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장례식

지난 2001년 9월 23일 새벽..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10월에 위암 진단을 받으시고 수술하신 뒤 1년만에 할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평생 남에게 주기만 하고 사셨고...어떨 때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셨던 분...적어도 제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할 수밖에 없었던 분이셨습니다. 지금도 누구를 가장 존경하느냐는 질문에 전 어김없이 할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할아버지는 저와 삼십년 동안 함께 사시면서 제 맘 속에 늘 본받고 싶은 분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할아버지가 위독해서 김해에서 부민동 본가로 모셨다는 소식을 월요일 새벽(아스타나 시간으로 새벽 2시)에 들으면서...불안해 하다가..이곳 시간 새벽 5시가 가까워질 무렵...할아버지께서 소천하셨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얘기드렸듯이 제가 국제협력의사로 지원할 때 가장 큰 걸림돌이 할아버지였습니다. 수술 받으신 뒤...팔다리에 힘이 없다고 하시면서 절 의지하시는 할아버지를 차마 두고 떠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주셨고...까작스딴으로 오기 직전까지...제가 파견될 국가(과테말라)의 지도를 배껴 그려 벽에 붙이고 달력에 군의학교 입소식과 퇴소식 그리고 출국 날짜까지 빽빽하게 적어 놓으신 할아버지의 애정을 보면서 ..'아..내가 정말 할아버지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구나...'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돌아가시기 전까지...성훈이 얘기를 하시면서...할아버지께서 흐믓해 하셨다는 얘기를 주변 사람들로부터 듣고 나니..그 큰 사랑에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까작스딴에서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일주일에 한 번 월요일 밤에 있습니다. 여름 성수기에는 아시아나 항공이 운항하기도 하지만...지금같은 비수기에는 까작스딴 항공사의 비행기만이 왕복 운항하고 있는데...할아버지의 소천 소식을 들은 날이 바로 월요일 아침이었습니다. 만약 할아버지께서 다른 날 돌아가셨더라면....예를 들어 화요일이나 수요일이었다면...삼일장이나 장례식을 참석할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나중에 한국에 도착해서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알렸더니...모두들...할아버지께서 가시는 그 순간까지도 성훈이가 잘 올 수 있도록 배려하셨다면서....놀라와 하며 얼마나 다행스러워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는 제 마음은 얼마나 아팠는지 모릅니다. 우리 할아버지가 천국 가시는 그 순간에 옆에서 자리를 지키지 못한 아쉬움이 제 마음을 자꾸만 아프게 만들었지요.

할아버지의 부음을 들은 월요일 아침...부랴부랴...서울의 국제협력단, 알마티의 현지사무소로 전화하고.....서울로 '파견국외 휴가신청서','근무지 이탈 신청서'를 작성하고 허가를 기다리는 한편 서울까지의 여비와 비행기표를 마련해서....아스타나에서 알마티로 떠나는 오후 3시 비행기를 타러 집을 나섰습니다. 시내 곳곳에 교황의 방문을 환영한다는 낯선 간판이 서 있는 것을 보며(교황이 까작스딴을 방문하는 때였습니다.) ....공황까지 오면서 아무런 아무 생각도 안 들더군요..그저 멍하니...비행기를 타야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기 전..아스타나의 날씨는 차가왔습니다. 저녁이나 밤에는 찬 공기 때문에 선화가 늘...."오빠...추운 거 싫어요...빨리 카펫트도 깔고..난로도 피워야겠어요..." 얘기하곤 했는데...출발할 때의 우리의 복장은 코트에다가 모자까지 눌러쓴 겨울 복장이었습니다.

아스타나에서 알마티로 내려오는 비행기에서 전 많이 울었습니다. 할아버지로 인한 슬픔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선화는 그렇게 울 수가 없었지요..하지만..전 태어날 때부터 서른이 될 때까지...할아버지와 한 집에서 살고 있었고...맏손자로 할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에...받은 사랑만큼 슬픔도 컸습니다. 사실.....할아버지께서 수술 후 힘이 없으셔서 걱정하신다는 가족들의 얘기를 전해 들으면서...언제나 마음 한 쪽에 큰 바윗돌을 얹어 놓은 듯한 걱정과 슬픔이 있었지만......할아버지의 죽음이 막상 닥쳤던 그 날 아침에는....'할아버지께서 가셨구나....' 라는 사실에 시간이 멎는 듯한 멍한 생각만 계속 들었고...한편으로는 이제 힘드시지 않으셨도 되겠다는 사실에 오히려 홀가분함 마저 느껴졌습니다. 이제...천국에서 다시 만나볼 것에 대한 소망에 슬픔을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비행기를 타고 내려 오면서...지난 날...할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많은 일들이 영화 필름처럼 돌아가자...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왜..하나님을 의지하고 말씀대로 살아 가려는...착하고 착한 우리 할아버지께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라는 오래된 질문이 떠오르면서 그냥 마냥 슬펐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형민이는 벌써 돌이 되기 전에 비행기를 몇 만 킬로미터를 타고 있는 베테랑입니다. 오늘도 아스타나에서 알마티까지 가는 1시간 반..비행기 여정동안 아빠, 엄마를 도와...계속 잤고...우린 너무 그것이 감사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알마티에 도착할 무렵...상공에서 알마티를 내려다 본 사진인데..정말..푸른 숲에 싸여 있는 도시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1개월 남짓 아스타나에 살다가 돌아온 건데도...알마티 공항에 내리자말자 드는 그 따뜻한 기온에 "야...정말 알마티는 좋다...." 탄성을 내지르고 말았지요...우린 코트와 잠바를 벗어 버리고 알마티에서 선물을 사고 마침 그날 저녁 권소장님댁에서 있었던 모임에 참석한 뒤...서울로 떠나는 밤 10시 15분 비행기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밤새도록 비행기는 달렸습니다. 비행기는 다음 날 아침 6시 10분에 영종도 국제공항에 도착했는데...밤새도록..스튜어디스의 기내 서비스가 이어져 형민이가 잠자는데 어려웠지만...비교적 무난하게 긴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동쪽으로 동쪽으로 날다가...한반도가 가까울 무렵....동이 터 오기 시작하는데...황해의 바다에서 물밑에서 올라오는 태양의 기운을 느끼는 건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영종도 신공항은 정말 멋있는 곳입니다....까작스딴에 살다가 한국에서 제일 처음 만나는 곳이기에...이곳이 외국인들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감탄할 틈도 없이...바로 부산으로 내려가야 했고...우린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있는 부산행 비행기를 타고 9시가 넘어 부산에 도착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할 때 처음 느낀 건....고국에 대한 반가움과 함께 밀려오는 무더운 날씨였습니다. 눈 뜰 수 없을 정도로 물기가 흠뻑 든 더위에..일주일 내내 우린 고생해야 했습니다. 건조한 더위에 익숙해 있던 우리로선...오히려 한국의 날씨가 더 견디기 어려웠다면 믿으실지 모르겠네요....사실입니다.

공항에 나오신 반가운 얼굴...장인,장모님을 만나 뵙고..우린 바로 부민동 본가로 향했습니다. 부민동에 들어서자...낯익은 나무, 담, 공기..모든 것이 4개월 전으로 돌아가는 곳이었습니다. 하지만...부민동 집 입구에 달려 있는 "상가(喪家)" 임을 알리는 등을 보고...이곳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내가 뛰놀던 곳...3살 때부터 내가 자란 곳....이 부민동...어머니 품과 같은 이 집에...우리 가정의 가장 큰 대들보이신 할아버지의 영정이 놓여 있었고...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젖어 있었습니다. 이미 많은 조문객들이 찾아 왔었고...이 날 역시 많은 사람들이 할아버지 소식을 듣고 집으로 찾아오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병원 영안실을 이용해서 빈소를 차리지만...저희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부산에 내려 오신 후...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사신 곳인 이 부민동에 빈소를 두는 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셔서 이곳으로 할아버지를 모셨다고 합니다. 저 역시...할아버지가 이제 금방 이층에서 내려올 것만 같은 정든 고향집에서 할아버지의 가시는 모습을 뵙는게 더 좋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사진은 지난 78세 생신을 축하하는 가족 사진 중에서 할아버지 얼굴만 확대한 것이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살며시 웃으시면서 절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할아버지....마치 할아버지를 부르면...지금이라도 나오셔서 "어이구....성훈이 왔나..."하고 반겨주실 것 같은데...이제 이 세상에 안 계신다고 생각하니...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고 뭐가 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멍청한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빈소에는 아버지, 작은 아버지, 명수 삼촌, 안수 삼촌이 모두 와서 지키고 계셨고...남동생 영훈이는 마당에서 잔심부름을 하고...강도사님(여동생 주훈이의 남편..항상 이렇게 부릅니다.) 은 대문 밖에서 서 계시고...주훈이와 숙모들은 아래 위층을 오르락 내리락 거리면 문상객의 식사대접을 하고 계시고 사촌동생들은 여기 저기 뛰어 다니며 떠들어대는...떠나간 사람만 훌쩍 가 버린...쓸쓸한 상가집이 우리 집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가신 뒤...만 하루가 지난 날이었지만...저도 팔에 완장을 하나 차고...빈소 주변에 서 있다가 문상객이 찾아 오면 국화를 전달하거나..나가실 때 인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아버지는 ....어제부터 한 잠도 못 주무셨는지 지쳐 보이셨지만....빈소를 떠나지 않고 계셨고...모두가 못내 가 버린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얘기하면서...이미 과거가 되 버린 분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전 아무도 없는 빈소에 가서 "할아버지..."하고 불러 보았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대가족의 많은 짐을 지시고...꿋꿋하게 앞서 걸어가시며..본이 되어 주셨던 분...70이 훨씬 넘은 연세임에도 교회에서 성경이나 찬송 암송대회를 하면 항상 앞에 나오셔서 성경 구절을 외우시고...스스로 외운 찬송가 가사에 율동을 붙여 가며 하나님 앞에서 어린이처럼 찬송하셨던 분....말년에 나쁜 병을 얻고 욥처럼 애매한 고난을 당하셨지만...휠체어를 타고 교회에 가시고...돌아가시기 3일 전까지...환자를 친히 보셨던 그 할아버지.....할아버지는 제가 평생 살아가면서...본받아야 될 믿음의 선조이셨습니다.

슬픔은 뒤로 해야만 했습니다....한 세대가 지나가면 다음 세대가 오는 법....이 상가집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아장 아장 걸어다니는 형민이를 보면서...하나님의 자손은 이렇게 지금도 이어지고... 그 분의 뜻은 이렇게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앞서 가신 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 주어야 할 귀한 책무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낀 시간들이었습니다.

제가 서너살 때부터 늘 보던...마당의 석류나무에는 올해 유난히 큰 석류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습니다.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이렇게 석류가 풍년인지....남의 속도 모르고 활짝 핀 마당의 사루비아와 꽂들은 내 맘을 더욱 쓸쓸하게만 만들었습니다.

화요일은 금방 지나고 수요일...발인이 있었고 출상예배가 드려졌고...할아버지의 관은 삼촌들의 손에 들려 장례차에 옮겨졌고 많은 조문객들과 우리 가족은 버스와 차량에 나눠 타고 가족묘가 있는 대구 화원으로 향했습니다. 그 곳에는 저의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산소가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바라 그 아래에 모셔지게 됩니다. 살아생전 아버지,어머니로 모셨던 분들의 산소 바로 아래이지요...

장지로 가면서...영정(할아버지의 사진)을 드는 일은 장손인 제가 맡았습니다. 사진의 무게는 무겁지가 않고 힘드는 일도 아니었지만....할아버지의 가시는 길에 맨 앞장 서서 걸어간다는게....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한 감정에 빠져들 게 만들었습니다.

 모두가 줄 지어...장지로 올라갔고...100여명의 조문객들과 함께...미리 파 놓은 무덤 터 안에 관을 내린 뒤....예배가 드려졌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이 절망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지만...당분간 이제 볼 수 없다는 그 아쉬움에 우린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예배가 마친 뒤...가족들이 한 사람씩 나와 삽으로 관 위에 흙을 뿌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삽..두 삽..던지는 흙더미에 할아버지의 관은 보이지 않게 되었고...가족들의 눈에는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누구보다 슬프게 운 분은 저희 어머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스무살에 시집을 오셨고...당시 삼촌과 고모는 초등학생이었습니다.

 

젊은 시아버지를 오래 동안 봐 왔고...늘 안타까운 맘으로 옆에서 지켜보던 맏며느리인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주검 앞에 오열을 토해내고 말았습니다. 수 많은 세월을 함께 보내며...마치 친아버지처럼 함께 살아온 세월들이 어머니로 하여금 그렇게 목놓아 울 게 만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간다는 건...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저희 가족이 아니라면...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스토리가 할아버지의 주검 뒤에는 놓여 있습니다. 그 분이 걸어가신 그 길을 바라보며...저 역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례식이 있는 날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한 낮이었습니다. 황토빛 흙더미를 멍하니 쳐다보며.....할아버지의 관이 묻히는 걸 보면서.....필시..모두의 마음 속에는 사람, 삶 그리고 죽음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뭉게뭉게 피어 올랐을 겁니다.

할머니는 담담히 서 계셨습니다. 할아버지와 오십년 이상 함께 해 온 세월....전 선화와 부부로 산 지 이제 만 2년이 되어 갑니다. 만 2년이 되어도...별의별 경험을 함께 나누며..서로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알 게 되는데....오십년의 세월은 얼마나 두 분을 가깝게 했을까요?

할아버지가 날로 약해져 갈 그 때 즈음...할머니는 대문 밖으로 나서는 우리를 우연히 보시고...눈물 고인 눈빛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둘만 서로 행복하게 지내면 된다....."

이 말씀은 그 어느 누구보다..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함을 얘기하신 겁니다.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어려운 풍파와 환난 속에서 서로 상처 받고 지치고 힘드는 일이 점점 많아지게 됩니다....이렇게 두 사람이 흔들리는 조각배 안에서 세파를 이겨내며 오십년을 살아가다 보니...정말 서로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가슴깊이 느끼게 된다는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

이런 반쪽을 떠나 보내는 할머니의 슬픔은 정말 컸고..그 상실감이야말로 실로 엄청났지만.....사람이 때가 되면 누군가를 제자리로 돌려 보낼 용기가 생기는 건지...할머니는 묻힌 할아버지의 산소를 바라보며...일군들에게 방향이나 위치를 지시하시면서...앞으로의 일들을 계획하시는 모습도 보이셨습니다.

 

여기 할아버지의 묘비가 있습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묘는 위로 동그랗게 봉이 솟아 있는 전통적인 형태이지만.....새로 만든 할아버지의 묘에는 봉이 없습니다.

마치 유엔 묘지에 납작한 비문처럼....할아버지의 묘 앞에는 이렇게 네모난 비석만  놓여집니다.

할머니는 언제가 호주의 어느 묘원에서...이렇게 평토장(봉이 없이 하는 무덤)이 예쁘게 되어 있는 풍경을 보시고...당신과 할아버지의 묘는 봉없이 평토장을 하실 걸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묘비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 여기 잠들다 - 서부산교회 장로 이완일의 묘"  

장례식이 마치고 무덤가를 정리하고 잔디를 심는 걸 보고 나서...모두들 아래로 내려 왔습니다. 대구시에서 무슨 민속 마을로 지정했다는, 산소가 있는 산 아래 마을 어귀에서...이제 다시 부산으로 떠나기 직전...할머니와 손자며느리인 선화가 함께 앉아 있습니다. 물론 선화의 품에는 형민이가 자고 있구요....

이제 이 세상에는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습니다. 몇 년 전부터..."멘토링"이라는 얘기가 우리 주변에서 들립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이 세상에 보내졌다면...우리가 이 곳에서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많은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답변을 하겠지요...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든지...예수님 같은 인격을 닮아간다든지...해외 선교사가 된다든지...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준다든지...교회가 참 공동체가 되는 일에 헌신한다든지.....

멘토링을 얘기하는 사람은 이 답변을 이런 식으로 얘기합니다. 참그리스도인이라면...누군가에게 거룩한 영향을 끼치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고 얘기합니다....."하나님은 당신과 나의 삶에 대해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계신다. 그 분이 우리를 이 땅에 있게 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하시고 은사를 주신 이유는 이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 영향을 끼치기 위해서이다."

할아버지는 나의 가장 위대한 멘토이셨습니다. 그 분은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하나님께로 가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보고 계실 나의 앞으로의 삶 속에서....할아버지처럼....예수님의 사랑을 가슴 속에 채우며...자신을 모함하는 이웃이라도 용납하고 받아 주며..오히려 섬기는 사랑의 삶을 실천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전 할아버지와 다르게...고집도 세고..욕심도 많아서....그렇게 살아가기가 힘들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저 역시 반세기 후....이 황토빛 땅 속에... 할아버지 처럼 묻힐 때까지....할아버지께서 보이신 믿음의 본을 늘 생각하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겁니다. 또 할아버지께서 그렇게 전 생애를 통해 보이셨던 그 거룩한 영향력이 다음 세대에 까지 미칠 수 있도록 형민이가 우리 하나님만 의지하고 이 세상의 시류에 흔들리지 않도록 기도하고 잘 양육할 겁니다.

할아버지는 가셨지만...그 분의 믿음의 본은 내 맘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욥은 닥친 고난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 옳으시고 찬송받으실 분" 임을 고백했습니다. 지금까지 저 역시..비록 오랜 세월동안 할아버지의 투병을 보며..하나님께 대한 불평도 늘어 놓았지만(왜 의인에게 고난을 주십니까?) ....욥이기에 그런 고난을 감당할 수 있었듯이 ....할아버지기에 그 고통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으시고 빛나는 하늘의 영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수 있었음을 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큰 소리를 칠 수 없습니다. 이국 만리 까작 땅에서....마치 봄 날의 아지랑이처럼...잠시 한국에 들어가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보며 든 생각을 적었지만....점점 자신이 없어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처럼 겸손하게 살아갈 수 있을지....

하지만 그 때마다...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지금도 빙긋이 웃으시며 절 쳐다 보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성훈아...힘을 내거라.....끝까지 참고 인내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신단다..."

할아버지와 빨리 만났으면 좋겠습니다........"할아버지...지금은 좋으시죠?"       2001.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