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도에서 만난 선교사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활동 중인 남성택/박용주 선교사님 가족을 지난 주에 만났습니다. 선교사님은 예장(고신) 총회 파송 선교사로서 카자흐스탄의 주류 민족(55%)이자 무슬림인 카자흐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으며 '수이어스펜설록 카우옴'이라는 카자흐인 교회를 개척하고 계시던 중 안식년으로 일시 귀국하셨습니다.

남성택 선교사님의 수이어스펜설록 교회와 저는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스타나에서 산 지 1년여가 지날 무렵...남 선교사님 가족은 최종 사역지인 아스타나로 옮겨 오셨고 마당이 딸린 자그마한 집을 하나 수리해서 '수이어스펜설록' 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카우옴)을 열게 되셨습니다. 이제 막 새로 시작한 교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지역 사회와의 접촉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전 매주 한 번씩 수이어스펜설록 교회를 방문하여 진료 활동을 했었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당으로 출입하도록 하기 위한 시도였지요.

그동안 '수이어스펜설록 교회'와 관련한 글들도 몇 번 올렸는데 아래를 클릭해 보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선교사님 가정은 지난 9월 2-3일 경주에서 있었던 '카자흐스탄 선교보고대회' 일정에 맞춰 귀국하셨습니다. 귀국 전부터 한국으로 들어오신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연락은 없었습니다. 경주에서 열린다는 선교보고대회도 가 보고 싶었지만 평일(목-금)에 열리는 행사라 참석할 도리가 없었죠. 그러던 중 딱 한 번 선교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집으로 걸려 왔지만 제가 없었을 때인지라....제 핸드폰 번호만 물어 보시고는 다시 전화하겠다며 끊은게 처음이지 마지막 연락이었습니다.

참 아쉬웠습니다. 우리 가정이 떠난 뒤의 아스타나 소식도 듣고 싶고 선교사님의 가족도 무척 만나 보고 싶었는데... 이곳이 카자흐스탄이 아니라 한국이라는 현실적 장애물들이 우리의 만남을 어렵게 했습니다. 제가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병원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 알고 계시는 선교사님으로선 선뜻 한 번 만나자는 얘기도 못 꺼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우리 부부는 총회 세계선교위원회 홈페이지에서 남성택 선교사님 가정이 머무시는 안식관의 연락처를 알게 되었고 카자흐스탄으로 되돌아가기 전, 이번에...가까스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님은 거제도의 한 교회에서 마련해 준 아파트(안식관)에서 3개월간 머무셨습니다. 통상 선교사의 안식년은 1년임에도 남 선교사님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선교지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셨습니다.

거제도로 가는 길은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도 빠르고 값싸고,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뱃길이 있다면 바로 용원에서 조금 떨어진 안골에서 떠나는 페리호를 타는 방법입니다.

이 배는 자동차 수십대도 실을 수 있는 배로, 거제도까지는 불과 3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주 5일 근무로 쉬게 되는 토요일 아침...우린 셋째 성은이는 처가에 맡겨 두고 형민이와 시은이만 데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용원에서 배를 탄 기억은 있지만 직접 차를 몰고 용원의 안골 선착장까지 가는 건 처음이라 염려도 되었지만, 알고 보니 무척 부산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양산에서는 김해공항 가는 방향으로 나가 공항로를 따라 명지,녹산쪽으로 쭉 달리기만 하면 진해 입구에서 용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오랜만의 나들이에 아이들도 좋아했고 선화나 제게도 반가운 외출이었습니다. 먼저 용원에 들러 안골로 들어가는 길을 묻기로 했습니다. 예전에는 용원에도 가덕도 등지로 가는 배가 떠나는 선착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전한 상태이고 고깃배를 위한 수로만 하나  달랑 나 있었습니다. 시장과 횟집등이 즐비한 이곳은 밀물 때가 되면 아래 그림에서 보이는 포장마차 옆 도로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합니다. 주변 횟집에서 떨어진 물고기들까지 떠밀려서 온다더군요.

포장 마차에서 어묵, 떡볶이, 붕어빵 등을 먹으며 안골로 가는 길을 아저씨게 물어 보았습니다. 친절한 아저씨는 쉽게 길을 설명해 주셨죠.

불과 부산에서 10여분 떨어진 곳인데도 거리 풍경에서는 한적한 시골 분위기가 느껴졌습니다. 빡빡한 병원 생활로 지쳐 있는 제겐 그것만으로도 큰 휴식이 되었습니다.

포장마차를 나온 우린 어시장과 횟집이 모여 있는 바닷가 쪽으로 가 보았습니다.

조그마한 수로를 따라 나즈막하게 갈매기들과 한 사람도 커 보이는 작은 통통배들이 보이는 곳... 어패류들의 패션쇼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이 곳, 용원 바닷가의 모습이었습니다.

해운대 같이 큰 바다만 보던 형민이에게는 이렇게 조그마한 항구 풍경이 정겨웠나 봅니다.

시은이랑 같이 방파제에 딱 붙어서....잔잔한 바다 물결에서 눈을 뗄 줄을 몰랐습니다.

아빠가 사진 찍는다고 이름을 불렀더니...형민이 뒤에 숨어 있던 시은이도 고개를 돌리고 있네요.

우리 가족에겐 너무도 평화롭고 좋은 시간이었죠.

우리가 용원에서 이렇게 여유를 즐길 수 있었던 건 안골에서 거제도로 떠나는 배의 출항 간격이 2-3시간 이기 때문입니다. 초행길이라 일찍 출발했던 바람에 여유가 많이 생긴 것이죠. 우린 즐비한 횟집 가운에 한 곳을 골라 애들이 먹을 수 있는 된장찌게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용원에서 안골 페리호 선착장까지는 10분 거리였습니다.

 

페리호를 타는 안골 선착장 여객 터미널 안의 모습입니다.

형민이와 시은이...요만한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이 때가 어쩌면 우리 가정의 또 하나의 황금기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빠, 엄마가 가자면 그저 좋아하고...선뜻 따라 나서는 이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발걸음도 가볍습니다. 사실 우리가 더 재미있는데...

아직도 기어 다니고 있는 셋째 성은이가 남아 있기에 우리의 황금기는 당분간 계속 이어질 것 같네요.

포근한 날씨에 맑은 하늘....푸른 빛을 띤 바다를 바라 보는 아이들의 마음은 설레이기만 합니다.

잠시 후 커다란 배가 선착장으로 들어 왔습니다. 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차곡 차곡 배 안으로 들어가고....우리들의 항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이런 배를 탄 건...형민이도 처음이고 시은이도 처음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생활의 터전이 부산이라는 사실에 오래 전부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카자흐스탄 생활 3년을 거치면서 더욱 증폭되었는데...바다와 산을 끼고 있는 부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곳인지...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온 지 1년이 넘어가는 아직까지도 산과 강, 바다를 볼 때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동을 받습니다.

자연으로부터 얻는 감동..."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이란 찬송이 그렇게 눈물겹도록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온 뒤 부터였습니다.

매일 호포 지하철 역에 오를 때마다, 긴 산자락을 벗 삼아 유유하게 흐르는 낙동강의 물줄기를 보며...매일마다 감동합니다. 햇살에 강물이 반짝일 때마다 이 아름다운 경치를 눈 앞에 두고만 싶어지죠.

부산에 살게 되면 거제도처럼 아름다운 섬을 방문할 기회를 더 갖게 되는 것도 행운입니다. 남해의 푸른 바다, 아직도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늦가을의 남해에서....카자흐스탄에서도, 러시아에서도 아니 어디서도 느낄 수 없는 우리 만의 아름다운 정서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너무 좋습니다.

 배가 출발하자 갑판 위에 서 있기 힘들 정도의 바람이 불어 왔고 아이들을 데리고 선실 내로 들어 왔습니다. 배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들 2층이나 3층 갑판, 온돌 바닥으로 된 다른 선실에 모여 있었고 우리가 있는 곳은 비교적 한산했습니다.

선교사님께서 맞은 편 거제도 선착장에 나와 계시겠다는 연락이 휴대폰으로 왔습니다. 반가운 얼굴을 볼 거라는 들뜬 마음으로 아는 양....거제도는 조금씩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배는 거제도에 도착했습니다. 다시 자동차들이 뭍으로 밀물처럼 밀려 나갔고 우리도 아이들과 함께 사람들 틈에 끼여 밖으로 나왔습니다.

아니나다를까...선착장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남 선교사님의 모습이 금방 눈에 들어 왔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보다 좀 더 탄 듯한 얼굴이지만 예전 그대로의 모습이셨습니다.

"선교사님...."

"아이고...이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이게 누구야...시은이야?"

무엇보다 부쩍 커 버린 시은이가 가장 놀라우신가 봅니다. 늘 선화 품에 안겨 있던 시은이가 이렇게 뚜벅뚜벅 걸어올 줄이야...(우리가 카자흐스탄을 떠난 것은 시은이가 만 11개월 때의 일입니다.)

선교사님이 친구 목사님에게서 빌렸다는 승용차에 모두 올라탄 뒤 거제도의 푸른 숲 사이를 지나 안식관이 있는 장승포로 내달렸습니다. 차 안에선 안부 인사와 아스타나 얘기들이 이어졌지요.

안식관에 도착해서는 사모임과 아이들과도 반가운 해후를 했습니다. 두 아들인 성민이와 지형이도 부쩍 자라 있었습니다.

안식관은 24평 정도되는 아파트였는데 방 3개에 모든 가구들이 잘 갖춰져 있었습니다. 관리비 등도 교회에서 부담하고 있기에 선교사님들은 그저 몸만 들어오면 되는...그야 말로 귀한 안식관이었습니다.

이 아파트를 보면서 '이렇게 선교사 안식관을 마련하는 것도 지역 교회로선 참 큰 후원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모님은 밝은 미소를 가진 분이십니다. 모두가 거실에 둘러 앉아 아스타나의 다른 선교사님들의 근황, 우리 가정의 계획, 선교사님의 계획 등을 나누었습니다. 남성택 선교사님은 큰 욕심을 내기보다는 현실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선교 사역을 꿈꾸고 계십니다. 반듯한 교회당 건물을 가진 아스타나 나사렛 교회, 현재 건축이 진행 중인 아스타나 아스타나 장로교회처럼 큰 교회당이 있으면 좋겠지만 욕심은 없으십니다.

남 선교사님의 사역은 카자흐스탄의 여러 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카자흐 민족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보니 앞서 말한 다민족 사역의 교회들보다 '교회' 나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선 소규모 공동체 중심의 친밀한 접촉과 구제와 섬김을 통한 물 밑 교제가 더 중요합니다. 일대일 양육을 통한 현지인의 제자 양육, 공동 거주를 통한 신앙 교육, cell church로 표현되는 포교 활동이 무슬림 민족을 상대하는 남 선교사님의 사역 방향이기에 밖으로 크게 드러나는 건물에는 그리 집착하지 않으시는 거지요. 물론 교육과 구제를 위해 사용되는 좋은 건물이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 보다 더 급한 문제들로 둘러 싸여 있습니다.

남 선교사님은 이런 얘기도 하셨습니다. "다른 어느 선교사들의 사역보다 악한 영들의 도전이 거센 것 같습니다."

이 말은 이슬람 민족인 '카자흐' 인을 대상으로 이뤄지는 선교 활동이 얼마나 어려운 지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 설립 초기에 교회 등록이 순조롭게 이뤄진 것만 빼고 나면...수이어스펜설록 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 어려움이 많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난 2년 간은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자면...  남 선교사님과 함께 동역해 왔던 현지인 사역자 '베르드갈리'가 선교사님과 결별을 선언하고 교회를 떠난 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베르드갈리'는 사역자 아니 동역자로서 갖춰야 하는 인품, 정직, 신앙...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하지만 현지인을 신뢰하는 맘으로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동역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갔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일이 터졌습니다. 선교사님과 우리들이 그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했던 결혼식 당시... 베르드갈리의 신부는 이미 임신 중이었음이 밝혀지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의 신뢰는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현지인들로선 혼전 관계가 흔한 일이지만 남 선교사님으로선 이에 대해 최소한의 반성의 빛도 보이지 않는 베르드갈리에게 권징을 시행했고 베르드갈리는 교회을 나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집이 없었던 그는 결혼 전부터 교회당의 방 한 칸을 차지해 살고 있었고 결혼 후에도 교회당 안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홈에 베르드갈리의 결혼식의 결혼식에 관한 글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그 글을 읽어보면 우리가 얼마나 현지인 사역자 베르드갈리를 믿었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남 선교사님이 겪었던 또 다른 충격적인 사건은 올 여름 한국에서 온 단기 선교팀(IVF)과 현지 어린이들을 데리고 물 가로 떠난 수련회에서 벌어졌습니다. 물놀이를 하던 중 이동을 위해 아이들을 모두 물 밖으로 나오라고 불렀을 때 4살짜리 아이 하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전 순간적으로 뭔가 문제가 발생했음을 느꼈어요. '아...이 아이가 물에 빠졌구나' 라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죠. 한국 단기팀들과 모든 아이들이 그 자리에서 흩어져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아이의 친 언니,오빠도 눈물범벅이 되어 애타게 아이의 이름을 불렀죠. 청년들은 물 속으로 들어가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물살을 따라 떠 내려 갔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전...직접 물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제 키보다 더 깊은 곳까지 경사진 바닥은 불길해 보였습니다. 물 아래서 눈을 뜨고 여기 저기 살펴 보다 머리를 들어 수면 위를 보았습니다. 어디에도 흔적은 보이지 않더군요. 그런데 바로 그 때, 저 멀리서... 콜라병 같은 것이 수면에서 찰랑 거리고 있는 게 보였습니다. 뭔가 싶어 좀 더 관찰하기 좋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 그 곳을 자세히 바라 보았습니다. 그게 바로 아이였습니다. 수초 사이에 걸려 가라앉지 않은 채 그렇게 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얘기를 하시는 선교사님의 모습은 참으로 슬프고 괴로운 모습이었습니다. "뻣뻣하게 굳은 아이의 시신을 직접 안고 바로 병원으로 뛰어 갔어요.."

그 후로는 듣지 않아도 아실 겁니다. 단기팀과 함께 아이와 가족을 위해 기도하고...이 일로 교회에 큰 시험이 들지 않도록 기도하고... 참으로 혹독한 시련이었습니다. 선교사님은 만일 가족들이 교회를 상대로 법적 소송을 걸어 오면 교회 건물을 팔아서라도 배상해 주고 카자흐스탄을 떠나기로 결심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유족들은 선교사님을 상대로 소송을 걸려 했지만 아이의 엄마가 이것을 막았다고 합니다. 평소 주일학교에 큰 관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대했던 선교사님의 모습을 누구보다 잘 아는, 죽은 아이의 엄마가 그 좋은 외국인들에게 그렇게 대할 수 없다고 말렸다고 합니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페리호를 기다리며 차 안에 앉아 멍하니 거제도의 푸른 바다를 바라볼 때였습니다. 예정에도 없이 우리 가족은 선교사님의 안식관에서 하룻밤을 묵었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배를 기다리며 선교사님은 사역 1기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들을 되새기며 무겁게 입을 여셨습니다.

"이 선생님, 카자흐스탄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정말 힘들고 어렵습니다."

아마 지금 아스타나는 백색의 눈의 나라로 변해 있을 겁니다. 들어가자 말자 예전처럼 다시 지붕과 마당에 있는 눈을 치우며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부담감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겠지만...죽은 아이의 부모들을 대하고 베르드갈리와 같이 마음을 줄 수 없는 현지인들을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은 무거울 수 밖에 없으셨습니다. 선교사님에게 있어서 카자흐스탄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은 그 만한 고통과 시련을 안고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사모님이 그러시더군요.

"우리가 왜 카자흐스탄에 가겠습니까? 다 하나님이 부르셨기 때문이지요."

엄마, 아빠가 이렇게 선교사님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동안 형민이와 시은이는 선교사님의 둘째 아들 성민이와 이층 침대에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형민이는 성민이 형에 대한 기억이 가물가물한데....성민이는 형민이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쬐그만 아이로...

아이들은 이렇게 하루가 다르게 자라기만 하는데...선교사님과 우리들이 가진 카자흐스탄에 대한 사명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선교사님 안식관에 갔던 토요일 저녁...선교사님은 저를 '대우 조선' 외국인 기숙사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대우 조선'에는 사업 연수생으로 와 있는 카자흐 인이 40명 가까이 되나 봅니다. 그들은 그 동안 말이 통하지 않아 아파도 제대로 진료를 못 받았다고 합니다. 카자흐어를 구사하는 선교사님이 그 곳에 오시자 얼마나 그들이 반가와 했을까요...선교사님 부부는 여러 번 통역을 위해 그들과 함께 병원을 찾곤 했다고 합니다. 이 날도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한국인 의사...그것도 카자흐스탄에서 2년 반이나 살았던 의사가 왔다며 그들에게로 절 데리고 가셨습니다.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는 밤...대우 조선 기숙사에는 30명 가까이 되는 카자흐 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솔직히 전...영어보다는 러시아어가 더 편합니다. 물론 단어 갯수로 따지면 영어 단어를 더 많이 알겠지만...실제로 영미인을 만나는 것보다는 러시아어권의 사람들(CIS국가)을 만나는 게 더 편하고 또 자연스럽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의 생활이 이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죠.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우즈벡스탄이나 러시아쪽의 환자들을 직접 진료하기도 했었습니다.

인력송출 기관에 2500불이나 주고 한국에 온 카자흐인들은 밤낮없이 일하면서 매월 800불 정도 버는 것 같았습니다. 대부분의 일들이 한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밀폐된 공간에서 페인트 칠하기 등...)이다 보니 그 날 모였던 사람 중 가장 오래 일한 사람은 고작 1년 2개월이었습니다.

1시간 남짓 그들과 자연스런 분위기에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카자흐인들만 모인 방에서 한국인 두 사람이 있다 보니...그 방 안에서만은 '카자흐스탄에 온 한국인'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한국에서 사는 동안 제 삶은 바로 이런 CIS권 노동자들을 위해 드려져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져 간 밤이었습니다.

 

선교사님 댁에서 하룻밤을 자고 난 뒤...대우 조선 외국인 노동자들이 참석한다는 외국인 예배에도 참석했습니다. (사진 참조)

설교자의 말이 루마니아,캄보디아,몽골 어로 차례대로 통역되는, 그야말로 보기드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카자흐인들도 몇 명 왔었는데 남 선교사님께서 그 들 옆에 앉아 통역해 주셨지요.

외국인 예배에 참석한 외국인들은 같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정기적인 모임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과 통역이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유익으로 인해 매주 참석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속에서 하나님은 믿음의 씨앗을 심으시겠지요.   2004.11.25

 

예배를 마친 뒤 한 카자흐 청년이 선교사님에게 자기가 들었던 몇몇 한국어를 카자흐로 알려 줄 수 있겠냐며 공책에다 한국어를 카자흐 표기식으로 빽빽하게 적어 왔습니다. (사진)

예배가 마친 뒤 30분에 걸쳐 이 말들을 카자흐어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그 속에는 "화내지 마세요" 같은 그들의 답답한 심정을 엿 볼 수 있는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선교사님은 안식년 3개월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하시고 카자흐스탄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말 그대로 안식하지도 못한 채...매 주 두 군데 교회에서 선교 보고 겸 후원 요청을 하며 바쁜 나날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짧은 시간이나마 한국에서의 학교 생활을 경험했지요. 11월 23일 비행기를 타셨으니...이제 막 카자흐스탄에 도착하셔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1기 사역동안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신 선교사님을 위로해 달라고...주님이 주시는 평안함을 입혀 달라고 기도합니다. 지금은 수고와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더 많은 은혜와 능력을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 신실한 현지인 사역자와 동역자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합니다.

또...우리 가정이 구체적으로 카자흐스탄을 위한 밀알이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