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업 첫 날 (Day 1)

사상 유례없는 전공의 전면 파업의 첫 날이 밝았습니다.  어젯밤 인터넷을 통해 국내 주요 일간지의 기사를 검색하고 내용을 살펴 보다 새벽 3시가 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습니다. 참 웃기는 일이지요...이렇게 전국의 의사들이 파업을 하게 되면 당연히 국민들의 비판 여론이 들끓을 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혹시나 우리 심정을 대변해 주는 기사가 있는가 행여나 하는 맘으로 찾게 되다니.....

내과 전공의들은 아침 7시 반까지 부산대학병원 본관 10층 내과 의사실로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각자가 담당하고 있는 환자들은 병원에 남아 계실 교수님께 인계가 되어졌고 어제 오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자정까지 이루어졌습니다.

부산대학병원의 340여명의 전공의들이 떠난 뒤 입원하고 있는 환자들은 교수님들이 맡아 돌보시게 됩니다.. 나이 드신 교수님께서 힘들고 험한 일을 하실 걸 생각하면 참 '이래선 안되는데....'하고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교수님이나 저희들이나 모두 '이제는 이대로는 안된다' 라는 하나의 공감대를 가지고 있기에 흰 머리가 보이는 나이 드신 교수님들은 저희들에게 '.....몸조심해라' 라고 당부하시면서 친히 힘든 야간 응급실 당직과 야간 병동 호출을 받고 매일 2-3명씩 꼭 사망하는 대학병원의 병동을 지키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중환자실과 응급실, 병동 환자들을 전공의 하나 없이 교수님 두 세 분만이 맡아 지킨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일입니다. 아마 2-3일 뒤까지 이 사태가 계속되면 견디기 힘드시겠지요....

아침 7시 반까지 늦지 않고 가기 위해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물만 한 잔 마시고 아파트 주차장으로 나갔습니다. 밖에는 장마 전선이 북상하고 있는 탓인지 않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더군요..공기도 무겁게 느껴지는 아침입니다. 저의 엑셀 승용차에 시동을 걸고 구덕 터널을 넘어 대학병원으로 가는 길에서 라디오를 틀었습니다. 7시 뉴스의 의료계 파업 소식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역시나 톱 뉴스로 나오더군요....하지만 뉴스의 내용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역시나 .....의료계 파업으로 인해 병원에 환자가 밀린다. 환자들이 진료 가능한 병원을 찾다가 위독해지고 사망하기도 했다 (사실 그 내용을 들어보면 의료진이 없어서 변을 당했다고 보기에는 힘듭니다. 70세 할아버지도 그렇고 신생아 사망도 그렇습니다. 정상 근무 중이라도 그런 상태라면 사망할 수도 있는 일이지요...)는 내용이 계속 반복되더군요...그리고 꼭 나오는 협박조의 뉴스......'구속한다...징계한다. 입영시킨다......'이제는 이런 내용을 들으면 정말 정부의 위기 관리 능력이 바닥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이런 기사들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퍼 붓는 역할만 하는데...그걸 잘 모르나 봅니다.

차를 병원 주차장에 대고 본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TV 중계차가 와 있는 걸 보고 본관 현관쪽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YTN 중계차가 와 있더군요...아마 병원을 취재하기 위해 왔나 봅니다. 현관문의 유리에는 빽빽하게 대한 전공의 협의회, 병원협회, 대학병원장 명의의 포스터와 자보가 붙어 있고......이걸 보니....드디어 터질 게 터졌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현관문에서 10층 간호사 한분을 만났습니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어디 안 가셨어요?"      "아....예. 오늘 아침 7시반에 의국에서 일단 전체 모임을 가지기로 했거든요..."."  "그런데....저희들은 이제 어떡해요?"  ".....잘 해결되겠지요...수고해주셔야겠네요..."

모두들 서로를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가는 길에서 이비인후과 교수님이 엘리베이터를 타셨습니다. 전공의인 우리를 보시고 "어디 다니지 말고...몸 조심해라...나도 병원에서 근무하지만 넥타이도 안 매고 나왔다....." 라고 얘기하셨습니다. 덩치가 우람한 교수님의 걱정해 주시는 몇 마디에 힘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교수님들께서도 18일 발표된 전국의과대학 교수협의회의 결의에 따라 22일까지 정부의 성의 있는 조치가 없을 때는 교수직을 사퇴하고 전공의와 의대생을 포함한 의협회원들에게 법적 제재가 가해질 경우 교수직을 사퇴한다는 방침을 세워 놓고 계십니다.

의국에 들어서자 벌써 많은 전공의들이 와 있었습니다. 우린 곧 모여서 향후 행동 지침 등에 대한 전달 사항을 듣고 조별로 흩어졌습니다. 이제 환자와는 잠시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환자는 담당의가 당분간 자신을 못 보게 될 것 같다고 얘기하니까 "선생님 수고하시고 조심하세요.....그리고 빨리 돌아오세요..."라고 얘기했다는군요.

4년차인 저희들은 비상 연락망을 확인한 뒤 집에 가 있기로 했습니다. 22일 전체 집회를 가지기로 하고....혹시나 병원에 얼쩡거리다 환자 보호자들에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고......쫒기다시피 병원을 빠져 나옵니다. 의국과 공부방은 폐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떠났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 신문을 3부 샀습니다. 동아일보,조선일보,한국일보....저희 집에 중앙일보가 들어오니까 4종류나 되는 셈입니다. 이번 사태 관련 기사를 스크랩하기 위해서입니다. 전 약 4개월 전부터 의약분업 관련 기사부터 시작해서 계속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있습니다. 이제 스크랩 자료철도 두툼해졌습니다.

보통 때 같으면 집에서 쉰다고 하면 참 즐거웠을 텐데....오늘은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고 답답합니다. 공부를 하려고 책을 가지고 왔지만 책상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각 시간대별로 라디오를 틀어 뉴스를 듣지만 늘 같은 얘기만 반복되고.....마치 지명 수배자가 된 듯한 이 묘한 기분이 나로 하여금 또다른 분노가 생기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뉴스에서는 연일 사태의 본질에 대해 침착하게 보도하지 못하고 여론에 떠밀려 의사들을 비난하기만 하고 있기에 선화는 졸지에 '범죄자의 아내' 처럼 되었습니다. 우리는 함께 아침식사를 하고 가져온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고 우울한 맘을 씻어 내기 위해 아파트 밖으로 나가 수박을 한 덩이 사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오후 내내 집 안에 있기만 했습니다. 행여나 연락이 올 지 모르기 때문에 호출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습니다.

선화는 이번 주부터 시작된 파이디온 주최의 여름 성경학교 교사 강습회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어젯 밤에도 강습회가 열 리는 개금교회까지 가서 선화를 태워서 집으로 돌아 왔는데 이렇게 병원에서 근무하지 않다보니 오늘은 강습회에 데려다 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선화는 강습회 내용이 너무 좋다는군요..원래 파이디온은 내용이 알차고 선생님들의 열정이 뛰어난 곳이지요...다니엘에 대한 말씀이 있었던 모양인데...선화는 연신 내용이 좋았다고 얘기합니다.

선화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강습회도 가고 열심을 내는 데.......공권력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의사들의 현실은 너무 답답합니다. 저녁에는 뉴스에서 청와대의 반응과 시민단체의 반응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종합병원의 응급실은 비교적 한산하다는 보도가 나오더군요...이런 보도를 접하면서 건국 이래 초유의 이번 사태를 통해 많은 아픔과 고통이 따르겠지만 의료인들이 가지고 있는 불만과 실정이 국민들에게 바로 전달되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또 이번 기회로 의료 사회에서 단결할 수 있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과 정부에서도 의료인들의 생각이 이처럼 강경하구나라는 것을 인식시킨 것도 큰 수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후로는 의료 정책 결정 등의 여러 가지 세심한 사안에도 의사들이 더 적극 나설 거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모든 국민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맘을 떨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방법이 아니고서는 의료계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사회가 미울 뿐입니다. 아파트밖에 나가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제대로 들 수 없었습니다. 어쨋든 우리들의 본분을 다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집행부와 주동자를 전원 입건, 구속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전공의들이 앞으로 계속 병원으로 복귀하지 않게 되고 장기적으로 될 가능성이 큽니다. 빨리 탈출구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최악의 사태에는 아마 병원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습니다. 자의든 타의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