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절두산 순교지

새 봄이 다가옵니다. 우리 다섯 식구는 지난 겨울, 양화진과 절두산 유적지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학회와 처남 가정의 첫 아기 백일도 있고 해서 겸사 겸사 서울에 올라왔는데 주말을 이용해서 전부터 가 보고 싶었던 양화진에 가 보기로 했습니다. 한 번쯤은 와 봤을 곳임에도 이제껏 못 왔던 걸 생각하면.. 이곳을 방문하는 것 자체도 특별한 인도하심이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선화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양화진에서 가까운 지하철 역이 합정역임을 알아냈고 우리는 지하철로 이동했습니다. 아이들은 부산에서는 지하철을 많이 타고 다녔지만 포항에 온 지도 3년이 넘어가기에 신나는 일입니다.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오니까 양화진 외국인 묘역 이라는 안내판이 보였고.. 그 표지를 따라 10분 정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새끼 손가락이 부러졌던 형민이가 열심히 딱정벌레 공을 튀겨 가면서 엄마와 동생을 따라가고 있는 모습입니다. 합정역에서 양화진 선교사 묘역으로 가는 길은 큰 차들이 다니는 강변 도로 입니다. 인적도 드물고 커다란 덤프 트럭이나 공사 차량이 군데군데 세워져 있어 한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걸어가다 저 앞에 보이는 모퉁이를 돌아서니 비석들이 세워진 작은 동산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곳이 선교사 묘역인가보다...' 그런데 정문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작은 빗장을 열고 들어가 보니 제법 넓은 묘역에 많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고 참배객들이 여기 저기 보였습니다.

 말로만 듣던 곳에 도착한 우리는.. 비석에 새겨진 이름을 하나 하나 주의깊게 살펴 보았습니다. 여기는 애비슨 선교사 묘지입니다. 제중원(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를 설립했고 우리나라 근대 의학 발전에 이바지했던 분이죠.

 한국 선교의 개척자, 언더우드 선교사 가족 묘역이고...

토요일 오후인지라 시간이 흐를수록 참배객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   

 양화진을 풀이하면 버들꽃나루 라는 말입니다. 이곳은 깊은 강물로 인해 큰 선박들이 하역할 수 있는 곳이었고 제물포로 들어오는 전국 각지의 생산물을 배분하는 허브 항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천혜의 입지 조건으로 인해 한성을 넘보는 외적들의 표적이 되는 국방의 취약지이도 했습니다. 임진왜란, 병조호란 이후 1754년, 영조 30년에 양화진의 전략적 중대성이 부각되어 군진이 설치되었습니다.

 1866년 8월에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을 응징하고자 프랑스 군함 세척이  양화진까지 침범했다가 같은 해 10월 강화도에서 패퇴하는 병인양요가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대원군의 척화 의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는 극심해졌습니다. 대원군은 양이에게 더렵혀진 한강을 사교들의 피로 씻는다고 하면서 양화진 앞 강물을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들였습니다.

 그 후 대원군의 섭정을 종식시키고 고종 친정체제를 구축한 민비와 외척들은 쇄국의 빗장을 벗기고 서구열강들과 국교를 수립했습니다. 이러한 지각 변동을 틈타 개신교 선교사들도 조선의 복음화를 목표로 조선에 들어오게 됩니다.

아펜젤러 선교사 묘비 뒤쪽에 새겨진 글입니다.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했을 때 올렸다는 첫 기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 곳에 왔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미국 북감리회가 파송한 아펜젤러 선교사의 묘입니다.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그는, 목포 앞바다의 전복된 배에서 한국 소녀를 구하려다가 익사했습니다.

 '조선회상' 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셔우드 홀의 묘

불과 만 25세인 루비 켄드릭의 묘비에 새겨진 글은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립니다.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아침 일찍 엄마, 아빠를 따라 이 묘지에 온 아이들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지만..우리 나라 사람도 아닌 이들이 왜 이곳에 묻혀 있는지 듣게 되었습니다.  

많은 무덤이 1살도 안 되는 아이들의 무덤입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운동으로 이어진 원산 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던 하디 선교사.

 조선 사람보다 이곳을 더 사랑해서 적극적으로 독립 운동을 펼쳤던 헐버트 선교사의 무덤입니다.

이곳 양화진에 선교사 묘역이 조성된 계기는 헤론 선교사의 죽음과 관련이 있습니다.

갑신정변(1984) 당시 민영익을 구사일생으로 살려낸 선교사이자 의사인 알렌(H.N.Allen) 덕분에 선교사들과 왕실 사이에 밀접한 관련이 맺어지고 이는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설립으로 이어졌습니다. 금교령으로 인해 복음전파가 허락되지 않았으므로 선교사들은 주로 서구의 의료와 교육, 자선 사업을 통해 봉건적인 조선사회에 침투하고자 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의 반기독교적 정서의 영향으로 선교사들은 직접적인 개인전도보다는 사회제도 전반에 걸친 간접적인 선교를 모색했고 이는 교회사가 추후 민족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합니다.

알렌에 이어서 광혜원 원장이 된 헤론(J.W.Heron)은 전염병에 걸린 환자들을 돌보던 중 자신도 이질에 걸려 1890년 7월 26일, 34세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당시 헤론의 시신을 어디에 매장할 지가 화급한 문제로 제기되었죠. 삼복더위 중에 시신을 당시 유일하게 외국인 묘지로 사용되던 제물포까지 옮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유족과 선교사들은 미국 공사 허드(H.Heard) 를 통해 한성 가까운 곳을 매장지로 해줄 것을 요구했고.. 때 마침 조선은 통상지역 안에 외국인의 묘지를 무상으로 조성해야 한다는 수호통상조약을 영국과 체결하고 있었는데 미국 공사 허드는 최혜국 조관을 근거로 헤론의 매장지를 한성 가까운 곳에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조섭교섭통성사무 독판 민종묵과의 급박한 서신 왕래 끝에 양화진이 매장지로 정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낙엽이 뒹구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서 말없이 새겨진 묘비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아이들도 저마다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하나 하나 읽었죠.

 막내 성은이도 글씨를 읽을 줄 알기에... 이 돌비석에 새겨진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이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양화진 홀이 세워져서 방문객들에게 더 많은 얘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곳은 박물관을 연상시키는 깔끔한 디자인의 안내판, 영상, 시각 자료를 갖추고 있습니다. 주제별로 선교 초기 상황을 설명하고, 선교사들이 한국을 찾게 된 배경과 그 당시 어떤 준비들이 이뤄지고 있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 줍니다.

 최초의 한글 성경

 언더우드 선교사가 한국을 소개한 책.

 이 밖에도 한국을 소개하거나 한국에서의 선교 경험담을 기록한 많은 책들이 보관,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의 활동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해 놓기도 했습니다.

1832년 귀츨라프 목사가 동인도 회사 배를 타고 충청도 고대도에 정박하여 성경을 나누어 준 일을 가장 먼저 기술하고 있네요. 그 후 1866년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와 척화비 건립이 이어집니다.

 1882년 만주에서 출간된 최초의 한글 성경(누가+요한, 로스 역), 1883년 견미사절단 민영익과 가우처 목사의 만남, 1884년 일본에서의 한한 성경, 마가복음 번역에 이어.. 드디어 알렌 선교사가 서울에 도착하게 됩니다. 알렌은 조선땅에 들어 온 최초의 선교사지요. (물론 어떤 의미에선 토마스 선교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셔우드 홀의 캐나다로 돌아가 발간했던 회고록도 보이고...  

 양화진 홀 출구 옆에는 어느 선교사의 비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옆에 조그맣게 한글로 번역되어 있었죠.

 이국 만리 조선 땅에서 먼저 떠나 보낸 아내를 추모하는 남편의 애닳은 맘이 파문처럼 밀려 오는 것 같습니다.  

한강변의 찬 바람을 맞으며 몇 시간을 걸어 다니느라 우리 모두 지쳤지만.. 꼭 방문해야 할 곳을 봤기에 뿌듯한 맘이 앞섰습니다. 사실 우리 아이들도 충진 어린이 선교학교 훈련을 받으면서 선교지나 선교사들의 얘기를 많이 듣긴 했지만... 이렇게 우리 나라에 와서 선교하다 죽은 선교사들의 무덤을 본 건 처음이니까요.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는 100주년 기념관도 세워져 있었는데 문은 굳게 닫겨 있었습니다. 아마도 사전 연락 후 방문해야 하나 봅니다.

 한국 기독교 100주년 선교 기념관

선교사 묘역을 둘러 보다가 인근의 절두산 유적지 안내문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지쳐서 그냥 돌아갈까도 생각해 봤지만... 언제 다시 이곳에 올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으니 절두산 순교지도 돌아보는게 좋을 것 같아 가 보기로 했습니다.

화장실 찾는다고 잠시 들른 절두산 주차장 벽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이곳의 위치를 비교적 잘 표현해 주고 있는 것 같아서 찰칵~~했죠.  서울 외국인 묘지공원 이 바로 양화진 선교사 묘역이고 절두봉 유적이라고 적힌 글자도 보입니다. 한강이 흐르고 양화대교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입니다.

절두산 유적지에 대해 설명하는 안내문인데 많이 훼손되어 있었씁니다. 이곳에 적힌 대로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은 우리 조상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며 개화기의 혼란 속에 지식인과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역사의 현장으로 보존 가치가 큰 곳인데 안내문 관리는 좀 안타깝네요.

 절두산 유적지 입구에는 이렇게 건물(박물관)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양화진 홀에 막 들어갔다가 나왔는지라... 이건 그냥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아마 많은 문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을 겁니다.

 1866년 봄, 병인 대박해로 인해 처형당한 순교자 중에는 프랑스 성직자 9명이 포함되어 있었씁니다. 1866년 9월 25일 프랑스 함대가 군함 2척을 이끌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서울의 문턱인 이곳 양화진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는 한 편, 양이에 의해 더럽혀진 국토를 그들을 끌어들인 천주교도의 피로 씻어야 한다고 해서 더욱 심한 박해를 가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수천의 신자들의 목이 베어져 한강으로 던져졌으며 이후부터 목을 자른 산이라 하여 절두산이라 불리워지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기록 미비로 40명의 순교자만 이름을 알 수 있다고 하는데...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기념관(박물관과 성당)을 건립하고 1968년에 성당 지하에 병인 24위를 포함해 순교자 유해 안치실을 설치했습니다.   

절두산 유적지로 가는 길입니다.

 순교자를 위한 기념상입니다. 그 옆에 성당이 있는데 그만 사진을 찍질 못했네요.

1972년에 대지 1,381평을 4,000평으로 확장 개발했는데 같은 해, 애국 선열조상 건립위원회에서 김대건 신부를 조국 근대화의 선구자로 받들어 여기에 동상을 세웠다고 합니다. 보이시죠?

 김대건 신부 동상

 성당 앞을 지나가니 많은 촛불이 밝혀 놓고 기도하는 신도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토요일 오후, 이곳을 찾아 간절하게 기도하는 모습이 맘 속 깊이 다가왔습니다.

기도하는 곳을 지나가니 흥선대원군이 전국 각지에 세웠던 척화비가 보입니다.  비석 표면에 “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주문()을 큰 글자로 새기고, “ (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작은 글자로 새겼습니다. 이 비는 1866년(고종 3)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를 치른 뒤 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세운 것입니다.

역사의 유물이 되어 버린 척화비 옆에 형민이와 시은이가 서 있습니다. 그런데..시은이 뒤쪽으로 낯익은 건물이 하나 보이죠?

국회 의사당 건물입니다. 절두산에서 한강 뒤로 보이는 국회 의사당을 배경으로 남매가 기념 촬영을 했습니다.

 이렇게 양화진 선교사 묘역과 절두산 순교지를 둘러 보고 왔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찬 바람 맞고 다니느라 애들 표정이 말이 아니죠?  진작 한 번은 왔어야 할 곳을 이렇게 다녀 오니 오래된 숙제를 마친 기쁨도 있지만... 글쎄요.. 이곳에서 본 수 많은 비석과 이름들은 제게 또 다른 숙제를 안겨 주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구요.  200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