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데의 웅장한 유적들    10 일째: 사데 에서 (4월 13일)

새벽녘에 내린 비로 인해 촉촉하고도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빌라델피아의 시외 버스 정류소로 나와 다음 목적지인 '사데'로 향하는 버스표를 끊었습니다. 우리가 인터넷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고대 사데 도시의 유적을 보려면 현재 "살리히리" 라고 불리는 곳을 가야만 했는데 쉽게 그 곳으로 가는 표를 끊을 수 있었습니다. 빌라델피아에서 이즈미르(서머니)로 가는 도중에 이곳을 통과한다고 하더군요.

형민이와 우린 버스에 올라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산과 들에 시선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참고 자료에 의하면 사데는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BC 1200년 경에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수세기가 지나면서 산기슭에 제 2의 도시가 형성되어 고대 리디아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BC 700년 경 소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정권을 자랑하던 곳이 바로 리디아 왕국이었습니다.

그런데...막상 버스가 '살리히리'라는 곳에 섰음에도 차장(터어키에는 차 안에 꼭 안내원이 있습니다.)은 우리더러 이곳에서 내리지 말라고 막아 섰습니다. 우리같은 외국인들이 '살리히리'를 찾아 오는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듯이 무조건 조금 더 기다리라는 표시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좀 더 기다렸지요...그랬더니 얼마 못 가서 정말 거짓말 같이 차창 밖으로 뾰족뾰족한 바위들로 특징지어지는 산봉우리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이 바로 그 유명한 난공불락의 요새...'사데' 라는 것은 한 눈에 알 수 있었지요.

허름한 가게가 하나 서 있는 도로변에 우리 가족들만 내려 놓고 버스는 떠나 버렸습니다. 도로변에는 "Sardis"라는 글자가 선명한 붉은색의 관광 안내판이 서 있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말자 바로 촬영한 것입니다. 선화 뒷 쪽으로 날카로운 각을 보이고 있는 바위 산이 고대 도시 '사데' 가 있던 지역입니다.

도로변에는 아무 것도 없었고 뒤 쪽으로 가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곳은 일반 식료품과 생활 잡화를 파는 곳이었고 식당도 붙어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음료수를 하나 사면서 사데 유적을 보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사데는 헬라어로 "남은 자" 또는 "남은 물건" 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 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탈레스가 바로 이 곳 사데에서 태어났지요. 철학자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멜레스가 이 도시를 처음 축성했다고 하고 하는데 사데는 부와 철학과 법률과 음악의 도시였고 모직 공업, 자주업, 금은보석 세공업이 발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아데미 여신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가게집 주인으로부터 사데 유적지의 위치를 확인한 우린 도로를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때는 4월 중순...지중해의 4월은 무척 더웠습니다. 생수병을 손에 들고 팔을 걷어 붙이고 웅장한 뾰족산을 향해 걸어 올라가야 했습니다.

유적지까지 버스가 다닌다고는 하는데 사람들 말로는 걸어가도 금방 닿는다 해서 형민이를 앞장 세우고 걸었습니다. 도로 위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데를 수도로 삼고 있던 리디아 왕국이 세계사에서 가지는 중요한 의미는 금과 은으로 만든 동전을 가장 처음 사용한 국가라는 사실입니다. 당시 리디아보다 문명이 앞서 있던 히타이트나 이집트에서도 동전을 만들어 사용하지 않았지만 리디아에선 은과 금을 53:37의 비율로 섞은 호박 색깔의 동전을 주조했다고 합니다.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인 크로에수스는 색깔이 변하는 기존 동전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순수한 금과 은으로 동전을 만들어 전 세계의 급속히 보급했고 부로 큰 명성을 떨쳤다고 합니다.

한참 동안 도로를 건넌 뒤 우리는 :"Welcome to Sardis" 라는 영문 팻말이 적힌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왼쪽 사진이 바로 그 유적지의 입구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알고 보니 사데의 유적은 사진에서 보이는 이 곳과 아데미 신전 그리고 아크로폴리스 등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곳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 세워진 안내판을 찍은 것입니다. 우리말로 몇 가지를 번역해 놓았는데 이것이 현재 고대 도시 사데에 남아 있는 유적들의 전부입니다. 이 안내판이 세워진 곳은 지도상에 보이는 체육관이나 집터가 있는 곳으로 이 외에도 수 많은 로마 시대의 집터와 상가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리디아 왕국의 마지막 왕 크로에수스는 아폴로 신탁의 잘못된 해석으로 고레스 왕이 통치하고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세력을 알아보기 위해 페르시아 영토를 침범했고 이로 인해 고레스 대왕의 공격을 받아 사데 도시를 포위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을 제외하고는 암벽 뿐인 난공불락 요새였기에 포위한 지 2주가 지나도 페르시아 군은 성을 정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데 성의 남쪽은 가파른 절벽에 맞닿아 있었기에 그야말로 방어할 필요가 없는 천연 요새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헛점은 있는 법...성의 남쪽에서 철모를 떨어 뜨린 리디아의 한 군인이 그것을 주우려고 기어 내려 가는 것을 본 페르시아의 군인들은 바로 그 곳을 통해 성의 남쪽을 공격해 사데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는데 그 때가 BC 546년 경이었습니다. 그 후 BC 334년에는 알렉산더 대왕에 이어 버가모 왕국 그리고 로마에 의해 차례로 점령되었고 BC 17년 경에 대지진으로 도시가 파괴되었으나 티베리우스 황제의 원조로 도시를 재건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데 유적지의 모습을 소개하겠습니다.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 곳을 지나면 왼쪽 사진과 같이 건물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있는 거리로 들어 서게 됩니다. 사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마치 전시용 부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처럼 많은 건물들의 유적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이 건축물들은 모두 로마 시대에 이루어진 상가 건물들이라고 합니다.

이 거리 입구에는 왼쪽과 같이 "Roman Avenue" 라고 적힌 안내판이 친절하게 붙어 있었고 4-5세기 경 로마 시대의 모습이라 설명을 달고 있습니다. 각 건물의 유적마다 "이곳은 무엇을 파는 곳이다" 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는데 마치 매장이 줄지어 서 있는 지하 상가를 걷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많이 모여 산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데는 많은 유대인들이 장사를 했을 것이 분명하고 최초로 동전을 사용했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음이 분명합니다.

이제부터는 사데의 주요한 유적 중 하나인 체육관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 사진 해설) 체육관으로 들어가는 통로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위 사진 해설) 웅장한 체육관 건물의 기둥들이 보입니다.

(위 사진 해설)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면 봤던 건축물 중에서 가장 복원이 잘 된 유적인 것 같았습니다.

(사진 해설) 체육관 앞 터에 무성하게 자란 잔디와 들꽃은 형민이의 눈에도 들어 오나 봅니다. 다리를 뻗고 앉아 엄마를 보고 있습니다.

(사진 해설) 로마 시민들은 육체의 건강을 위해 체육관과 목욕탕을 많이 세웠습니다. 직접적인 육체 노동을 노예들에게 맡긴 지배층은 주로 무역, 유통, 금융 등의 사무직에만 종사했고 육식을 중심으로 하는 식생활은 영양 과잉으로 인한 비만을 초래했습니다. 따라서 운동 시설과 목욕탕은 필수적이었고 시설도 초호화판이었다고 합니다. 실내 경기 시설과 육체를 단련할 수 있는 각종 운동 기구들이 체육관 안에 완비되어 있었다고 알려집니다.

(위 사진 해설) 사데의 체육관 앞 유적지 에서....많은 기둥들이 보이지요?

특별히 체육관 바로 옆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붙어 있었는데 안티오쿠스 3세가 메소포타미아에 살던 전쟁에 능한 유대인 고참병 1600여 세대를 리디아로 이주시킴으로 이곳에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요세푸는 줄리이어스 시저가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하나는 이들의 전통에 따라 얼마든지 돈을 모아 그것을 예루살렘에 보낼 수 있게 한 것이고 또 하나는 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락해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유대인 회당을 걷고 있는 선화의 모습입니다. 유대인 회당은 선화의 발 밑에 보이는 특징적인 모자이크 무늬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데에서 발견된 비문에 의하면 이곳의 유대인들은 주로 금세공업에 종사했으며 일부 유대인은 사데 시의원이 될 만큼 영향력이 컸었다고 합니다.

체육관 근처의 유적지를 돌아 보고 있을 때 우리 가정은 일단의 한국인들을 만나는 드문 경험을 했습니다. 이스탄불에선 한국인을 쉽게 만날 수 있었지만 에베소가 아닌 소아시아 지역에서 한국인을 만난다는 건 드문 일이었습니다. 그 만큼 이곳은 교인들이 아니면 알고 찾아 오기 힘드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데 유적지 매표소 안으로 들어 온 승합차 유리가 내려 지면서 한국 말이 들렸습니다.

 "어...한국 사람들이네! 여기 사세요? 말 좀 물읍시다. 빌라델피아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죠?"

"아...빌라델피아요? 저 아래로 가셔서 반대쪽으로 가셔야 하는데...현지인들에게 물으셔야지..저희들은 잘 모른답니다. 우리도 이곳에 사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아..그래요? 그럼 관광객이란 말이예요?"

아마 이 분들은 젊은 부부가 아기 하나 데리고 풀밭에서 놀고 있으니...아마도 이 곳에서 살고 있는 '대단한 한국인' 가정으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예...우린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어요. 이곳에 여행을 온 것이죠."

 "그럼..교포들이네..."

웬지 교포라는 말이 듣기 싫게 느껴졌지만... 엄밀한 의미로 보면 우리 역시 '재외 국민' 이었기에 그렇게 불릴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 분들은 인천에서 온 어느 교회의 성도들인데 성지 순례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아마도 다른 국가를 포함한 성지 순례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중인 모양인데...오늘 하루 동안 일곱 교회를 다 둘러 봐야 한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소아시아 지역을 돌아 보고 있는 우리로선 하루 만에 이 지역을 다 둘러 보겠다는 이들의 얘기는 마치 농담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들에게 길을 묻는 동안에도 일행들끼리 티격태격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느 부부는 다른 사람들이 듣는 데서 상대방 때문에 길을 잘 못 들었다며 원망의 소리를 내뱉고 있었고 이들을 안내하고 있는 현지인 운전 기사도 길을 잘 모르는 한국인들을 데리고 다니느라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았습니다.

이슬람 신자인 터어키 사람들은 한국인 기독교인들이 찾아 와서 그저 '빌라델피아'로 가자고 말하면 알아 들을 수 없습니다. 빌라델피아는 지난 번 글에서 밝힌 대로 '알라세히르' 라는 작은 마을을 찾아 가야 하는데 아마도 운전 기사에게 이 단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기사에게 '알라세히르'로 가야 한다고 알려 주었더니 영 다른 곳으로 왔다고 투덜거리며 차 시동을 걸었습니다. 한 마디로... 승합차 안의 사람들은 성지 순례 중임에도 불구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떠나는 승합차를 바라 보며 제대로 된 가이드도 구하지 않은 채 급하게 이 곳을 찾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예 우리 가정 처럼 하루에 한 도시씩 해서 천천히 쉬어 가며...참고 자료를 읽어 가며... 소아시아 지역을 둘러 본다면 가이드가 필요 없으련만....그렇지 않다면 제대로 된 전문 가이드를 데리고 여행을 하는 것이 훨씬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 갈 곳은 사데 시민들이 섬겼다는 아데미 신전이 있는 곳입니다. '아르테미스 여신'이라고도 불리는 아데미 신전 바로 옆에는 로마 시대에 세워진 사데 기념 교회가 있다고 해서...더욱 가 봐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미 우리는 에베소를 방문했을 때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는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의 기둥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데미 신전을 찾아 가는 동안 터어키 전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걸어 갔습니다. 한 살 반 밖에 안 된 형민이가 또박또박 앞서 걸었고 푹푹 찌는 태양볕을 받으며 푸른 들판 사이로 걸어 갔습니다.

이곳에는 양을 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카자흐스탄에도 양이나 말이 많긴 하지만...이곳에서 본 양들이 형민이가 태어나서 처음 본 것들이었습니다.

양 목에 매여진 방울의 딸랑 딸랑 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자 형민이는 양떼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제 눈에도 작고 꼬물 거리는 작은 것들이 신기하게 보였나 봅니다.

이곳에서 형민이는 양들에게 '맘마' 주는 것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풀을 뜯어 먹고 있는 양들을 보며 형민이도 풀을 뜯어 와 양들에게 "맘마...맘마.."하고 외쳤습니다. 터어키의 양들은 그림책에 있는 양들보다 좀 더 무섭게 생겼습니다. 선화는 이곳 양들을 보고는 무섭다며 가까이 가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용감한 형민이는 양들을 만져 보려고 다가 갔습니다. 이 맘때까지 형민이는 커다란 개도 별로 무서워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저 모든 짐승들을 가까이 했습니다. 하지만 두 돌이 지나면서부터는 인상 좋은 개와 그렇지 못한 개를 구별하는 눈썰미가 생기더군요...

이렇게 냇가를 따라...들판을 따라 한참을 올라 가니 커다란 기둥들과 건물들이 나왔습니다. 바로 아데미 신전인 것입니다.

사데의 주된 신앙은 키벨레 여신이었는데 '람세이'라는 학자는 그리스의 아데미 여신과 같은 신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물론 아데미 여신은 주로 사슴을 안고 있고 키벨레는 사자를 안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 엄청난 규모의 신전의 주인은 일반적으로 아데미 여신이라고 받아 들여집니다. 터어키에는 에베소, 사모스, 디딤 등의 옛 도시에서 아데미 신전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어졌는데 사데의 아데미 신전도 그 보다는 작지만 엄청난 규모로 지어 졌습니다.

이 신전은 아데미 신에게 바쳐진 네 번째로 큰 이오니아식 신전이었는데 서쪽에는 아데미를 위한 성소가, 동쪽에는 제우스를 위한 성소가 놓여 있었습니다.

기원전 499년에 일어난 이오니아인들의 폭동으로 일부가 파괴된 이 신전은 가로 99.2 미터, 세로 45.7 미터 규모로 만들어 졌고 78개의 돌기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두 개의 기둥이 18미터 정도의 높이로 여전히 우뚝 솟아 있는데 선화가 앉아 있는 기둥의 둘레를 보면 흉칙스럽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AD 17년에 일어난 지진으로 신전은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139년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가 다시 보수해서 자기 아내 조각상을 아데미 신상과 나란히 두어 숭배케 했다고 합니다.

AD 4세기 경 황제 숭배가 거의 사라질 무렵이 되자 이 신전은 너무 파손되어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눈여겨 봐야 할 곳은 신전 옆에 세워진 작은 건물입니다. 사진에서 빨간 벽돌로 지어진 건물인데...이 건물이 바로 사데에 세워진 교회 건물이라고 합니다. 아래에 세워진 안내판에서 봤던 로마 시대에 세워진 '사데 기념 교회'는 바로 아데미 신전 옆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놀랄 만한 일이죠...

어떻게 교회가 우상 숭배의 현장 바로 옆에 세워져 있을까? 사데 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곳의 이교도 신앙이 기독교화 된 것을 엿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 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고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계 3:1-6)"

주님은 순교하면서까지 믿음을 지키던 교회가 이제는 몇 명 되지 않은 성도만이 남은 것을 상기시키면서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왜 그들은 처음 믿음을 잃어 버리게 되었을까? 그것은 사데의 부유한 환경 때문이었습니다.

앞서 봤던 로마 거리(Roman avenue)에서 알 수 있듯이 금화가 풍부한 세계적인 무역 도시요, 연회와 축제, 미녀들과 오락이 있던 이 도시는 세상의 화려함 속에서 성도들이 서서히 신앙을 잃어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성도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 돈과 쾌락과 권력이듯...사데 교회는 이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데 교회는 1세기 중반에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그리스어로 된 메노로지온(Menologion)에 의하면 바울의 제자이며 일곱 집사 중 하나인 클레멘트(clement)가 사데 교회의 첫 감독이었던 것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사데 교회에 편지 쓸 당시의 감독이 누구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하는데 2세기 경 사데 교회의 감독은 멜리톤(Meliton)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을 대변하기 위해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황제에게 많은 논문들을 써 보낸 사람이라고 합니다.

초대 교회 박해 시에 사데에서 순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테라폰(Therapon)과 아폴로니우스(Apollonius)가 알려져 있습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 사대 교회 감독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고 그 후 고트 족이 침입하여 교회를 파괴했다고 합니다.

아데미 신전을 둘러 본 우리는 위 사진에서 보이는 산 꼭대기에 조성된 '아크로폴리스' 까지는 가지 말고 이 정도에서 돌아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지금까지 사데에서 본 것만 해도 많은 데다... 형민이를 데리고 산꼭대기까지 올라 가는 건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데미 신전을 돌아 보고 있을 때 동네 아이들 몇 몇이 나와 낯선 동양인들을 신기한 듯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신기한 건...형민이겠지요?

형민이는 아직도 눈과 얼음으로 덮여 있을 카자흐스탄을 떠나 녹음이 푸른 터어키에 와 있는 동안 눈에 띄게 자랐습니다. 갑자기 세상의 많은 것들을 대한 탓인지...말도 많이 늘었고 표현력도 부쩍부쩍 자랐습니다. 여행이 아기를 자라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형민이 뿐 아니라 선화도 터어키의 작은 마을들을 돌아 다니며 유적지를 찾는 이번 여행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이 곳 아이들이 가르쳐 준 약수터에서 생수를 떠 마시며 "카자흐스탄 보다 물 맛이 좋다" 며 소리치는 선화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사데를 여행하는 동안 마냥 좋았던 것 만은 아닙니다.

우리가 소아시아를 여행하는 동안 다툰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이곳 사데 에서였습니다.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별것 아닌 것임은 분명하고 자칫하면 아데미 신전을 보지 못하고 그냥 돌아갈 뻔 했습니다. 하지만 우린 이내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이 힘든 일정을 잘 헤쳐 나가기로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사데는 더 기억나는 곳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아데미 신전에 있는 동안 버스 한 대가 여기까지 올라 왔는데 그 안에는 영국에서 온 카톨릭 신자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는데...나중에 큰 도로까지 이 버스의 신세를 지고 내려 갈 수 있었습니다. 영국 할아버지들은 형민이를 데리고 여기까지 걸어 온 우리 부부를 보며 적잖게 놀라는 기색이었습니다. 그들은 버스를 타고 소개해 주는 관광지에 내려서 돌아 보기만 하면 끝인데 비해 우린...도로에서 2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걸어 올라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젊은 우리들이 그렇게 여행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죠?

오후가 지나서야 처음 버스에서 내렸던 그 큰 도로가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도로에 위치한 그 식당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이제 터어키식 샐러드나 몇 가지 음식은 익숙합니다.

게다가 이런 시골은 음식 값이 싸서 먹고 싶은 걸 얼마든 지 먹을 수 있고 야채도 훨씬 신선하답니다. 선화의 품에는 깊은 잠에 빠져 든 형민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루 종일 엄마, 아빠를 따라 걸어 다녔기에 이제부턴 한참 동안 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사데 여행기는 끝이 납니다. 이제 남은 곳은 서머니와 버가모 뿐...소아시아 여행기도 이제 그 끝이 보입니다.

나중에 꼭 다시 한 번...버스를 타고 와 이 추억의 장소에서 내리고 싶습니다. 뒤로 보이는 저 낡은 식당과 가게는 여전히 남아 있을지 모르겠지만...암벽으로 깎아 지를 듯 솟아 있는 사데의 천연 요새는 그대로 서 있겠지요. 그러나... 어쩌면 형민이를 안고 있는 이 때가 그리워 이 곳을 다시 찾고 싶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004.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