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을 돌아 보며

2004년 12월 31일 이른 아침...아직도 캄캄한 어두움을 뚫고 출근길을 나서다가 자동차와 지붕 위마다 하얗게 덮여 있는 눈이 쌓인 것을 보았습니다. 첫 눈이 왔습니다.

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서 살 때는 1년에 6개월 정도를 눈과 얼음의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늘 스케이트장 같은 도로 위에서 차를 몰아야 했고 항상 눈을 밟으며 지내야 했습니다.

어둠을 헤치고 35번 국도를 따라 호포 지하철 역까지 달리는 이미 빙판길로 변해 있었습니다. 아스타나의 도로가 생각났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그리운 친구를 만난 것 같았습니다. 참 애틋하고 반가운 감정이었습니다.

2004년이 저뭅니다.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상황을 보더라도 올해만큼 힘들고 우여곡절이 많은 해는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나라 뿐 아니라 우리 가정으로서도 올해는 특별한 시련과 훈련의 시간이었습니다.

1년 전..그러니까 2004년이 시작될 무렵...우리 가정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은..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강한 평안이 자리잡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돌아보면 합리적으로 이해되지 않은 평안이 우리 맘에 깃들 수 있었던 것은 그 분의 인도하심 때문인 것 같습니다.

둘째 시은

성도들의 삶이 세상적인 부와 안락한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기도하는 맘을 주시려고...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특별한 상황을 통과하도록 하셨다는 확신이 2004년을 보내는 이 시간에 가장 크게 드는 마음입니다.

"애통하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은 재 뿌리는 대신 왕관을 씌우셨고 슬픔 대신 기쁨의 기름을 바르셨으며 절망대신 찬양의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양합니다.

지난 1년간 하나님이 주신 위로를 돌아 봅니다. 눈으로 드러나는 위로보다는 우리 맘에 주신 확신이 더 큰 위로이지만 우리 삶에 구체적인 부분도 소개하고자 합니다.

1. 양산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조차도 우리가 양산에서 살 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한국에 들어오고 나서야 우리 가정을 둘러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사실 그 당시 벌써...내년에 부산대학병원에서 소화기 내과 전임의 과정을 밟기로 결정한 상태인지라... 부산에서 집을 골라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역 정착" 이라는 고상한 단어를 떠 올릴 여유도 없이 혹독한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그 날을 기억합니다. 비가 뚝뚝 떨어지는 11월의 오후...시은이를 업고 형민이를 안고...우리가 살 만한 집을 고르기 위해 양산 석계의 낡은 아파트 사이를 기웃거리고 있던 모습을... 아파트 앞 게시판과 길가에 세워진 생활 정보지 속에서 우리가 원하는 아파트를 찾고 있을 때, 낯선 양산의 지명들 사이에서 '석산에 있는 32평 아파트' 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양산 지리를 전혀 모를 때입니다. 어렵게 중개인의 도움으로 찾아 간 우린... 그 곳에서 희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 아파트의 호수가 "1303호"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모든 게 막막하고 어려웠을 때...이 아파트의 호수가, 우리가 결혼 후 카자흐스탄으로 가기 전까지 살았던 학장동 도개공아파트의 호수와 동일한 1303호라는 사실 하나에...내 맘을 뜨겁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쫒겨 나갈 때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모든 게 캄캄해 보이던 그 시절...단지 아파트 호수가 이전 아파트와 똑같다는 사실 하나에 우린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그 상황 속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양산 외곽이라 다른 곳보다 전세가가 낮았고 주변에 밭도 많고 앞이 탁 트여 있어 아기들을 키워야 하는 우리에게 딱 맞는 곳이었습니다.

첫째 형민

그로부터 1년 뒤...양산 석산 해강 아파트에 살고 있는 우린...양산 전체를 통틀어 이보다 더 좋은 아파트는 없다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부산대학병원 출퇴근에 가장 좋은 위치이다.

우리 아파트에서 부산 지하철 2호선 종착역인 호포역까지는 자동차로 10분 거리입니다. 만일 양산 시내에 살았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고 수 많은 신호등을 만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침마다 달리는 출근길은 거침이 없습니다.

2) 맑은 공기

양산은 부산보다 훨씬 오염이 덜 된 곳입니다. 울창한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이죠. 그 중에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석산은 숨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맑은 공기가 살아 있는 곳입니다. 매일 밤...호포 지하철 역에 내릴 때마다 이렇게 상쾌한 공기가 있는 양산으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정말 매일 같이... 카자흐스탄 특히 아스타나의 맑은 공기 속에서도 살다 온 우리로선 이보다 더 좋은 정착지가 없었습니다.

3) 흙에서 사는 아이

봄이면 아파트 주변은 꽃으로 가득합니다. 여름이면 옥수수가 올라오고 가을이면 모과나무, 감나무가... 겨울이면 무와 배추가 파랗게 올라 오는 곳이 바로 아파트 주변입니다. 산 밑이다 보니 농사짓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형민이와 시은이는 고춧잎, 옥수수, 코스모스, 호박잎이 어떻게 나고 자라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파트 앞 1

아파트 앞 2

4) 교통이 편하다.

우리 집은 남양산 톨게이트 근처에 있습니다. 집에서 출발해서 경부 고속도로 톨게이트까지는 15분이면 도착합니다. 남해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로 다 진출할 수 있는 남양산은 지난 1년간 부산, 밀양, 창녕 등에 흩어져 있는 부모형제를 찾아 다니기엔 더없이 좋은 지역이었습니다.

 

2. 교회

전 유치부 시절부터 카자흐스탄으로 나가기 전까지 한 교회(서부산교회, 예장 고신) 안에서 성장했습니다. 4대째 신앙을 이어 받고 있는 가정인지라 교회 생활은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고 교회에 대한 애착도 무척 강했습니다. 그래서 대학생 때는 친구들로부터 "사찰 집사" 라는 우스개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습니다. 그 시절 제 비젼 역시 지역 교회 안에 있었고 아무리 우리 교회가 작고, 일꾼이 적어도 내 교회라는 이유만으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습니다.

카자흐스탄에 있는 동안에도 목사님과 메일 교환이 있었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비행기 속에서 조차도 다시 모 교회에서 출석하겠다는 맘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물론 교회 이동을 몇 번 생각해 본 적도 있지만 그 때까진 그럴 만한 명분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귀국 후 이 모든 전제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밀려...우린 교회 역시 양산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막상 양산에서 교회를 찾으려고 하니....카자흐스탄 아스타나에 살고 있을 때 남성택 선교사님(고신 파송)으로부터 빌려 읽었던 '월간 고신' 속에 소개된 '양산교회'가 떠 올랐습니다. 당시에는 무심코 읽었던 기사였는데 그 당시 '양산교회가 괜찮은 교회구나' 라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리고 우린 다른 교회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양산교회에 출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때가 2003년 12월 첫 주였습니다.  

셋째 성은

양산 교회는 무척 좋은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 성도들의 열심이 특심이었습니다. 최근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신도시 양산은 대부분 부산에서 유입되는 인구입니다. 그러다 보니 양산 교회로 전입해 들어오는 교인들 중에는 부산에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던 분들이 많았습니다. 교회에 출석한지 이제 1-2년째라는 분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양산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텃세가 거의 없는 교회였고 젊은 부부들이 열심히 교회를 섬기는 좋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 등록한 지 3주 뒤... 바로 중고등부 교사를 맡게 되었고 전입 집사로서 청년회 임원도 맡고, 교회 안에서 빠른 속도로 정착해 갔습니다. 세 아이를 기르는 '7년 대 환란' 시기이기에 선화는 교회의 모든 모임에 참여하기 어려웠지만 저라도 교회 일에 열심을 내기로 한 것입니다. (물론 이 부분에선 선화의 희생이 컸습니다.)

그로부터 1년이 흘렀습니다. 양산교회에 와서 가장 감사한 것은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전 교회는 교인수가 백 명 정도의 규모라 저같이 부족한 사람이 교회 안에서 몇 가지 직분들을 겹치게 수행해야 했습니다. 교사도 몇 개나 맡아야 했고 부서장도 맡고 성가대니 찬양팀...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감당하기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물론 그 때는 그에 맞는 은혜를 주셨더랬습니다.

그런데 양산교회에 오고 보니까...정말 하나님이 귀하게 쓰시는 평신도 사역자들이 참 많았고 배울 점들이 눈에 쏙쏙 들어 왔습니다. 교회는 한 팀이기에 그 누구도 짐을 도맡아 질 수 없는데...양산교회는 각 분야에서 성도들이 효과적으로 협력하고 있었습니다. 7-800명이 출석하는 큰 교회이기에 그렇겠지만, 이렇게 많은 일꾼들이 말없이 충성하고 있으니 교회가 성장하는 것 같았습니다.

올 여름 카자흐스탄 아스타나 장로교회의 현지인 리더 세르게이를 초청해서 저희 집에서 한 달간 머물게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세르게이가 한국에서 배워 갈 만한 좋은 교회 모델이 필요했었습니다. 하지만 고민할 필요가 없었죠. 양산교회라면 충분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여름, 카자흐스탄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을 모셔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도 양산교회로 모시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기왕이면 많은 사람이 모이고 선교에 대한 관심이 있는 교회가 좋은데...양산교회가 제 격이었기 때문입니다.

포장마차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왜 나를 서부산교회에서 빼 내셔서 양산교회로 옮기셨나에 대해 수긍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전 교회에 있었더라도 하나님이 인도해 주셨겠지만 양산교회로 옮기신데에는 특별한 섭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사람이 좌지우지 하는 곳이 아니기에 그 분의 뜻대로 사람은 옮겨지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 훈련받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제 맘에 가장 크게 들어 오는 부분은 양산교회에서 만난 좋은 믿음의 동역자들 때문입니다. 이 분들은 제가 훗날 카자흐스탄으로 나가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함께 기도하고 동역할 사람으로 일할 분들입니다.

최근 저는 양산교회에서 알게 된 비슷한 연령의 집사님들과 '바나바 하우스'라는 모임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은 기도하며 해외 선교사를 위해 후원하는 모임입니다. 이제 시작 단계인 이 모임은 현재 카자흐스탄, 필리핀, 중국, 캄보디아의 선교사님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을 드리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현지 선교 경험이 있는 제가 이 모임의 발기인으로 가담하게 된 것...우연이라고 보기엔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양산교회에서 앞으로 제가 할 일을 위한 초석을 닦으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곳에서 잘 준비된 교회, 좀 더 대규모의 교회에선 어떻게 교회 공동체가 움직이는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전 교회에서 가졌던 작은 교회에서의 경험과 어우러져 선교지에서 유용하게 사용되리라 확신합니다.

 

또 하나...양산교회에서 지난 1년간 고등부 교사로 섬기면서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3년간 카자흐스탄에 떨어져 있다가 막 들어온 한국 생활은 모든 게 낯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 불리는 찬양들도 매우 생소했습니다. 이전보다 리듬이나 빠르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고등부 교사를 하면서 이런 환경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자연스럽게 한국의 기독 학생, 청년들의 문화에 다시 적응한 것 같습니다. 양산교회의 고 1 학생들을 대하면서 영혼에 대한 사랑을 일깨울 수 있었고 선생님들의 열정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사를 하며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 지내던 2년 반 동안 내 맘이 많이 빈약해 있었다고...' 막상 주의 일을 한다고 약가방을 짊어지고...선교지에서 떠들어 대었지만....2년 반이란 세월 동안 내 맘을 풍성하게 채워 줄 영적 공급원은 참 부족했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선 한국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새벽 기도회..수련회...주일 말씀마다 들려오는 강력한 도전... 카자흐스탄에서의 경험은 앞으로 어떻게 무장되어 나가야 할 것인지를 더 절실하게 깨닫게 해 준 것이었습니다.

3. 우리

카자흐스탄에서 돌아온 이후 우리 가족은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만삭으로 무거운 선화와 아이들을 집에 두고 귀국한 지 한 달도 안되어 병원 야간 당직을 해야만 했습니다(부산대병원에 들어가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선 한 시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지냈었지만 한국 생활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얼마나 낯설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성은이가 태어나고 세 아이로 북적거리던 올 초...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없었더라면 우리도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많은 망설임 속에서 부산대병원 소화기내과 전임의 생활을 시작했고 이제 8개월이 지났습니다.

전임의 생활을 시작할 무렵 내년 진로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솔직히 분과 전문의 과정을 밟지 않더라도 내과 전문의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남들만큼은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선화의 권유와 '3년 간 지속된 한국에서의 의료 공백'을 메꾸기 위해 일정한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 길을 걷게 만들었습니다.

1년이 지난 지금...형민이와 시은이는 좋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시은이는 아침에 눈만 뜨면 성은이부터 찾습니다. 성은이 앞에 가서 "아가야..까꿍..아가야..언니 있다.." 라며 손뼉을 치며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아빠의 전화를 받아도 제법 똑똑하게 대화하고 동생 성은이에게 얼굴을 맞더라도 언제나 친절한 시은이는.... 이제 만 두 살이 넘었습니다. 내년에는 네 살이 됩니다. 첫째 형민이는 한글을 깨친 것 같습니다. 아직 서툰 발음이지만 낯선 글들을 보이는 대로 읽어내기 시작합니다. 형민이는 내년에 여섯 살이 됩니다.

세 아이 모두 많이 자랐습니다. 1년의 시간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여전히 아이들로 인해 정신없지만 선화는 요즘 여유가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비가 넘어갔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입니다.

 

내년 진로도 결정되었습니다. 부산 남천동에 내년 3월에 개원하는 '좋은 강안병원' 소화기 내과 과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강안병원은 비교적 큰 규모의 종합 병원입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함께 소화기 내과에서 근무하게 되는 다른 두 명의 과장님들 때문입니다.

모두 저보다 두 살 많은 부산의대 출신의 기독의사입니다. 두 분 다 저처럼 부산대병원 소화기내과 전임의 과정을 거치신 분들이시고 다른 대학병원에서 교수직을 제안받을 정도로 실력과 경험이 뛰어난 분들이십니다. 지역 교회에서 열심이시고 저와 함께 '부산의대 기독학생회' 시절부터 함께 해 왔었기에 이 부분에서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를 느낍니다.

카자흐스탄 의료 선교활동을 지속하는 면에서나 의료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동료들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한데 하나님은 제게 가장 적당한 병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난 1년간 부산의대 소화기 내과 전임의 과정을 거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집 앞에서

 

우린 지난 한 해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생애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이었고 가장 은혜로운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꿈과 희망으로 인해 우리 삶은 더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요즘은 '산다는 것'이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비록 현재도 삶의 순간들은 매 순간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가정이 너무도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는 날까지...내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수 놓고 싶습니다. 그 안에는 슬픔과 고통이 있겠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이제 알기에...실망하지 않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나를 가까이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기에 더 이상 낙망하지 않습니다.  2004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과정을 밟게 하셨습니다.  

주님 사랑해요...   200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