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두 이야기

형민이 몸에 붉은 반점이 생길 때만 해도 그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배 쪽에 두어개 빨간 홍반이 올라오는 것 가지고 너무 호들갑 떤다는 생각도 들었고...뭐...감기 같은 거 앓고 난 뒤 생길 수 있는 것으로 여겼죠.

하지만 선화는 달랐습니다.  아이의 몸에 특별한 변화가 감지되자 말자 책장에 꽂힌 "삐뽀삐뽀 119, 소아과" 책을 꺼내 들고 열심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조그마한 변화에도 가장 먼저 반응하고 고민해서 답을 찾아 내는 사람은 언제나 아이들의 엄마입니다. 다른 사람에겐 평범해 보이기 쉬운 현상이라도 엄마의 눈은 속일 수 없지요.

돌이켜 보면... 의대 시절 소아과학을 공부할 때도 수두,돌발진,홍역 등...발열과 동반되는 홍반성 질환의 감별에 무척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임상 경험도 없던 그 당시 도무지 책 만으로는 질환의 차이점을 이해하기 힘들었지요. 그 후유증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내과 의사를 하고 있지만 소아과 영역의 이 질환들에 대해선 경험도 부족하고 감별력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그 날 저녁...선화는 수수께끼의 답을 말했습니다. "형민이가 수두래요.."  

아침까지만 해도 몸통에만 몇 개의 발진이 보였었는데 저녁에는 얼굴에도 불긋불긋 점들이 돋아 올랐고 이내 수포가 맺히고 있었습니다. 열도 안 나고 이렇게 수두가 시작된 것이죠.

수두를 일으키는 바이러스는 수두-대상포진 바이러스(varicella-zoster virus) 라고 불립니다. 연령에 상관없이 나타나지만 특히 2-10세 어린이에게서 주로 발생합니다. 이 바이러스는 몸에 들어와서 2주 정도의 잠복기를 거친 뒤 발병하는데...특별한 전구 증상은 없고 가벼운 발열과 동시에, 또는 조금 늦게 발진이 시작됩니다.

수두는 얼굴, 가슴, 배 등에서 시작해서 온 몸으로 퍼지는데 처음에는 작은 홍반이 여기저기 나타나고 그것이 부풀어 구진이 되며, 몇 시간 후에는 팥알 크기의 수포로 바뀐답니다. 이런 임상 양상을 보아 수두라고 추측할 수 있지요. 2-3일 지나면 수포는 말라서 흑갈색 딱지가 앉고 10일 전후로 딱지가 떨어져 낫게 됩니다.

 수두는 아주 전염력이 강한 질병입니다. 발병 후 약 1주일까지(수포가 생긴 후 1주일까지) 전염되므로 유치원이나 학교에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형민이가 수두에 걸렸다면 시은이와 성은이의 운명은 뻔하겠지요?  

아니나 다를까...다음 날부터 시은이의 얼굴에도 붉은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약간의 미열을 띠고...

사실 소아과의 기본 예방 접종표를 보면 어느 곳에도 수두 예방 접종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떤 소아과 선생님들은 수두 예방 접종을 하지 않기도 하죠.

수두는 걸려도 대개는 별 위험 없이 좋아지는 병인데 수두 접종을 하게 되면 오히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수두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에(그 효과가 얼마나 갈지도 모르기에)  차라리 어릴 때 걸리도록 예방 접종을 하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실 수두는 어른이 되어 걸리는 경우가 더 위험합니다. 수두폐렴이 합병되어 중증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수두 예방 접종을 해도 열 명 중 한 명은 수두 환자와 접촉을 했을 때 수두에 걸릴 수가 있습니다. 수두 접종했다고 수두에 전혀 안 걸리는 것도 아니죠. 하지만 수두 예방 접종 한 아이가 수두에 걸리면 접종 안 한 아이보다 대체로 가볍게 지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번 수두에 걸린 사람은 평생동안 면역력을 갖게 되지요.

미국에서는 그동안 수두 예방 접종 자체를 하지 않았다가 요즘은 FDA 공인이 나면서 건강한 아이에게도 수두 예방 접종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형민이의 경우 만 두 살 즈음 수두 예방 접종을 받았습니다. 2002년 12월...우리 가정이 카자흐스탄에 살고 있었을 때 선화가 둘째 시은이를 낳으러 혼자(형민이를 데리고) 귀국한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외국에 있느라 제 때 챙기지 못한 예방 접종을 한꺼번에 받아야 했죠. 형민이는 그 때 수두 예방 접종을 받았습니다.

시은이는 작년 이맘때 수두 예방 접종을 받았습니다. 수두 예방 접종은 돌이 지나기만 하면 언제든지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문제는 성은이였습니다. 성은이는 형민이가 수두라는 사실을 알 게 될 때까지도 예방 접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자칫 심한 수두를 앓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다행히 형민이가 수두라는 얘기를 들었던 그 날...선화는 성은이를 데리고 수두 예방 접종을 하러 갔습니다. 통상 수두 예방 접종은 수두 환자와 접촉한지 2-3일 이내에 접종해도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세 아이들은 늘 한 집에서 붙어 살기에 이미 성은이의 몸 속에는 수두 바이러스가 활동하고 있을 테고 수두 예방 접종의 효용성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으로 예방 접종을 했던 모양입니다.

다행히도 시은이도 아침에 잠깐 열이 난 뒤 이내 괜찮아졌습니다. 하루 종일 신나게 놀았다고 합니다. 그 다음 날부터 수포에 딱지가 앉더니만 수두가 끝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가볍게 흉내만 내고..넘어간 셈이죠.

사흘 뒤...거짓말같이 성은이의 몸도 불긋불긋 홍반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는 선화도 내심 긴장했을 겁니다. 예방 접종의 효과를 못 볼 수도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다행히도 성은이도 미열 한 번 없이 이내 발진이 사라지고 딱지가 앉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삼남매의 수두 이야기는 마치게 됩니다. 우리의 경험이 우리 또래의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다른 가정에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램에서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수두가 지나가고 난 뒤 시은이와 성은이는 부쩍 자랐습니다. 하루도 안심할 수 없는 흉한 소문과 사고 속에서... 아이들을 키워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크게만 느껴진 한 주였습니다.   2005.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