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은이가 자라고 있어요 (3개월이 되는 시은이)

한국에서 돌아온 지 벌써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국에서는 쌀쌀하고도 따스한 봄이 시작되었겠지만 이곳은 아직도 영하 10도에서 꿈틀거리는 겨울입니다. 그래도 간간히 오후가 되면 서쪽 창 밖에 걸어둔 온도계가 햇빛을 받아 영상으로 올라가기도 하는데 최근 낮이 길어지면서부터 햇볕은 더욱 위력을 발휘해 수개월 동안 얼어 붙은 있던 눈덩어리들이 녹이고 있습니다. 아파트 지붕과 구석진 곳에 있던 눈덩어리들이 아래로 툭 떨어질 때면 인근 상가 지붕에 떨어지면서 "쿵...쿵..." 하고 큰 소리를 내는데 처음에는 낯선 소리에 놀라던 형민이도 이젠 제법 익숙해졌는지 재미있어 합니다.

바로 지난 달 오늘.... 두 달도 채 안된 시은이와 아직도 엄마만 찾는 형민이를 데리고 어떻게 그 먼 곳으로 가겠냐고 걱정하시던 부모님들을 뒤로한 채 씩씩하게 비행기에 올랐었지요. 아스타나의 집으로 돌아와보니 모든 게 그대로 였습니다. 물론 몇 가지 사라진 것들이 있긴 했었는데...주전자 두 개와 냄비 하나 였습니다. 혼자서 100일동안 지낸 형민 아빠가 불에 올려 두고 깜빡 잊는 바람에 까맣게 타 버린 탓입니다. 

안방에 있는 형민이 장난감 통에도 전화기, 강아지 인형, 빙글빙글 돌아가는 고양이 그리고 자동차...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습니다. 알마티 공항에 돌아 왔던 날.... "엄마... 왕할머니집에 가자..." 하면서 울어대던 형민이가 다시 정착하는데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도 바로 이 장난감 통이었답니다.  이 장난감들이 잊었던 옛 일들을 생각나게 해 줬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가끔 "형민아 할머니집에 갈까?" 하고 물으면 "아니... 아빠(랑) 집에..."하면서 이곳에 있겠다고 합니다.

그동안 시은이의 이야기가 뜸 했지요. 형민이가 뱃속에서부터 받았던 관심에 비하면 시은이는 너무 무관심한 속에 있었던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 시은이나 형민이 모두 우리에겐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입니다.

자식 수가 많아질 수록 아기 기르는게 수월해진다는 사람들의 말처럼 시은이를 기르는 일은 형민이 때보다 훨씬 쉬운 것 같습니다.

물론 시은이도 잠투정이 심하고 아직도 밤에 3시간 간격으로 우유를 먹으려고 하는 어린 아기지만 그런 아이의 요구에 내가 좀 더 여유있게 대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둘째 기르기가 더욱 쉽게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아빠가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어주고 엄마가 휴식이 필요할 때면 아기들을 전담하고 있기 때문에 아빠 덕도 많이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잠투정하는 시은이 재우기는 아빠가 더 잘 한답니다....

한국을 떠날 때 시은이는 생후 한 달 반...이제 막 옹알이를 시작할 때였지요. 그런 시은이가 요즘은 제법 소리를 냅니다. 눈을 맞추고 상대방이 뭐라고 이야기를 해 주면 자기도 열심히 대답을 하지요. 목을 완전히 가누게 되어 엄마가 업을 수도 있게 됐고 손,발을 내의 밖으로 내 줘야 할 말큼 많이 자랐답니다.

2개월 반이 지나는 시은이는 요즘 3시간 반 간격으로 130cc 정도 먹습니다. 트럼을 얼마나 잘 하는지(갓난아기때부터) 우유 먹은 뒤 토하는 일은 거의 없지요. 최근에는 침을 흘리는 시기가 되었는지 가끔 거품같은 걸 입술에 묻히기도 하고 자기 손을 입 안으로 열심히 가져갑니다.

광등이(천장에 있는 형광등)는 형민이 때와 마찬가지로 시은이에게도 흥미로운 존재입니다. 한참동안 쳐다보면서 미소를 보내기도 하는데 우유를 먹을 때도 엄마를 안 보고 광등이를 보면서 먹는답니다.

며칠전부터는 앞으로 본 채 안기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세를 취하면 목 돌리기가 훨씬 자유스러워지고 보고 싶은 것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되는데...더욱 두리번 거리면서 주변 사물들을 자세히 바라보고 있습니다. 가끔씩 아빠 옷깃이 입에 닿으면 열심히 혀를 내밀어 탐색하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보다 건조한 기후 때문에 가습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작년 12월 말에 보낸 소포가 제 때 도착하는 바람에 가습기 두 대를 방과 거실에서 동시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건조한 때문인지 시은이는 가끔 물을 엄청 먹습니다. 목이 말라서 가끔 울기도 하는데 그럴 때는 우유가 아니라 물을 줘야합니다. 물을 50 cc 이상 먹기도 하지요.

아이를 기를 때 제일 힘든 것 중 하나가 바로 아기를 잠 재우는 문제지요. 아기를 가진 엄마라면 한 1년동안은 잠투정하는 아기를 재우느라 매일 '잠과의 전쟁'을 치뤄야만 합니다.  형민이의 경우 잠투정이 심해 보통 1시간 이상은 안고 흔들어야 잠이 들고 잠이 든 뒤에도 자주 깨는 바람에 한 밤중에 한 두 번씩 다시 업어 재우기도 했었는데 거기에 비하면 시은이는 너무 수월합니다.

물론 잠투정을 좀 하긴 하지만 아빠가 노리개 젖꼭지를 물려 아빠 만의 노하우를 사용해 안아주면 30분 이내에 잠이 들지요. 요즘 시은이는 10시쯤 잠이 들어 밤 동안 두세 번 우유를 먹고 아침 7시 반이나 8시에 정확하게 일어나는 스케줄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는 시은이의 예방 접종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올 때 일 년간 맞아야 할 백신을 보건소에서 받아 왔었는데 DTP 와 소아마비 1차 접종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과 전문의인 아빠와 대학 병원 근무 경력 3년의 간호사 엄마가 서로 미루다 결국 아빠가 놔 주기로 했습니다. 방긋방긋 웃던 시은이도 허벅지에 바늘이 들어오는 순간 " 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지요. 옆에서 긴장 속에 지켜보던 형민이에게는 "자꾸만 바지에 쉬-하면 형민이도 주사 맞아야 돼!"하고 효과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좋은 매체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 왼쪽 사진이 바로 시은이에게 예방 접종을 하던 날 찍은 사진입니다.

아빠가 시은이의 오른쪽 허벅지에 주사를 놓은 모습인데 이걸 지켜 보는 형민이도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있지요?)

시은이 옆에서 형민이는 오빠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엄마가 아기를 돌보고 있으면 투정을 부리거나 의기소침해지는 아기였는데... 이곳에 와서는 완전히 바뀌었답니다. 한국에 계신 어른들이 보시면 놀라실꺼에요.

형민이는 쉬-하러 혼자 갑니다. 화장실에서도 발 뒷꿈치를 들고... 혹은 쉬야병(소변받는 병)을 혼자 잡고 하는데... 이 때마다 자기를 가리키며 "오빠, 오빠" 라고 의기 양양하게 얘기한답니다. 자기는 이제 오빠가 되었기 때문에 혼자서도 잘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지요.

손 씻는 것도 혼자서(물론 이 때는 옷을 다 적시지만) ...밥도 혼자 먹습니다. 원래 식성이 좋던 형민이였지만 한국에 있는 동안 군것질에 심취하는 바람에 밥을 제대로 먹질 않아 부모님들이 걱정을 하시곤 했었는데 이곳에 와서는 다시 예전처럼 뭐든 잘 먹는 아이가 되었습니다. 고사리나물, 취나물은 물론, 깻잎김치, 명란 젖(다 한국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 같은 것을 보면 "와....맛있다" 고 환성을 지르면서 먹는답니다.

시은이에게 형민이는 좋은 오빠입니다. 시은이의 울음소리가 날 때 제일 먼저 달려가는 사람이 바로 형민입니다. 가끔은 하던 일을 멈출 수 없어 "형민아 시은이한테 가 볼래?" 하고 시키기도 하는데 그럴 때면 "왜?... 왜?.." (왜 울어?) 하며 달려갑니다. 어떨 때는 형민이가 달려간 뒤 시은이의 울음이 멎기도 하는데 형민이가 뚝딱이 인형이나 노래하는 고양이를 시은이 옆에 둬서 시은이의 시선을 끌거나 입에서 빠진 노리개 젖꼭지를 다시 물려 주기 때문입니다.

시은이 목욕시간에도 형민이가 자기가 직접 샴푸를 눌러주고 목욕 후 크림을 바를 때에도 늘 형민이가 발라주지요. 행동이 얼마나 빠른지 엄마가 크림 가지러 가기 전에 미리 자기 손에 다 묻혀와서 아기 뺨, 코, 이마, 턱에 골고루 발라줍니다.

물론 그동안 안하던 행동을 하는 것도 있는데.... 젖병에다가 물을 담아서 시은이처럼 빨고 다니는 것, 시은이 입에 침이 보글보글 맺혀있으면 자기도 따라하는 것, 시은이 옆에 나란히 누워 자기도 발운동 시켜달라는 것... 그리고 뚝딱이 인형을 엄마가 시은이를 돌보는 것처럼 흉내 내면서 가지고 노는 것 등입니다.

자거나 밥먹을 때 외에는 늘 노래를 입에 달고 있는 형민이를 조용히 시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겨우 시은이를 재워서 눕혔을 때 형민이가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자동차를 타고 와 문턱에 쾅하고 부딪힐 때면 아기가 다시 깰까봐 가슴이 덜컹 내려 앉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빠인 형민이를 조용히 시키기 보다는 시은이가 그 소리에 익숙해지는게 더 빠를 것 같아 요즘은 그냥 내 버려 둡니다.

이렇게 두 아이와 지내다보면 하루가 금방입니다. 아직은 날씨가 추워서 어린 시은이를 데리고 나가는게 쉽지 않기에 전 늘 집을 지키고 있고 먹거리 제공은 아빠가 합니다. 엄마가 주문하기도하고 아빠가 맛있는 것들을 발견해 오기도 하는데 아빠가 외출할 때는 형민이가 자주 따라 나섭니다. 자동차 조수석에 앉아 아빠와 함께 도시를 누비고 다니는데...장보러 가는 것 뿐 아니라 여기 저기 다른 집을 방문할 때도 아빠와 함께 합니다. 주차장에 차 넣으러 갈 때도 그렇구요...어제는 아빠의 교회 진료에도 함께 했었는데 이렇게 형민이가 나가고 나면 시은이와 엄마가 조용한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도 시은이는 아빠 품에 안겨 세상구경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뒤집기를 못하기 때문에 낮에는 대부분 소파에 누워 지내는데 팔, 다리만 버둥거릴 뿐 누워있던 위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시은이를 보면서 어서 빨리 형민이만큼 자라서 제 발로 걸어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 갓난아기때의 형민이가 그리운 것 처럼 지금은 힘들지만 언젠가 시은이의 갓난아이 울음소리를 그리워 할 때가 있을 것 같아 지금의 시은이를 더 많이 품어 줘야겠다고 매일 다짐한답니다.

많은 사람들이 손 탄다고 아이를 자주 안지 마라고 말들 하지만 시은이는 눈을 뜨고 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나 아빠 품에 안겨 지내고 있습니다.

우리 부부의 성격상 아이가 우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사람에게 안기고 싶어하는 아기의 요구에 잘 반응해주는 게 아기의 정서에 좋을 것 같아서입니다.

우리 품에 안겨서 여기저기 거닐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자극을 받길 기대하는 맘도 가지고 있지요.

곧 시은이가 백일을 맞게 됩니다. 오는 4월 7일이 백일인데 아스타나에 살고 계시는 한인들을 초대해서 즐거움을 나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시은이는 요즘 엄마나 아빠 얼굴이 눈 앞에 나타나면 반갑다는 듯 활짝 웃습니다. 티없이 맑은 아기의 미소를 대하고 있으면 아기에 대한 사랑이 샘 솟듯 올라 오면서 한 없이 행복해지는 게 부모의 마음이지요....하지만 또 한 편으로는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가는 것에 대한 신비스런 경외감을 아기를 통해 느끼기도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시작하지만 지혜가 자라고 감정이 성숙해지면서 의지적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안 뒤 평생 동안 자신의 소명 아래에서 열심히 살아갈 그 사람의 삶은 참으로 귀한 것임을 몇 번씩 느끼게 되지요.

지난 3개월 동안 시은이를 자라게 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 펼쳐질 삶 역시 당신의 눈길 안에서 멀어지지 않게 해 주시길 오늘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2003.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