은 구 소련 시절 스탈린의 협동 농장 추진 과정에서 많은 카자흐인들이 러시아인들에 의해 처형된 슬픈 역사가 있기에 러시아인이 믿는 신, 하나님에 대한 저항감, 반감이 무척 심한 곳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라고 말하면 비웃고 받아들이지 않는 그들의 맘 아래에는 슬픈 그들 민족의 수난사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심을 예수 믿는 사람들(외국 선교사와 외국 교회)이 정말 보여줘야 할 곳이 바로 이 곳 카자흐스탄입니다.

이렇게 매 달 가정을 방문하게 되면 예수를 영접하지 않는 그들도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에 반응을 보입니다. 방문시 함께 기도하기도 하고...교회 모임에 나오기도 하지요. 우리가 방문한 다음 주일 예배 때도 7남매의 어머니가 주일 예배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항상 관절염 약과 혈압약, 위장약 등을 드렸던 싸샤네 할머니는 1년 10개월 만에 나타난 절 보며 어디 갔었냐며 그 동안 보관하고 있던 KOICA  마크가 선명한 약봉지를 내 보이셨습니다. 2년 가까이 보관하고 있었던 KOICA 약봉지를 바라본 순간...얼마나 감격적이고 가슴 아팠었는지... 한국으로 돌아가서도 꼭 약을 계속 보내야겠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는 골수염이 심각한 분인데 아직도 살아 계셨습니다. 아목시실린 같은 항생제를 계속 복용하도록 했었는데... 놀랍게도 상처 부위는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스스로 매일 환부의 붕대를 교체합니다. 이처럼 내가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분들도 수 없이 많이 만났습니다. 수술해야 하는 사람, 입원해야 하는 사람...작은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해결 안되는 사람들을 무수히 만나며 그저 오병이어를 내 놓는 부끄러운 손처럼...그들에겐 약을 내놓던 부끄러운 기억들이 내겐 있습니다. 그런 옛 시간들을 떠 올리며 항상 드는 생각은 "동시대적 진료가 이뤄질 수 있는, 한국 수준의 검사와 진료가 가능한 기독교 의료기관" 이 아스타나에 꼭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알릴 수 있는 작은 나팔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아스타나 장애인 및 노인 요양원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그 곳에는 주동일 할머니가 계십니다. 주동일 할머니는 예전에도 우리 홈을 통해 소개해 드렸던 인물입니다. 이 분은 해방 후 한국 땅에서 소련을 거쳐 이곳 중앙 아시아까지 들어 오신 분입니다. 중앙 아시아의 고려인들은 대부분 1937년 스탈린 강제 유배 정책의 희생자들이지만...이렇게 해방 후 공산주의 운동에 관심을 가졌던 젊은 지식인들 일부가 소련으로 흘러 들어가기도 했었습니다. 주동일 할머니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오신 분입니다. 나이 90세에 고등학교를 나오셨다고 하면...그 당시론 상당한 지식인에 해당됩니다.

할머니는 소련 땅에서 한국인의 말과 얼을 지키기 위해 한국어로 된 신문을 보전, 발행하는데 남다른 공헌을 하셨습니다. '레닌 기치'로 불리다 카자흐스탄 분리 독립후 '고려일보'로 명명된 이 신문은 구 소련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려인들이 한국 말과 글을 지켜 가는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소련 땅의 많은 한국계 문학가들이 이 신문을 통해 한국어로 작품을 발표하고 문예 활동을 벌여 온 것이죠. 최근 고려일보 CD화 작업이 완성되어 한국에서도 고려일보를 만나볼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국내 기자 중 한 분이 KOICA 봉사단원으로 지원해서 유서 깊은 곳, 고려일보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고려일보과 고려인에 대한 글은 아래를 참조하시면 됩니다.

 

 할머니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껴안아 주시던 모습입니다. 얼마나..사랑스러우셨으면 그러셨을까요. 할머니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내 나이 구십이지만 아직도 내 조국 내 강산의 모습은 지워지지 않아요. 가서 전해 주세요. 지금도 고향 땅 길 모퉁이에서 자라는 꽃 한 포기도 잊지 않고 있다고..." 할머니는 한국어로 쓴 시집도 있을 정도로 문학적인 기질이 뛰어난 분이십니다.

 주동일 할머니는 아스타나에 오시기 전, 끄질오르다에 사셨다고 합니다. 10 여년 전, 꿈에도 그리던 조국 사람, 한국인 선교사를 처음 만난 뒤 동포를 만난게 너무나 반가워 교회에도 열심히 출석하며 선교사님을 많이 도왔다고 합니다. 할머니가 아스타나로 올라오게 되자 끄질오르다의 선교사님은 아스타나 장로교회 목사님께 이 할머니를 소개했고...할머니는 지금 아스타나 장로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계십니다.

 양로원을 나오며 다같이 눈부신 역광을 마다 않고 카메라 렌즈 앞에 섰습니다. 할머니와의 만남을 꼭 남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할머니께 이 사진을 보내 드리겠다고 했는데...빨리 부쳐야겠습니다.

  주마간산으로 훑어 봐야 했던 일주일의 시간이었지만 아스타나 장로교회는 1년 10개월 전과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현실과 싸워 나가고 있었습니다. 신도시, 신수도 건설이라는 건축붐 속에서 돈 없는 선교사가 느끼는 상대적 위축, 갈수록 거세어지는 민족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속에서 복음을 말해야 하는 내 모습, 주류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소수로 살면서 그들에게 본을 보여야 하는 책임감, 부족한 지원에도 불구하고 교회 건립이라는 엄청난 일을 추진하는 힘겨움, 그리고 끊임없이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아야하는 내면의 전쟁과 동료 선교사에게 무관심이 아니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하는 명제....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함께 일하시고 계심을 하루하루 피부로 실감할 수 있기에...이곳은 말 그대로 해외 선교의 최일선, 기쁨과 위로가 넘쳐 흐르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곳이자 그 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법을 배우며 일하는 곳이죠.

 

형민이는 만 3살 넘어서까지 카자흐스탄에서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스타나에 도착하던 날, 람스토르 앞 레스푸브리카 거리에 들어서자 말자 우리 가정이 전에 살던 말라죠즈니와 바라예바 도로를 바라보며 형민이는  "아...여기 내가 아는 곳인데..." 라며 반갑게 소리쳤습니다. 내 나이 35세, 형민이 나이 6세... 2005 의료선교여행을 통해 1년 10개월만에 이 곳을 다시 밟는 우리 부자는 아스타나 교회당 건축 현장 앞 황무지에 서서, 멀지 않아 실현될 꿈결같은 미래를 그려 보고 있습니다.    2005.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