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이야기

부산대병원에 근무한지 오늘로 딱 78일째 됩니다. 아침 5시 50분에 일어나자말자 바로 출근해서 밤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 오는 생활을 시작한 지 벌써 2개월 반이나 지났다는 말입니다. 앞으로를 생각할 때 필요한 과정이겠다 싶어 시작한 일이지만 요즘 들어 말 못할 어려움이 점점 쌓이고 있습니다.

가장 크게 눈에 띄는 건...시은이가 예전처럼 아빠에게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깨어나기 전에 출근해서  늦은 밤, 자기 직전에야 들어오는 아빠가 조금씩 멀게 느껴지나 봅니다.

생후 1년 7개월을 맞는 시은이는 심리적으로도 민감한 시기입니다. 엄마, 아빠처럼 가까운 사람의 사랑을 받으려고 하는 때이기도 하지요. 작년의 일입니다. 두 돌이 넘었던 형민이가 시은이를 출산하러 한국에 들어가는 엄마를 따라 2개월 정도 아빠와 떨어져 지내다가 다시 카자흐스탄 알마티 공항으로 들어 왔을 때의 일입니다. 전 오랜만에 형민이를 만난다는 생각에 너무 가슴 설레고 기다려졌었지만...형민이의 반응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막상 아빠 얼굴을 본 형민이는 한 마디 말도 못 건네고 어색해 하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아빠지만 2개월만 얼굴을 못 보면 이전 감정조차도 기억나지 않는 게 이 시기의 아이들인가 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오랫동안 집을 비워야 하는 아빠의 상황은 슬픈 얘기를 가져올 수 밖에 없습니다.

밤 11시를 훨씬 넘긴 시간에 집에 들어오는 제 모습이 안타까운지 선화는 이런 저런 간식거리를 내 놓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배가 출출해서 뭐라도 먹고 싶지만 자기 전에 많이 먹는 건 좋지 않아...주로 토마토 같은 과일을 먹습니다. (아이들이나 저나 토마토를 좋아합니다.)

얼마전까지 선화는 왼쪽 사진처럼 간식(?)을 내놓았습니다. 토마토를 간 즙에다 인삼 한 뿌리...원래는 '마'(뿌리의 일종)와 '인삼'을 갈아서 주곤 했는데 인삼 알갱이가 삼키기 더 불편하다는 제 불평을 듣고선 아예 뿌리채 주기로 방침을 바꾼 것이죠.

하지만 이것도 오래 가진 못했습니다. 이렇게 인삼을 씹어 먹으니까 속이 쓰리더라구요. 요즘은 토마토에다 '칡', '홍삼 엑기스' 같은 것(?)들을 내 놓습니다. 선화의 마음이죠.

이 와중에... 선화가 속상해 했던 사건이 그저께 발생했습니다. 밤 늦게 지친 몸을 이끌고 들어 온 집에 들어온 전....낮에 받았던 메일에 대해 적은 답장의 내용을 우리 홈페이지 '카자흐스탄' 란에도 올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통부 소속의 인터넷 봉사단 활동을 준비하고 있던 담당자 한 사람이 제게 카자흐스탄의 특정 도시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는데 이 내용은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 할 것 같아 우리 홈의 카자흐스탄 란에 추가하려 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업데이트 작업도 요즘엔 좀처럼 할 여유가 나지 않아 생각난 김에 얼른 처리하려고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자정이 가까워 오는 시간이었죠.

 사실 요즘 전 홈페이지 업데이트 작업을 집에서 하진 않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도 않기에 주로 병원에서 글을 써서 FTP로 업로드 하는 작업만 집에서 합니다. 집에선 선화와 아이들을 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늘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날처럼 밤 늦게 귀가해서 홈페이지 관련 작업을 하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인데...이 날 따라 몸도 피곤하고 쳐지는 바람에 선화가 준비한 간식을 먹고 나서 그저 아무 생각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던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이런 단순한 작업을 하고 나면 힘이 생기더라구요. 그저 아무 생각없이 하는 단순한 편집 작업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때 발생했습니다. 그 때까지 자고 있지 않던 시은이가 제 곁으로 왔었던 것입니다. (선화가 아빠에게 가 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전 시은이가 들어온 걸 알았지만 하던 작업을 마치려고 신경쓰지 않았고... 아빠가 봐 주지 않자 시은이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아무도 자기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 게 섭섭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이내 선화가 뛰어오고 ... 그 순간 애기보다 일을 중요시하는 아빠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아빠가 왜 아기가 원하는 대로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느냐" 는 핀잔을 들었습니다.

아마 선화도 제가 요즘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다는 걸 알테지만.... 아이가 관련된 일만큼은 이렇게 화가 솟구치는 모양입니다. "아빠가 아이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해야지...."

선화의 말이 맞습니다. 집에 들어오면 다른 어떤 일도 제쳐두고 아이들을 우선해야 합니다. 우리같이 세 아기가 사는 집은 더욱 그렇습니다. 또 사실 한국에 들어온 뒤로 쭉 그렇게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선화만큼 아이들을 가까이 챙겨주진 못하지만...제 나름대로는 누구보다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냈었고 지금도 어느 아빠보다 아기를 좋아하고 함께 있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제는 그렇게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홈페이지에 적어 놓은 글에선 아이가 함께 있고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해 놓구선 왜 아이를 보지 않느냐" 는 얘기도 들어야 했습니다.

어젯 밤에는 캐나다로 이민가려 한다는 선화의 친구 얘기도 들었습니다. 그 친구의 남편은 삼성에서 일하고 있는데 아무리 빨라도 저녁 9시가 되서야 퇴근하는 한국 생활에 넌저리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카자흐스탄에서 살고 있을 때 그 친구도 단기간 미국에서 지낸 적이 있었는데 아마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이라면 한국에서 직장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아마 선화도 이제 78일 째가 되는 이 생활에 많이 지친 모양입니다.

우린 딱 1년...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10개월만 부산대병원에서 전임의 생활을 하기로 했습니다. 소화기내과 분과 전문의가 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요건만 충족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분과 전문의 수련 기간은 2년이고 최소한 1년은 대학병원 같은 수련병원에서 근무해야 합니다.) 하지만 3개월도 되지 않아 이렇게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아이들과 함께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이 너무 적은데서 문제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전 낮에도 몇 번씩 집으로 전화를 걸어 형민이의 목소리를 듣곤 합니다. 집에서는 깨어 있는 형민이를 볼 순 없지만 이렇게 전화를 하면 또록또록한 형민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형민이의 표현력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지요.

지금의 제 생활은 끔찍합니다. 평일에는 하루 중 18시간을 병원업무와 출퇴근에 소모하고... 남는 6시간 중 자는데 5시간을 사용해야 하니 가족과 함께 보내는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딱 1시간 뿐입니다. 하지만 이 1시간도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고 있을 때지요. 늦게까지 깨어있는 시은이게도 아빠는 차츰 낯선 존재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왼쪽은 둘째 시은이(1년 7개월), 오른쪽은 셋째 성은이(6개월)입니다.

성은이가 자랄수록 둘은 점점 서로 닮아갑니다. 기본적으로 시은이는 아빠를... 성은이는 엄마를 더 닮았지요.

항상 자정을 전후로 하는 시은이를 보는 탓에 잠이 쏟아지는 시은이에게 아무리 손을 뻗쳐도 엄마에게 도망가려고만 합니다. 이런 시은이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 현재의 어려움이 더 깊게 다가 옵니다.

그래서 슬픈 현실입니다.

선화는 이제 세 아이와 하루종일 18시간을 보내는 패턴에 익숙해져 버렸다고 합니다. 오히려 토요일이나 주일같이 아빠와 집에 함께 있으면 더 불안하고 불편하다고까지 말합니다. 벌써 이 생활에 적응해 버린 거지요. 이렇게 비정상적인 생활이 우릴 더욱 힘들게 만듭니다.

부산대병원 전임의를 하기로 한 올 한 해는 우리 가정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양산에서의 출퇴근(출근에만 1시간 반 소요)을 포함한 18시간의 근무 외에는 그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게 요구합니다. 교회나 다른 분야의 활동은 전혀 생각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추진하는 일은 카자흐스탄 현지 교회의 청년 리더를 한국으로 초청하는 일(세르게이 프로젝트) 뿐입니다. 그 외는 모든 게 유보되었고 교회 일 역시 많은 부분에서 손을 떼거나 뒤로 빠져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전혀 시간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양산교회 중고대 수련회, 기독학생회 의료봉사, 교사로서 아이들을 심방하고 살피는 일....이 모든 일은 관여하고 싶고 해야만 하는 일인데도 도무지 관여할 시간이 나지 않습니다.

최근 2번의 MBTI 검사를 통해 드러난 저의 성격 유형은 ENFP로 소위 말하는 "스파크 형"입니다. 이런 형은 항상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비젼을 따라 갑니다. 통찰력과 창의력이 요구되지 않는 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열성을 불러 일으키지도 못하죠. 한가지 일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일을 벌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문제 해결에 재빠르고 관심이 되는 일은 무엇이든지 수행하는 능력과 열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빨리 부산대병원 전임의 생활을 끝나고 새장 속에서 풀려난 새처럼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올 한 해가 마지막 수련 기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에는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가정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에서도 더욱 책임있는 일원으로 섬기고 싶습니다. (그래서 최근 교수님들로부터 들어오는 "2년간 전임의" 를 하라는 제안을 거푸 거부하고 있습니다.)

시은이의 울음 소리는 큽니다. 사진처럼 물끄러미 쳐다보는 성은이가 오히려 더 큰 아이처럼 느껴지네요.

아이를 기른다는 건...이 모든 것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래도 우린 시은이를 두고 꾸중을 하고 매를 들 것인지 그렇지 않을 것인지 늘 고민합니다. 버릇없이 굴고 오빠에게 손찌검하는 습관을 보이면 야단쳐야 하지만 그러고 나면 의기소침해지는 시은이의 모습에 선화는 늘 후회하곤 한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어려움과 고통은 하나님의 섭리하심 속에 있음을 믿습니다. 성경은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고 권면합니다. 고난을 통해 우린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성취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이 어려운 시간들...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하나의 과정임을 잘 알기에 그저 담담하게 받아 들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는 맘 뿐입니다.

우리 아파트 앞 화단에 앉아 있는 형민이와 시은이의 모습입니다.

선화는 늘 얘기합니다. "우리 아기들은 지금도 자라고 있어요. 바로 지금이 아빠가 필요한 시기죠..."

비록 올 한 해가 예고된 고난의 시기라 하더라도 남은 기간동안 우리 아이들에게 더 잘하고 싶습니다. 1시간을 더욱 쪼개고 쪼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