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저녁

주 40시간 근무제가 도입되면서 월요일은 저녁 6시, 나머지 날은 저녁 5시면 하루 일과가 마칩니다.(토요일은 오후 1시)  언제든지 응급 환자가 발생하는 병원 특성상 3일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응급실 당직 때는 휴대폰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응급실로 달려 나갈 때도 있지만 입원 환자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지지만 않는다면 일과가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 옵니다.

대학 시절에도 학교 도서관보다는 집에서 주로 공부했고(도서관에서 공부한 적이 없답니다.) 대학병원 인턴,레지던트 시절에도 항상 집에서 점심을 먹었던,  집 밖에 모르던 제 생활은 결혼 후 더 심화되었고 요즘은 세 아이 얼굴이 보고 싶어 웬만한 모임은 포기하고 집으로 달려오는 아빠가 되었습니다.

황령산 터널 위, 우리 아파트에서 병원(지하철 2호선 금련산역) 까지는 바로 가는 교통편이 없기에 출근 시에는 마을 버스를 타고 경성대 앞 까지 내려간 다음 지하철 두 구간을 타야 하는 불편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퇴근할 때는 운동 삼아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집으로 옵니다. 약 35분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가파른 오르막이 있어 숨도 차고 땀도 맺히지만 따로 운동할 시간을 낼 수 없는 제겐 무척 소중한 퇴근 길이죠. 요즘같이 칼바람 부는 추운 겨울에도 귀가 시리긴 하지만 폐포 깊은 곳까지 찬 바람을 들이 마시며 이런 저런 생각에 잠길 수 있어...때론 머리가 복잡한 제겐 무척 유용한 생각입니다.

현관문을 열면 "아빠..." 라는 함성과 함께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 나옵니다. 정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습니다. 셋이나 되니까... 반갑다 못해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고 거실 바닥에 나뒹굴며 아빠의 귀환을 축하합니다. 이렇게 환영 받으며 집으로 오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요...

아이들 하나씩 차례로 안아 주고 샤워하고 나오면 아이들과 거실에서 지내는 시간입니다. 선화가 저녁 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말이죠. 가끔 형민이가 컴퓨터로 재미나라(인터넷 학습 사이트)를 하거나 피아노 연습을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림책을 읽든지 색종이로 종이접기를 하거나... 탑블레이드(팽이의 일종)나 다른 장난감으로 시간을 보내지요. 선화가 가져다 주는 간식(고구마, 귤...)을 아이들과 먹기도 합니다.

아이들의 생활이란게 어른 눈에는 참 한심해 보입니다. 일어나서 밥 먹고 노는 것 외에는 하는 게 없으니까요.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 시간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인간관계를 배우고 가족을 배우며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 놀랍다는 생각밖에 안 듭니다. 베란다 구석에서 이 방 저 방으로 뛰어 다니는 아이들은 서로에게 친구도, 선생님 역할도 하는 것 같습니다.

형민이를 보면 얼마나 신기한지요. 언제 저렇게 컸을까? 어린이집과 선교원 2년동안 마치 이 세상의 모든 지식을 배운 것 같습니다. 분명 한 두 해 전만해도 아무 것도 모르던 아기였는데...이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털어 놓는 소년이 되었습니다.

책상 위에 있는 지구본을 가져 와서 "아빠...여기가 낮이면 여기는 밤이지요? 아빠..여기가 여름이면 여기가 겨울인가?...아빠 우리는 어디 살고 있어요? 아빠 여기가 아프리칸가?"  

어디서 배웠는지...아빠, 엄마가 얘기한 적 없는 세밀한 지식까지도 배우고 있는 형민입니다. 이런 걸 보면 유치원 교육의 위력을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형민이가 다니고 있는 산성교회 선교원에서는 파이디온 어린이 찬양을 많이 부르나 봅니다. 얼마 전 선교원 합창제를 앞두고 밤마다 열심히 율동 연습을 하는 형민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파이디온 어린이 CCM을 들어보셨나요? 정말 굉장합니다. 아이를 기르는 부모로서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는 파이디온 선교회가 너무 감사하게 느껴지지요. 곡들이 하나같이 너무 좋아 우리도 작년부터 파이디온 어린이 찬양 CD를 넷이나 구입했습니다. 지금 우리 홈페이지 배경 음악도 파이디온 어린이 찬양 중 하나죠. 파이디온 선교회의 최근 어린이 CCM은 다 좋아요...(rec: 아이 있는 집은 꼭 들어 보세요. CCM Love.com 같은 사이트에서 들어보셔도 좋구요)

2002.1All star

2004.6 Joy to the world

2005.6 꿈이 자라는 나무

2005.9 Thank U

하여간 아이들은 이렇게 슬며시 커나 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7살 즈음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있던 창조적인 생각은 점점 정형화되면서 갇히게 된다 하던데...아마 형민이는 이제 그 단계에 점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반면 시은이는 아직도 우릴 많이 웃겨 줍니다. 너무 너무 터무니 없고 구김살 없는 말과 행동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박장대소하게 되지요.  

 

 

가끔씩 피곤할 때가도있습니다. 주로 병원에서 너무 많이 내시경 시술을 했다거나 환자에 시달렸을 경우죠. 약한 감기 기운처럼 두통과 함께 몸살 기운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주로 목요일이 그렇습니다. 목요일은 30분의 휴식도 없이 퇴근 직전까지 내시경 시술과 외래 환자를 계속 봐야만 하는 날이죠.  ERCP 시술 등으로 2-3시간 늦게 퇴근할 때도 그렇습니다.

몸 상태가 안 좋고 이처럼 과로를 했을 때는 아이들의 놀이 소리가 오히려 거슬리게 됩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되는 아이들의 소리가 어찌나 피곤하게 들리는지...선화를 도와준답시고 아이들 곁에 있다가는 오히려 아이들에게 잔소리만 늘어 놓는 심술쟁이 아빠가 되기에...그냥 말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게 선화를 돕는 길입니다.

 

7시 반 정도 되면 저녁 식사가 준비됩니다. 상을 펴고 수저를 놔 주는 것보다는 선화는 제가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길 더 바랩니다. 아빠와 실컷 놀라는 거지요.

8시가 되면 뉴스를 보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8시 반이 되면 선화와 아이들이 일일연속극 "별난 남자 별난 여자"를 보는 동안 저는 설거지를 시작합니다. 좀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전  설거지하는 게 무척 좋습니다. 일단 뭔가 정리하고 깨끗하게 된다는 게 제 취향과 딱 맞아 떨어지고 적당히 운동도 되는데다가 별 생각없이 단순 작업만 하면 되기에 오히려 휴식이 됩니다. 카자흐스탄 시절부터 설거지하던 습관은 한국에 들어와서도 잘 유지되어 지금도 저녁 설거지는 제 담당이 되었습니다. 가끔 선화는 제게 설거지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집 아빠들은 안 한다면서 그러죠. 아빠가 설거지하는 것도 단점이 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단점보다 장점이 많기에 앞으로도 계속 설거지를 하고 싶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9시가 되면 TV를 꺼고 거실 청소를 합니다. 아이들도 거실 바닥에 깔린 장난감 치우는 일을 잘 도와 줍니다. 거실을 깨끗하게 걸레로 닦고 정돈하고 나면 새로운 작업도 시작할 수 있지요.

9시부터 10시까지...이 시간은 그야말로 자유시간입니다. 아이들은 거실에서 선화가 읽어 주는 동화책 얘기에 귀 기울이고 전 제 방에서 잡다한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죠.

 

10시가 되면 예배 드리는 시간입니다. 결혼 7년째까지 계속 이어져 오는 가정예배는 우리 가정의 버팀목이기도 합니다. 예배 순서는 간단합니다. 먼저 찬송을 부릅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즐겨 부르던 찬송은 ' 예수 사랑하심은' 이었습니다. 후렴 부분에서 "형민 사랑하심 시은 사랑하심 성은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라고 바꿔 부르는 재미로 아이들은 열심히 따라 했습니다. 이제는 어떤 찬송을 부르더라도 아이들은 즐거워 하며 잘 따라 합니다. 형민이도 찬송가 번호를 보며 열심히 찾지요. 다음으로 성경책을 읽는데 지금은 로마서를 읽고 있습니다. 선화와 제가 다섯 절 씩 돌아가며 읽는데 카자흐스탄에서 살 땐 4살 된 형민이도 아빠, 엄마 다음에 자기만의 언어로 성경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 형민이는 글자를 다 깨쳤기 때문에 엄마, 아빠가 읽을 때 자기 성경을 보며 따라 읽곤 합니다. 물론 집중하는 시간이 얼마되진 않지만...

 

성경 읽기가 마치면 기도 제목 적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결혼 첫 날부터 매일 우리 가정의 기도제목을 적어 왔던 역사적인 "기도제목장" 이 있습니다. 오늘 날짜를 적고 오늘의 기도 제목을 적지요. 기도 제목을 적지 않은 사람이 마칠 때 마치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요즘 주로 나오는 기도 제목들은 '포항으로 가는 과정', '할머나와 가족들의 상황',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의 선교사님과 교회 건축 상황'에 관한 것들입니다. 선화나 저  둘 중 한 사람이 기도 제목을 쓰고 나머지 사람은 마칠 때 맺는 기도를 합니다. 기도제목을 적고 나면 모두 합심해서 기도하는 시간입니다.

요즘은 이 시간이 재미있습니다. 기도계의 다크 호스...시은이가 기도시간에 큰 소리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엄마, 아빠를 웃게 할 정도로 큰 소리로 또박또박 시은이의 기도 제목을 밝힌답니다. "하나님..시은이 안 아프고 콧물 안 나오게 해 주세요. 성은이 엄마, 아빠, 오빠 말 잘 듣게 해 주세요..." 대부분 엄마, 아빠의 기도 소리를 듣고 흉내내는 것들이지만 때로는 이렇게 제 생각을 가지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나보다 낫다는 생각도 가져 봅니다. 하나님도 순수한 아이들의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를 기뻐 받으시겠지요.

 

예배를 마치면 10시 반...이제 잘 준비를 합니다.

안방에는 침대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우린 자는 시간에는 이산 가족이 되죠. 아빠와 형민이는 침대에...선화와 시은,성은이는 바닥에 눕습니다. 형민이는 어제는 아빠와 잤으니 오늘은 엄마와 자야지...하고 바닥에 누울 때도 있지만 잠이 들면...침대 위로 옮겨집니다. 본인은 모르죠. 매일 따뜻한 형민이를 폭 안고 자고 싶어하는 아빠의 마음을...

선화를 중간에 두고 왼쪽은 성은이 자리(성은이는 절대로 이 자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른쪽은 시은이 자리입니다. 시은이는 눈이 감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에게 동화책을 읽어 달라고 조릅니다. 시은이가 형민이와 다른 점이 몇 가지 있는데 하나는 "그림 그리기(색칠하기)"를 잘하는 점이고 또 하는 "동화책 듣기"를 무척 좋아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자신이 그림 동화책 보는 걸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직 글을 잘 모르기에 엄마에게 주로 읽어 달라고 보챕니다. 시은이에게 걸리면 잠이 드는 마지막 순간까지 컴컴한 방 안에서 동화책을 읽는 시련을 겪어야 하지요. 하지만 선화는 그런 어려움 속에도 끝까지 시은이를 위해 동화책을 읽다 잠이 듭니다. 엄마가 잠이 들면 시은이도 사르르 잠이 들지요.

 

어떨 땐 아빠가 동화책을 읽거나 얘기를 해 주기도 합니다. 시은이가 아빠에게 즐겨 해 달라고 하는 이야기는 "햇님 달님"입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로 유명한 이 동화를 제 맘대로 각색해서 해 주는 동화인데 형민이도 재미있는지 귀를 쫑긋해서 듣습니다. 물론 아빠가 동화를 해 주는 날은 가뭄에 콩 날 정도지만....

최근 우리 가정에는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할머니가 우리와 함께 사시게 된 것이죠. 그 동안 김해 삼촌 집에 거하시던 할머니는 김해 삼촌이 울산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거처를 저희 집으로 옮기셨습니다. 집안 사정으로 저희 가정이 할머니를 모실 수밖에 없게 되었지요. 아무래도 선화에게도 더 부담되는 일이지만 누구보다 할머니를 잘 모시려고 노력하는 선화입니다. 아이들도 할머니를 잘 따르기에 다행스럽기만 합니다. 물론 할머니가 계셔도 우리 가정의 저녁 시간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상 2.4.6 살 삼남매를 둔 아빠의 저녁 일과 소개였습니다.

아래는 형민이의 스케치북에 그려진 작품들입니다. 선교원에서 그린 형민이의 작품들이죠. 형민이의 그림을 보면 특징이 있습니다. 사람 얼굴을 아주 동그랗게 크게 그린다는 것, 그리고 교회를 사람처럼 그린다는 것 등이죠...뭐...다른 사람은 재미없겠지만 아빠의 맘이려니 생각하고 너그럽게 봐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