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

온 몸을 파고 드는 알싸한 감촉의 바람... 하늘 아래 광활한 땅에 마치 고성능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 같은 냉랭한 기운... 13층 아파트에서 창문을 열고 아직 푸른 기운이 남아 있는 산을 받아 들이면 어디서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찬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 계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전에는 이런 기후 조건을 만나면 추석이 생각나고 잘 익은 사과...배를 떠 올렸지만 올해부터는 달라졌습니다. 작년 10월 16일....가을의 한복판에서 우린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이젠 겨울...봄....여름을 보내고 다시 가을을 맞게 되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간 뒤부터 어느새 찾아 든.... 아침,저녁으로 대하는 찬 바람을 느끼면서 작년 가을, 우리가 새로 시작한 그 때의 기분이 생각나고 떠 올려집니다. 마치 초등학교 2학년땐가.....여름 방학을 시작한 날에 할머니를 따라 얼음을 사러 가면서 박하사탕을 먹었던 기억 이후로 지금도 박하사탕을 먹기만 하면 여름방학과 푸른 잎의 버드나무가 생각나는 내가 가진 독특한 조건 반사들처럼.....

새로 병원에 나가 공부를 시작한 지 3일째.... 이제 만삭의 선화를 집에 두고 9시경 출근했다가 저녁 9시 반이 넘어서야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제 잠을 깬 지 얼마되지 않아 함께 식탁에 앉아 먹는 아침 식사 시간이 유일하게 함께 식사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새벽별 모임이 있었고 공부가 마친 뒤....모임에 잠깐 들렀다가 온다고 밤 10시가 되서야 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초인종을 누르고 선화가 문을 열고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기다립니다.(양해해 주세요...아기가 태어날 때까지만 오빠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여보.... 뭐 그렇게 불러야 하겠죠)

이윽고 문이 열리고.....말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는 선화의 눈빛이 보입니다. 제가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오빠가 왔네...."라고 말을 꺼냈더니..선화는 ."30분 늦었네요...어디서 뭐했어요..기다렸어요....."  라며 빨리 와 줬으면 하는 바램을 드러내 보입니다. "이건 바가지다......"라고 얘기하면서도 배가 너무 불러서 앉았다가 일어나는데도 힘들어하는 선화 곁에 더 많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선화는 요즘 DDR에 빠져 있습니다. 임신 37주에 들어서는 만삭의 산모가 웬 DDR이냐고 그러시겠죠.....그런데 그게 실제 상황입니다. 지난 번 여름 성경학교 때 서부산교회 유년주일학교에서 DDR 경연대회를 열었는데 그 때 사용한 DDR 발판이나 가스펠 송으로 되어 있는 프로그램을 구할 수가 있었지요.

결혼하기 전부터 선화는 DDR을 좋아 했습니다. 잘하지는 않지만 시내에 쭉 늘어 서 있는 DDR 기계를 보면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면서 "한 번 해 볼까요?..." 라고 얘기했고 실제로 몇 번 뛰어 본 적도 있습니다. 사실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는 DDR을 겨냥해 '지옥불에 들어가 뜨거워 하는 모양을 본 뜬 것'이라며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규정하는 목사님도 계시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이번에 구한 DDR은 가스펠송에 박자를 맞추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제 "나의 발은 춤을 추며 나의 손은 손뼉치며...." 가스펠 송에 맞춰 실제로 발을 구르고 즐거워 할 수 있는 거지요....소리엘, 박종호 외 많은 가스펠 곡들이 수록되어 있는데.... 글쎄요.....세상 문화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무조건 배척하든지 ....아니면 그 곳에 들어가 우리 것으로 만들어 가든지....둘 중에 하나인데.....이런 가스펠 DDR을 보면서 크리스챤 문화를 만들어 가려는 작은 시도로 볼 수 있어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싶습니다.

오늘도 선화는 박종호의 '지명' 멜로디에 맞춰 뛰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때도 있는데....그걸 보면....의사로서 조마조마한 생각도 들지만 마냥 즐거워 하는 선화의 모습이 좋아 그대로 두기로 했습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DDR을 하면서 38주 정도까지 하체를 강화하는 훈련을 해야겠습니다. 사실 임산부는 분만할 때를 대비해 마지막 달까지 꾸준히 운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초산인 경우 진통하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분만시에 제대로 힘을 못 주게 되지요.... 계단도 오르 내리고 누워 있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선화 .....지금은 DDR 발판에서 뛰고 있습니다. 그래도 DDR은 좀 심하다 싶고.....앞으로 열흘 정도 후에는 금할 생각입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선화는 제 옆에서 아기의 정서를 위한다면서 '아가서'를 읽고 있습니다. 아가서를 읽으면 아기가 어떤 정서를 가지는지 모르겠지만....태교를 위해서 얼마 전까지는 '잠언'을 읽더니....어쨋든 열심입니다.  며칠 전 주일 저녁 TV에서 영어를 잘 구사하는 4살 짜리 아이가 개그맨들과 영어 능력을 겨루는 프로그램을 방영했는데....그걸 본 선화는 우리 아기도 어릴 때부터 현지인 교사가 있는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할 지....고민하더군요. 어머니의 교육열은 아기가 나오기 전부터 시작되나 봅니다.

저희 아파트는 개별 난방을 택하고 있기에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방에 불을 때고(?) 있습니다. 추위를 유달리 잘 타는 선화라.....보일러를 가동하고 있지요...밤에 누워 자면서도 옆으로 새우잠을 자다가.....배가 너무 부르니까 "배가 땡긴다..."면서 반대쪽으로 돌아 눕고.....얼마있다가 다시 바로 눕고...옆으로 눕고....이러다가 지쳐 자는 선화가 요즘은 안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래도 선화는 아기가 그렇게 기다려지나 봅니다. 병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하루 종일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했다고 얘기하면서 뱃 속에서 놀고 있는 아기가 빨리 밖으로 나와서 함께 지내면 좋겠다고 얘기합니다. 환하게 웃는 아기를 방에 눕혀 놓고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면서 함께 부대끼게 될 날이 기다려지나 봅니다.

지난 토요일....세간에 회자되고 있는 '공동경비구역'을 보러 선화와 바깥 나들이를 했습니다. (선화와 함께 본 영화는 여기 에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 아기가 배 안에 있는 게 낫다는 먼저 결혼한 선배들의 얘기대로 아기가 배 밖으로 나오면 부부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힘들다고 하는데 ..... 그래도 지금은.....아기가 태어나더라도 좋은 영화를 자주 함께 보러 나오고 싶습니다.

9시까지 공부하게 되어 있어서.....저녁 먹는 시간에 미리 표를 끊어 두었다가 ....공부가 마치는대로 선화와 만나 함께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공동 경비 구역.....이 영화에 대해 얘기를 좀 할까요...아직 안 보신 분들이 있을 테니까....줄거리는 얘기할 수 없고....한 마디로 가슴 아픈 영화였습니다. 전 영화가 마치고 사람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갈 때....그냥 일어서기엔 너무 안타깝고 속이 쓰린 제 맘을 주워 담느라 힘이 들었습니다.  쉬리와 마찬가지로 남북문제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본 영화였습니다. 쉬리는 소재만 남북문제지.....거의 할리우드 영화와 다름이 없지요. 하지만 공동 경비구역은 민족의 아픔을 그대로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남과 북의 병사들이 닭싸움도 하고 공기 놀이도 해가며 우정을 쌓아 가는 장면을 보며 웃었던 우린 ... 서로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기가 막힌 경비 초소 안에서의 장면과 자신 때문에 북한군 병사가 죽었다는 말에 그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속죄의 죽음을 선택한 병사의 죽음을 보며 밀려오는 처절한 민족애와 분단의 슬픔을 지울 수 없습니다......잔잔히 들리는 김광석의 노래처럼....너무나 슬프게 느껴졌습니다. 공동 경비 구역은 제게는 결코 재미있는 영화가 될 수 없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영화였고 ..... 민족에 대한 사랑, 대한민국과 북한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느끼게 한 영화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오는 길에서.....선화와 나라와 민족에 대해 얘기했습니다. 이 땅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100년. 역사상 유래 없는 기독교 부흥....그리고 부흥 뒤에 찾아 온거품과 껍데기의 시대....이제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무엇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좋은 영화였습니다. 제게는 무척 슬프고도 가슴 아픈 영화였지만.....

올림픽 열기가 한창입니다. 어느 때보다 내 나라 대한민국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말하는 요즘입니다. 2000년 9월..... 결혼식을 올렸던 그 차고 선선한 가을 공기 아래에서 선화와 전........DDR을 뛰면서 공동경비구역과 올림픽 속에서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