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타임즈 인터뷰

지난 2006년 2월...'선교타임즈' 라는 잡지사로부터 생각지도 않은 메일을 받았습니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놀라기도 했었지만 선린병원으로 가기 전,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의 삶을 돌아보고 결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자는 우연히 저희 가정의 홈페이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소망과 계획을 다른 분들과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고 여긴 모양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삶의 모습 뿐이지만 홈페이지를 만든 이유가 여러 사람들과 삶을 나누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인지라 인터뷰에 응하기로 했습니다. 선교타임즈가 많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하는 잡지라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구요.

서울에 있는 기자가 부산에 내려와서 직접 인터뷰를 하려 했으나 서면 인터뷰로 대신하게 되었고 기자가 물어오는 질문에 답변을 적어 메일로 보냈습니다. 서울 순천향 병원 연수 떠나기 전 날이었습니다.  

그리고...선린병원에 온 지 1주일, 2006년 4월자 '선교타임즈' 가 배달되었습니다.  간혹 기독교 서점에 진열되어 있는 책만 지나쳐 볼 뿐이었는데 이렇게 우리 가정을 소개하는 글이 실린 책을 받아 들고 보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뭘 잘 못했나 싶기도 했습니다.

잡지사에서는 호칭에 꽤 신경 쓰는 눈치였습니다. 목사나 선교사도 아니다보니 집사 라는 호칭이 가장 낫겠다 싶었던 모양입니다. 당초 보낸 내용의 1/2 정도만 편집되어 실려 있었는데 원래 3 페이지로 한정된 인터뷰 기사다 보니 글을 많이 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선교타임즈에 원래 보냈던 글을 소개합니다. 선교타임즈 홈페이지에 가시면 이번 호에 실린 글은 읽으실 수 있습니다.

 


(아래는 선교타임즈社에 보낸 글 전문입니다.)

 

나의 예수님

 

 늘 역동적이라 생각하는 제 삶에 예수님이 찾아온 것은 어떤 극적인 계기 때문이 아니라 날 때부터 부어주신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4대째 예수 믿는 가정의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30여년동안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할 수 있게 해주셨으니까요. 성경 구절 외우고 찬송 부르는 것을 당연시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된 최초의 사건은 1983년 늦은 겨울,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참석했던 부산지역 중∙고 SFC 동계수련회 때였습니다. 그 수련회의 주제는 야고보서 였습니다. 그 때 처음으로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며 눈물로 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 눈덩이가 굴러 가듯 제 삶의 무게 중심은 그 분께 기울어져 갔습니다. 

 

(카자흐스탄 수도 아스타나市 중심부를 흐르는 이심강)

 

하나님의 부르심

 

 대학에 입학하던 1990년 즈음, 해외 선교는 대부분의 교회, 선교단체의 최우선 과제로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수련회의 주제는 ‘선교’라는 단어로 채워졌고 선교지로의 부름이 끝없이 이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제겐, 해외 선교 나 미전도족속 이란 단어가 크게 와 닿질 않았습니다. 당시 제 관심사는 교회였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빛과 소금으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였습니다. 묵은 신자의 갱신, 마른 뼈의 부흥 이 더 급해 보였습니다.  

 

 그런 제 삶에 전환점이 된 사건은 2001년 5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외교통상부 산하 국제협력단(KOICA) 소속 국제협력의사로서 카자흐스탄에 파견된 일입니다. 국제협력의사로 지원하게 된 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아는 선배로부터 소개받은 뒤 그리스도인으로서 해 볼만한 일이라 여겨 지원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그 때부터 제 삶에서 특별한 일을 시작하고 계셨습니다.

 

 저는 과테말라로 지원했는데 하나님은 카자흐스탄으로 보내셨습니다. 알마티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신 수도, 아스타나로 보내셨습니다. 한국 교민만 해도 천 명이 넘는, ‘작은 서울’ 알마티가 아니라 교민이라곤 스무명 남짓의 선교사 밖에 없는 척박한 땅, 아스타나로 보내신 하나님은 우리 가정에게 믿을 수 없는 꿈만 같은 사실들을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피상적으로만 알았던 선교에 대한 생각들은 너무도 선명하고, 감격스런 고백들로 마음판에 새겨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는 바로 이 곳에서 나도 일하고 싶다는 열정이 생겼고 내 손에 들려진 오병이어도 그제서야 보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얻은 또 하나의 교훈은 선교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선교의 주체는 선교사가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 눈에 보기엔 웬지 허술하고, 될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모임과 프로그램 속에서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인간(선교사)의 실수와 약점을 초월해서 일하시는 그 분의 열심을 바라보며 전능하신 하나님, 세상 역사를 끌어 가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희망이 생겼습니다. 비록 내가 부족하지만 뭘 더 잘 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연약한 내 삶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영광을 받으실 거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최근 건립된 아스타나의 이슬람 사원)

 

카자흐스탄에서

 

 저는 대한민국 정부가 파견한 국제협력의사로서 카자흐스탄 수도인 아스타나의 제 1 시립 외래병원에서 근무하며 현지인들을 진료하는 것이 주 업무였습니다.

 

 이와 아울러 선교지에 세워진 지역교회에서 정기적인 진료 활동을 펼쳤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정착하는 단계였기에 진료 사역을 통해 지역 사회에 교회가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습니다. 이미 자리를 잡은 교회와 비공개 예배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교사의 지역 교회에서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아스타나 베라교회, 미추리나 크리스챤 센터, 아스타나 수이어스펜셜륵 카우옴, 어즈거하브르 카우옴 등의 교회를 2주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방문했습니다. 눈과 얼음으로 길이 막히는 동절기를 제외하고는 아스타나 북쪽 100Km 지역의 악꼴 교회까지 진료를 하러 다녔습니다. 다섯 군데 교회를 2주에 한 번씩 방문하다 보니 거의 매주 한 두 교회를 방문해야 했습니다.

 

 이 외에도 제자 양육사역으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아스타나 UBF 학생들의 건강 상담과 아스타나에 사는 여러 선교사 가정의 크고 작은 건강 문제를 챙기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눈보라가 치는 겨울 밤, 다음 날 설교 준비를 못하고 독감으로 끙끙 앓는 선교사님을 찾아가 해열제 주사를 놓는 일도 포함되고 한인 선교사 뿐 아니라 영미권 선교사들의 건강 문제도 맡아야 했습니다. 아스타나에 있는 유일한 외국인 의사였기 때문입니다. 

 

 선교지 교회에서의 경험도 값진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아스타나 장로교회에 출석하며 예배, 교제, 봉사의 기쁨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누렸습니다. 주일 예배와 수요성경공부 외에도 금요일마다 성가대 연습이 있었습니다. 아내는 선교지 교회에서 반주자로 활동했고 저는 예배 전 찬양 인도와 함께 교회에서 처음 시작된 ‘청년들의 모임’이라 불리는 주일학교를 맡아야 했습니다. 러시아어로 된 사영리, 기본 교리서, 몇 몇 손유희를 가지고 초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모이는 이 모임을 인도해야 했던 경험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구제품, 약상자, 왕진 가방을 들고 정기적으로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돌며 심방을 해야 했고 장례식이나 교회 소풍, 여름 수련회 같은 교회 행사 때마다 답사부터 진행까지 선교사님을 도와 뛰어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좋았던 것은 출석하는 교회 외의 다른 선교사님 가정과도 친밀한 교제를 누릴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정기적으로 진료하러 나갔던 교회 외에도 알마티 라큼교회, 아스타나 나사렛교회, 아스타나 벧엘교회, 기독교침례회 소속 NGO로 들어오신 여러 선교사님 가정과도 허물없이 지내며 선교사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 직접 접하며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바울선교회의 이동휘 목사님(전주안디옥교회)이 카자흐스탄의 저희 가정을 방문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선생님, 이 기간동안 선교사 훈련받는다고 생각하십시요.” 돌이켜 보면 그랬던 시간인 것 같습니다. 저희 가정이 아스타나에 가던 해, 아스타나 선교사협의회가 발족되었는데 직업 선교사도 아닌 제가 서기를 맡았을 만큼 선교사님들과의 관계가 돈독했었고 이것은 훗날 귀국 후에도 계속 카자흐스탄을 품고 섬길 수 있는 귀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 외에도 카자흐스탄의 새로운 선교지 아스타나를 찾아 오시는 타 지역 선교사님들의 방문, 단기선교여행팀에게 가정을 열어 숙식을 제공하는 일이나 한국국제협력단(KOICA) 단원들의 아스타나 전초기지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아울러 현지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며 크리스챤 가정의 모습을 그대로 비추는 일도 우리 가정의 역할이었습니다. 

 

(2005년 여름, 알마티 한카병원에서)

 

내가 생각하는 선교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어떻게 감히 선교라는 명제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짧은 현장 경험을 통해 얻게 된 생각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교는 Mission 입니다.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세상에 보내노라(요 20:21)”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치관과 사회 속에 보내졌습니다. 보냄을 받은 사람에겐 예수님이 모델입니다. 예수님처럼 그들 속에서 겸손하게 섬기고 사랑할 수 없다면 선교의 모든 동기는 처음부터 다시 점검되어야 합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사는 동안 느낀 것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이 필요한지에 대해서입니다.

 

사실 외국인 선교사로서 사역하는 데에는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현지어에 능숙하다 하더라도 현지인의 마음을 위로하고 흔드는 능통한 상담이나 대화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전도나 양육 등 많은 부분이 통역에 의해 이뤄지다보니 오해도 생기고 웃지 못할 일도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그래서 선교사의 최종 목표는 자신이 떠난 뒤 자신의 일을 계속 이어 맡을 수 있는 현지인 지도자(리더) 한 사람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라고들 얘기합니다. 그러나 수 많은 사람들이 선교지 교회를 출입해도 영적 리더 한 사람 만나는 일은 어렵기만 합니다. 

 

제가 만난 현지인들 중에서 '야. 진짜 거듭난 그리스도인이구나.' 라고 느꼈던 순수한 믿음의 사람들은 한결같이 선교사들이나 동료 그리스도인과 끊임 없이 교제를 나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속 마음을 숨긴 채 그저 교회당에만 앉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특별히 선교사)과 친밀하게 접촉하며, 그들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고민했던 사람들이 결국 복음을 복음 그대로 순수하게 받아 들이고 빠른 속도로 성장해 갔습니다 .

 

 2년 반의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신다'는 사실입니다. 말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고 표정도 다르지만 진실은 통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그를 존중하고 그의 영혼을 사랑하며 참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를 섬기길 원할 때(우리의 무의식 중에서도 그 사실을 보여 줄 수 있을 때) 딱딱하고 굳어진 그의 맘은 천천히 열려 갔습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서 느낀 또 하나의 분명한 사실이 ‘그들을 사랑하기는 참으로 어려웠다’ 는 것이기에 이 모든 일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목회자 선교사로 와서 교회당을 세우든지 혹은 전문인 선교사로 와서 그들을 섬기든지간에 선교지에서의 궁극적인 역할은 동일할 수 밖에 없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만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 준비하는 일

 

 사람이 자기 일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앞으로의 제 삶에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현재 카자흐스탄을 품고 진행하는 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부산의대기독학생회와 새벽별(졸업생 모임)과 연계하여 2003년부터 2년에 한 번씩 학생들과 함께 카자흐스탄으로 의료선교활동을 1-2주씩 다녀오고 있습니다. 작년 여름에도 아스타나를 방문했으며 향후 하나님이 장기 선교사로 보내실 때까지 이 일을 계속하기 원합니다. 이 일은 올해부터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전환되는 부산의대 기독학생들에게 의료선교에 대한 소명을 불러 일으키는 동원의 장으로 활용됩니다. 이 일을 위해 매년 현지에서 도움을 받고 있는 카자흐스탄 파견 국제협력의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유지하고 있으며 의약품 반입상의 편의를 위해 제가 근무하던 아스타나 1 외래병원에 심전도 검사 용지를 무상 제공하는 등 현지 의료기관과의 관계 증진도 모색하고 있습니다.

 

(2005년 여름, 아스타나 국제공항, 아스타나의 선교사님들과)

 

 2) 아스타나의 현지교회 리더들을 한국 교회로 초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4년에는 아스타나 장로교회의 현지인 지도자 세르게이를 한 달간 초청했고 올해도 같은 교회의 자미라, 까밀라 자매를 한국으로 초청합니다. 이 일로 현지인 리더가 얻게 될 유익도 커지만 그들을 맞는 한국 교회의 유익도 상당합니다. 이들은 우리와 함께 예배하고 금요심야기도회, 구역예배, 새벽기도회 등을 경험합니다. 크고 작은 수련회도 참석하며 교회 안의 묵은 신자들에게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영접했는지 들려 줍니다.

 

3) 우리 가정의 카자흐스탄 경험과 선교 정보들을 홈페이지 ‘나의 주 나의 하나님(http://oh-junim.netian.com)’을 통해 공유함으로 카자흐스탄과 아스타나를 향한 동원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선교지에 필요한 책자 및 약품을 아스타나의 선교사님들께 보내는 일과 선교사 귀국시 건강 진단 및 치료 지원, 교회 안팎의 선교 모임에서 건축 중인 아스타나의 교회들을 지원하기 위한 활동도 주요 역할입니다. 아스타나에서 살았었기에 선교사님 가정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4) 개인적으로 준비하는 것도 있습니다. 첫째는 러시아어 학습인데 선교지에 있으면서 생활에 어려움이 없을 정도의 러시아어는 익혔지만 이를 잊지 않고 더 발전시키기 위해 지금도 꾸준히 러시아어 회화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 이상입니다. 카자흐스탄으로 떠나는 의료선교여행이나 현지인 리더 초청 시에도 러시아어 구사 능력이 요구되기에 동기 유발은 충분합니다. 둘째는 의료 분야의 준비입니다. 구 공산권인 카자흐스탄은 일차 진료를 맡아줄 일반 의사보다는 특정 분야의 전문 의사를 선호합니다. 이를 위해 소화기내시경과 소화기내과 분야를 더욱 공부하였고 카자흐스탄에서 열게 될 기독의료기관을 고려해 일차 진료에 필요한 초음파 검사 및 병리 검사 능력 등을 보완할 예정입니다. 

 

5) 2006년 3월부터 근무지를 포항에 있는 한동대학교 선린병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산의료선교교육훈련원에서 훈련받는 도중 가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고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는 맘으로 정든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30년 이상 살아온 부산을 떠나는 과정에서 내 삶은 이제 내 손에서 떠났고 그 분의 손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을 카자흐스탄에 보내셨던 것처럼 선린병원으로 보내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그 곳에서 우리를 준비시키시고 때가 찰 때까지 좋은 동역자와 후원자들을 만나게 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스타나 장로교회 주일 교제 시간  2005년 8월)

 

앞으로의 계획과 비전

 

카자흐스탄은 다민족, 다문화 사회입니다. 인구의 55% 정도가 카자흐인, 35%가 러시아인이고 나머지 110여 민족이 한 국가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류 민족인 카자흐인은 무슬림이고 그들의 복음화율은 0.015%에 불과합니다. 무슬림 카자흐인들은 18세기 중엽 제정 러시아에 합병된 이래 250년 이상 기독교(러시아 정교) 문화권인 러시아의 영향 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과정에서 입은 상처로 인해 반기독교적 정서가 무척 강합니다.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에 반대하던 카자흐인들은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저항하다 죽어가야 했습니다. 카자흐인들에겐 러시아인이 믿는 하나님을 믿는 일은 민족과 가족을 배신하는 행위로 해석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라고 이야기하면 콧웃음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구요? 러시아인들이 믿는 그 하나님이 사랑이란 말인가요?”

 

 이곳의 분위기는 어렵게 세워진 현지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기엔 너무도 어둡습니다. 그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고 신앙을 지키기에 급급할 뿐입니다. 카자흐스탄의 공무원들은 특정 종교를 가질 수 없게 되어 있어 예배에 참석하지도 못합니다. ‘십자가’나 ‘하나님’ 이란 단어는 카자흐의 어두운 역사와 맞물려 한 없이 저주스럽고 멀리할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그래서 교회당을 세우고 목회자 선교사를 보내는 것 외에도 상처받은 카자흐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그리스도인(전문인 선교사)들의 섬김이 많이 필요합니다.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낙후된 분야가 바로 의료와 교육입니다. 1991년 분리 독립 이후 다른 분야는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발전해 갔지만 유독 이 두 분야만이 뒷걸음질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 최초로 파견된 한국인 의사이자 기독의사였기에 누구보다 이 부분에 대한 필요를 절감하고 있고 하나님이 제게 줄로 재어 주신 구역이라 믿습니다. 

 

(아스타나 제 1시립 외래병원, 이비인후과, 2005)

 

 이런 상황 속에서 카자흐스탄의 수도, 바로 이 곳 아스타나에 '기독교' 라는 저주스런 이름을 내걸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료 기관을 세우려는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만일 아스타나에 기독교 병원과 기독교 학교가 들어오고 그 기관의 활동 수준이 이곳의 많은 병원과 학교들이 무색하리만큼 정확도와 실력면에서 뛰어나다면 사회 문화 전반에 만연하고 있는 반기독교적 분위기를 상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기독교적 공연을 선보이는 문화 사역이나 깊은 신앙으로 인도하는 훌륭한 책자나 인쇄물을 현지어로 번역, 출판하는 사역과 마찬가지로 이런 의료 사역 역시 눈 앞에 보이는 열매만 빨리 세려는 조급증에 빠진 한국 교회의 선교 경향으로선 성에 차지 않는 활동일진 모르겠지만 아스타나에 살면서 의료 사역을 계속해왔던 저로선 너무도 필요한 선교 활동입니다. 

 

 제가 구상하는 것은 일단 큰 병원급이 아니라 내과계 질병을 다루는 의료 기관에서 출발합니다.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키워 가실 것입니다. 한국보다 30년 정도 뒤떨어져 있는 카자흐스탄의 (평균적인) 의료 시설과 수준을 감안할 때 향후 20년 후에도 그 격차는 별로 달라질 게 없어 보입니다. 지금이라도 누군가가 한국의 검사 시설, 장비, 시스템을 가지고 그 곳으로 들어 간다면 타 의료 기관보다 비교 우위를 지닌 뛰어난 시설이 되겠지만 이런 곳에 한국인 의사가 개업하며 살아 간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95% 이상의 의료 기관이 국영인 이곳에선 낮은 의료비로 인해 사설 의료 기관은 생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스타나 제 1시립 외래병원, 내시경실, 2005)

 

 

 전 이 틈새를 보고 들어 가려고 합니다. 선교 의료 기관을 통해 이곳의 암울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영혼을 섬기고 봉사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고 싶습니다. 한국의 선진 의료 지식을 이용한 현지 의사 보수교육, 의대생 양육을 통한 크리스챤 의사 세우기, 지역 교회를 돕기 위한 교육 및 문화 공간, 단기팀을 위한 선교 기지 역할을 감당함으로 아스타나 전역에 그 영향력을 끼칠 것입니다. 이러한 비전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미숙한 나의 생각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때에 그 분의 뜻을 보여 주시리라 기대하고 신뢰합니다. 카자흐스탄에서 나올 무렵엔 2020년이 되면 그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상했는데 이 일을 하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더 빨리 실현시키실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저 잠잠히 기다릴 뿐입니다.

 

가족이 있었기에

 

 부산의대기독학생회에서 간호학을 전공한 아내(이선화)를 만나 1999년에 결혼했습니다. 부산대학병원에서 내과를 전공하고 카자흐스탄으로 건너갈 때는 7개월 된 첫째 형민이만 데리고 떠났지만 귀국할 때에는 둘째 시은이와 셋째 성은이까지 선물로 받고 들어 왔습니다.

 

 저희 가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제 아내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아내도 선교지에서의 삶을 통해 저와 동일한 맘을 품게 되었고 눈에 보이는 어려움에 개의치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선교지에서 아내의 역할은 남편 이상인 것 같습니다. 특히 가정을 열어 사람들을 맞고 그들과 삶을 나누는 일에 있어선 아내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성급하고 즉흥적인 저와는 달리 차분하고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아내가 있었기에 눈에 보이는 것에 흔들리지 않고 기쁨 가운데 거할 수 있었습니다.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2005년 아스타나, 여름 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사실 저희 가정은 지금도 넘어야 할 산들이 많습니다. 여전히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이 맞서 싸우고 있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은 멀게만 느껴집니다. 때로는 의심이 밀려오고 쓰라린 고통의 시간도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우리 모습이 그러하기에 분연히 일어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신, 그 분의 신실함에 의지합니다.  

 

 은사와 사역에 있어 다양성을 얘기합니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무관심하다고 해서 불평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이 가진 특별한 재능과 사역을 보고 자신의 처지를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모습 그대로 가장 필요한 곳에 자신의 뜻에 따라 사용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해외 선교사로 선교지에 직접 나가는 것이 우리 삶의 최고의 목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릭 워렌이 말한 다섯 가지 목적 중 하나에 해당될 뿐이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만의 역할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 가정에게 보여 주신 아름다운 꿈이기에 불평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그 분만 따라 가기 원합니다. 

 

 힘 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 가정이 걸어 온 길을 돌아 봅니다. 고비마다 세밀하게 인도하셨던 사랑의 하나님을 만납니다. 나의 부족함을 덮어주신 그 사랑에, 뜨겁게 눈물 흘렸던 고백의 현장을 다시 목격합니다. 그래서 내 삶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전 우리 삶에는 우연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세밀한 섭리 안에서 돌아갑니다. 그래서 포항으로 떠나기 직전, 선교타임즈 인터뷰를 통해 내 삶의 설계도를 다시 보게 한 것도 하나님의 따스한 손길이었다고 확신합니다.      2006.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