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와 배추를 나르는 남자.....

일년 전 까작스딴 알마티에 처음 도착했을 때 놀란 것 중 한 가지가 이곳에 와 있는 한국인 남편들의 가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분명히 한국인 남편들인데...알마티에서 사는 젊은 남편들은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편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알마티에는 한국 사람들이 상당히 많아서 늘 크고 작은 모임이 끊이지 않습니다. 이 곳에 가면 저처럼 아기들을 데리고 오는 젊은 엄마들도 자주 만나게 되고 오랜 만에 수다를 떨면서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빠지지 않는 얘기가 먹거리 얘기입니다. 지금쯤 한국은 뭐가 맛있을 때라든지.....한국에서는 흔한 건데 여기는 너무 비싸다는 등...낯선 곳에서 살림하는 어려움이 공유되는 곳이기도 하지요...간혹 새로 입수된 먹거리 정보들도 이곳에서 알려지는데...예를 들면, 한국 물건만 취급하는 상점인 '두레'에 새로 고구마가 들어왔다든지 바자르(시장)에 배추가 나왔다든지..... 뭐 그런 것들입니다.

그런데 제게 신기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대화에 남자들이 늘 참여한다는 사실 이었습니다. 이곳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것 중 하나인 배추의 가격, 나오는 시기, 구할 수 있는 장소와 같이 꽤 전문적(?)인 정보들까지도 이곳에 사는 남편들은 꿰뚫고 있었고...한국식 먹거리에 관한 한 모르는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고등어 파는 곳, 맛있는 햄이나 참치의 이름 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용품의 정보까지도 주부만큼이나 자세히 알고 있는 이곳 남편들을 보면서 전 너무나 놀랐습니다. 성훈이 오빠도 한국에서 저녁 설거지는 도맡아서 해 주었고 시간이 날 때면 함께 장을 보기도 하는 가정적인 남편이지만 이곳에 사는 남편들처럼 각종 야채나 생선의 가격까지 외고 있지는 않는데....이곳의 남편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까 놀라움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가정적이고 자상한 남편들만 이곳에 모였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스타나로 옮겨 온 지 10개월이 지났습니다. 알마티보다는 먹거리가 다양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적응하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푸른 채소에 대한 아쉬움은 지울 수 없습니다. 지금쯤 알마티에는 애호박이랑 배추, 흰색의 무 등이 제법 나오고 있겠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콩나물은 못 먹어본 지 10달이 지났구요. 나사렛 교회에 다니는 한 할머니가 가끔 두부를 만들어 팔곤 했는데 봄이 되면서 다차(구 소련시절에 정부에서 도시 외곽에 지어준 별장으로 여름에 각종 먹거리를 마련하여 겨울 식량을 삼을 수 있도록 작은 텃밭이 딸린 시골 집)로 일하러 가셔서 두부를 만들 수 없게 된 이후로 다시 우리의 식탁은 빈약해졌습니다.

아무리 육류 값과 쌀 값이 한국에 비해 싸다고 하지만...이렇게 철따라 나는 채소를 먹을 수 없다보니...매 끼니 식탁을 준비하는 주부의 입장은 답답하고 걱정일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가끔 한국에서 보내 주는 말린 명태나 미역, 춘장, 카레 같은 것으로 입맛을 달래 보지만 한국 사람인지라...지난 봄에는 쑥국이나 냉이국이 그렇게 먹고 싶었고...신선한 봄배추로 담은 새 김치도 먹고 싶고... 콩나물 국도 시원하게 끓여 먹고 싶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상하지요? 여긴 쑥이 나질 않습니다....아무리 들판을 뒤져도 쑥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심강으로 들어가는 길에 서 있는 오빠와 형민이..뒤에 보이는 빨간 번호판이 우리 차입니다.

그러던 중...두부를 만들 줄 아는 고려인 아주머니 한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도시 변두리에 식당을 하고 계시는 분인데....두부 뿐 아니라...남쪽에서 가지고 온 찹쌀로 떡도 만들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이 반가운 소식을 듣고...아스타나에 살고 있는 한국인(모두 23명)들은 이 아주머니가 만드는 두부 맛을 일단 보기로 하고 단체 주문을 해 봤는데 그런대로 맛있어서 요즘 일 주일에  한번꼴로 주문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한국의 보통 두부 크기보다 좀 큰 것 한 개에 200텡게(약 2000원) 인데.. 이 두부를 주문하고 배달하는 일을 성훈이 오빠가 도맡아서 하고 있습니다. (성훈이 오빠 말로는 '두부 사역'이라고 합니다.) 가장 젊은 남편인 오빠가 외딴 곳에 있는 그 식당 까지 통역 아주머니와 함께 차를 몰고 가서...필요한 갯수 만큼 주문을 한 뒤... 약속한 시간에 다시 집에서 30분 정도 걸리는 그 곳까지 차를 몰고 가서 두부를 찾아 ...주문하신 선교사님들께는 갖다 드리는 일인데...두부 한 개의 크기도 커서 14개 정도의 두부를 한꺼번에 가지고 오르면...커다란 플라스틱 통에다가 하나씩 담은 뒤...무거운 통을 차에 싣고 다니며 나눠 드려야 하기에...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두부가 도착한 날은 두부 된장 찌게에 계란 입힌 두부 부침을 올릴 수 있어서 식탁이 풍성해 집니다. 형민이가 두 번째로 좋아하는 게 바로 이 두부인데(첫째는 햄이지요) 뜨거운 두부를 조그맣게 잘라서 접시에 놔 주면 순식간에 두부가 사라질 정도로 손이 빨리 움직입니다. .....양 손을 사용해서 마구 입 안으로 두부를 집어 넣는 형민이를 보면서 우린 말리지도 못하고 그저 웃기만 합니다. 어쨋든 두부가 도착하면 마치 큰 걱정을 덜은 듯 주부인 저의 마음이 든든하지요.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오빠가 고맙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김치없이 살 수 없습니다. 지난 겨울에 110 kg의 김장 덕을 톡톡히 봤는데... 그나마 있는 몇가지 야채도 나오지 않거나 아주 비싸지는 긴 겨울을 이 김장 김치 덕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김치 찌게, 김치국, 김치 전.... 참 맛있게 먹었답니다. 그런데 이 김치가 떨어진 지도 두달이 다 되어갑니다. 다른 선교사님들 가정들도 김치가 다 떨어졌기에...모두들 어떻게 배추를 구할까 하고 이야기를 나눠 보지만 별 뾰족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알마티에 단체주문을 하자고 했지만 이틀은 족히 걸릴 먼거리를 누가 가지고 올 것이며 또 그 무거운 것을 맡아서 보내 줄 사람도 마땅치 않습니다. 김치 대신 양배추 김치도 담고 오이 소박이도 담아 먹곤 하는데 아무래도 김치만 못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부를 주문하고 돌아온 오빠의 손에 푸른 야채가 한봉지 들려 있었습니다. '두부 아줌마 집 밭에 이게 있더라.... 이거 배추 맞지?' 하면서 건네준 건.... 정말 배추였습니다. 통배추는 아니고 봄에 나오는 배추인데 봄에는 이게 더 맛있지요.  두부를 만드는 식당 옆에 있는 조그만 텃밭에 붉은 무와 배추 씨를 뿌리고 조금씩 뽑아 가며 기르고 계시는가 봅니다. 이걸 본 오빠가 좀 줄 수 있느냐고 물어서 가져온 모양인데...적어도 지난 9개월 간 한 번도 배추를 보지 못했던지라.....정말 감격스러웠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얼른 김치를 담궜습니다.

오빠가 구해 온 배추를 보며 기뻐하는 내 모습

벌레가 많이 먹어서 구멍이 숭숭 난 배추였지만 정말 맛있었습니다. 이후로 오빠는 두부를 찾으러 갔다 올 때마다 이 배추를 가져옵니다. 어떤 날은 돈을 주고 사 오기도 하고 어떤 날은 그냥 얻어오기도 하는데..어제는 다른 선교사님들의 요청으로 배달도 나갔습니다.

사실 두부를 만드는 고려인 아주머니 집 옆의 텃밭은 넓지도 않고 배추는 아주 적은 양이 심어져 있습니다. 아마 할머니가 반찬 삼아 재배하시는 것 같은데..오빠가 이걸 보고 조금씩 얻어 오는 것이라 작은 양이지만....이걸 몇 등분해서 선교사님께 나누어 드리기도 했습니다. 이 귀한 배추를 맛 볼 수 있는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먹거리 배달 뿐 아니라...최근 오빠는 여러 가지 일로 분주하게 다니고 있습니다. 한 여름이 시작되면서 따가와진 햇살을 피하기 위해 자동차 유리에 썬팅을 하려고 정비소에 매일 다니고 있는데...이곳에서는 자동차에 뭔가 새로운 작업이나 수리를 하려면 각자가 부품을 사서.... 기술자를 찾아가서..... 예약를 하고.... 작업에 들어가야하기에 이렇게 여러 번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그나마도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간단한 일이라도 서너번 움직여야만 해결되지요..

게다가....3개월밖에 살지 않은 우리 집도 다시 이사를 해야할 사정이 생겼는데...집 주인이 알마티로 전근 되는 바람에...알마티에 새 집을 사려고 우리가 세 들어와 있는 이 아파트를 팔겠다고 연락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원래 계약서에는 12월말 까지 전세를 하게 되어 있는데...집 주인은 계약 사항을 무시하고 집을 비워 달라고 한 것이죠...계약서 대로 하자고 말할 수도 있지만....그러면 또 겨울에 집을 찾아 나서야 할 것 같아..다시 아파트를 보러 다니고 있습니다. 더운 햇볕에...새 아파트 보러 다니는 것도 쉽지 않아서... 어렵게 적당한 곳을 찾아서 들어가기로  약속 했었지만 집 주인이 세를 놓지 않겠다고 번복하는 바람에 다시 다른 곳을 알아 보고 있는 등.....여러 가지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제가 입덧과 감기로 시장이나 수퍼에 일절 다니지 못한 이후로 장보는 일도 성훈이 오빠가 해 오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람스또르에 깜발라(납세미)가 있더라....'하면서 사오기도 하고 '오렌지 쥬스 먹고 싶다고 했지?'하면서 종류별로 쥬스를 사 오기도 합니다. 이렇게 바쁘게 다니다 집에 돌아와서도..... 같이 놀자고 달려 드는 형민이를 외면할 수 없어 늘 형민이를 안고 지내는 오빠는 요즘 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늘 오빠에게 미안하면서도 고맙고 또 오빠가 움직이지 않으면 안되기에 의지하게 됩니다.

아침...햇살을 맞으며 부엌 한 쪽편에 체리를 들고 서 있는 형민이...

양 손의 먹거리를 담은 비닐 봉지를 들고 들어 오는 오빠를 보면서...문득 지난해에 보았던 가정적인 남편들의 모습이 오빠의 뒷모습에서 느껴졌습니다.

이제 오빠도 배추와 생선의 가격이며 각종 정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아스타나의 먹거리 정보통이 되어있습니다.

까작스딴에서 살아간지 1년...처음 알마티에 와서 부럽게 느껴졌던...'가정적'인 남편이 내 옆에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한국적인 환경이 먼 외국 생활을 하는 데에는 남편의 도움이 절대적입니다. 먹거리를 구하고...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데에는 남편과 아내의 구분이 없고...함께 힙을 합쳐서 해결해야 하지요..

한국적 상황이 아니라....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까작스딴이였기에...이렇게 아름다운 추억 거리가 생기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했던 까작스딴 생활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글쎄요...한국에 가면 오빠가 두부와 배추를 나를 필요가 없는 편리하고 풍족한 생활을 하겠지만.... 지금의 생활이 더 행복하게 느껴지는 건...제 욕심 때문일까요?    2002.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