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안의 블루

주전자 뚜껑이 들썩들썩거리고 물이 팔팔 끓는 소리가 들립니다.  방금 냉동실에서 꺼낸 보리차를 한 웅큼 쥐어 주전자 속으로 던졌습니다. 흰 물거품 속으로 회전하며 빨려 들어가는 검은 보리 알갱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옵니다.

선화가 없는 학장동 아파트....무주 공산으로 텅 비어 보입니다. 방금 처가집에서 돌아 와서 텅 빈 아파트의 불을 밝혔습니다. 안 주인 없는 아파트지만....전 욕조에 더운 물을 틀고....걸레를 빨아 이틀동안 쌓였을 안방의 먼지를 닦아 내고 두꺼운 이부자리를 폈습니다. 베개는 하나 만 꺼내고........이제 나흘째....이틀에 한 번씩 이 집에 들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은 웬지 머리가 아프고 눈이 아픈 감기 몸살 기운이 있어....이미 타이레놀을 먹었고....이 곳에서 보리차를 뜨겁게 끓여 마실 생각입니다. 방을 다 닦고 샤워를 한 뒤...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잘 생각입니다.  아무래도 처가집과 학장동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움직이는 것이 무리가 되나 봅니다.

처가집에 있는 선화와 형민이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간혹 방 안 온도가 올라가서인지..형민이 얼굴에 작은 발진이 생기기도 하지만 실내 온도가 좀 떨어지면 이내 사라지더군요...선화는 하루종일 잠옷 차림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형민이가 옆에 있기 때문에 아기 본다고 푹 쉬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산모를 편히 쉬게 하려면 아기를 떼어 놓아야 할 것 같은데...그게 쉬운 일이 아니지요....

사랑해서 결혼하고.....결혼 1주년도 안 되어...아기까지 출산하고 보니....이 아파트에서 불과 며칠 전까지 아웅다웅거리며 지내던 일들이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인 것 처럼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칭얼거리는 형민이를 안고 젖을 물리는 선화를 보면....그저 최근의 일들이 꿈 속에서 일어난 것 같이 느껴질 뿐이죠...

오늘 처가집으로 향할 때...몸이 안 좋았습니다. 몸살 기운도 몰려 오고....몸도 떨리고.....하지만 선화와 아기가 있기에 꼭 가야만 했지요.....어렵게 어렵게 향했습니다....전국체전으로 인한 홀짝제 시행 때문에 차를 사용하지도 못하고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선화는 결혼 후 저의 습관이나 잦은 병치레의 형태를 잘 알고 있지요.  안방으로... 얼굴빛이 형편없이 변해 버린 제가 들어오자...이내 알아챘습니다. "눈이 아파요?....머리도?" 형민이는 자지도 않고 눈을 뜨고 이리 저리 보고 있더군요...전 그 옆에 누웠습니다. 따뜻한 방바닥에 등을 대고 누우니....온 몸의 긴장이 눈녹듯이 사라지고 노곤해졌습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눈을 떴지요....그런데 이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선화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지 뭡니까? 훌쩍이는 소리에  깜짝 놀라 앉아 왜 그러느냐고 물었지요. "아니....그냥....여자는 뭐...이럴 수도 있어요..."  


선화와 사귀기 전...그러니까 연애하기 전에는 선화가 눈물이 많은 줄 몰랐습니다.  그 전에 가졌던 선화의 이미지는 대전 엑스포 자원 봉사를 지원했던 진취적인 면과 말씨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눈물이 많았습니다. 그 중 ....몇 가지 특이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선화가 근무하는 병동에 젊은 유방암 환자가 입원했었습니다...선화는 그 환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그 환자의 초기 증세가 자신의 증세와 아주 똑같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화는 그 때....한 쪽 가슴에 작은 결절이 만져져 걱정을 하고 있었다는군요..  그 날 저녁에 집에 바래다 주기 위해 나온 저와 만난 뒤 선화 집 앞에서 헤어질 때....그냥 펑펑 울더군요....전 제가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왜 그런지......마냥 답답했었습니다.....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이 유방암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해....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울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형민이가 출생한 다음 날.... 함께 공부하는 다른 4년차들도 있고 해서 공부방에 잠시 갔다가 다시 병실로 들어왔는데....선화가 담요를 끌어 당기며....눈가를 붉히며 울고 있는 걸 목격했습니다. 전.....그 때도 놀랐죠... 혹시 제가 뭐 섭섭하게 한 게 있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인즉....화장실에 갔다 와서 침대에 누우려는데 갑자가 한기가 느껴지더랍니다. 그래서 황급히 옆에 있던 보온물병의 물을 컵에 붓고 마시려는데....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는 겁니다.

유방암 사건은 그렇다 치더라도 보온물병 사건은 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눈물이 그렇게도 흐를 수 있을까? 여자는 그럴 수 있는 걸까?

몸살 기운으로 선화 옆에 누웠을 때 선화는 계속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런 저런 얘기하면서 선화옆에 누워 있는 절 보며 선화는 그냥 그저...눈물만 주르르 흘렸습니다. 오빠가 불쌍하냐고 물어 보면....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고......아무래도 선화가 돌봐줘야 할 오빠가....이리 저리 다니며 앓는 것이 안스러워서 그러는 것 같은데.......여자는 혼자 살 수 있어도 남자는 혼자 사는 것이 불쌍하다고 늘....말해오던 선화였습니다.

선화는 '베이비 블루스'라고 얘기하더군요...눈물을 흘리는 일이 요즘 자주 일어나는 것에 대해.........

출산 후 산모는 감정 변화를 겪게 됩니다. 출산 후 3일에서 5일 사이 산모는 가벼운 우울증이나 정신적 긴장을 경험하기도 하고 특별한 이유없이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는데 이를 서양에서 흔히 베이비 블루스(baby blues)라고 부르는데 출산과 관련해 호르몬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되고 대체로 짧은 기간 동안 지속된다고 합니다.

산후 우울증은 좀 다릅니다. 출산 직후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베이블 블루스와 달리 산후 우울증은 아기가 태어난 지 1년 사이에 언제든지 생길 수 있다고 합니다. 산모의 10%가 이를 경험하는데 많은 엄마들이 아기와 집에 있게 되는 처음 몇 주 동안 특히 고립감과 외로움을 느낀다는 거지요.....산후 우울증의 주요 증상은 눈물이 많고 메사에 예민해지고....깊이 낙담하거나 우울하고....집중을 못하고..시간 관념이 없고....강박 관념에 사로잡혀 자살을 생각하고...비현실적 느낌을 가진다고 합니다.

선화는 걱정어린 눈빛으로 눈물을 쳐다 보는 제게 "베이비 블루스가 좀 오래 가는 것 같네요..."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 전 그게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날 518호 실에서 보온병의 물을 마시며 눈물을 흘렸던 것은 호르몬 변화에 의한 베이비 블루스라고 하더라도...

출산 후 일주일이 지난 오늘.....힘들게 아기와 자신을 찾아 온 남편을 보며 흘렸던 눈물은 ....  우리의 사랑과 신뢰가 이번 출산을 통해 더욱 깊어진 증거라고 느꼈습니다. 사실...전....연애할 때....누군가에게서 "당신,  그 여자를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 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말할까 ? 라고 스스로 자문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쓸데없는 생각이지만)   당연히 "예.."라고 얘기할 수 있었고 그래서 결혼했지만.....그 당시에는 .....(너무 비현실적 생각이지만).......영화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리는 뜨거운 감정을 가지기엔 우리가 서로 공유했던 경험이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93년부터 알고 지냈어도.....

그런데 오늘....머리가 너무 아파  따뜻한 방바닥에 누웠다가.... 지친 날 향해....눈물 글썽이는 선화를 보며.....너무나 깊어진 우리의 관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스치는 생각이 그것이었습니다.....아! 이제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 그토록 불타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얘기할 수 있다고.......

우린...... 함께 방에 누워 급하게 돌아갔던 그 당시 분만실 안의 상황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선화는 그 때 급하게 코에 착용했던 산소 연결관에서 고무 냄새가 심하게 났었다는 얘기도 하더군요.. 그러면서 두 사람이 직면했던 위기의 순간 순간들을 떠 올려 보았습니다. 그 순간들이 서로를 더 의지하고 믿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경험들입니다.

선화의 눈에서는 계속 눈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베이비 블루스 때문에 눈물이 더 많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빨리 선화가 산후조리를 잘 마치고 이 학장동 아파트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형민이가 생겼기에...이전과는 다르겠지만....이전보다 더 깊은 사랑과 신뢰가 우리 가정을 지켜 줄 걸 확신합니다.  이제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마셔야겠습니다. 선화처럼 베이비 블루스 탓에 .....따뜻한 물을 마시면 눈물이 주르르 흐르지는 못하지만....이 보리차를 마시면... 마음 한 구석에서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릴 것 같습니다.

선화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