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델비아 의 옛 교회 터    9 일째: 빌라델비아에서 (4월 12일)

  라오디게아 유적을 돌아본 후 우리는 다시 아저씨의 차를 타고 데니즐리 까지 나왔습니다. 데니즐리는 큰 도시인지라 인근 지역으로 가는 교통편들이 모두 모여 있고 그 곳에서 다음 목적지인 알라세히르(빌라델비아)로 가는 버스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이죠.

라오디게아에서 무릎위로 올라 오는 풀 숲을 두시간 가량 걷는다고 온 가족은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바지에는 노란 꽃가루가 잔뜩 묻어 있었고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습니다. 선화의 경우, 무엇보다 바닥이 보이지 않아 깊이를 잘 알 수 없는 수풀을 걸으며 도마뱀이나 벌레들이 잔뜩 있을 거라고 내내 긴장을 했던 탓에 버스에 오르자마자 이내 잠에 빠져 들고 말았습니다.

 왼쪽 사진은 버스를 타고 잠에 빠져 드는 선화와 형민이의 모습이고 오른쪽 사진은 데니즐리에서 알라세히르까지 가는 버스표인데 두 사람의 운임으로 8백만 터어키 리라(우리 돈으로 8천원 정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터어키의 시골 마을들을 찾아 다니는 여행을 하면서 터어키는  버스 교통망이 상당히 발달한 나라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버스 차량 자체나 버스 터미널의 청결도나 수준은 우리 나라 시골 버스보다 훨씬 나은 것 같고 버스마다 도우미 한 사람씩 배정되어 있기에 승객 서비스도 나아 보였습니다. 아마도 워낙 넓은 국토인데다 구 소련처럼 철도망이 촘촘하게 깔려 있는 것도 아니기에 버스 교통이 큰 역할을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음 목적지인 빌라델비아 역시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막무가내로 찾아 가는 것이어서 어떤 모습의 마을을 만나게 될 지 내심 기대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빌라델비아'에서 숙소를 정하고 하룻밤을 지낸 뒤 다음 목적지인 '사데'로 떠날 생각입니다. 이제부터는 사실상 짜여진 일정이란 것이 없고 볼 것이 많으면 더 머무는 것이고 오래 있을 필요가 없으면 바로 그 곳을 떠나는 유동적이면서 생동감 넘치는 여행 스케줄입니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할 수도 있는 일정이어서 한 살 반된 형민이와 선화를 데리고 여행하는 이 시간들이 가끔씩 두렵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늘 '별 일이 없어야 하는데....' 라는 생각 뿐이었죠.

빌라델비아는 필리아(사랑)와 델피아(형제)가 합쳐진 복합 명사로 '형제 사랑'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 2세가 왕이던 시절, 그의 동생 앗탈레스 2세도 정사나 군사 지식이 탁월해서 형인 유메네스 2세가 원정을 나가면 항상 동생에게 국정을 맡기곤 했다고 합니다. 이 동생에게도 국민의 지지도 높았었는데 이를 간파한 로마가 그에게 왕위에 오르도록 충동질 했지만 동생인 앗탈레스는 이를 거절하고 형에게 충성을 바쳤다고 하고 이것을 '앗탈레스의 형제애'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훗 날 왕이 된 앗탈레스 2세(BC 159-138)는 BC 140년 경 이 곳에 도시를 만들고 빌라델비아(형제애)라고 명명하여 친형 유메네스 2세에게 바친 충성과 우애를 기념했다고 하는데 도시 명칭의 기원에서부터 벌써 따뜻한 사랑이 감도는 곳입니다.

버스 속에서 얼마나 달렸을까...흔들림에 잠을 깨어 차창 밖을 내다 보니 왼쪽 사진처럼 도로 양 옆으로 끝없이 이어지는 포도 밭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사도들이 사역하던 당시 빌라델비아의 전체 인구는 약 1천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바람에 주로 농업과 목양하는 농민들만이 사는 작은 도시였다고 하는데 원래 이곳 사람들이 섬기던 신은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 였다고 합니다. 디오니소스 신전에서 제사를 드리고 포도주를 마시고 춤을 추며 향락을 즐겼다고 전해지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곳은 포도 농사로 유명한 곳이지요.

초대교회 시절에는 이곳 성도들이 만든 포도주를 성찬식에 쓰라며 다른 교회에 나누어주어 빌라델비아(필리아+델피아, 사랑+ 형제) 이름의 뜻처럼 형제 사랑을 실천하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끝없는 포도밭을 따라 2시간 가량 달리고 나서야 작은 시골 마을 정류소에 버스가 섰습니다. 배도 고프고 지친 우리들은 터미널을 빠져 나와 호텔이 있을 법한 도시 중심을 찾아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호텔을 정해 둔 게 아닌지라 짐을 풀고 오늘 밤을 묵을 만한 장소를 미리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류소 앞의 길을 따라 집들이 다닥닥 붙어 있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얼핏 봐서는 여기에 호텔이나 시내 중심가가 있을 것 같지 않은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작은 공장들이 줄지어 있는 도로를 따라 슈트케이스를 질질 끌고 형민이를 안고 마을 안쪽으로 들어 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자주 보지 못했던 흰 조랑말들이 끄는 수레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도심을 따라 얼마를 걸으니 "OTEL"이라고 적힌 건물이 도로 저 쪽에 보였습니다. 

그 호텔 건물은 정말 크고 화려했습니다. 마을의 규모는 조그만 면 소재지 같은데 호텔 로비와 규모는 완전 대도시 급이었지요. 그러나 우리 같은 여행객들에겐 너무 고급 호텔도 도움이 안 되는 법...로비에서 직원과 가격 흥정을 벌였지만 80불에서 40불까지 해 줄 순 있어도 그 이하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작은 도시에서는 숙박비도 적게 들 것이라 생각하고 예산을 짰던 우리로선 40불도 큰 돈이어서 선뜩 들어 가겠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도 30불짜리 호텔에서 지냈는데 말이죠....

호텔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곳을 나와야 했습니다. 다시 무거운 슈트 케이스를 들고 호텔 밖으로 나올 땐 정말 씁쓸한 기분이더군요. 하지만 잘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바로 맞은 편에 또 다른 호텔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크기는 비슷하지만 웬지 저렴할 것 같은 분위기(?)를 가진 호텔이었죠. 역시나 깨끗하게 수리된 이 호텔의 하루 숙박료는 1천 5백만 터어키 리라(우리돈으로 15,000원) 에 불과했습니다. 13불 정도 되는 싼 가격인 셈이죠. 생각보다 너무 요금이 싼 바람에 한 사람 요금인지, 두 사람 요금인지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주인과 손짓 발짓으로  한참동안 실랑이를 벌인 뒤에야 2인용 침대에 아침식사까지 포함하여 15,000,000리라 임을 확인하고서야 대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좌측 사진은 호텔이 들어서 있는 빌라델비아의 거리이고 우측 사진은 우리가 이곳에서 묵었던 호텔입니다.

호텔방은 지금까지 묵었던 어떤 곳보다도 깨끗했습니다. 청결한 욕실에다 더운 물도 잘 나오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더러워진 옷을 빨고 나니...새로운 곳을 탐험할 의욕이 다시 생기면서 기분도 좋아졌지요.

우선 주린 배를 채우기위해 골목에 있는 어느 식당으로 찾아 들어 갔습니다. 관광객이 별로 찾지 않는 이런 작은 도시에 동양인 가족이 등장은 큰 뉴스거리였나 봅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기한 듯 우리를 쳐다 보았고 특별 대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식당에서 따뜻한 애플티를 마시는 모습입니다. 터어키의 다른 식당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음식들이 유리 진열대 속에 놓여 있고 원하는 것을 주문하는 방식이었는데....이 날 먹었던 음식이 터어키에서 먹었던 가장 맛있는 음식이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그 때 몹시 굶주려 있었던 탓이기도 하지만 가지 무침이나 감자 요리, 닭고기까지 특별하게 맛있었습니다. 도시보다 이런 시골에서 먹은 야채 샐러드(오이, 토마토에 올리브 기름을 얹은)의 맛이 더욱 깔끔하고 신선한 것 같았습니다. 가격도 저렴해서 푸짐하게 먹었음에도 우리돈으로 7000원 정도 밖에 안 되더군요.

식사를 마친 시간은 벌써 오후 4기가 가까워 질 무렵이었습니다. 우리가 빌라델비아에 온 목적은 이 지역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기독교 유적인 6세기에 건축된 요한 교회를 보기 위함입니다. 책 속에 나와 있는 사진 만을 염두에 두고 호텔을 찾으러 도시를 지나치는 동안 두리번 거려 보았지만 그 어떤 유적지 안내판도 눈에 띄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그 곳을 찾아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갔던 에베소나 히에라폴리스, 라오디게아 등은 그 곳에 내리자 말자 눈 앞에 유적지가 펼쳐져 있었기에 시골 마을 한가운데 떨어진 이번 경우는 좀 막막하게 느껴졌습니다. 고민하던 끝에... 우린 우리가 가진 자료에 나와 있는 빌라델비아의 유적지 사진을 식당 주인에게 보여 주기로 했습니다. 혹시나 이런 모양을 가진 건물이 이 근처에 있는지 물어 본 것입니다.

흑백 사진을 한참이나 쳐다 보던 주인은 다행히도 아는 듯한 눈치를 보였고 우리에게 방향을 알려 주었습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식당을 나선 발걸음은 아주 가벼워 졌습니다. 만일 오늘 이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다면 오전의 라오디게아 방문에 이어 빌라델비아 까지 돌아 본 셈이 되고 나머지 시간은 충분하게 휴식을 취한 뒤 내일 아침에 바로 사데 지역으로 떠나면 되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의 풍경은 발달된 도시는 아니었지만 정이 가는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지금도 포도 농사와 농업을 주로 하는 정겨운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명 관광지가 아닌 탓에 이곳 사람들의 생활을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맘이 편하고 자연스러웠습니다. 시골 인심 역시 너무나 좋아서 신기하기 그지 없는 동양인 가족이 (조그만 꼬마까지 딸린) 뭘 물어 보기라도 하면 도와 주려고 안달일 정도였습니다.

길을 따라 쭉 걸어 가던 길에서....그렇게도 찾던, 사진 속의 유적지를 발견했습니다. 라오디게아 처럼 광활의 평원에 흩어진 잔해들이 아니라 빽빽하게 들어찬 집들과 건물들 사이에서 마치 한 칸의 공중 전화 박스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위 사진이 바로 빌라델비아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옛날 교회의 흔적입니다. AD 17년과 23년에 발생한 큰 지진으로 인해 이 도시에는 아무런 고대 유적도 남아 있지 않는데다 이미 유적지 위에 이 마을(알라세히르)이 들어서 있는 탓에 더 이상 발굴도 불가능한 상태라고 합니다. 이곳의 유일한 기독교 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건물 앞에는 영어로 '성 요한 교회'라고 큼직막하게 적어 두었더군요. 보이시죠?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바쳐져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비교적 높은 4개의 돔으로 구성된 이 교회의 벽에는 11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고 하나 점차 마모되어 가고 있어 제대로 알아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남아 있는 기둥의 잔해 중에서 가장 높은 것입니다. 아랫쪽의 돌로 짜여진 기둥 위에 층층이 올라져 있는 붉은 벽이 그 옛날 웅장했을 교회 건물을 떠 올리게 만듭니다.

사실 이 교회 건물이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언급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건물은 아닙니다. 전에도 언급한 대로 그 당시 교회는 건물의 형태를 가지지도 못했고 초기에는 유대인, 이후에는 로마의 박해로 인해 가정 중심의 지하 교회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기원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료도 발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바울은 그의 친척 누기오(롬 16:21)를 빌라델비아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했다고 하고 사도 헌법에서는 이 도시의 첫 교회 감독은 요한이 임명한 데메트리우스 라는 사람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우리에게 더 와 닿는 이유는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 중에서 서머나 교회와 함께 예수님으로부터 책망 없이 칭찬만 들은 교회라는 점 때문입니다.

교회사에서 빌라델비아 교회가 등장하는 부분은 사도 요한이 계시록을 쓴 지 10년이 지난 AD 105년 경에 익나티우스가 트로이에서 빌라델비아 교회의 감독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때문입니다. 이 내용을 보면 당시 순교자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나의 열망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갈망하는 것은 육체의 불이 아니라 단지 내 속에서 말씀하시는 살아 있는 생수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

이후 2세기 경 암미아 라는 여선지자가 빌라델비아 교회를 섬기면서부터 큰 부흥이 일어났다고 하는데 그녀의 예언과 은사들은 교회 부흥에큰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초대 교회 내에서 빌립 집사의 네 딸과 대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전해 집니다.

3세기의 빌라델비아 교회는 두아디라 교회와 같이 이단 몬타니즘의 중심지가 되었고 AD 325년 니케아 종교 회의 때에는 빌라델비아 교회 대표로 헤티마시우스 라는 감독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AD 431년 에베소 종교 회의에서 빌라델비아는 마리아의 신성(Tne Mother of God)을 주장한 알렉산드리아의 학자 시릴에 반대하고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안을 지지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교회의 잔해 옆에는 좌측 화면과 같이 AD 600년 경에 세워진 사도 요한을 기념한 교회라는 안내판이 하나 세워져 있었고 우측 사진처럼 땅 아래로 깊숙히 파 내려간 발굴 현장도 그대로 보였습니다. 구덩이 아래에는 층층히 내려간 벽들이 보였습니다.

처음에 이곳을 찾은 뒤 입장권을 파는 매표소가 안 보여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터어키는 입장권 같은 관광 수입은 철저하게 챙기는 나라인데...아무런 시설도 눈에 띄지 않았기 때문이니다.

그래서 우린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 왔고 잘 가꾸어진 정원과도 같은 이곳을 어슬렁 거리고 다녔습니다. 한참이 지난 뒤에서야 안쪽에 위치한 개인 주택같은 허름한 건물에서 왼쪽 사진처럼 1인당 1백만 터어키 리라(우리돈 천원)를 받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좌측 사진은 유적지 안에서 이곳 저곳을 돌아 보는 모습이고 우측 사진은 유적지 맞은 편에 세워진 모스크를 촬영한 화면입니다. 빌라델비아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모스크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동네마다 서 있는 교회당의 숫자보다 터어키에서 볼 수 있는 이슬람 사원(모스크)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말 동사무소가 있는 곳마다 모스크가 하나씩 서 있는 것 같았는데 커다란 건물이 아니라 자그마한 건물에 사진처럼 뾰족한 첨탑을 세워 놓은 탓에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 왔습니다.

빌라델비아는 아랍인들의 침략 속에서도 끝까지 남아 있었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였다고 전해 집니다. 소아시아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쥬스티니안 황제의 통치기인 AD 6세기에 정치, 문화적으로 절정기를 이룬 뒤부터는 이교도들에게 점령당하는 역사들로만 이어집니다. 7세기에는 이슬람인들인 아라비아 인들이 소아시아를 점령해서 수백년간 지배했었고 1071년 로마 황제 라마노스 4세가 만지켈트에서 또 다른 이슬람 민족인 셀주크 터어키인들에게 패한 뒤로 12세기에는 셀주크 터어키인들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 후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터어키에 완전히 함락된 1453년 5월 29일 이후..지금까지 소아시아는 이슬람 민족의 땅이 되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을 인내로 지켰기 때문에 칭찬 받은 교회였던 빌라델비아 교회의 모습을 빽빽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는 모스크의 첨탑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소아시아 순례를 통해 맛 봐야 하는 슬픈 현실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시작된 복음이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을 통해 가장 먼저 이방 땅으로 전해진 곳이 바로 이곳 소아시아였습니다.

복음의 서진 현상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소아시아.

지금은 복음과 가장 먼 곳에 놓인 이 시대의 '땅 끝'으로 불리는 이슬람 한 복판에 놓여 있습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 된다는 말이 이곳에도 적용되는지....어쨋든 이 지역의 재복음화는 이 곳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온 복음을 받아 들인 한국을 비롯한 신흥 기독교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으로 보입니다. 그들로부터 복음의 빚을 지고 있으니까요....

유적지 내에선 위의 사진처럼 각종 기념품들과 안내 책자들이 전시되어 팔리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래 사진처럼 그 곳에서 발굴된 각종 유물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십자가 형상도 보이지요?

빌라델비아의 교회 유적지를 관리하고 있는 사람은 나이 지긋한 터어키인 부부였습니다. 안내 책자를 팔기도 하고 입장료 수입을 얻어 가며 생활하고 있는 곳으로 보였는데 우리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무척 반가워 했습니다. 한국 사람을 알고 있다며 '소아시아 7대 교회'를 집필하신 김주찬 선생님 이름을 대기도 하더군요.

이 관리인 아저씨는 형민이와 선화에게 월계관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 형민이에게 물구나무 서기를 시키기도 하는 등 무척 우릴 좋아해 주셨습니다.

형민이는 이 물구나무 서기를 하고 난 뒤 세상이 떠나가도록 울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동작이었거든요(사진).

관리인 부부에게 인사를 한 뒤 빌라델비아 교회 유적지를 나선 것은 저녁 5시 반... 오전 내내 라오디게아의 풀밭을 헤매야 했던 우리로선 빌라델비아의 유적지가 비교적 간단했던 것이 일정상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호텔로 가서 푹 쉬면 되니까요...

빌라델비아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고 합니다. 1세기 당시 빌라델비아는 사데, 버가모, 트로이를 거쳐 로마로 가는 관문이었다고 합니다. 비록 적은 교인들이 모인 교회였지만, 많은 박해 속에서도 주의 이름을 배반치 아니했고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의 간계에도 속지 않았습니다. 주의 말씀을 굳게 지키며 충성을 다한 그들에게 주님은 천국의 문을 열어 두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소아시아의 각 도시마다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좀처럼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 게 하리라'"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빌라델비아 성도들의 성숙한 믿음과 사랑의 행위로 인해 유대인 몇몇이 빌라델비아 교회로 들어와 예수를 믿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날 교회 역시 말 뿐인 사랑보다는 교회를 비판하는 자들조차도 우리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만드는 믿음의 행위가 중요한 상황에 놓여 있지요...

호텔방으로 들어가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며 살짝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때가 훨씬 지나 다시 밖으로 나와 저녁 식사를 하고 빌라델비아의 도심을 거닐며 지중해변의 정취를 맘껏 느꼈습니다.

예수님께 칭찬받은 교회가 있던 빌라델비아는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름처럼 '형제애'가 가득한 모습으로 낯선 방문객들의 방문을 맞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빌라델비아(알라세히르) 에서 남긴 다른 모습들입니다.

(위 사진) 도시가 작지만 아담하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우리가 방문한 소아시아의 도시 중 가장 정이 많이 가는 곳입니다.

 

 (위 사진) 형민이는 이곳 사람들의 시선을 독차지 했지요.

 

  (위 사진) 우린 호텔방에 들어 오면 신선한 오이를 사다가 간식 삼아 먹었습니다. 이곳의 오이와 오렌지 등은 정말 신선하고 맛있습니다.

 

(위 사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빌라델비아를 떠날 때의 모습입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버스에서 찍은 사진이지요.  2004.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