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흥망사

(아무리 요약해도 더 이상 간단해지긴 힘들더군요...혹시 시간이 바쁘신 분은 지금 읽는 것 보다 잠시 숨을 돌리고 난 뒤 여유를 가지고 읽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그리 고 꼭 한 번은 읽으시는 게 유익할 듯 합니다. )

독자들을 위해 잠시 로마사를 간단하게 요약해 볼까 합니다. 방대한 로마사를 몇 줄로 적는다는 시도 자체가 우스운 얘기지만 일단 교회사는 차치하고서라도 일반 역사로서의 로마사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만 비잔틴 제국의 배경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입니다. 하지만...이 글에 포함시켜 보니 너무 내용이 많더군요. 그래서 따로 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장신대 출신의 노우호 선생님이 쓰신 '신구약 중간사' 를 참고해서 적은 글입니다.

로마는 그 건국 기원을 BC 753년으로 잡습니다. 로물루스와 레므스의 신화로 시작되는 로마 역사는 초기의 전설적인 왕정기를 거쳐 BC 510년 경부터 공화정기에 들어섭니다. 이들은 왕을 선출했고 경력이 있고 나이가 든 귀족들을 원로로 추대하여 원로원을 구성했는데 약 300명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시민을 다 합쳐 8만 4천명이라고 하니 작은 도시 국가이지만 민주 정치를 해 낸 셈입니다.

그러다 7대 왕 타르퀴니우스의 폭정에 온 나라가 홍역을 치루고 난 뒤 부터 원로원은 다시는 왕을 뽑지 않기로 결의하고 원로원 의원 중 해 마다 두 사람씩 뽑아 집정관으로 세워 일하게 했고 나라가 위급할 때는 한 사람의 지휘가 필요하다는 단서를 붙여 6개월로 기간이 한정된 독재관이라는 제도를 둘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로마에서 집정관에 뽑힌 사람은 정말 일 년 동안 혼신을 기울여 일했고 원로원 의원들 가운데 물망에 오르게 된 사람은 평소에 많은 연구와 업적을 쌓아 갔습니다. 이것이 로마가 빠른 시간에 발전한 이유라고 할 수 있지요. 그들이 공을 세우는 가장 빠른 길은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기고 돌아오면 집정관이 될 가능성은 높아 졌습니다.

로마에서 부를 누릴 수 있는 길도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우는 것이었는데...막대한 전리품과 노예를 차지한 사람들은 일약 귀족의 자리에 오르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어 사회는 점차 귀족과 평민, 그리고 노예 신분으로 나뉘게 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평민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지요.

모든 정치가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평민들끼리 또 다른 로마를 건설하겠다는 의식이 싹트자 원로원은 충격을 받고 평민의 대표를 원로원이 인정하여 평민의 민의를 수렴할 것을 약속하고 호민관 제도를 도입합니다. 평민들은 10명의 호민관을 두어 귀족들이 만든 정책이 맞지 않으면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고 이후 로마 공화국은 한 층 더 발전하게 됩니다. 해마다 교체되는 호민관은 평민의 편의를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함으로 귀족과 평민의 차이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개선되었고 더 나아가 호민관을 뽑던 민회가 발전하여 집정관 이하의 모든 관리를 뽑을 수 있는 국가 최고 세력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이후 로마는 더욱 성장해 BC 397년 북쪽 에트루리아의 도시 베이이를 합병하게 됩니다. BC 387년 북쪽의 켈트족에게 처음을 패하기도 하지만 전 시민들의 재건 의지는 다시 하늘을 찌르고 유능한 인재가 있으면 귀족이나 평민을 가리지 않고 등용한 로마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이 때 평민 출신의 집정관이 나오기 시작하지요.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의 타렌툼을 복속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게 됩니다. 그 후 지중해에는 로마와 카르타고가 앙숙이 되어 패권을 다투게 되었는데  로마는 1,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의 패권을 잡게 됩니다.

로마는 이후 시칠리아, 코르시카 섬 뿐 아니라 마케도니아 왕국을 쳐 아테네, 스파르타를 다 동맹으로 흡수하고 BC 192년에는 스키피오의 군대가 소아시아로 진군하여 시리아를 무찌릅니다.

로마는 점령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문화와 문물을 전하기도 하고 수용하기도 했는데 찬란한 헬레니즘과 오리엔트 문명을 다 수용하며 발전하는 바람에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이 생기게 됩니다. 실력과 지혜, 학문과 공로가 있는 사람이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합리적인 정치가 유지되는 동안 로마는 많이 발전하는데 마리우스 같은 사람은 7번이나 집정관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출신 신분이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지혜와 학문, 덕망이 있으면 인정받는 사회로 발전합니다. 이 때 영웅, 지혜자들이 로마에 많이 나타나지요.

이러한 때 로마는 삼두정치를 맞게 됩니다. 폼페이우스, 크랏수스, 케사르... 이 세 사람이 로마를 함께 다스리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죠.. 폼페이우스는 무적의 장군으로 소아시아에서 승리하고 지중해의 해적단을 무찌르고 팔레스타인 지방을 속주로 삼은 이입니다. 로마제국의 속주가 최대로 확장된 시기가 바로 이 시대이지요.

지혜, 돈, 힘의 연합이 이루어 낸 삼두 정치는 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원로원에서도 불평 한 마디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이 세사람은 저마다 각기 튼튼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세 사람은 로마의 속주를 3등분하여 각자가 지사가 되어 다스리겠다는 의지를 민회에서 강제로 통과시키는데 성공하게 되는데...원로원은 자신들과 의논하지 않은 오만함에 분개했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을, 크랏수스는 시리아를, 케사르는 갈리아의 지사가 되었고 임기도 5년으로 스스로 정합니다. 케사르는 게르만인과 켈트인을 굴복시키고 바다 건너 브리타니아까지 군대를 진출시키고 가는 곳마다 도로를 닦고 도시를 건설하는 업적을 이룹니다. 5년의 임기가 끝나자...다시 그들은 5년을 연기하게 됩니다.

이 때 시리아를 다스리던 크랏수스가 메소포타미아로 가는 도중 파르티아인들의 공격을 받아 전사하게 되고 이를 은근히 기쁘게 여긴 원로원은 이 기회에 버릇없는 케사르를 벌주기 위해 폼페이우스를 비상시를 다스리는 독재관으로 삼고 케사르에게 모든 권리를 원로원으로 되돌리고 군대를 남겨 두고 홀로 귀국하라는 명령을 보냅니다.

이 정보를 안 케사르는 혼자 깊이 생각한 뒤...군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가에  모습을 드러내지요. 그 유명한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을 하고 전군에게 진격 명령을 내린 그는 단숨에 아드리아 해안의 아리미움 시를 점령하였고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고 원로원은 해산되고 맙니다. 폼페이우스는 도와 줄 줄 알았던 이집트 인들에게 속아 넘어가 죽임을 당했고 추격하던 케사르는 아까운 인물을 잃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집니다.

BC 47년 내란으로 어지러운 이집트를 평정하여 속국으로 삼고 클레오파트라를 여왕으로 세우고 로마에 반기를 든 폰토스를 평정한 케사르는 당당하게 개선하게 되고 그 위세에 압도된 원로원과 민회는 화려하게 개선식을 올리고 독재관, 최고 재판관 등의 최고 관직을 줍니다.

케사르는  달력을 지금의 태양력으로 바꾸기도 하고 도시를 건설하고 서민을 돌아보면서 선한 정치를 해 나갔습니다. 노예 해방을 늘려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도 하면서 선정을 베풀던 중 케사르는 결국 로마의 대군주 황제가 되고 싶은 생각을 품게 됩니다. 케사르의 야심을 간파한 카시우스는 부르터스와 짜고 동지를 규합해 케사르를 제거하는 계획을 세우는데 "케사르는 로마인이 용납할 수 없는 황제가 되려고 한다" 라는 소문이 돌자 동지들은 모여 들게 됩니다. 로마의 정치 체제는 공화정이기 때문이죠.

이들은 BC 44년 원로원에 출석한 케사르를 둘러싸고 단검으로 찌릅니다. 케사르는 단검에 찔린 채 꿋꿋하게 그 곳을 벗어 나려다 친자식처럼 사랑하던 부르터스를 보고 "오..부르터스..너마저도.." 하고 부르짖으며 숨지게 됩니다.

독재자 케사르를 제거하고 나면 로마는 다시 평화스런 공화 정치가 회복되리라고 믿었던 카시우스와 부르터스 등의 예상은 완전히 어긋나고 맙니다. 처음에는 부르터스의 연설을 듣고 독재자는 잘 죽었다고 생각했던 민중들은 케사르의 장례식에서 당시 집정관이었던 안토니우스의 연설을 듣고 케사르가 무참하게 살해되었으며 케사르가 생전에 자신의 유산을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고루 나누어 주라고 유언을 했다는 얘기를 접하자 술렁이게 됩니다.

"우리의 영웅 케사르가 젊어서부터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했는가? 이러한 케사르를 암살한 자들은 마땅히 처벌되어야 한다" 며 떠들었지요. 부르터스 일당들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보고 로마에서 달아났고 이 소식을 들은 케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당시 18세)가 그리스에서 유학을 하고 귀국하게 됩니다.

그는 작은 케사르가 되어 케사르의 유언대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이는 어리지만 케사르의 후광을 업고 케사르의 군대를 훌륭하게 지휘합니다. 그는 그리스 민주 정치를 배우고 돌아온 사람으로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고 뒷 날 로마의 첫 황제,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성경에는 가이사 아구스도 라고 나오지요..."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눅 2:1))

BC 42년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힘을 합쳐 마케도니아의 빌립보 들판에서 부르터스 군대를 전멸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10년 뒤...다시 두 사람은 서로 정적이 되어 권력을 두고 겨루게 되지요. 로마는 자칫하면 다시 두 동강이 나든지 피를 부르는 회오리가 밀어닥칠 위기였기에 원로원은 차라리 두 사람을 공동 집정관으로 뽑아 화해시키자는 지혜를 짜내고 옥타비아누스의 여동생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킨 뒤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다스리고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다스리게 합니다.

그러나 파르티아가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이를 정벌하기 위해 동방 원정을 떠난 안토니우스가 당시 길리기아에 와 있던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열렬한 사랑에 빠지게 되고 안토니우스가 그렇게 지체하는 동안 파르티아 군은 시리아를 점령하고 팔레스타인까지 점령하게 됩니다.

로마에서는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소리가 점점 높아갔지요.

"안토니우스는 도대체 뭘 하고 있나?"

옥타비아누스도 누이 동생의 위험을 무릅쓰고 안토니우스에게 비난과 경고의 편지를 몇 차례 보냈으나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열애에 빠진 안토니우스는 마침내 옥타비아를 돌려 보내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을 하고 가까스로 파르티아 군을 몰아낸 뒤 키프로스 섬과 시칠리아, 아프리카의 키리네를 결혼 선물로 클레오파트라에게 줘 버립니다.

이에 대해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은 안토니우스의 행동에 분개를 느끼고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쳐 부숴라!" 는 소리를 높입니다.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군함 500척을 이끌고 그리스의 악티움 앞 바다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전함 600척과 마주치게 됩니다. 바다의 싸움이 치열해질 때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달아났고...바다의 전투와 육상에서의 전투에서 이집트의 군대는 로마의 군대 앞에 산산히 부숴지게 되고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궁전에서 자결하고 이 소식을 들은 클레오파트라도 자살하고 맙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승전보를 로마 원로원에 보냈고 로마에선 승리의 축제가 벌어집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열광하는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개선하지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온갖 진귀한 전리품을 가득 싣고 개선한 옥타비아누스는 케사르와 같은 욕망을 불태우며 들어 왔지만 지혜롭게 얘기합니다.

원로원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겸손하게 "한 시민으로서 바다와 육지의 모든 승리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바칩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 한 마디에 원로원 위원들은 감격하지요.

"비상시 독재관의 권한과 휘하에 움직이던 54개 군단을 모두 로마 시민에게 돌려 드립니다. 한 시민으로서..."

원로원 의원들은 하나같이 옥타비아누스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고 크게 만족합니다. 원로원 회의는 만장일치로 옥타비아누스에게 최고의 집정관 군대의 대원수라는 칭호를 주었고 민회에서는 최고의 호민관이라는 관직을 그에게 맡깁니다. 그는 한사코 고사하다 간절한 부탁을 받게 되자 10년동안만 이 직무를 맡겠다고 수락합니다.

"그러나..그 안에라도 국가가 번영되고 내란이 가라앉으면 언제라도 한 시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원로원과 시민들을 감동시킨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지요.

BC 29년...'원로원의 제 1인자'라는 칭호가 내려지고 '시민들은 그를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사람)라고  불러야 한다' 는 원로원령이 떨어지게 됩니다. BC 23년 그는 로마 신관의 최고 자리에 올랐고 '국가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자세로 일평생 그 권좌를 누리면서도 원로원을 능수능란하게 다스려 나갔습니다. 이 무렵부터는 로마는 제국이 되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황제라고 불리우게 됩니다. 그는 로마의 첫 황제가 된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후계자가 없어 케사르 집안의 친척이 되는 티베리우스(성경에 나오는 디베료: 눅 3:1에 보면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라고 나옵니다.)를 후계자로 삼고 7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티베리우스 시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됩니다.

티베리우스 이후 '가이우스 갈리굴라' 가 왕이 되었는데 포악한 왕이라 근위병에 의해 암살되고 맙니다. 근위병들에 의해 세로운 왕이 추대되고 원로원은 승인하게 되는데 그가 '클라우디어스' 황제입니다. 행 11:28 에 나오는 '글라우디오' 가 바로 그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클라우디어스 황제는 정치를 잘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기독교의 복음이 사도들에 의해 한창 힘차게 전파되던 시기도 이 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기독교인들은 로마에서는 박해를 받으며 성장하게 됩니다.

클라우디어스 황제의 뒤를 이은 황제가 바로 '네로' 황제입니다. 그의 악행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입니다. 67년에는 사도 바울도 네로의 손에 순교를 당합니다. 네로가 미치광이처럼 행동하자 여기 저기서 네로를 죽이려는 사람이 일어나게 되고 그 중에 스페인 지사로 나강 있떤 갈바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들어왔고 근위병들과 원로원은 그의 왕위를 승인합니다. 이를 안 네로는 자살하고 말지요.

69년 한 해동안 로마는 가르바, 오토, 비테리우스 등이 잇달아 황제가 되었고 비테리우스가 죽임을 당하자 유대지방에 주둔군 사령관으로 나가 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가 됩니다. 그는 기념 사업으로 지금의 콜로세움을 건립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은 10년이 걸렸고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 때에야 완공하게 됩니다. 공교롭게도 70년에 예루살렘이 멸망되고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에 건설된 이 경기장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맹수의 밥이 되었습니다. 76년에 폼베이의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티투스 황제가 죽은 뒤 그의 아우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제위에 올랐는데 그도 기독교인들을 많이 핍박했습니다. 사도 용한은 그 당시 에베소에서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고 있다가 체포되어 밧모섬으로 유배되었고 거기서 요한 계시록을 쓰게 됩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된 뒤 연이어 현명한 다섯 황제(네르바, 트라야뉴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 가 연이어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는데 이를 일컫어 '오현제' 라 합니다. 하지만 오현제 후 일어난 코모두스(180-192) 황제는 나쁜 황제의 길을 걸었고 근위병에게 암살되고 맙니다. 로마의 혼란한 상황은 세베루스(193-211)에 의해 통일되지만 군대를 소중히 여기는 그와 그의 아들들의 정책으로 인해 군인들이 교만하고 방자해지게 됩니다. 235-285년가지 50년 동안 로마 군대는 왕을 무려 26명이나 만들어 내게 되지요. 막시미누스 등...이런 군인 출신의 왕 중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었다고 합니다.

로마 내부가 이렇게 썩어 들어가자 지방 속국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그 중에 언제나 앞장 선 민족들은 게르만 민족과 페르시아 인들이었습니다. 새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270년 경부터 로마에 성벽을 수축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쌓은 성벽은 지금도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는 군대를 육성하여 페르시아를 진압하고 정치를 잘 해 보려 다시 암살되고 맙니다.

이러한 때 나타난 사람이 디오클라티아누스 황제입니다. 그는 286년 페르시아를 무찌르고 나서 이 광대한 나라를 한 군데서 다스리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고 동서로 갈라서 다스리되 거기에 다시 부제를 두어 결국 제국을 네 사람이 분할 통치하도록 만들었다. 동서에 정제와 부제가 있어서 힘의 공백을 없이 하고자 했지만 이것은 결국 나라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갈라지게 한 셈이 되었지요.

동로마의 수도는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 서로마의 수도는 이탈리아의 밀라노, 동로마의 부제는 다뉴브 강가의 시르미움, 서로마의 부제는 라인강 변의 트리에르 로 정하게 되었다. 여러 사람들 중 서로마의 부제는 콘스탄티우스라는 사람인데 그는 용감하면서도 관용을 베푸는 사람들로부터 자비로운 아버지로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콘스탄티우스에게는 콘스탄티누스(콘스탄틴) 이라는 훌륭한 아들이 있었고 키가 크고 용모가 뛰어난 데다 체력과 지력을 겸비한 장군이었다고 합니다.

AD 305년, 동서의 정제는 물러나고 동서의 부제가 정제로 취임하게 되어 서로마는 콘스탄티우스(콘스탄틴의 아버지)가, 동로마는 갈리우스가 정제로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 때 콘스탄틴은 니코메디아에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라인강변의 트리에르로 달려 가게 되었는데 중간에 많은 사람들의 방해를 받았고 특히 지난 번 정제의 아들인 막센티우스가 집요한 방해를 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틴은 그의 아버지를 만나 로마를 분할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하고 한 사람이 다스리지 않으면 나라는 결국 제위 다툼으로 멸망하게 될 것이라며 그 동안 겪었던 일을 보고합니다. 하지만 이 때는 브리타니아 진압을 위해 출전하던 참이라 나중에 더 의논하기로 하고 덮어 두었고 콘스탄티우스는 전쟁터로 가는 도중 병을 얻어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는 죽을 때 아들에게 유언하기를..."콘스탄틴! 로마를 통일하도록 해라" 고 말합니다.

이 때 밀라노에서는 지난 번 정제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원로원을 업고 서로마의 정제라고 선언하고 나섭니다. 막센티우스는 근위군과 아프리키 기병을 동원하고 콘스탄틴을 역적으로 몰았고 그러던 차에 로마 시민이 보낸 사절단이 와서 막센티우스의 야망에서 로마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전달합니다 .

콘스탄틴은 9만의 군대를 나누어 절반은 변경 수비를 맡기고 절반의 군대를 거느린 채 한니발처럼 알프스를 넘어 질풍같이 진격하여 트리노에서 20만명의 막센티우스 군대를 무찌르고 로마로 진격합니다.

진격하는 도중...하늘에 십자가가 나타났고 "이것으로 이겨라" 라는 글씨가 하늘에 새겨지는 것을 전 군대가 다 보았다고 합니다. 콘스탄틴은 떼베르 강 밀비우스 다리에서 막센티우스와 격돌했고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환호하는 소리에 쌓여 입성한 콘스탄틴은 어머니의 신앙을 따라 기독교를 믿고는 이듬 해인 313년에 동로마의 정제와 함께 밀라노에서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하는 밀라노 칙령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 후...동로마의 황제 리키니우스가 기독교를 거짓 종교라고 선포하고 콘스탄틴에게 싸움을 걸어 오자 그는 "로마의 통일을 위하여!...기독교를 위하여..." 라며 나가 싸우게 됩니다. 9년이나 걸린 이 긴 전쟁에서 콘스탄틴은 승리하게 되고 323년 연말에 로마 제국이 통일된 것과 기독교의 자유를 만 천하에 다시 선포합니다. 당시의 기독교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와 공식 종교가 됨으로 교회적인 견해차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해 325년 콘스탄틴은 니케아에 종교회의를 소집하기도 합니다. 이 때 주제는 기독론이었습니다.

논쟁이 일단락 된 뒤 콘스탄틴은 전혀 새로운 로마를 건설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수도를 생각하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잇점에다 로마와 같이 일곱 언덕을 가진 도시인... 비잔티움으로 수도를 결정합니다.

AD 330년 성대한 천도식이 있었고 콘스탄틴의 도시라 하여 새 수도의 이름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뒤 6년 뒤 콘스탄티노플의 궁전에서 조용히 눈을 감습니다. 그의 사후 로마는 다시 그의 세 아들들에 의해 셋으로 나뉘어졌으나 16년의 싸움 끝에 콘스탄틴 2세가 승리하게 됩니다. 하지만 국력은 많이 소진되었고 게르만 족이 다시 갈리아 지방을 짓밟았습니다.

황제는 아테네에 유학중인 사촌 유리아누스를 불러 게르만을 정복하도록 했고 유리아누스는 성공적으로 이 임무를 수행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다시 그에게 페르시아의 반란을 진압하라는 명을 내렸고 이에 갈리아 사람들이 유리아누스를 보내기 실어하면서 하는 말이 "만약 유리아누스를 페르시아로 보낸다면 우리도 같이 가겠노라...단 부제인 유리아누스를 정제로 모시고 가리라! " 이였습니다. 제국은 다시 나뉘게 된 것입니다.

AD 360년 유리아누스가 진군해 가는 도중 콘스탄틴 2세는 열병으로 죽게 되었고 유리아누스는 자동으로 정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독교를 버리고 페르시아 원정길에 들어 섰다 전사하고 맙니다. 그는 기독교도들로부터 배교자라고 일컫어지게 됩니다.

유리아누스 이후 황제같은 황제가 일어나지 못했고 제국은 현저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속국들이 종주국인 로마를 멸시하게 되었고 속국들의 의식도 많이 계몽되어 독립의식이 고취되어 가게 됩니다. 이 때 흑해 북쪽의 훈족의 습격을 견디지 못한 고트족이 이번에는 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서쪽에 있던 고트족은 남쪽으로 밀리게 되었는데 이른 바 게르만 족의 대이동이라고 불리는 사건입니다.

38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서고트족에게 다뉴브 강 남쪽 기슭에 나라를 만들 것을 허용하고 동맹국으로 삼고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합니다.

AD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후 로마제국은 둘로 나뉘게 됩니다. 동쪽은 맏아들 아르가디우스가 다스리게 되었고 서쪽은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에게 맡깁니다. 동로마제국은 난공불락의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여 이후 1000년간의 역사를 누리지만 서로마는 내리막 길을 가게 됩니다.

AD 410년 서로마는 서고트족의 왕 알리리크에게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짓밟히게 되고 맙니다. 그 해부터 제국의 판도는 달라지기 시작해 서고트족 , 반달족, 프랑크의 게르만족 등이 결국 갈리아, 에스파니아, 브리타니아, 아프리카를 모두 점령하고 자신의 왕국을 세우게 됩니다.

이 때를 노려 훈 족의 대대적인 침공이 시작되고 서로마 최후의 명장 아에티우스가 고트의 여러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나아가 아틸라 대왕의 50만 대군과  샤론 평야에서 맞붙게 됩니다. 황색의 훈족과 백인과의 처음 전쟁에서 서로마는 가까스로 승리하지만 양쪽 다 심한 타격을 입고 맙니다. 이 전투가 451년 7월의 전투였고 이것이 서로마의 마지막 반짝임입니다.

AD 453 아틸라 대왕은 시기심에 가득차 샤론 평야의 영웅 아에티우스를 죽였고 이 어리석은 황제는 결국 고트 출신의 병사의 칼에 죽고 맙니다. 이듬해 고트의 반달 왕 가이세리크는 로마로 진격하여 황후와 공주까지 포로로 잡아 가지고 물러 갑니다.

마침내 476년 게르만의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가 이름 뿐인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를 제위에서 끌어 내리고 오토 아케르 왕국으로 만들면서 비명 소리도 없이 서로마제국은 조용히 잠들어 버리게 됩니다.

로물루스의 건국(BC 753년) 이후 멸망 (AD 476년) 까지 723년 동안 로마는 온갖 영욕을 겪으며 세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