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의학교 5주차(32사단 2주차...3/26-30)

이번 주가 지나면 꿈에도 그리던 첫 외박을 나가게 된다. 이젠 한 주만 참으면 된다고 몇 번이고 되새겨 보지만 달력에 X표 치는 마음은 세월이 더디감을 탓하게 만든다.(우리 내무반 달력에 X 표시하는 역할을 내가 자청했고, 시간이 더 안 간다고 만류하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계속 하고 있다.)

26,27일은 기초 유격 A,B 코스로 일정이 잡혀 있다. 이틀 내내 산 속을 달리며 각종 장애물 극복 훈련을 받았는데 어린 시절 평균대 위를 걸어 다니고 징검 다리를 건너고 뜀틀을 뛰어 넘던 능력이 다시 필요했던 시간이었고 특히 몸의 균형을 잡는 능력이 중요했다.

각 코스마다 장애물 통과를 위해 대기하는 올빼미(유격 훈련 중에는 우리를 올빼미 라고 부른다. 왜 올빼미라고 부르는지는 교관도 잘 모른다고 했다.) 들은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유격 체조를 하거나 군가를 불러야 했는데  A코스 때는 조교들에게 새 군가를 가르쳐 달라고 구슬려서 멋진 군가도 배우고 유격체조도 피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기도 했다. '용사의 향수','구보가','겨레여 영원하여라','훈련소의 밤' 등은 군의학교에서는 배우지 않았던 것들인데 '용사의 향수'를 부르는 조교의 눈에 눈물이 맺히는 걸 보면서 정말 몇 년이 지난 군인들인양 그 노래의 향취에 빠져들면서 열심히 군가를 불렀다.

A코스에는 '타이어 통과하기' 가 있는데 방글라데시로 떠날 예정인 외과 협력의사 한 분은 통과하다가 왼쪽 4번째 손가락 뼈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고 B코스의 줄타기를 하다가 어떤 후보생은 우측손의 인대가 붙는 뼈가 떨어져 나가는 부상을 입어야 하는 등 크고 작은 부상이 끊이지 않았다. 물웅덩이에 빠질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는 위험이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는 마치 '명랑 운동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도 있는 훈련 과정이었다.

28일 수요일....

자고 있어나 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뒤덮였다. 이젠 봄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인데도 눈 앞에 펼쳐진 전경은 군의학교에 입소하기 전에 보았던 한 겨울 설악산 설경과 흡사한 풍경이었다. 오전화생방 수업은 하얗게 눈 덮인 도로와 산길을 밟으며 올라가야 했는데 눈이 내려 앉은 나뭇가지를 흔들며 눈벼락을 즐기는 한 겨울의 정취를 맘껏 느낄 수 있었다.

오후에는 수류탄 실습...물론 진짜 수류탄은 아니다. 3년 전인가...이 곳에서 수류탄 실습하다가 교관과 교육생이 사망하는 폭발사고가 있었다는 얘기에 섬찍한 생각이 들었다. 수류탄의 '수'는 손을 의미하고 '류'는 석류를 의미한다고 한다. 수류탄 내부에는 폭약과 함께 정육면체의 철조각들이 마치 석류알처럼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29일 목요일....

32사단에서 가지는 마지막 훈련인 '전술적 행군'이 있는 날이다. 원래 우리 행군은 50Km가 계획되었지만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28Km로 거리가 단축되었고 군장도 줄어 들었다. 하지만 아침 8시 반에 출발해서 밤 8시경에 막사에 도착하는 쉽지 않은 일정이라 모두가 걱정하는 눈치였다.

출발 전 식사하러 막사 위로 올라갔을 때 난데없는 폭설이 30분동안 내리는 바람에 혹시 행군이 취소되지 않을까 기대도 해 보았지만 출발을 위해 연병장에 모였을 때는 파란 하늘이 머리 위에 있었다.

우린 길 게 두 줄로 열을 지어 사격장 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올라갔고 동원 예비군 아저씨들의 열렬한 응원을 등에 엎고 32사 철책을 통과한 뒤 부대 뒤로 이어진 산 속으로 진입했다. 드문드문 민가가 보였지만 사람은 볼 수 없었고 흰 개, 검은 닭, 누런 소 들만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넘어 가는 산은 지금까지 흔히 보아 온 흑색이나 갈색 토양을 가진 기름진 흙이 아니라 먼지 날리는 붉은 황토와 발에 차이는 굵은 돌로 이뤄진 척박한 곳이었다. 행군하면서 여기 돌들을 다 주웠다가 공사장에 건축자재로 넘기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잠시 걸어가자 우리네 산들이 으례히 그렇듯이 낮은 소나무와 향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아침의 맑은 공기 속에서 일찍 내린 눈으로 인해 하얗게 빛나는 낯 익은 충청도의 산골로 변해 갔다.

생각보다 자주 쉬지 않았는데 1시간에 10분 정도였고, 처음 5Km가 산길이었고 그 후로는 촌락을 지나 논밭을 가로 지르는 농로였다. 8Km쯤 갔을 때 시간은 아직 11시였다. 넓은 터가 나왔고 인솔 장교는 우릴 세웠고 그 곳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알고 보니 이 곳이 점심 식사 장소로 예정된 곳인데 우리가 너무 빨리 걷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이 곳에 도달했고 점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8Km가 이것밖에 안돼?" 누군가의 자신감 넘치는 말을 들으며 쉬고 있을 때 얼굴에 찬 게 느껴졌다.

"어...이게 뭐지...." 바람이 불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온도도 점점 떨어지고 눈도 점점 굵어지면서 우린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야...이러다가 정말 민주지산 되는 거 아냐?"

4월 1일인데도 폭설과 강우가 겹치는 바람에 공주 근처 민주 지산에서 행군 중인 특전대 6명이 사망한 비극의 영화를 봤기에 모두들 눈이 계속되면행군을 계속하기 힘들거라며 기대반 우려반으로 눈을 반겼다.

"야..저기 봐....저기 눈이 몰려 온다."

누군가의 외침 때문에 뒤 쪽을 돌아보니 먼 산 아래에서 검은 구름과 함께 새하얀 눈보라 덩어리가 마구 흔들리면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저게 여길 들어오면 ...오늘 행군은 끝이다."

아니나 다를까..잠시 후 정말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두가 우의를 걸치기 시작했고 훈육장교들도 웅성거렸다. 하지만 우린 신이 났다. '눈아..펑펑 내려라..' 가져 온 일회용 사진기로 기념 촬영도 하고 민주 지산 얘기도 하면서 즐거운 한 때를 보냈다.

20분이 넘도록 눈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자 훈육대장은 기상 악화로 부대에 복귀할 것을 명령했고 2시간이면 부대로 돌아갈 거라는 얘기를 듣고 부대로 가는 길로 모두 향했다.

온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불과 1시간 전만 해도 따뜻한 봄날이었는데....새하얀 산하를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눈보라 속 행군을 시작했을 때 거짓말처럼 눈이 멎고 햇볕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흰 들판은 다시 흙빛으로 변했고 산은 푸른색을 되찾았다. 군장과 우의 위에는 눈 녹은 물이 고였고 도로 위로 갑자기 나온 햇살에 눈이 녹으면서 생긴 김이 무럭무럭 피어 올랐다.

'이러다가 다시 정상 행군 되는 거 아냐...'

약간의 염려가 생길 정도로 1시간 가량 걸었을 때...정말 신기하게도 어디서 나타났는지...눈 구름이 몰려 오면서 다시 기온이 떨어지고 눈보라가 밀어 닥쳤다. 고개도 제대로 못 들고 또 다시 하얗게 변한 들판 사이를 걸어야 했다. 변심할 수 있는 훈육 대장의 맘을 붙잡기라도 하듯이 눈은 계속 내렸다.

30분이 자났을까...다시 눈이 그치고 거짓말처럼 새파란 봄하늘과 아지랑이가 피어 오르는 들판이 펼쳐졌다. 이렇게 한 겨울과 따뜻한 봄 날씨가 앞 다투어 교차하기를 네 차례... 젖은 군장과 군복으로 지친 우린..점심도 거르고 오후 3시 경 32사단 정문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걸었다. 눈보라 속에서 기관병들이 나눠 주는 빵과 음료수 만을 먹었을 뿐이었다.

32 사단에 들어 와 신교대까지 오르는 비탈길에서 발바닥이 아프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만약 당초 계획대로 밤 8시까지 걸었다면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들어 보니 20Km 정도 걸었다고 한다. 50Km 행군하는 현역 병사들은 정말 고생하겠다는 측은한 생각이 들고 눈구름을 보내셔서 체력을 유지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는 맘이 절로 우러 나오는 저녁 시간이었다.

30일 금요일...

32 사단은 떠나는 날이다. 아침부터 또 눈이 내리기 시작해서 오전 내내 퍼붓고 있다. 부대 안의 개나리 꽃들은 이제 꽃망울을 터뜨리려고 하는데 연일 내리는 눈보라에 개나리 꽃을 32사단에서 제대로 보긴 힘들 것 같다. 모레가 4월인데....

오후 1시에 퇴교식을 마치고 타고 왔던 관광 버스에 몸을 싣고 군의학교로 돌아왔다. 32 사단으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이제 5주가 마치고 외박을 하루 앞둔 오늘의 버스 여행은 기쁨과 희망에 넘친다. 곧 사랑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겠지....

자주색의 나즈막한 지붕을 가진 예쁜 건물들이 잘 배열된 군의학교로 돌아와 지난 2주동안 지켜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모든 것이 내게 유익한 경험이 되었으리라 여기면서도 호텔 같은 군의학교로 무사히 돌아오게 하심이 너무 기뻤고... 잊지 못할 32사단이지만 다시 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은 떨쳐 버릴 수 없었다.

하나님...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