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학교 6주차(4/2-7)

한 번의 외박은 지친 맘에 휴식과 여유를 불어 넣어 주고 군의학교 생활에 활기찬 변화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다른 공중보건의 요원들과 달리 국제 협력의사로 분류되는 우리(760명 중 8명)들은 군의학교에서 이수하는 학과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고(단지 임관에 필요할 뿐이기에...) 짜투리 시간을 내어 틈틈이 하는 외국어 회화, 컴퓨터 공부 등이 더 필요하다.

외박을 마치고 귀대하면서 EBS 라디오 영어회화 교재 4월호 2권을 구입했고 아침 저녁으로 라디오를 들으며 영어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물론 훈육장교 몰래....)

아침 7:20-40(저녁 7:00-20) 가 되면 EBS 라디오에서 [Easy English] 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그 뒤 [Power English]가 이어진다. 이 두 프로그램의 방송 교재를 가지고 들어왔기에 간단하고도 중욯나 실용영어 표현들을 중얼거리고 따라 하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었고 군대에서 자율적으로 뭔가 하고 있다는 해방감에 만족할 수 있었다.

[알기 쉬운 스페인어 회화] 란 책과 테이프도 구입해서 새로운 스페인어 알파벳과 발음을 익히려고 수업시간 사이의 빈 시간을 이용해 틈틈이 보곤 했다. 서한사전(서반아어 사전)과 고등학교 스페인어 자습서도 구입해 내무반 관물대 안에 넣어 두고 낯선 스페인어와 친해지려고 애를 썼다.

취침 시간은 10시....취침 나팔이 분 후에도 이불 속에서 [오성식 생활영어]를 들으며 간단한 실용회화를 받아 들였다. 누구의 말대로....바벨탑 사건 이후 하나님이 일부러 혼잡하게 하신 다른 민족의 언어를 새로 배운다는 건 그 분의 뜻을 거슬리 정도의 어려움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선한 목적을 가지고 있기에 용기를 잃지 않을 수 있다.

여전히 규칙과 통일을 강조하는 생활이지만 이제 끝이 보이기에 참을 수 있고 처음 입소할 때보다 한결 따뜻해진 기후 덕분에 전보다 지내기 훨씬 좋다.

식목일에는 육군체력검사 기준에 맞추어 1.5Km 달리기 측정이 있었는데 나처럼 만 30세 이전의 후보생은 7분 23초 내에 완주해야 한다. 군의학교 입소한 뒤 이 사실을 듣고 1.5Km가 표시된 운동장 주변 도로를 두 번 달려 보았는데 대강 측정한 기록은 7분 정도였고 그 이후론 달리지 않았고 체육관에서 농구를 하며 땀을 흘렸었다. 아마 별로 빠르지 않았던 나의 기록을 다시 확인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지 싶다.  

원래 하나님은 내게 노루같이 빠른 발을 주셨는데...어느 새 무거워진 몸을 의식하게 되었으니...안타까울 뿐이다.

그 후 5주가 흘렀고 군사 훈련을 거치며 체력도 향상되었을 법하지만 다시 뛰어 보진 않았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오전...보도 블록에 소대별로 앉아 1소대부터 출발하는 1.5Km 달리기를 관전하게 되었다. 한 소대가 약 45명이고 달리기 측정은 소대 단위로 출발하게 되어서 1,2,3 소대가 출발하는 장면과 영예의 1등이 골인점으로 뛰어 들어오는 걸 앉아서 볼 수도 있었다.  '내가 저렇게 빨리 달릴 수 있을까...사실 전에는 여기 있는 누구보다 빠른 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 저기에 'Rabbit"으로 불리는 6분대의 선수들이 즐비했고 출발 전부터 누군가가 나보다 빨리 달린다는 사실로 인해 오히려 위축되는 걸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달리기 좋은 날씨 아래에서 중학교 들어갈 때 육상 특기생으로 갈 수도 있었던 나의 옛 능력을 발휘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운동화 끈을 질끈 매고 굳은 마음을 가진 채 출발선에 섰다.

긴장하면 근육은 긴장되고 스피드가 생길 수 없기에 여유를 잃지 않고 몸을 풀려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침내 출발을 알리는 훈육장교의 손이 내려 갔고 첫 100m 정도를 제법 빠른 속도로 달려 2위 그룹에 속할 수 있었다. 발도 가벼웠고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기에 중압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식적으로 육상부 시절 익혔던 호흡을 하고 있었다. 한 번 들이 마셔서 네 번에 나누어 숨을 내 뱉는 방식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을 느끼며 앞으로 향했다. 한 바퀴를 돌았을 때...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고 넘치는 자신감으로 1등을 앞질러 곡선 주로로 접어 들었다.

달리기는 외로운 싸움...아무도 없지만 그 옛날 외로웠던 경주들을 생각하며 바로 앞만 바라보면서 달렸다. 2바퀴를 200m 정도 앞둘 무렵...뒤에서 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가까워지기도 했지만 속도를 더 올릴 수 있었고 골인 지점에 앉아 있는 5소대원들의 박수 소리를 들으며 결승점을 일등으로 통과했다.

"5분 30초...."

훈육장교의 외침이 들렸고 내가 해냈다는 기쁨과 감격이 밀려왔다. 지난 6주 동안의 훈련은 심폐능력과 체력을 예전에 가까울 정도로 회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감사합니다.'

"후보생은 빠른데....담배 안 피우지?.." 놀랐다는 듯이 묻는 훈육장교의 물음에 담배는 피우지 않고 매일 연습한 것도 아님을 얘기하고 숨을 돌이켰다.

이 일후 4소대의 동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달라졌다고 본다. 이전부터 뚜렷한 가치관을 가진 크리스챤이고 행정업무도 맡아 보는 성실한 이미지로만 나를 인식하고 있다가 달리기도 잘하는 친구라는 걸 새로 알게 된 것이다. 남자들만 살아가는 군대에선 인정받는다는 건 자랑스러운 일이고 특히 육체적 능력은 부러움을 살 수 있는 항목이기도 하다.

내가 독실한 기독교임을 아는 동료들에겐 "예수 믿으라...."고 던지는 말보다는... 6주 동안 내무반 생활을 함께 하며 맺는 관계 속에서 내가 보여주는 삶과 그리스도인으로 풍기는 느낌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난 잘 알고 있다.  1.5Km 달리기를 통해 그리스도인은 '약하고 힘없는 성격 좋은 사람들' 이 아니라 '성실하고 운동도 잘 하는 주도권을 가진 건전한 가치관의 소유자' 이기도 함을 조금이나마 심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뿌듯했다.

물론 내가 하는 모든 활동 속에서 최고가 되고 모범이 될 수 있는 건 아니지만...1.5Km 달리기의 소대 1위가 예수밖에 모르는 과테말라 국제협력의사 임을 알릴 수 있었던 건...하나님이 행하신 또 다른 활동이라고 믿는다.

주변 사람들의 칭찬을 들으며 어깨가 으쓱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조심스러워졌다. 웬지 조심하지 않으면 터질지도 모르는 지뢰지대의 한 가운데 서 있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내가 노루처럼 빨리 달릴 수 있는 건....나의 창조자이신 그 분 때문이기에...그 분께 감사를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