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의 사랑 - 김해 내동의원에서...

 지난 며칠동안 저희 가정은 분에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그저 놀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려 드린대로 과테말라 국제협력의사로 최종 결정되었고... 오늘 2시 공식 발표한 제 44회 내과 전문의 시험 합격자 명단에도 제가 포함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에 시험이 쉬웠기에... 떨어지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고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발표나기 전까지의 제 마음은 '혹시나....'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제 자신을 잘 알기에...아무리 장담할 수 있는 시험이었다고 하더라도...하나님께서 내게 특별한 연단을 거치도록 하시려면 얼마든지 그러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제가 충분히 그럴 만한 소인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웬지 내 계획대로 진행되는 최근의 일들이 나로 하여금 더욱 두렵고 긴장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700-2236 자동 응답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안내 멘트에 가슴 조리며 수험번호를 누르다가 ...."잠시 기다려 주십시요..." 라는 소리에 극도의 긴장감으로 빠져 들었고 잠시 후 들린 ..."축하합니다. 축하합니다...당신의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낯익은 멜로디의 곡에 찡...하고 가슴 한 쪽에서 말 못하는 감정이 밀려옴을 느꼈습니다. 뭐라고 할까.....이런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계속되는 배반과 반역 속에서도 그저 이렇게 긍휼을 베풀고 계시는군요...이렇게 하나님께서 몰아 가시니...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살아야 합니까?... 나의 과테말라 행에 하나님의 어떤 섭리가 담겨 있습니까?'  ... 수화기를 들고 멍하게 서 있는 내 마음속으로... 떨리는 감사와 도전이 밀려...밀려 왔습니다.

지난 3일간 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처남인 정우와 몇 몇 가지의 부속품을 교체하다가 이유없이 모뎀이 작동하지 않는 것을 발견하였고...많은 우여곡절 끝에.. 모뎀을 교체하고 나서야 다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낯선 곳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으며 방명록을 클릭했을 때...수많은 분들의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참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제가 어떻게 갚아야 할지...

2001년 설날, 학장동 집에서

지난 6일은 선화의 생일이었습니다. 이 날...넷츠고에서 상으로 받은 케잌이 오후 5시 경 시간에 맞춰 배달되었습니다.(이유는 아시죠?) 이 케잌을 가지고 부민동 본가에 가서...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축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선화의 생일은 제 남동생 영훈이와 같은 날입니다. 글쎄요...함께 생일을 축하하게 되니 더욱 상승 작용이 있는 것 같아....잘 된 일인 것 같습니다.

선화는 결혼하고 두 번째 맞는 생일인 셈입니다. 이번 생일에 선화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병원을 나오면서 받게 되는 퇴직금의 일부를 떼어....선화에게 어울리는 건반 악기를  사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1989년도 삼익 피아노가 저희 집에 있습니다만...늘 여러 CD 속에서 흘러 나오는 다양한 synthesizer의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도 이런 악기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 마련한 것이 영창 악기에서 Kurzweil 이라는 상품명으로 판매하는(영창 악기가 Kurzweil사를 인수했다는군요...OEM방식으로 생산하고 있습니다.) 건반입니다. keyboard라고 하기에는.... 듣기 힘들었던 수준 높은 음색의 다양한 피아노 소리를 보여 주지만 ...음향 합성기능 등이 없어 엄밀하게 말하면 synthesizer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선화는 요즘...태광 audio AUX line을 통해 kurzweil을 연주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신 못 차리도록 들려오는 축하와 기쁨의 소식들 속에서... 전...이제 다리에 힘이 없어 시내 버스에 오르기도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를 떠 올려야 했습니다.

앞의 다른 글에서 소개드렸듯이 할아버지는 저희 가정의 기둥이고 정신적 지주이십니다. 작년 가을..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진행성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으시고...어려운 수술을 받으신 뒤...약 4주가 못 되어...다시 당신을 기다리시는 진료실로 돌아 오셨습니다. 위가 없는 탓에...식사도 4-5 숟가락 분량 밖에 못 드시고....수술 후 회복되는 과정에서 많은 단백질이 필요했는지....체내의 근육이 거의 소실되어 이제...거의 앙상한 팔, 다리만 남게 된 몸을 이끄시고...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환자를 보시는 그 분을 조금이나마 도와 드리기 위해 지난 2.6-8일까지 3일동안 김해시 내동에 위치한 내동 가정의학과 의원에서 제가 진료했습니다.

전부터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이제 조금 뒤....성훈이가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면 군대가기 전에...병원을 며칠 봐 주겠지...그럼...푹 쉬고...여행도 가야지...." 시험 이후 계속되는 스케줄 속에 바빴지만....이제는 할아버지께 꼭 달려 가야 할 때였습니다.

할아버지 병원을 찾으시는 분들은 대부분...할머니,할아버지들이십니다. 물론 젊은이들도 감기로 가끔씩 들르지만 80%는 관절통, 요통, 두통을 호소하시는 노인들이시지요...그 분들은 할아버지 대신 진료하는 제가 그 분의 손자라는 것을 들으시고...대견해 하시면서도..."할아버지가 처방한 약 그대로 주세요....." 라고 말하면서..할아버지에 대한 깊은 신뢰을 보였습니다.

제가 진료하는 동안 할아버지는 진료실로 내려 오시지 않고 방에서 아미노산 수액과 포도당 전해질액을 주사 맞으시면서 누워 계셨습니다. 점심 시간에 제가 올라가서 할아버지께서 식사하시는 동안 말 벗이 되어 드리는 게 그 분께 큰 기쁨이셨습니다. 병원 때문에 부민동을 떠나 김해로 오신 지가 4년째....수술 후...식사를 좀 하게 되었다고는 하지만...여전히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적은 양을 드시고 계셨습니다. 그러시면서....상당한 정신에너지가 소모되는 진료를 놓지 않고 계시는 건 기적적인 일입니다.

전...할아버지를 볼 때마다...이제 하나님께서 언제 불러 가실지 장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이제 조금 있으면 멀리 타국으로 가게 되는 손자와의 기억을 좀더 드리고 싶어 잡곡밥을 드시며...형민이 얘기를 하시는 할아버지 옆을 지키고 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걷는 것도 불편하시고.... 앉았다 일어서기도 힘이 들어.. 일부러 의자를 높여 걸터 앉으십니다. 그래야 쉽게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그래도 주일 오전 예배는 지금도 빠뜨리지 않고 출석하시는데.. 서부산교회에서는 은퇴하신 뒤로....김해 남교회..(현재는 모든 민족 교회)에 나가십니다. 요즘 그 교회는 800여평의 부지에 새 교회당을 건축한다고 바쁩니다. 할아버지는 건축을 위해 애쓰는 그 교회를 보시고...매일 1만원 헌금을 작정하시고...매주일 마다 7만원씩 건축헌금을 하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매일 진료실을 나가시면서...1만원을 챙겨 가방 한쪽에 차곡차곡 모으시는 거지요.....내동의원은 65세 이상 노인들에게는 2200원 정도하는 본인부담금을 받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부분 노인 환자이기에...어떨 때는 많이 진료했음에도 2만원이 채 안되는 수입이 발생할 때도 있다고 합니다.....그래도 꼭 1만원을 챙겨 놓으신다고 합니다...잘 일어 서지도 못하시면서...시무하지도 않으셨던 교회를 생각하시는 그 분의 마음 중심을 바라 보면 늘 부끄러운 제 모습입니다.

할아버지 진료실 한 쪽 벽에는 달력이 하나 있습니다. 처음 진료실에 앉아 달력을 보았을 때...깜짝 놀랐습니다. 8일에 동그라미 쳐져 있고 '2차 발표'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 밑에는 '군입대' 라는 말도 있더군요...할아버지는 겉으로 내색을 안 하고 계시지만...저의 전문의 2차 시험 결과만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할아버진...늘 그러셨습니다. 초중고 시절...전 언제나 성적표를 가지고 오면....제일 먼저...2층의 할어버지 방문을 열고 그 앞에 앉아 보여 드려야 했고 그건...어린 제 마음에 큰 기쁨이었습니다. 늘 할아버지는 작은 제가 하는 일에 관심을 보여 주시고 격려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무뚝뚝할 정도로 말은 없으시지만...그 깊은 속마음을 아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닌...늘...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이 가정을 어떤 길로 이끄실 것을 말씀하곤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나....전 부산의 학장동에서 선화와 살면서...할아버지 생각을 가끔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할아버지는 늘...손자인 제게 마음을 주고 계셨습니다.

이번 전문의 합격 소식도 누구보다도 먼저 할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렸습니다. 할아버지는 "그래?" 하고 고개만 끄덕이시지만...그 속에 큰 마음이 숨어 있음을 이제는 압니다.

30년전....경북 약목의 영생병원(할아버지의 개업의원) 앞 도로에서 이제 막 돌이 지난 절 안으시고 흔드시며 찬송을 부르시던 할아버지께서 ...30년이 지난 지금.."따뜻한 설탕물이나 연유를 타서 틈틈이 마셔 탄수화물을 보충해야 하구요...분유를 아주 묽게 타서 드시는 것도 좋겠어요....2년간 서서히 빠진 힘이 빨리 돌아오겠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라고 조언아닌 조언을 하며....애처러운 눈으로 당신을 쳐다 보는 손자를 지긋이 보고 계십니다. 아마 지난 날의 여러 기억들이 점철되어 기억되시겠지요... 어쩌면 저도 기억 못하는 제 모습을 간직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진료 마지막 날.....형민이와 선화도 김해를 방문했습니다. 제 아들인 형민이를 보시면서..."이제 형민이가 날 보고 웃는다......"라고 기뻐하시지만 제 맘은 형민이가 "왕할아버지'라고 부르시는 것을 들으시면서 즐거움을 누리셔야 하는데....하는 염려로 차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그 분의 계획을 의지하면서도...이렇게 바라는 게 생기는군요...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할아버지의 삶은 제게 큰 본보기였습니다. 언제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고...가정 예배 시간만 되면 그 내용만을 되풀이하셨습니다. 어떤 성경 본문을 가지고 오더라도 할아버지께서는 사랑, 아니...좀 더 구체적으로 용서하고 덮어 주는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많이 들으면 지루하기도 할 텐데....언제나 똑같은 내용의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으면서...오히려...그 분의 지나온 삶과 어쩌면 그렇게도 일치하는 말씀을 하실까....하고 생각했었던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의 제 모습을 떠 올립니다.

그리고 이전에 있었다는 다툼과 갈등이 얽힌 집안 내력과 하나님의 교회임을 무색하게 만드는 교회 내의 분쟁 속에서도 언제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시고 의연하게 보이신 할아버지의 참을성과 그 너그로우심을 너무나 닮고 싶지만....아직은 너무나 부족한 손자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진료실은 대신 지킬 수 있지만...그 분의 큰 뜻은 지키기에 너무 힘들어 보입니다.

3일간 진료실을 맡기시고 휴식을 취하신 할아버지께서 오후 5시경에 진료실로 내려 오셨습니다. 1시간이라도 일찍 절 집으로 보내시겠다고오신겁니다...환자도 없고...우린 1시간 가량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주름 속에서...나의 미래를 봅니다. 할아버지의 교회 사랑을 보면서...내가 해야 할 일을 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지난 3일동안 쉬고 나니...다리에 힘이 조금 생기는 것 같다고 하시면서...이제 곧 좋아질 거라는 의욕을 보이셨습니다.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월 7일이 정월대보름이었지만....올해 대보름은 정확한 월력으로 13.6일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진짜 대보름은 2월 8일 바로...오늘...3일간의 내동의원에서의 진료 활동을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저녁길에서 만난 달이었습니다.

김해 들판 위로 커다란 달이 휘엉청 밝습니다.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언제나 주기만 하고...언제나 희생만 하셨던 분....투병 속에서도 언제나 변함없이 하나님을 붙잡고 계시는 그 분을 생각하면.....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달은 정말 둥글고 커 보입니다. 내 마음 속 가득....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