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나 선교지 탐방 - 7.수이어스펜셜록 교회

"아스타나 선교지 탐방" 이 일곱 번째로 소개하는 교회는 까작 민족만을 선교 대상으로 하고 세워진 '수이어스펜셜록 교회' 입니다. "수이어스펜셜록" 이란 말은 까작어로 "사랑" 을 뜻하는데...아가페적 사랑을 가리킵니다. 까작 사람들은 이 '수이어스펜셜록'이란 단어를 들으면 고귀하고 높은... 거룩한 사랑을 떠 올린다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까작스딴은 120 여개의 민족이 섞여 살고 있는 다 민족 국가입니다. 약 55%의 까작인, 35%의 러시아인, 5%의 우크라이나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고려인(한국인)을 비롯해 유대인까지...인종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민족들이 모여 있기에 각 민족별로 촛점을 맞추어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도 자주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둥간족을 위한 사역, 따따르인을 위한 사역...등을 들 수 있는데...중앙 아시아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민족이 까작스딴에 있는 바람에 이런 선교사들은 비교적 선교 활동이 용이한 까작스딴으로 와서 선교 훈련이나 그 민족을 위한 언어 훈련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까작스딴에서 비교적 복음을 잘 받아들이는 민족은 아무래도 비 이슬람 민족...즉 러시아인들입니다. 이미 988년 러시아의 군주 블라지미르가 비잔틴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한 이래...거의 천년 이상 동안 러시아인들은 기독교 안에서 그들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물론 그들이 받아들인 기독교는 동로마 교회 즉, 그리이스 정교였지요. 나중에 비잔틴 제국인 멸망한 뒤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제 3의 로마를 자처하며 그리이스 정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으려 할 정도로 러시아 정교회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개신교와 달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보다는 의식이나 전통에 얽매여 신앙 생활을 했던 정교회 하의 러시아인들은...공산주의 이념하의 소비에트 시절을 지나면서...종교를 거저 하나의 거치장 스러운 관습으로  여기게 되고...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멀리 떠나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바로...이렇게 잊혀 버린 민족, 러시아인을 위해 많은 선교사들이 구 소련 지역으로 들어 왔었고.. 한 때 모스크바에는 200명 이상의 선교사들이 운집(?)해 있기도 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러시아인들은 그들의 언어, 사회, 문화적 관습과 전혀 대치되는 부분이 없는 개신교 선교사의 교회에서 잘 적응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이미 아주 어릴 적부터 성경에 대한 얘기를 들어 왔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이름을 본 딴 이름들을 가지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러시아 어(語) 만 하더라도...과거 비잔틴 제국이 지리적으로 근접한 남동부 및 동유럽의 슬라브 지역에 대한 선교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던 10세기 경... 선교사로 파송한 끼릴과 메또디우스 형제에 의해 고안된 언어가 바로 러시아어의 모체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 위해 그 언어(끼릴 문자)를 만들었다는데.....그러고 보면... 러시아어는 그 기원부터 교회, 선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언어인 셈입니다.

하지만...까작스딴의 55%의 민족, 아니...이제 독립된 까작스딴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까작인의 경우에는 상황이 180 도 달라집니다. 까작인들에게는 십자가는 미워할 수밖에 없는 흉물스러운 상징입니다.

까작 민족은 투르크계 혈통과 몽고계의 혈통이 섞인 민족입니다.  기원 후 4-6세기 경부터 돌궐 제국을 건설했던 고대 투르크 제국의 후예들은 8 세기에 이르러 중국 당에 붕괴되면서 현재 카작스딴 지역에 유입되어 여러 부족 국가를 형성합니다. 766년 탈라스 국제전에서 아랍(아라비아)의 도움을 받고 중국을 격퇴한 이후 이 지역의 투르크계 부족들은 이슬람화 되었고 ...잠시 거란의 통치를 받다가...12세기에 등장한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혈통에 변화를 겪게 됩니다. 15세기에 들어서 우즈벡 족과 까작 민족이 나누어지면서 형성되기 시작한 까작 민족 공동체는 16세기 중엽에 들어서면서 마침내 하나의 민족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사진: 아스타나 현대 미술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 - 까작 전통 가옥(유르트)과 까작 인의 모습)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미 766년에 투르크 계 부족들이 이슬람화 되었기에...500년 전, 까작 민족 공동체가 형성될 때 당시부터...이슬람이라는 종교는 그들 민족의 정체성 그 자체였습니다.

1731년 자신들의 요구로 까작스딴이 러시아에 편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러시아의 지배에 대한 까작인들의 불만은 날로 팽배해져 갔습니다. 러시아의 까작 식만 통치 이후 경제적으로 약간의 발전이 있긴 했지만...주요 교역이나 기술 집약적 산업은 러시아인들이  모두 장악했고 까작인들은 거저 광산 노동자, 농민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수 차례의 반러시아 폭동이 1917년 10월 혁명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게다가 소비에트 연방 탄생 이후인 1929년... 스탈린은 집단 농장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까작인들을 강제적으로 집단 농장에 배속시키고 그들의 가축은 연방의 소유로 삼아 버렸는데 유목 민족인 까작인의 독특한 문화를 고려하지 않은 이러한 정책은 집단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켜 많은 까작인들이 자신의 가축을 지키려다가 총살을 당하거나 강제 수용소에 보내져야 했습니다. 이 때 까작인 전체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인구가 스탈린에 의한 억압에 저항하다 죽었다고 합니다.

이처럼...러시아 정교와 러시아 군주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까작인들은 기독교(그리이스 정교)와 기독교 국가라고 알려져 있는 러시아에 의해 많은 상처를 받아 왔습니다.  그들을 기독교화(그리이스 정교화)하려는 러시아인들에 의해 문화적 정체성과 언어를 잃었고... 많은 까작인들이 이를 반대하다 죽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까작인들에게는... 기독교를 받아 들이는 것은 러시아의 종교를 받아 들이는 것이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은 까작인의 유산을 배신하고 러시아인이 되는 것과 같다고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들로선 "십자가" 표시는 악마의 상징이요...'하나님'이나 '교회' 라는 단어는 꿈에서라도 없애 버리고 싶은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세월은 흘러...까작스딴이 독립한 지 11년이 지났습니다. 수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까작스딴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그들 앞에 내 비쳐도...그들 맘 속에서는 도무지 그 "사랑의 하나님" 이라는 존재를 받아 들이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까작인들을 전도한다는 것은...다른 이슬람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이중 삼중의 어려움이 따른다고...모든 선교사들은 시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이 한 많은 민족 까작인에게도 하나님은 빛을 비추고 계십니다. 까작스딴이 독립 할 당시... 까작인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었지만...10 년이 지난 지금 7천명이 넘는 까작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있고...알마티의 살렘 교회 처럼 까작인만들 대상으로 하는 교회 임에도 2천명이 넘는 대형 교회가 세워지고 있습니다. (살렘교회를 참고하세요...) 

바로 이러한 까작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겠다고 지난 2002년 9월...아스타나로 올라 오신 선교사 부부가 바로... 남성택, 박용주 선교사님 부부이십니다.

그리고...최근 교회 등록을 마치고 문을 연 까작인만을 위한 교회 이름이 '수이어스펜셜록' 입니다. 까작인들의 거부감을 없애기 위해 "교회" 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카우옴(까작어로 '모임'이라는 뜻)"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다는데....'수이어스펜셜록 카우옴' 이라고 불리는 셈입니다.

 현재 아스타나에는 많은 개신 교회들이 세워져 있습니다. 선교사들의 교회보다는 오히려 러시아인이나 까작인 목사님이 담임하고 있는 교회의 교세가 더 센 곳이 바로 이 곳 아스타나입니다.

하지만...아스타나에서 까작인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교회는 이 수이어스펜셜록 교회를 포함해... 딱 두 군데 뿐입니다. 예배와 성경공부와 대화가 오가는 모든 순서들이 오직 까작어만으로 이루어지는 이러한 까작인 교회는 까작인 복음화를 위한 또 하나의 선교 전략인 셈이지요. 그래서 남선교사님 부부는 까작스딴에 온 이후...까작어 만을 배우셨고...러시아어는 잘 못하시지만...까작어는 까작인들보다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실력을 갖추고 계십니다.

물론 이곳에 있는 현지인 교회들 중 많은 교회에서 러시아어 예배와 까작어 예배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아스타나 은혜교회(블라가닷찌) 와 이미 소개해 드린 45년 전통의 이곳 침례교회에서도 따로 까작어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실제로 가장 복음화되지 않고 있는 민족인 "까작 민족"을 생각한다면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까작인들은 그들의 특수한 민족 정서로 인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안을 위해 공개된 장소보다는 까작인 성도 만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이곳 공무원들은 교회에 다니지 못하게 되어 있고...만일 어떤 공무원이 교회에 나왔다가 발각되는 경우에는 바로 사표를 써야 한다고 합니다.(대부분의 공무원들이 까작인 입니다.) 교회는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비밀스런 예배 처소가 필요해졌고 몇몇 교회들은 일부러 고위직에 있는 까작인 성도들을 구별해서 주일 날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게 아니라....가정 교회 형식으로 따로 모이게 하면서... 때가 찰 때까지 보호하고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사진은 지난 10월(2002.10) 아스타나로 올라오신 남성택 선교사님이 교회로 사용할 집을 구입하셨다고 해서...축하 인사 차 방문했을 때의 모습입니다. 가을 정취가 물씬 풍기는 나무가 많은 집이었습니다.)

남성택 선교사님 부부는 까작스딴이 첫 선교지입니다. 남 선교사님은 장로교(예장 고신) 목사님이신데...결혼 후 현대 정유에 근무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던 중...선교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느끼고...부르심에 순종하는 맘으로 늦게 신학을 시작하고 선교사의 길을 걷게 되신 분이십니다.  아시다시피 80년대 초 OMF 등 국제 해외 선교 단체들의 국내 동원 사역과 OM 소속 로고스 선교선의 방문 등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해외 선교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했고, 88년 '제 1회 선교 한국' 이후...90년대 초에는 거의 모든 선교 단체들의  수련회 이슈는 "해외 선교" 뿐 이였습니다. 90학번으로 부산대학교에 입학했던 저로선...누구보다도 그 때의 열기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에는 오히려 '해외 선교' 에 대한 반발(?)이 일 정도로  '해외 선교' 만을 얘기하는 분위기였습니다. 또 실제로 CMF 나 CCC가 처음으로 선교사를 파송한 해가 90년이기도 했습니다.

전... 누구 못지 않게 해외 선교를 주제로 하는 모임에 많이 참석했었지만....'해외 선교사' 가 하나님이 제게 주신 소명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보내는 선교사'로 헌신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내가 직접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전...하나님께서 내가 선교지로 나갈 것을 원하셨으면 ...오래 전에 내게 그런 애타는 마음을 주셨을 거라고 믿습니다. 저는 '미전도 족속'이라는 단어보다는 '회복' 이라는 단어가 더 크게 와 닿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나님 안에서 저의 비전은 선교보다는 지역 교회와 공동체였고...까작스딴에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를 향한 개인적인 부르심은 선교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내가 섬기는 한국 교회 안에 있었기에....대학 시절...수 많은 해외 선교에 대한 초청 속에서 적지 않게 괴로워 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해외 선교 단체들의 국내 동원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맹렬했던 저의 대학 시절 동안...저의 작은 소망은 더욱 단련되어 갔던 것 같습니다.

전...모든 사람이 해외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사람을 필요한 곳에 세우시고 당신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 세계에, 전 문화 영역에 걸쳐 이루어지기에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는 일만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하게도... 전 지금 KOICA 소속의 계약직 공무원으로 군복무를 대신해서 이렇게 까작스딴으로 파견되었고...하나님은 지금 날 이곳에서 전문인(의료) 선교사처럼 일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이렇게 되리라고는 미처 생각지도 않았는데...하나님은 날 이곳으로 부르시고 이곳 선교지의 교회들과 동역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개인의 생각과 계획을 넘어선 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어 가고 계시기에...내게 주신 소명을 고이 간직하면서...열심히 달음박질 하다 보면 하나님은 나를 가장 합당한 길로 인도해 주시리라 오늘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지에서의 경험이 내가 가고자 하는 길에 분명히 유익하게 사용되리라 믿습니다. 또...결국에 하나님께서 저를 해외 선교사로 사용하시더라도 그 인도하심에 감사드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쨋든 남 목사님은 그 뜨거웠던 선교의 열기 한 가운데에서...직장을 그만 두시고 95년도에 고려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고 강도사 기간을 채운 뒤 목사 안수를 받고는 바로 선교사로 나서게 되는데... 그 곳이 바로 까작스딴 이었지요. 지난 3 년동안 까작스딴의 '가라간다' 에서 사역을 해 오시다가...아스타나가 수도가 되면서 많은 까작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이곳을 사역지로 삼아 까작인만을 대상으로 하는 선교 활동을 계획하시고 이곳에서 새 출발을 하시게 된 것입니다.

 제가 아스타나에 처음 왔을 때(2001.8) 이곳에 계시는 선교사 가정은 총 여섯 가정이었지만...2002년 12월 현재... 네 가정이 더 불어나 지금은 열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저 보다 늦게 아스타나에 들어 오신 선교사님들의 정착을 지켜 오면서...선교지에 선교사가 들어 와서 뿌리 내리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잘 지켜 볼 수 있었습니다. 이사 문제, 초기 정착 문제, 비자 문제, 교회 등록 문제, 언어 문제, 조력자 문제, 정부 기관과의 사소한 마찰, 자녀 교육 문제...모든 게 쉽지 않은 이곳에서 기도하면서 이 문제들을 해결하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일군들을 부르시고 사용하시고 계심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지요. 선교지에선 하나님의 일하심이 훨씬 더 잘 느껴진다는 말이 정말 딱 들어 맞았습니다.

남목사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라간다에서 이곳으로 이사하는 과정에서 수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사히 위기들을 넘겼고...이제 이자벨리 라는 작은 거리에 위치한 집을 구입해 교회로 사용하시게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이 바로 교회가 위치한 땅집(아파트가 아닌 일반 주택을 일컫는 말입니다) 의 모습입니다.

위 사진에서 개를 만지작 거리고 있는 아이가 남목사님의 둘째 아들 입니다.(두 아들이 있지요....) 처음에 이 집을 샀을 때는 낡은 가구와 벽지만 붙어 있는 허술한 집이었지만...지금은 깔끔한 벽지와 가구들로 채워진 좋은 예배 처소로 바뀌었습니다. 선교사님 부부가 직접 벽지나 카페트를 깔고...헌 가구도 재료를 사서 다시 수리를 하셨다고 하네요.  

또..재미있는 것은 이 집에 전에 살던 사람은 점괘를 보거나 주문을 외워 병을 고치는 무당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에 목사님이 이 집을 사기 위해 그 무당과 접촉했을 때...그는 다음과 같은 뼈대 있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신께서 이 집에 꼭 필요한 사람을 보내셨군요..." 라구요.

교회 등록을 마치고 까작인 교회를 시작한 지는 이제 한 달이 넘었지만...주변의 까작 사람들이 이 곳을 쉽게 찾아올 리는 만무합니다. 게다가 이 교회가 위치한 이자벨리 거리에는 딱 두 가정만 까작인이라고 하더군요. 뒤 쪽으로 돌아가면 까작인들이 많이 사는 아파트가 있긴 한데... 처음 개척한 교회인지라...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 올 수 있도록 만들 프로그램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약품 가방과 혈압계를 들고 다니며 여러 교회에서 진료를 하던 제가...이곳에도 투입(?)되게 된 것입니다.

사실...까작스딴의 의료 환경은 한국과 판이하게 다릅니다. 인구 천 5백만의 까작스딴에는 네 군데의 의과대학이 있고 그 중 하나가 이곳 아스타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매년... 아스타나 의대에서만 3000명의 의사 인력이 배출되고 있지만(인구 4천 5백만의 한국의 경우... 1년에 배출되는 의사가 3천명입니다.) 의업에 종사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한 채 매년 졸업생의 반 수가 낙향하고 만다고 합니다. 나머지 천 5백명은 어디에서 일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까작스딴은 개업하는 의사가 거의 없는 나라입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오래 길들여진데다 의사를 만나는 비용은 거의 무료이기 때문에 비싼 돈을 내고 사립병원을 찾아갈 일반 국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의사가 일할 수 있는 곳은 시가 관할하는 병원이나 국가가 관할하는 병원 뿐인데...그 수가 아주 적은 데다가 그만 두는 의사가 없어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들어가는 병원에서 의사가 받는 급료가 얼마인지 아세요? 제가 근무하는 1병원(시립 병원입니다)에서 일하고 있는 안과 의사에게 매달 받는 급여를 물어 보았습니다. 그는 7000텡게를 받는다고 답했습니다. 2002년 12월 현재...100달러는 15400텡게이니까...7000텡게는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6만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는 그 돈으로는 빵 사 먹고, 병원에 출근한다고 버스 타고 다니다 보면 다 없어진다며 중얼거렸습니다. 이곳 까작스딴에서 평균 월급을 산정한다면...아마 100달러(13만원) 정도 될 듯 합니다. 거기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수입으로 살아가는 이곳의 의사들에게는 더 나은 진료 서비스, 첨단 진료 장비, 최신 지견 확보를 위한 학회 활동 등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전체적으로 진료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고...전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교과서에 발 맞춰 진료를 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옆에서 보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처방을 내기도 하고...무슨 민간 풍습 전수자 인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자국 제약 산업이 전혀 없는 까작스딴으로서는 대부분의 약제를 외국에서 들여와야 하기에...약품의 가격이 턱없이 높을 수밖에 없고...돈 없는 서민들은 의사로부터 받은 처방전에 씌어 있는 약품을 구할 수 없어 발만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물론 까작스딴에도 고급 병원이 있습니다. 그런 병원을 알게 된 것도 아주 최근인데요...한국의 초대형 병원에서나 볼 수 있는 병동과 시설을 갖춘 병원이 아스타나 외곽에 있긴 합니다. 하지만...그 곳은 아무나 갈 수 있는 병원이 아니고 까작스딴 전역에 걸쳐 지역별로 2-3명 정도로 배분되어 있는 특별한 병원입니다. (영국이 투자해서 지었다고 하더군요..)

어쨋든...까작스딴에서 '의사' 라는 직업은 변변치 못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까작스딴에서는 '마사지사' 는 의대를 졸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직업입니다. 약을 사용해서 치료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곳에서는 물리치료나 마사지가 효과가 뚜렷한 치료로 규정되어져 있고 따라서...의사만 마사지를 할 수 있습니다. 약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약을 먹어도 잘 낫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우수한 약제가 아니라...무슨 풀뿌리나 밀가루 반죽 같은... 약효가 거의 0 에 가까운 싸구려 약 만을 살 수 밖에 없는 이곳 사람들의 경제력을 떠 올리면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 동안 테니스 레슨을 받았었는데...제게 테니스를 지도해 주던 러시아인 코치도 의사입니다. 절 의사라고 소개하니까..자기도 웃으며 의사라고 하더군요.. 제가 거래하는 '텍사카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있을 때...그 은행의 임원인 듯한 사람이 내 직업이 뭐냐고 물었을 때 의사 라고 대답했는데...그 말을 들은 그 쪽의 반응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은행에는 왜 오지?' 라는 듯한 눈초리였습니다.

까작스딴에 만연되어 있는 성적을 돈을 주고 사는 풍조는 의대 내에서도 광범위하게 퍼져 있어서...돈을 주고 성적을 얻어 졸업하는 게 일반화된 현상입니다. 그래서 의대를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자신있게 진료를 할 수 있는 의사도 드물고...일반 국민들도 의사에 대해 평하기를 자기 보다 더 병에 대해 모르는 사람으로 낙인찍고 있습니다(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을 너무도 많이 만나 보았습니다.) 한 마디로...존경받는 실력있는 의사를 구경하기 힘든 곳이 바로 이곳 까작스딴입니다.

그래서...한국에서 온 의사인 전 이곳에서 살면서 어떤 책임감을 느끼고 있기도 하고... 때로는 한국의 의료 현실에 대해 감사하기도 합니다.

이곳 사람들도 까작스딴 의사가 아니라 한국에서 온 의사라는 사실에 호감을 가지고 찾아 옵니다. 게다가 약효가 좋은 약을 무료로 나눠 주니...이보다 더 좋을 순 없습니다.

저 역시...전 KOICA에서 지정한 아스타나 1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그 외에도 이곳에 세워져 있는 선교지의 교회들을 정기적으로 방문해서 진료하고 있습니다.

크리스챤 의사로서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진료 사역을 편의상 3가지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고 있습니다. 1단계는 선교사 개인이나 가정의 건강 문제의 조력자로 나서는 것이고 2단계는 선교사의 교인이나 양육하는 학생들을 찾아가 진료하는 일입니다. 실제로 아스타나에 있는 KOICA 단원을 제외한 한인들은 거의 모두 선교사이기에 1,2 단계에 해당되는 진료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3단계는 선교지에 지역 교회가 세워져 있는 경우...그 교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면서 그 곳의 지역 사회 주민이 교회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돕는 일인데... 이 일을 통해 지역 사회 내에서 교회의 위치가 든든히 설 수 있고 좋은 이미지를 심을 수 있어 복음을 전하는 데 유리한 토양을 제공하게 됩니다. 수이어스펜셜록 카우옴은 바로 3단계에 해당된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대상

형태

1단계

선교사와 그의 가족

가정 방문

아스타나에 파견된 모든 선교사 가정

2단계

선교지 교회의 교인, 양육받는 학생

개별 전달

아스타나 장로교회, 아스타나 UBF

3단계

지역 사회

지역 교회 방문 진료

악골교회,베라교회,수이어스펜설록,미추리나 크리스챤 센터

요즘 까작스딴 정부는 낙후된 시립 병원들의 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제가 근무하고 있는 1병원도 예외가 아니어서...우리 진료실이 있는 3층의 전 층이 현재 보수 공사 중에 있습니다. 그래서 전...지금 1병원에서의 진료를 잠시 중단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전 지금...어떻게 보면...선교지의 교회만을 지원하고 있는 의료 선교사로 이 곳에 나와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형태의 진료가 앞에서 말한 1,2,3 단계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날 이렇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문득 문득 놀라게 되는 요즈음입니다.

물론...선화, 형민이가 함께 살아가는 우리 가정을 돌보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만...지금 당장은 둘 다 한국에 들어가 있기에...조만간 한국인 선교사 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의 진료 활동도 병행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래 표는 2002년 12월 현재.. 방문해서 진료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 교회를 정리한 것입니다.

장소

위치

방문 날짜

진료 환자 수

비고

베라교회

아스타나 외곽 지역

격주 방문, 금요일

15 - 20 명

 

미추리나 크리스챤 센터

아스타나 남쪽 25Km

격주 방문, 수요일

10 명

 

수이어스펜셜록 교회

아스타나 시내

매주 방문, 목요일

10 명

 

악골교회

아스타나 북쪽 100Km

매달 방문, 화요일

20 명

동절기는 제외

 수이어스펜셜록 교회의 경우...저의 진료 사역이 초기 교회 정착 과정에 유용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언젠가...남목사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교회를 열고 난 뒤 처음으로 오늘 한 사람이 찾아 왔는데, 자기 딸이 계속 머리가 아프면서 벽이나 바닥에 쓰러지면서 머리를 부딪히기 때문에 아마 귀신이 들린 것 같아... 이곳에 살고 있던 그 무당의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과 상의를 한 뒤...그 가족을 만나기로 했고...교회당에서 만나..그 아이의 치료를 위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뒤... 그 까작인 가족(마침 까작인이었습니다)을 교회로 초청하기도 했었지요. 이런 일이 몇 번 있은 뒤...매주 진료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제 일년 반 정도 임기가 남았는데...이곳에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선교지 교회들과 동역할 생각입니다. 때로는 '내가 하는 진료 행위가 복음 전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라는 다소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나를 이곳에 부르시고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환경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큰 일을 생각하면 오늘도 떨리는 마음으로 진료 가방을 들고 나서야 합니다.  

최근의 모습입니다. 수이어스펜셜록 교회 입구에서 남목사님과 함께 서 있습니다.

오른 손에는 여러 가지 약품들이 가득 찬 가방이 들려 있고... 왼쪽 어깨에는 약봉지,혈압계, 연고류 등이 든 가방이 매어져 있습니다.

눈발이 끊이지 않던 어느 날 저녁, 진료를 마치고 나왔을 때인데...길 가에 쌓인 눈덩어리들과 뒤로 보이는 자그마한 거리가 마치 한국의 어느 시골길 같습니다.

이제 막 시작한 수이어스펜셜록 교회...머지 않아 이곳이 아스타나 까작인 전도의 중심지가 되길 바래 봅니다.

또...영하 3-40도의 추위 속에서...하나님께서 보내실 한 영혼을 찾기 위해 기도하며 뛰어 다니실 남성택/박용주 선교사님 가정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위로와 평안이 넘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매주 목요일 오후 수이어스펜셜록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진료 활동을 통해 추운 날씨로 힘들어 하는 이곳 사람들이 위로 받고... 하나님이 미리 예비하신 참 생명의 복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2.12.11

 

 

 (다음은 수이어스펜설록 교회와 관련된 글입니다.)

                 * 추억의 앨범: 수이어스펜설록의 깻잎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