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데미와 마리아

고대 에베소 도시의 유적지를 뒤로 한 채... 승합차에 올라 탄 우리 일행은 다음 방문지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고대 문명이 있는 유명 관광지인 탓에 반듯하게 닦인 아스팔트 도로가 키 큰 나무 사이로 시원스레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나무 밑둥마다 칠해져 있는 하얀 페인트가 이상해 보였는지 함께 가던 캐나다 친구가 "저 흰 칠 해 놓은 게 뭐냐?" 고 가이드에게 묻더군요. 그건 해충을 방지하기 위해 칠해 둔 건데...까작스딴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라 우리 눈에는 낯설지 않았었나 봅니다.

한참을 달린 뒤 우리가 들른 곳은 바로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신전 앞 이었습니다. 고대 에베소 도시는 아르테미스 신을 수호신으로 섬겼었기에 이곳에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커다란 신전의 잔해가 남아 있습니다. 아르테미스 여신은 성경에도 '아데미 여신'으로 자주 등장하기에 기독교인들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지요. 아데미는 로마에서는 다이아나(Diana), 그리스에선 레아(Rhea), 이집트에선 이시스(Isis) 라고 불리워 졌습니다.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로 여겨지는 것은 이집트의 피라밋, 바빌론(이라크)에 있는 세미라미스의 공중 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 하리카나서스의 화려한 무덤, 알렉산드리아의 파라오, 로도스의 거대한 골로새 동상 그리고 바로 이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입니다.

에베소에 있는 아데미 신전은 기원전 7세기 경에 세워진 것으로 어떤 신전보다도 웅장하고 아름답게 건축되었다고 합니다. 다산, 다복의 신인 아데미 여신은 소아시아에서 뿐 아니라 사도행전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천하가 섬기는 여신'인데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아기를 잘 낳게 해 주고 축복을 준다고 믿고 있었지요.

왼쪽 사진이 바로 아데미 신전 앞에서의 모습입니다. 선화는 형민이가 "쉬..." 할 장소를 찾고 있지요?

잔뜩 기대감을 가지고 찾아 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뜻밖에도 덩그러니 남아 있는 기둥 하나 뿐이었습니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가이드 아저씨 뒤로 이 신전의 원래 모습을 그려 놓은 조감도가 있습니다. 높이 15 미터의 건물로 127개의 돌기둥이 이 신전을 받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하나 남은 저 기둥은 바로 이 127개의 돌기둥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나입니다. 아데미 신전이 이렇게 파괴된 것은 지진 때문인데 에베소 도시를 황폐시킨 대규모 지진으로 인해 이 신전은 파괴되어 채석장으로 변했고 그 곳의 돌기둥들은 여러 지역으로 이동되어 이렇게 하나 만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어떻게 저렇게 큰 규모의 신전을 건설할 수 있었는가는 지금까지도 불가사의로 남아 있지만 우리 앞에 보여진 신전의 잔해는 초라할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거짓 신의 말로를 보여주는 듯했지요.  

사진은 셀주크(고대 에베소 근처에 건설된 도시) 도심 한 가운데 세워져 있는 아데미 여신의 모습입니다.진짜 아데미 여신상은 박물관에 있고 이것은 똑같이 만든 모형입니다.

여신의 머리에는 성벽이 조각되었는데 이는 도시의 신이요, 보호자란 뜻입니다. 머리 뒷 부분에는 반달이 그려져 있는데 달과 별의 여신을 의미합니다.

팔에는 사자들이 부조로 되어 있고 가슴에는 많은 혹이 보입니다. 이 혹에 대해 해석이 분분한데 여성의 유방을 의미한다고도 하고...여왕 벌 둘에에서 생식하는 벌 무리 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상징은 아데미가 모든 생물의 어머니가 되고 축복의 근원인 여신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겠지요.

아데미 신전을 끝으로 오전 관광 일정을 마치고 모두 함께 길 가에 위치한 식당으로 갔습니다. 마른 빵, 오렌지, 구운 쇠고기 같은 것으로 점심을 해결했는데 국적은 다 다르지만 배고픈 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는 서로 자신을 소개하기도 하고 이것 저것 질문하는 시간도 가졌습니다.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 아래을 피하기에는 그렇게 천막이 드리워진 그늘이 최고더군요. 가이드 아저씨는 형민이의 나이를 묻고는 자기가 이름을 하나 지어 주겠다면서 "무스타파"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 후론 형민이만 보면..."무스타파! 무스타파!" 라며 졸졸 따라 다녔는데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점심 식사 후 우리가 간 곳은 마리아의 집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는 AD 80 년 경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복음을 전하고 떠난 지 23년이 지난 후의 일이였지요.

당시 에베소 교회의 감독은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에베소 교회의 믿음이 흔들린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디모데를 에베소로 보냈었습니다. 에베소에 온 디모데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도 요한에게 자주 서신을 보내 에베소에 와서 동역할 것을 부탁했고 이에 따라 요한이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내려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제자 요한에게 자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던 것 기억하시죠? 그 후로 요한은 늘 이렇게 마리아를 모시고 다녔습니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AD 60년 초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도모하다 황제의 무서운 박해가 가해졌고 AD 70년에는 예루살렘 성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에베소로 온 요한은 디모데로부터 이단들의 사상을 논박하는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고 요한 일서를 기록합니다. 그 후 아데미 여신의 축제 날, 우상 숭배하는 군중들에게 붙잡힌 디모데는 매를 맞고 순교하게 되고 요한은 에베소에서 붙잡혀 로마로 갔다가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요한 계시록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풀려난 뒤에는 에베소로 돌아와서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되지요.

우리가 오늘 찾아간 이 '마리아의 집'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에베소에 옮겨 왔던 마리아가 살았던 집입니다. (사진에서 길 끝에 보이는 집입니다.) 에베소에 도착한 요한과 마리아를 위해 에베소 성도들은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곳에 거처를 마련해 준 것입니다.

우리가 마리아의 집을 찾아 갔을 때에도 멀리 에게해가 보이는 산등성이의 도로를 따라 굽이 굽이 올라가야 했습니다.

금빛 처럼 반짝이는 에게해 의 물결과 녹음이 우거진 이 산 속에서 파괴된 예루살렘을 떠나 에베소로 거처를 옮긴 요한과 마리아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모르긴 해도....그들의 마음 속에는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 버린게한 사람....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억과 경배로 가득차 있었겠지요. 산을 올라오는 승합차 속에서 잠 든 형민이를 안고서 2천년 전...이 산을 올라 왔을 요한과 마리아의 모습을 말 없이 그려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차는 넓은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마리아의 집'은 커다란 주차장을 가진 큰 관광지였습니다. 터어키는 이슬람 국가이지만 코란에도 마리아가 거룩한 여인으로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이슬람교인들 역시 마리아를 매우 존경한다고 합니다. 하긴 코란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라" 는 말도 적혀 있다고 하더군요.

이 마리아의 집은 아주 우연히 발견되었습니다. 1878년에 독일을 한 번도 떠나 본 적이 없는 카데린 에밀리히(Catherine Emmerich)라는 수녀가 꿈 속에서 계시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 라는 책으로 펴 냈는데 이 책 속에 성모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891년 나자렛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해서 오늘 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집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안내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입니다.)

그들은 이 집인 정말 마리아가 살던 집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고대 교회사와 고문서 등을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AD 431년 종교 회의록에서 요한이 마리아를 위해 집을 한 채 지어 주었다는 기술을 찾아냈고 이로써 마리아의 집은 역사적 사실인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1967년 로마 교황 바오로 6세와 1979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여 '신성하고 중요한 곳'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카톨릭 교회의 성지로 지정되었습니다.

마리아 집은 T형으로 건축되어 있었는데 그 안에서는 어떤 촬영도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선화와 전...잠든 형민이를 데리고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아주 작은 집이었습니다. 특별한 장식도 없었고... 마리아가 기도했을 법한 건물 중앙에는 그저 성경책 한 권만이 놓여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참 맘에 들었습니다.)

건물을 나온 뒤 마리아의 집을 지키고 있다는 수녀 한 분을 만났고 그 분과 함께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온 수녀라고 하던데...한국에서 온 기독교인(Christian)이라는 설명을 듣고는 우리 부부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었습니다.  우린 이곳에 개신교 선교사들도 있냐는 질문을 했었는데 "이곳에 캐나다에서 온 선교사가 한 명 있고 자주 만나서 교제를 하고 있다" 는 소식까지 알려 주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반가운 만남이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라고 고백해야 하는 카톨릭와 개신교 사이에 가장 큰 차이점 중 하나가 바로 이 '마리아'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마리아의 집 앞에서 있었던 수녀와의 만남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왜 1천 5백년간 내려 온 기독교 역사 속에 마리아 신격화가 끼여 들어 갔을까요? 단일한 성경 목록과 삼위일체와 같은 중요한 교리들이 초대 교회 시절부터 빨리 자리 잡은 것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 역사 속에서 진리를 위해 직접 일하셨다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이 마리아 신격화 현상은 안타깝게도 1517년 종교 개혁 시대까지 교회 속에서 전해 내려 왔습니다.

마리아의 집은 바로 마리아 신격화 현상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AD 431년, 바로 이 마리아의 집에서 열린 제 3차 종교 회의에서 마리아의 신성을 인정하게 되는 빌미를 제공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AD 313년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던 때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313년 이후 기독교는 굉장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는 국가의 적이 아니었고 오히려 동지였습니다. 전에는 신자가 되자면 대단한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지만 이제는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모든 면에서 유리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콘스탄틴 황제는 두 갈래로 나뉘어 통치되던 로마 제국을 하나로 통일한 뒤 로마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동쪽의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습니다. 황제는 갈라진 땅을 하나로 통일시킨 뒤에는 사상까지도 통일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부터 기독교인이 되면서 온 국민들이 자기를 따르길 원했고 나라는 기독교를 통해 사상적으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습니다.

사람마다 신앙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 기독교 공인 이후 시대의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박해를 받던 시절에는 그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도 급급했던 시절이라 이런 문제들이 표면적으로 대두되지 못했지만 기독교 공인 시대 이후에는 교리적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특히 콘스탄틴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존재인가? 아들이라고 하니까 조금 못한 존재가 아닌가? 하나님과 예수는 서로 생각과 마음이 다르면서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 논쟁이었고 여러 가지 주장들이 범람했습니다. 콘스탄틴 황제 역시 이 문제에 관해 대답이 여럿인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습니다. 기독교 자체도 하나가 아니었던 것이죠.

(마리아의 집 앞에 있는 세 개의 샘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샘물을 마시면 건강하게 해지고 두 번째 샘물을 마시면 부자가 되게 해 준다 는 등의 설명이 가이드 아저씨의 입에서 나왔습니다.  이게 기독교 맞습니까?)

언제나 신학적 문제는 그리이스(헬라) 철학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서 대두되었습니다.

복음이 유대 밖으로 퍼지기 시작하자 많은 헬라 문화권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고 헬라 철학에 익숙해 있던 그들은 성경의 내용이 이해되지 않을 때 헬라식으로 이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하면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죠.

삼위 일체에 관한 각종 논쟁들도 바로 이런 헬라식 사고로 인해 발생한 것입니다. 삼위일체 논쟁은 AD 325년 니케아에서 열린 종교 회의에서 '예수님이 곧 참 하나님' 이라는 니케아 신조를 채택하면서 그치게 되지만 곧이어 또 다른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삼위일체 논쟁과 니케아 종교회의에 관해 제가 간단히 정리해  둔 글을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새로운 논쟁의 주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완전히 동등한 존재라면 그리스도는 사람인가 그렇지 않은가?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들과 완전히 같은 존재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기독 논쟁이라고 부릅니다.

신자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에 의해 신앙을 이해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동방과 서방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남쪽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시와 북쪽 그리이스를 연결해서 그것을 기준으로 동쪽과 서쪽으로 나눈 것인데 둘 사이에는 우선 언어가 달랐습니다. 동방에서는 헬라어(그리이스어)를, 서방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했고 사람들의 의식 구조와 신앙에 대한 이해도 그러했습니다.

라틴어를 쓰는 로마인들은 로마를 위대한 제국으로 만든 이들이었고 도덕적 훈련이 잘 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권위를 주장했고 준법 정신이 투철했으며 판단 기준이 실제적이었습니다. 반면 그들의 사고는 별로 철학적이지 못했는데 여러 종족들이 하나로 묶여 대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실제적인 능력과 상식이었습니다. 로마인들 중에는 뛰어난 신학자들이 없었고 몇 사람의 로마인 신학자들도 아프리카 출신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가장 기본적인 문제를 죄의 해결로 보았고 구원은 죄의 해결을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선 그리스도 역시 우리와 같은 인간이어야 하고...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시키려면 그리스도 역시 완전한 하나님이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쓰여진 대로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이라고 단순하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방의 헬라 사람들은 대단히 철학적이었습니다. 그들의 사고는 언제나 사변적이었지요. 헬라 철학에 의하면 죄나 악은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선이 결핍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헬라인들에게 구원은 썩지 않는 불변의 몸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인간성 보다는 신성에 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며 동시에 인간임을 철학적으로 설명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보니 거의 모든 이단은 동방에서 나오게 되는데 당시 헬라 사상의 본거지는 알렉산드리아였습니다. 영지주의, 말시온주의, 아리우스 이단, 아폴리나리우스 등 모두가 그리스도에 관해 철학적으로 설명하려다 실패한 경우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예수의 인성을 무시하고 신성을 강조한데 있었고 그들의 생각은 열등한 인간의 성품이 어떻게 눈부시도록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겠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은 동방 지역 중 시리아는 헬라 문화권에 들지만 아랍어를 사용했고 팔레스틴과 가까운 지역적 특수성이 있는 곳이었는데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안디옥 교회가 이런 입장의 대표자였습니다.

기독 논쟁의 발단은 아폴리나우스 라는 사람에서 출발합니다. 그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감독이었는데 예수 안에 하나님과 인간의 두 본성이 같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속성은 부패하기에 예수 안에는 인간의 영혼 대신 로고스가 있다고 보았고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외모만 인간이고 영혼은 하나님인 셈이었지요. 삼위 일체 논쟁 때 아리우스도 비슷한 주장을 했지만 그는 로고스를 하나님의 피조물로 보았고 예수는 하나님도 인간도 아닌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주장은 374년부터 381년 사이에 열린 여러 교회 회의에서 비판받고 정죄되었지만 그것으로 논쟁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여러 가지 주장들이 계속되었고 이것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지역으로 대표된 두 극단으로 발전되었지요. 알렉산드리아 지역은 그리스도의 신성만을 강조해 단성론자들이라고 불리웠고 안디옥 지역은 인성을 강조하다보니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는 결과를 빚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AD 451년 칼케돈에서 신앙 고백이 만들어짐으로써 결국 해결됩니다.

이 시기는 이미 니케아 신조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다" 라는 사실이 확정된 시대였습니다. 단지 누가 인성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른 차이일 뿐이었습니다. 헬라 철학의 본거지 알렉산드리아는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고 안디옥은 인성도 신성만큼 중요시하고 싶었던 것이죠.

알렉산드리아 교회 측은 이단으로 정죄된 아폴리나리우스의 주장에 비교적 동정적이었습니다. 그만큼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죠. 만약 신성과 인성이 합치면 신성만 남을 것이 아닌가?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한다면 당연히 인성은 신성에 가려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표 성품을 신성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이러한 주장은 마리아가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이론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5세기 초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이었던 씨릴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두 성품이 함께 있었지만 너무나 위대한 하나님의 성품에 인성은 가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 만을 보여 주게 되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하나님을 낳은 하나님의 어머니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씨릴의 가르침은 AD 428년 네스토리우스에 의해 반박되게 됩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안디옥 교회에 있다가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감독으로 임명된 사람인데 그는 씨릴의 주장에 반대 의견을 펼쳤습니다. "마리아에게서 난 것은 인간이고 신이 아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서 우리의 주(Lord)로 계신 것이다."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은 예수의 인성은 신성과 연합되어 있긴 하지만 결코 혼합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 그저 '그리스도의 어머니' 일 뿐이라고 주장했지요.

문제는 이 둘 간의 논쟁이 정치적인 싸움으로 번져 갔다는 것입니다. 결국 수완이 좋은 씨릴이 네스토리우스를 궁지로 몰아 넣습니다. AD 430 년에 로마에서 회의가 열리고 네스토리우스가 이단으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네스토리우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체 교회 회의를 소집해서 모든 문제를 다시 밝히자고 말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의 황제는 전체 교회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431년 6월 7일 에베소에 전체 교회 지도자가 모이도록 명령한 것이죠. 알렉산드리아의 씨릴은 해로를 통해 많은 인원과 금은보화를 가지고 나타났으나 네스토리우스를 지지하는 안디옥의 감독 요한은 육로를 통해 여행을 하였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예정일이 보름이나 지나 급한 전갈이 왔는데 곧 도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씨릴은 요한이 도착하기 전에 자기 파들만 가지고 회의를 시작했고 안디옥 파들이 도착하기 4일 전에 회의를 끝냈습니다. 이 회의에서는 네스토리우스는 '새 유다'로 묘사 되어 감독의 직에서 파면될 뿐 아니라 사제들의 회의에서도 제외되어 버립니다.

나중에 도착한 시리아 지방의 감독들 역시 씨릴의 회의에 불참하고 있던 감독들과 별도의 회의를 열고 반대로 씨릴의 감독직을 파면시키고 그의 가르침을 정죄합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는 분열되고 맙니다.

황제는 실망하였고 두 파를 화해시켜 보려고 애를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황제는 씨릴과 네스토리우스 모두를 감금하면서 달래보려고 도 했지요. 결국 네스토리우스는 감독직을 사임하고 수도원으로 돌아갔고 야심가 씨릴은 개선장군으로 함대를 이끌고 알렉산드리아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후 네스토리우스가 보유하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총 주교직은 알렉산드리아파에서 차지하게 되었는데 이 때 화해의 조건들이 제시되었습니다. 안디옥 교좌는 네스토리우스를 포기하기로 했고 알렉산드리아 교좌는 안디옥 측의 인성과 신성을 함께 주장하는 교리를 받아 들인다는 것이 화해의 조건이었습니다. 결국 교회를 분열 시킨 것은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네스토리우스를 향한 씨릴의 미움이었음이 분명해 진 것이죠.

결국 이 기독 논쟁은 켈케돈에서 451년 10월에 모인 종교 회의를 통해 매듭지어 집니다 .이 신조의 뼈대를 잡은 이는 로마의 감독 레오였습니다. 교리는 다음과 같은 율령으로 시작됩니다.

" 본 회의는 이 경륜의 신비를 두 성자로 분리시키는 자를 반대한다. 그리스도의 두 성품이 혼합되거나 뒤섞인 것으로 생각하는 자를 반대한다. 또한 연합 이전에는 두 성품이지만 연합 이후에는 한 성품이라고 꾸며내는 자들도 정죄한다."

칼케돈 신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 분이시요 동일하신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는 두 성품으로 인식되나 혼합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또 분리되거나 분할되지 않는다. 이 연합으로 인해 영성의 차이가 결코 제거되지 않으며 오히려 각 품성의 특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서 한 품격 한 개체로 연합되어 있다."

결국 네스토리우스와 씨릴의 약점이 모두 다 부정되면서 불가사의한 그리스도의 성품이 설명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충분히 완전하게 연합되어 있을까? 이것은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것이고 인간의 죄 지은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 교리는 우리로 하여금 한 없이 겸손하게 만들 뿐입니다.

결국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는 마리아의 신격화를 야기한 씨릴과 같은 입장은 이같이 칼케돈 회의에서 잘못된 것으로 인정되었지만 여전히 교회 안에서는 마리아 숭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기독교 공인 이후 일반 성도들 사이에는 퍼져 있던 사도와 마리아에 대한 비신앙적이면서도 보편적이었던 숭배 관습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헬라 철학을 바탕으로 퍼져 있던 단성론적 기독론으로 인해 오랜 세월동안 교회 안에서 마리아 숭배가 이뤄져 내려 온 것입니다.

이미 4세기 말에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모든 성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가 되어 있었고 '주의 어머니'는 씨릴과 같은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주장에 힘입어 이미 '하나님의 어머니'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죄가 없는 이로서 '천국의 여왕' 이었고 마리아는 사랑과 자비가 한량없는 분으로 하늘을 움직이는 힘이 있어 아들인 그리스도가 들어 주지 않은 부탁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으로 굳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마리아의 집에서 이같이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복 받은 여인임에 분명합니다. 예수를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얘기를 듣고 노래 부르는 마리아의 모습은 겸손하고 슬기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집'에서 볼 수 있었던 건강과 부를 기원하는 샘이나 왼쪽 사진처럼 자신을 소원을 적은 글들을 마리아 집 앞에 잔뜩 매달아 놓은 모습은 마리아의 초상 앞에서 기도하고 소원을 아뢰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과 교차되면서 씁쓸함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저 안타까움과 아쉬움 뿐입니다.

마리아가 존귀하고 복 받은 여인이긴 하지만 그녀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유수한 기독 역사 속에서 어떻게 그녀를 신격화할 수 있었을까요. 심지어는 마리아가 평생 처녀로 살았다고 왜곡해서 묘사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상식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성경에도 예수님의 형제들이 등장하거든요....) 심지어 마리아가 승천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게 지금의 현실입니다. 매년 8월 15일이 마리아 승천일 이라고 하더군요.

사람이 만드는 인습과 규칙은 교회 안에서 조차도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하는 곳이 바로 '마리아의 집' 이였습니다.

마리아의 집의 담장을 보면 아랫쪽은 옛날부터 있었던 벽들이었고 그 위쪽은 그 아래를 기초로 해서 다시 복원한 듯한 벽이었습니다. 이전 벽들을 다 허물지 않고 그 위에 새 벽돌을 쌓아 올림으로써 이전 모습을 볼 수 있게 한 것은 또 하나의 세심한 배려였습니다.

마리아 집에서는 형민이가 줄곧 자는 바람에 좀 더 힝이 들었었고 캠코더 전원이 생각보다 일찍 바닥나는 바람에 비디오 촬영을 충분하게 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오늘 소개한 아데미와 마리아는 반대적인 개념인 것 같으면서도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아데미는 에베소 도시의 우상 신이였지만 마리아는 초기 에베소 교회 사람들의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데미가 말도 안되는 이방 신이었듯이 마리아 역시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 의해 왜곡되어 숭배되고 있는 대상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아데미와 마리아....두 여자의 이름을 뒤로 한 채 우리 일행은 이 두 여인과 아무 상관이 없는 새로운 종교 시설...이슬람 제국인 오스만 터어키 시대의 이슬람 사원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2003.7.6

 

 

참고 서적)  1. 초대 교회사 (헨리 채드윅 저, 서영일 역/ 기독교 문서 선교회)

                 2. 이야기 교회사 (김기홍 교수 저, 두란노)

                 3. 소아시아 7대 교회 (김주찬 저, 옥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