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성 소피아 교회 : 2일째

터어키에서 보내는 첫 날 밤은 아늑하고 편안했습니다. 터어키도 까작스딴처럼 라디에이터를 이용한 난방을 하고 있어서 온돌처럼 바닥이 따뜻해 지는 게 아니라 방 안 공기만을 데우는 방식이지만 비가 내린 밤 동안에도 한 번도 잠을 깨지 않고 푹 잘 정도로 방 안은 따뜻했습니다. 게다가 선화가 밤에 한 형민이 옷 빨래를 라디에이터 위에 놓아 둔 덕택에  방 안의 습도도 적당하게 유지되어 더 포근했지요.

우리는 터어키에 올 때 옷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왔기에...속옷, 양말 등을 포함한 모든 옷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습니다. 형민이와의 여행을 감안해 짐을 줄이느라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선화는 매일 조금씩 일정량의 빨래를 해야만 했습니다. 선화의 희생으로 우리 가족은 가벼운 짐을 들고 이곳에 왔어도 깨끗한 옷을 늘 갈아 입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여행 기간 내내 늘 선화에게 감사하며 지냈습니다.

이렇게 따뜻한 방에서 편안하게 잠을 잤지만...우리는 이스탄불 시간 새벽 6시에 눈을 뜨고 말았습니다. 잠을 설친 첫째 이유는 까작스딴과 이스탄불 사이의 시차가 5시간이나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탄불은 새벽 6시지만....어제까지 있었던 까작스딴을 기준으로 하면 낮 11시인 셈이니까요.. 우리가 눈을 뜨게 된 두번 째 이유이자 가장 큰 이유는 아직도 어둑한 바깥 사방 곳곳에서 크게 틀어 놓은 스피커를 통해 들리는 이슬람 교도들의 기도 소리 때문입니다. 코란을 읽는 소리가 같기도 하고 기도하는 것 같기도 한...울부짖는 듯한 이 소리는 터어키 땅의 첫 아침을 깨우기에 충분한 낯선 소리였습니다.

터어키는 알다시피 국민들의 98%가 이슬람교(순니파)입니다. 이스탄불에서도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모스크로 가득 차 있고...나중에 간 에게해 연안 지역에서도 우리 나라로 따지자면 동 마다 하나 씩 모스크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동네마다 교회가 가득하다고 하는데...제가 보기엔 터어키의 모스크 숫자는 한국 교회 수는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많아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순수한 이슬람 국가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루에도 여섯 번 정도 각 모스크에서 내 보내는 기도시간의 스피커 소리 때문에 정신이 없을 정도였지요...하지만 나중에는 터어키에서 며칠을 보내는 동안 이 소리에 익숙해져서 새벽에 기도를 하든 말든 우리는 편안하게 잠 잘 수 있었습니다.

일어 나자 말자 커텐을 젖히고 창 밖을 바라 보았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으로 찌푸려져 있고 가는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습니다. 창 밖으로 보이는 인근 가옥들의 지붕 위에는 옹기종기 모여 앉은 비둘기 떼들이 보였고 흐린 하늘을 배경으로 블루 모스크의 높은 첨탑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스탄불에서 맞는 첫 아침인 셈입니다.

형민이가 깨기 전...우리 부부는 먼저 세수하고 옷을 입은 뒤...형민이를 깨워 방 문을 열고 호텔 3층에 있는 작은 홀로 나왔습니다. 그 곳에서 아침마다 우리는 이 호텔에서 매일 당직(?)하고 있는 마음씨 좋은 총각으로부터 따뜻하고 부드러운 터어키 빵, 토마토, 잼, 버터, 차 로 이루어진 아침 식사를 대접받았습니다. 식사를 하는 홀의 한 쪽 벽은 모두 유리 문으로 되어 있고 발코니로 통해져 있는데 ....이 유리문을 통해 지중해의 일부인 마르마라 바다를 매일 아침마다 바라 볼 수 있었습니다. 비록 흐린 하늘이라 덜 푸르게 보였지만...우리가 살던 부산처럼 커다란 바다를 아침마다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이  터어키로 왔음을 실감나게 해 주었습니다.

아침 식사 시간이면 이 호텔에 투숙하고 있는 세계 각지에서 온 여러 여행객들을 만날 수도 있었는데...주로 가까운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젊은 학생들이나 부부...혹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도 비잔틴과 오스만 문화가 가득한 이스탄불을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사를 나누면서 늘 "우리들은 한국 사람인데.. 지금은 까작스딴에 살고 있고 이곳으로 여행을 온 것" 이라는 장황한 설명을 해야 했습니다. 1살 반 된 형민이를 데리고 온 이 용감한 젊은 부부를 보며 여러 사람들은 많은 격려를 해 주곤 했습니다. 우리 역시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이곳에서 여러 외국인들을 대했고 그들의 태도를 보며 실제로 이제 대한민국의 위상이 세계로 뻗어 나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 그 당시.... 2개월 후면 시작될 한-일 월드컵에 대한 이곳 터어키 사람들의 기대는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한국"이라고 소개하면 "뿟볼" 얘기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터어키는 사상 처음.... 본선보다 어렵다는 유럽 예선을 통과하고 월드컵에 참여하는 것이어서 더욱 더 많은 터어키 사람들이 한국에서 온 우리를 반겼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터어키가 브라질과 같은 조에 소속되어 일본에서 월드컵 경기를 치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터어키의 많은 TV 채널에서 하루 종일 축구 중계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며 터어키의 축구 열기가 대단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자국과 유럽 축구 리그 생중계 방송 때문에 저녁이면 많은 사람들이 TV 앞에 몰려 있더군요.. 

둘쨋 날...오늘의 주요 목적지는 성 소피아 박물관, 블루 모스크입니다. 우리는 아침 10시에 문을 연다는 성 소피아 박물관을 방문하기 위해 서둘렀고...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빗줄기 때문에 호텔 프론트에서 우산도 하나 빌려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가파른 비탈길을 올라 술탄 아흐멧 광장을 지나...성 소피아 박물관으로 향했지요.

바로 그 날 아침 찍은 사진입니다.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고 가는 빗줄기 탓에 우산을 들고 다녀야 했습니다. 제법 쌀쌀한 날씨 탓에 형민이에게는 따뜻한 잠바와 모자가 필요했습니다.

비가 오는 하늘이지만...푸른 잔디와 예쁘게 피어 있는 꽃들을 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히 눈벌판으로 덮여 있었던 아스타나에서 날아 온 우리 가족에게는 같은 시간에 이렇게 푸른 세상이 있다는 게 반갑고 신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멀리 보이는 붉은 벽돌의 오래된 건물이 바로 성 소피아 박물관입니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성 소피아는 537년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쥬스티니안 황제에 의해 세워져 916년 간 교회로 사용된 유서 깊은 건물입니다. 이 교회가 건축된 이래 비잔틴 제국의 멸망까지 약 800여년 동안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물도 건축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453년 이스탄불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정복된 이후 481년 간 이슬람 사원으로 용도 변경(?) 되어 사용되었고 터어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명령으로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친 후 1935년 2월...박물관으로 다시 일반인에게 모습을 드러냅니다.

AD 360년에 황제 콘스탄틴은 현재 성 소피아가 있는 곳에 메갈로 에클레시아라는 목조 건물을 세웠으나 404년 화재로 불타 버렸고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404-416년에 걸친 대 공사 끝에 이곳에 두 번째 교회를 세웠으나 이 건물 역시 황제에 대항한 니카 혁명 기간 동안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지금 보이는 성 소피아는 세 번째 건물인 셈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불리지만...제게는 옛 교회로 다가왔고 이 유서 깊은 교회 건물에 들어설 때 내 맘은 기대감과 경외심으로 두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성 소피아는 성 베드로 성당, 성 밀라노 성당, 성 바울 성당 다음으로 네 번째로 큰 교회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 소피아'는 "하나님의 지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비잔틴 시대 하나님께 봉헌된 세 개의 교회당이 있었는데 그 이름을 성 소피아(성스러운 지혜), 성 이레인(성스러운 평화), 성 디나미스(성스러운 힘) 로 불렀다고 합니다. 성 이레인 교회는 아직도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데 오스만 시대에는 병기고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성 이레인 교회는 방문해 보지 못했습니다. 뛰어난 음향 조건 때문에 클래식 음악 콘서트 장으로도 사용된다는 성 이레인 교회를 방문하려면 미리 허가를 받아야만 한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중에 서머나의 폴리갑 교회를 방문했을 때에도 교회는 열쇠로 잠겨져 있었고 그 교회의 초인종을 눌러 교회를 지키고 계시는 신부님의 허락을 얻고서야 내부를 둘러 볼 수 있었는데... 아마 성 이레인 교회도 그렇게 보존되고 있나 봅니다.

전...이스탄불에 와서 수 많은 동로마 제국의 문화 유산을 접하면서...뒤늦게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기초적인 사실들을 알아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느꼈습니다. 콘스탄틴이니..쥬스티니아누스...하는 황제의 이름이나....로마제국..동로마 제국...으로 따로 불리는 명칭등에 대해서도 보다 자세한 설명이 듣고 싶어졌습니다.  세계사 그것도 특히 서양사...를 얘기할 때 교회사를 빼놓을 수 없기에...동로마의 중심 이스탄불에 서 있는 동안 로마 제국과 비잔틴 제국에 대한 궁금증은 깊어만 갔습니다.

그 점에 있어선.. 저 뿐 아니라 이 터어키 여행기를 읽고 계시는 독자들도 마찬가지겠지요... 그래서 잠시 로마사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방대한 로마 흥망사를 몇 줄로 적는다는 시도 자체가 우스운 얘기지만 교회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로마 역사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이스탄불의 많은 유적들의 배경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처음엔 이 글에 포함시키려고 했는데 요약해 보니 너무 내용이 길더군요. 그래서 따로 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장신대 출신의 노우호 선생님이 쓰신 '신구약 중간사' 를 참고해서 적은 글인데 여기를 클릭 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안 보신다 하더라도 이 터어키 여행기를 읽어 가시다 보면... 언젠가 한 번은 꼭 클릭하게 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콘스탄틴 대제의 죽음 이후 로마 제국의 동방과 서방은 서서히 이질화 되어 가던 중 마침내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은 동, 서 로마로 영구히 분리되어 버리고 동로마의 수도는 콘스탄티노플이 됩니다. 비잔틴 제국이라는 이름은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로 천도한 33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마지막 황제가 전사한 1453년 까지를 일컫는 동로마 제국 문화권을 의미하는 거지요.

서로마 제국은 476년 게르만의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이름 뿐인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제위에서 끌어 내리고 오토 아케르 왕국으로 만들면서 역사 속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리지만 동로마 제국은 그 이후로도 1000년 간 계속되면서 이슬람 세계의 압박에 대한 서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그 교회는 남부 및 동부 유럽의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로마 제국이 정치적, 영토적으로 분리되고 서로마 제국이 동로마 제국보다 1000년 먼저 멸망하긴 했지만....유럽인들의 정신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교회는 분리되지 않은 채 서유럽 뿐만 아니라 비잔틴 제국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 교회(서방 교회)를 정치적으로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8세기 초 비잔틴 제국의 레오 3세가 내린 성상 숭배 금지령과 더불어 9세기에 야기된 교황권에 얽힌 문제가 개입되면서 양쪽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교황권 문제는 9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티우스의 취임에서 발단했는데 서로마의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보다 우월권을 주장했고 비잔틴 황제는 총대주교의 독립을 주장하면서 문제가 시작된 것이죠.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의 영역을 빼앗아 교황의 위신과 재정 상태에 타격을 주었고 교황은 자신의 보호자로 비잔틴 제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계기로 교황은 비잔틴 황제와 싸우게 되었고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수장으로 하는 그리스 정교와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로마 카톨릭으로 분열됩니다.  (1054년)  혹자는 비잔틴 제국이 북아프리카에서 쳐들어 오는 아랍인이나 알프스를 넘어 공격해 오는 롬바르드족 으로부터 이탈리아와 교황청을 방어해 주지 못한다고 생각한 로마 교황의 정치적 판단이 동서 교회의 분열의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성상 숭배 논쟁 역시 842년에 해결을 보긴 했지만 동서 교회 분열의 중요한 빌미를 제공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예수님이나 마리아 그리고 순교자들의 동상을 숭배하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특히 게르만의 개종 이후 서유럽에서는 선교 활동에 밋밋한 십자가 보다 성상을 더 많이 활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소아시아 지방이나 시리아 등지(실제로 로마보다 먼저 사도들이 활동하고 복음을 전한 곳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부터 훌륭한 교회의 전통이 이어지던 곳이죠...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의 훌륭한 교부들을 생각해 보세요....) 에서 십자가 이외의 성상을 숭배하는 행위에 대해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레오 3세가 이를 받아 들여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서유럽 지역에서는 비잔틴 황제의 성상 숭배 금지령이 기독교 선교 활동에 지장을 초래한다 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고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가 분열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은 더 이상 서로마 교회를 정치적으로 보호하지 않았고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여 서유럽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개신교인의 한 사람인 제 입장에서 본다면 당시 동로마 교회에서 보였던 생각이 더 옳았다고 보입니다. 개신교에서는 성상 숭배를 금지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아이러니칼하게도 제가 까작스딴에서 본 정교회들은 하나 같이 마리아나 제자들의 성상 앞에서 촛불을 밝히고 기도하고 있는 교회들이었습니다.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으로 갈라지게 한 그 처음 정신은 도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요?

지금 제가 있는 까작스딴이나 구 소련 연방 내 에서 천 년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정교회(러시아 정교 라고 부르지요)도 따지고 보면 다 이 비잔틴 제국의 그리스 정교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비잔틴 제국과 교회는 지리적으로 근접한 남동부 및 동유럽의 슬라브 지역에 대한 선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했고 10세기 경에 Cyril과 Methodius 형제를 슬라브 족의 거주지로 파견해 동방식 그리스도교(그리스 정교)를 전파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 자모를 변형하여 슬라브 문자(지금의 러시아어의 기초)를 고안해 냈고 성경을 슬라브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988년 러시아의 군주 블라디미르가 정교회로 개종한 이래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를 받아 들여 비잔틴 적인 문화를 포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뒤 스스로 그 후계자임을 자처하기도 하지요...이른 바 '제 3의 로마'로 자처한 것입니다. 러시아의 황제를 "짜아르" 라고 부르는데 옛 로마 황제의 칭호인 "케사르" 와의 연관성이 있음을 통해서도 이러한 점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말이 길어졌지요? 어쨋든 이러한 비잔틴 제국의 출발이 바로 이곳 이스탄불 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이스탄불 여행기는 더욱 의미가 있어 집니다. 비잔틴 제국은 역사 속에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성 소피아 박물관에 들어가는 입장권입니다. 입장권에 적힌 15,000,000 TL(터어키 리라) 가 보이시나요? 천 5백만 리라 라고 적힌 이 입장권은 우리 화폐로는 만 5천원에 해당합니다. 만 5천원이 비싸긴 하지만....역사적인 교회 건물을 볼 수 있다는 기대에 이 정도쯤은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스탄불 관광에 대해 얘기할 때 먹거리나 숙박에 드는 비용은 그리 비싼 편이 아니지만 입장료가 비싸다고 얘기 하는데... 우리 가족 역시 실제로 이스탄불에서 여러 문화 유적을 돌아 보면서 그 말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작은 문화재에도 우리 돈으로 5천원 이상의 관람료를 꼭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터어키는 많은 관광 자원을 제대로 활용할 줄 아는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 사진은 성 소피아 건물 내로 들어가기 직전 놓여 있는 안내판입니다. 여기에는 영어와 터어키어로 성 소피아 사원의 오랜 역사를 적어 놓고 있었습니다. "아야 소피아" 라고 적힌 거 보이시죠? "아야" 라는 단어 역시 "성스러운" 이라는 뜻입니다.

성 소피아 교회는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가면서 몇 가지 변화를 겪게 됩니다.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교회 둘레에 세워진 4개의 첨탑입니다. 이 첨탑은 이슬람의 모스크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인데...성 소피아 교회가 모스크로 사용되면서 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탄불의 점령자인 오스만 투르크의 왕 술탄 메멧은 성 소피아를 다룰 때 사려깊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가 이 교회를 정복했을 때 교회 내부에는 많은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가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레오 3세의 성상숭배금지령이 842년에 끝나면서 동방 교회들도 종교적인 성화들을 다시 그렸기 때문입니다. 술탄 메멧은 이 종교적 그림들을 파괴시키지 않고 모자이크 위에 얇은 석회를 발라 덮어 버린 뒤 모스크로 사용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늘 날 그대로 보존된 비잔틴 제국의 모자이크들을 우리가 감상할 수 있는 것이죠. 이걸 보면 이슬람 제국의 어떤 술탄들은 상당히 괜찮은(?)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형민이를 데리고 우리 가족은 우람한 성 소피아 교회 내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기도를 준비하는 장소인 외부 복도를 걸어 들어갔는데 이곳에는 특별한 장식이 없었습니다. 천장은 습기 등으로 인해 축축하게 느껴졌고 불빛도 없어 아주 컴컴한 공간이었습니다.

외부 복도를 거쳐 건물 내에 나 있는 내부 복도로 들어가 보니 외부 복도와는 달리 놀랍도록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 곳의 천장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었고 벽들도 대리석과 아름다운 돌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 복도는 길이가 60미터에 이른다고 합니다.

내부 복도에서 교회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가 있는데 한 가운데의 가장 큰 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는 황제의 문이었다고 합니다.

 왼쪽 사진은 선화가 내부 복도의 황제의 문 위에 위치한 모자이크를 바라보는 모습입니다. 그 모자이크는 오른쪽에 있습니다. 조명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촬영한 비디오를 캡쳐한 것이라 어둡습니다. 오른쪽 사진을 알아보기 쉽게 처리한 것이 아래 왼쪽 사진입니다 .

 이것은 9세기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인데...가운데는 예수님이 앉아 계시고 왼쪽 원 안에는 마리아가, 오른쪽 원에는 대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밑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어두운 조명이지만 황제의 문 위에 새겨진 이 조그마한 모자이크를 보는 순간... 비잔틴 제국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교회에 새겨져 있는 이 모자이크를 통해 1453년 오스만 터어키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동서 문명의 교차로에 서서 서유럽의 기독교 세계를 이슬람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던 그 대 제국을 떠 올릴 수 있었고 황제가 예수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모자이크를 보면서 그들의 신앙심과 가슴이 느껴졌습니다.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일하셨습니다. 비잔틴 제국을 사용하셔서 이미 복음을 받아 들였던 기독교 세계인 유럽 지역을 때가 찰 때까지 보호하셨고 교회를 성숙시키셨던 것입니다.

황제의 문을 지나....교회 본당으로 들어섰습니다.  그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교회의 내부입니다. 본당의 넓이는 75 미터 X 70 미터 로 7,570 평방 미터에 달했고....천장에 높이 솟아 있는 돔은 높이가 55.6 미터, 지름이 33미터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건축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높은 돔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다섯 개의 돔들 중 하나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돔에는 40개의 창문이 있어서 밖으로부터 밝은 빛을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소피아를 찾아 간 시간은 아침 10시 경이었지만 수 많은 방문객들이 본당 안에 와 있었고 각 나라 말로 이 아름다운 건물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들의 모습도 보였습니다.

돔을 받쳐 주는 네 코너에 있는 아치 사이에 3개의 날개가 달린 체루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전체 길이가 11미터인 이 천사는 얼굴이 각각 사자, 황소, 독수리, 천사였으나 왼쪽 그림에서는 그저 별 모양 처럼 보입니다.

벽과 코너에 있는 8개의 거대한 원판에는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 있는데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달필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916년간 교회로 사용되었지만 이슬람 제국으로 넘어간 뒤 이슬람 모스크로 변했었기에 이런 구조물들이 남아 있었고 술탄의 좌석 같은 것도 보였습니다.

교회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와 소아시아에서 운반된 것이며 모두 107개의 기둥이 사용되었고 5년간 백 명의 기술자와 만 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어 완성한 건물이라고 합니다.

자동 카메라로는 본당 내부에서 아무리 후레쉬를 터뜨려도 멀리 있는 벽화들을 제대로 촬영할 수 없었습니다 (촬영은 허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비디오 캠코더로 건물 여기저기를 자세히 촬영했는데 아침 시간인데다 조명도 밝지 않고 창으로 들어오는 역광 때문에 촬영이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돔의 한 쪽에 나 있는 또 다른 모자이크를 발견하고 확대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더군요.(위 사진)

본당 안에서 선화와 전 멍하니 하늘 높게 솟아 있는 돔 꼭대기만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높고 웅장하던지....그리고 건물을 둘러싸고 있는 창들과 그 창들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웅장한 교회 앞에 서 있는 초라한 인간 하나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년의 비잔틴 제국 역사가 이 성 소피아 안에 다 녹아 있는 셈이니.... 거대한 역사를 마주 대해 버린 당황함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혹자는 성소피아 사원은 종교성을 거세당한 죽은 동물처럼 느껴지고 블루 모스크는 살아 있는 것 같다고 얘기합니다. 비종교인이라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약 1400년 전, 지금 내가 섬기는 바로 그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지금의 나처럼 예배드렸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기에....내 마음 속에는 나중에 볼 블루 모스크와는 비교도 안되는 큰 감격과 경외심과 웅장함이 밀려 왔습니다. 아마 성 소피아에 들어온 기독교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 같습니다. 비록 잠시 모스크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여전히 남아 있는 모자이크들을 대하면서 이곳에서 크게 울렸을 찬양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또...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섬기는 국가였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시작하실 때가 있고 끝내실 때가 있다는 것....그리고 교회는 늘 하나님 말씀 안에서 개혁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정치적 보호를 받으면서 관심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곳에 돌리게 될 때에는... 고인 물이 썩듯이 향기를 잃게 되고 심판이 임하게 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느껴지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위의 사진은 본당 한 쪽에서 본 특별한 장소입니다. 오른 쪽 사진에서 보이는 안내판에는 "비잔틴 황제가 대관식을 거행했던 장소" 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로 그 동그란 원 안에서 새로 즉위하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처음으로 왕관을 머리에 얹었던 것이죠...

모든 것들이 새로웠고 모든 것들이 아름다웠습니다. 고등학교 때....잠 오는 어느 여름 날...들었을 것 같은 세계사의 한 대목들이 머리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기쁨도 있었고 잊고 지내던 제국...비잔틴 제국을 제대로 만날 수 있었다는 즐거움이 내내 우리를 즐겁게 했습니다.

우리 부부가 건물 내부를 둘러 보며 인터뷰 형식으로 감동을 녹취하기에 바쁠 동안...형민이는 건물 내부 여기 저기를 돌아 다녔습니다. 형민이 손에는 호텔에서 준 우산이 들려 있었는데..그 우산 끝으로 성 소피아 교회의 바닥을 긁으면서 방문객들이 잘 가지 않는 구석진 곳으로 다니더군요.

우리는 형민이를 보며..."이런 역사적인 장소 바닥에 자기가 왔다는 걸 남기려나 보다... " 하며 웃었습니다. 그래도 귀한 교회당이니만큼 우산 끝으로 교회 바닥을 긁고 다니지 못하도록 따끔하게 야단 치기도 했지요. 하지만...그래도 형민이는 이 컴컴하고 넓은 곳(교회인지 시장인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 마음에 드는지 우산만을 끌고 달리면서 우리가 가까이 오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우리 부부는 형민이가 나중에 자라서 결혼을 하게 되면....이스탄불로 신혼 여행을 보내는 게 좋겠다며 우스개 소리를 했습니다. 꼭 신혼 여행이 아니더라도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해서 자신이 우산 끝으로 밀고 다닌 이 건물이 얼마나 유서 깊은 건물인지...그리고 자신이 믿고 있는 하나님이 인간 역사의 엄청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섬기고 높이던 분인지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본당에서 긴 시간을 보낸 뒤 아쉬운 맘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사람들이 나가는 길을 따라 내부 복도의 가장 오른쪽에 놓여 있는 출구로 갔지요. 그런데....그 출입문 입구에서 커다란 모자이크가 우리 앞을 가로 막았습니다. 자세히 보니...그건 진짜 모자이크가 아니라 거울이었고...제 머리 위에...그러니까 출입문 위에 이 교회에서 가장 잘 보존된 모자이크로 여겨지는 작품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혹시나 이 작품을 잊고 돌아가는 사람을 막기 위해 이렇게 사람들 눈에 잘 띄도록 출입구 정면 위쪽에 거울을 배치해 반사된 모자이크를 볼 수 있도록 한 치밀함에 혀가 내둘릴 정도였습니다.

출구에 놓인 모자이크 앞에서 용감한 우리 부부는 기념 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위 사진) 출구 밖으로 나가려고 보채는 형민이를 억지로 불잡고 선화는 포즈를 취하고... 저는 출구를 통해 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모자이크와 선화가 동시에 나오도록 셔터를 눌렀습니다.  울고 있는 와중에도 형민이의 손에는 우산이 꼭 들려 있습니다.  그렇게도 우산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이스탄불에 있는 동안 형민이는 엄청난 경험을 했음이 틀림없습니다. 겨울 아스타나에 있는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야외 활동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는 것 외에는 교민 수도 적은 이곳에선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일도 적었지요.

그런데...형민이의 눈에 비친 이스탄불은 적당한 온도에다...수 많은 사람들이 형형 색색의 옷을 입고 여기 저기에 모여 있고.... 언제나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는 그야말로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멋진 곳이었겠지요...그래서 전에 없던 고집도 생겼고 이를 계기로 좀 더 엄마에게서 독립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을 통해서는 이 모자이크의 내용을 제대로 아실 수 없으시겠지요? 당시...전 이 모자이크만 따로 촬영을 했었고 나중에 돌아와 밝기를 조절해서 보다 식별하기 좋게 만들었습니다.

모자이크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콘스탄틴 대제가 콘스탄티노플을 상징하는 도시의 모형을, 왼쪽에는 쥬스티니안 황제가 성 소피아를 상징하는 교회의 모형을 들고 있습니다.

콘스탄틴이 황제가 되기 전에 확실히 기독교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콘스탄틴은 정적 막센티우스와의 결전을 앞두고 자신의 군대 4만 5천명 만을 데리고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 질풍같이 진격하여 트리노에서 20만명의 막센티우스 군대를 무찌르고 로마로 진격합니다.

진격하는 도중...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고 " 이것으로 이겨라" 라는 글씨가 하늘에 새겨지는 것을 전 군대가 다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콘스탄틴은 떼베르 강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돌했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에 쌓여 입성한 뒤 콘스탄틴은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기독교를 믿고는 이듬 해인 313년에 동로마의 정제와 함께 밀라노에서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동로마의 황제 리키니우스가 기독교를 거짓 종교라고 선포하고 콘스탄틴에게 싸움을 걸어 오자 그는 "로마의 통일을 위하여!...기독교를 위하여..." 라며 나가 싸우게 됩니다. 9년이나 걸린 이 긴 전쟁에서 콘스탄틴은 승리하게 되고 323년 연말에 로마 제국이 통일된 것과 기독교의 자유를 만 천하에 다시 선포히지요. 당시의 기독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공식 종교가 됨으로 교회적인 견해차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콘스탄틴은 니케아에 종교회의를 소집하기도 합니다. 이 때 주제는 기독론이었습니다( 나중에소개드릴 '에베소의 마리아의 집' 편에서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논쟁이 일단락 된 뒤 콘스탄틴은 전혀 새로운 로마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수도를 생각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잇점에다 로마와 같이 일곱 언덕을 가진 도시인...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으로 수도를 결정합니다. AD 330년 성대한 천도식이 있었고 콘스탄틴의 도시라 하여 새 수도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뒤 6년 뒤 콘스탄티노플의 궁전에서 조용히 눈을 감지요.

콘스탄틴은 그의 새 도시...콘스탄티노플을 하나님게 드렸고 그 후... 또 다른 비잔틴 황제 쥬스티니아누스가 이 성 소피아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인 이 모자이크를 끝으로 우리는 본당에서 빠져 나왔습니다.  

하지만...여기에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성 소피아 교회에는 2층 갤러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그냥 나가 버린 것이죠. 그 당시 우리 부부는 2층이 있다는 기본적 사실 조차도 모르고 성 소피아를 방문했었습니다. 우리는 그 때까지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만으로 다녔고 이 날 오후에서야 한국판 이스탄불 관광 안내 책자를 현지에서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니...어쩌면 저희 부부가 방문했을 그 당시에는 2층이 일시적으로 폐쇄가 되었었는지도 모릅니다. 2층으로 가는 듯한 어떤 방문객들도 발견하지 못했었고 우린 그저 교회를 빠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인데 2층 갤러리를 보려면 별도의 관람료를 내야 한다고 합니다. 어쨋든 우리는 2층 갤러리에 있다는 두 개의 모자이크는 보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혹시 성 소피아를 방문하게 되시면 2층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2층에는 성 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교하고 화려하다는 모자이크가 있습니다. 왼쪽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이 모자이크는 "디시스" 모자이크라고 불리는데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죄인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입니다. 가운데 예수님의 모습이 아주 인상적입니다. 이 예수님의 모습을 확대해서 많은 터어키의 기념품이나 안내 책자에서 사용하고 있던데...종교적 깊이가 느껴지는 훌륭한 모자이크입니다.

어쨋든 우리는 2층에 대해선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그대로 교회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비는 이미 그쳐 있었고 방문을 마친 많은 사람들이 이 아름다운 건물을 마지막으로 바라 보고 있었습니다.

선화와 우람한 성 소피아가 함께 나오도록 찍은 사진입니다.

여전히 하늘이 잿빛이지만 성 소피아를 받치고 있는 우람한 기둥들의 붉은 빛은 확연히 드러납니다.

오래된 시간 탓에 확실히 내부보다 외부에서 성 소피아의 나이가 더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어떻게 보면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그 때문에 이 오래된 교회가 더 사랑스럽게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형민이는 여전히 교회 마당에서도 우산을 끌고 다녔고 많은 관람객들이 형민이와 사진도 찍고 형민이의 나이를 물어 오기도 했습니다.

터어키는 아시아와 가까운 유럽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같은 아시아 사람들의 방문이 적은가 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다른 앵글로 색슨 족보다 터어키 사람들과 우리가 오히려 더 닮은 것 같은데...터어키 사람들은 우리 같은 생김새의 동양인을 자주 못 보는 탓인지... 아주 신기해 하고 반가워 하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꼭 우리를 쳐다 보고 지나가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은 "어디서 왔어요?" 라고 물어 옵니다.  제가 보기에도 유럽인들에 비해 터어키를 방문하는 아시아인들의 수가 훨씬 적은 것 같았는데...그래도 10명 중 6명은 일본인이냐고 물어 오고...4명은 한국인이냐고 물어왔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회 마당에서 여러 개의 사진을 찍고 다시 아쉬운 마음이 들어 입구 쪽으로 돌아가 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무심코 지나쳤던 교회 외부의 기둥과 벽...그리고 그 사이에 핀 이끼들과 허물어진 흔적들을 바라 보았습니다. 수 천년간 유럽에서 지켜오고 발전된 복음...하나님의 큰 계획 아래에서 이 복음은 아시아로 전해졌고...이제는 기독교에서 가장 큰 교회와 정통 신학을 고수하는 신학교들이 대한민국과 같은 아시아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옛날 사도들이 전했던 복음이 소아시아와 로마를 거쳐 우리 손에 주어지기 까지 수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희생하고 수고했음을 밎어서는 안될 것 같습니다. 이슬람의 모스크로 둘러 싸인 성 소피아에서 기독교의 과거를 보았지만 슬프지 않았던 이유도...기독교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세상의 마지막을 향하여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고립된 하나님의 옛 교회당 건물을 바라보며 ...언젠가 터어키에도 다시 수 많은 교회가 들어서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이스탄불에 있는 동안은 계속 비가 오고 흐린 날씨라...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성 소피아를 촬영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침 터어키 관광국에서 제공하는 성 소피아의 전경이 있어 소개합니다. 성 소피아를 둘러 싸고 있는 4개의 첨탑은 오스만 시대에 추가된 것이라고 말씀드렸으니까....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 건물을 보신다면 얼마나 이 건물이 아름다운지 동감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성 소피아 교회 앞에 있는 공원 같은 넓은 광장이 바로 지난 번에 소개한 술탄 아흐멧 광장과 이어진 곳입니다. 바로 이 지역에 모든 문화 유적지가 모여 있는 셈이죠.

저는 아직도 성 소피아 교회 사진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듭니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한반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바로...고구려 초기 왕 중 하나인 미천왕이 중국의 한 나라가 우리나라에 설치했던 한 4군을 몰아 내던 시대였습니다.  이 성 소피아 교회가 세워졌을 때...한반도에는 이제 막 시작된 삼국 시대가 전개될 무렵이었습니다.

그걸 보면 우리 손에 복음이 들려지게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으며 그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실감하게 됩니다. 성 소피아 교회를 보고 우리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내 마음은 그 곳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아마....평생 성 소피아 교회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하나님이 잔잔하게 이끌어 오신 인간의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복음 안의 감동들이 파도처럼 내게 밀려 옵니다. 2002.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