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나는 아이들

아이들이 열이 납니다. 우리집 아이들은 감기에 걸리더라도 아빠가 의사니까 걱정할게 없다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선화는 아이들이 기침을 하고 가래가 끓고 열이 나는데도, 청진기를 들고 아이들의 호흡음을 들어 본다던가 설압자를 가지고 입 안을 살펴 보는 적극적인 진찰 과정 없이 집에 있는 시럽 약만 주라고 얘기하는 아빠의 모습이 영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저는 요즘 김해 모 병원 내과에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내과 의사는 저 하나 뿐이지만 병동, 응급실, 외래, 내시경, 초음파 검사등을 혼자 다 처리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병원에서 바쁘게 생활해야 합니다. 특히 외래 환자들을 매일 하루 종일 봐야 하는데...우리 외래 진료실을 찾는 환자들의 80-90%가 바로 감기 환자들입니다.

내과 진료실이지만 소아과 환자들도 많아서 2개월도 안 된 갓난아기를 포함해 감기에 걸린 꼬마 환자들을 매일 만날 수 있는데... 이 아이들을 대할 땐 청진도 하고, 손전등을 사용해 입 안을 보기도 하고, 이경을 써서 고막을 보기도 합니다. 더욱이 요즘 같이 감기가 대유행을 할 때에는 바이러스성 상기도 감염증 환자에 대한 이런 류의 진찰은 거의 기계적으로 이뤄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렇게 해 주지 않는다는 게 선화의 불만이고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다" 는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아이들의 감기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데에는 제가 가지고 있는 오해, 즉... '감기는 병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의식의 저변에 깔려 있는 것도 한 몫 합니다. 의사가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느냐구요? 그러게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은 제가 받았던 내과 수련 과정에서 출발하는 것 같습니다. 대학병원에서 4년간의 내과 수련 과정을 밟을 때 우리들은 병동 담당의로서 진료 현장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대학병원의 내과 환자들은 그야 말로 조금만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중환자들이 많았었기에 우리는 이들을 돌보기 위한 교육을 받아야 했고 극도의 주의를 요구받아 왔습니다. 결국 그러다보니 어느 새 나도 모르게 이러한 중한 질병에만 친숙해져 버렸습니다. 내과 1년차 시절...제가 담당의로 있다가 사망한 환자들의 수만 해도 100명이 훨씬 넘습니다.(아직도 사망 진단서 발부 숫자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질병을 바라 보는 관점도 "양성이냐? 악성이냐" 가 될 정도입니다. 일단 양성이라면 한 숨을 돌리고 쳐다 보게 되고 감기 같은 질환은 아예 걱정도 하지 않지요. 이렇게 중병에 편중된 수련 과정으로 인해(사실 꼭 필요한 과정임에도) ...감기처럼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일반적으로 앓고 있는 질환임에도 특별한 치료가 요구되지 않은 질환에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 거짓말 같은 사실입니다. 사실... 의원이나 중소병원을 찾는 대부분의 내과 환자들이 바로 이 감기 환자들인데 말이죠.

특별한 치료법이 없는 감기는 그야말로 대증요법(증상에 따른 치료)만 사용될 뿐이고 특별한 합병증이 없다면 저절로 좋아지는 경과를 밟기에... 별다른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코가 막혀 숨을 못 쉬고, 심한 기침으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들이 안스럽기만 한데....아빠라는 사람은 뾰족한 치료법은 없고 그저 약 먹고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으니 선화가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진료실에선 감기 환자들에게 이것 저것 다 살펴 보면서 아빠가 집에 있는 자기 아이들에게 그렇게 못하는 건...앞에서 말한 감기에 관한 나름대로의 인식 외에도 최근에 겪고 있는 체력적인 고갈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병원에서 하루 종일 있으면서 체력을 거의 다 소진해 버린 탓에 집에 들어오면 쉬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든다는 것이죠.

물론 집에 오면 잘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저의 일과입니다. 성은이를 늘 안아야 하고...선화가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애들을 보고....그 후 애들을 하나 둘씩 재우는 게 우리 가정의 최대 업무입니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 두고 오는 청진기나 이경 등을 가지고 와서 애들 하나 하나를 진찰하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나 봅니다. 나름대로는 아기들의 기침 소리나 얼굴빛만 보더라도 질병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어쩌면...우리 아이들은 별 일 없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쨋든 이로 인해 '무정한 아빠' 라는 얘기를 듣게 되었으니 미안할 뿐입니다.

(사진은 한창 감기를 앓고 삼남매의 모습입니다. 왼쪽의 형민이는 겉으로 봐도 얼굴이 벌겋게 보입니다. 언제까지나 튼튼할 것 같았던 오른쪽의 시은이도 이번 감기에는 맥을 못 추고 있습니다. )

왼쪽의 성은이처럼 생후 3개월도 안 된 아이가 감기를 앓으면 불쌍합니다. 우리 진료실에도 이런 아기들이 많이 찾아 오는데 그런 아기들을 볼 때마다 성은이가 생각납니다.

실제로 저는 외래 진료실에서도 "감기는 바이러스 질환이고 아직까지는 감기를 낫게 하는 치료약이 없습니다. 지금 쓰는 약들은 그저 증상을 좀 경감시키거나 다른 합병증을 예방하는 정도이고...결국 감기가 나으려면 일정한 시간이 흐른 뒤 몸 속에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가 생겨 바이러스가 제거되어야만 하기에... 당분간은 힘들더라도 견디면서 찬 바람 쐬지 마시고 충분한 휴식과 영양을 섭취하세요." 라고 얘기합니다.

하지만...아이들의 감기가 좀처럼 좋아지지 않자 선화는 세 아이를 데리고 집 근처 소아과 의원을 방문해서 진료를 받고 돌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곳을 다녀온 뒤... 기관지 확장제를 사용한 분무 흡입 치료를 하더라...콧물을 흡입기로 제거하더라...기관지염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얘기하더라는 등의 얘기를 늘어 놓았습니다. 아빠보다 훨씬 믿을 만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이죠...

전...선화의 얘기를 들으며 소아 환자들에 대해 모든 방법을 동원해 도움이 되고자 노력하는 지역의 소아과 선생님들이 참 훌륭하다고 느껴졌습니다.. 물론 내과와 소아과가 감기의 치료에 있어 원론적인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어른과 달리 스스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지는 아이들을 돕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는 노력이 보기 좋았습니다.

어쨋든 이번 감기 건으로 선화에게서 여러 지적을 받은 뒤로 병원에서 감기 환자를 보는 제 태도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뭔가 특별한 배려와 도움을 이들에게 줘야 한다는 고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목 감기 환자들에게 가글액을 추가하는 등...뭔가 작은 것에서 도움이 될 만한 것으로 찾으려 노력합니다.

사실 감기 정도는 전문의가 아니라 의대를 갓 졸업한 일반 의사도 처방할 수 있는 영역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감기에 걸렸다고 내과 진료실을 찾고 있는 현실을 보면... 내과의로서 이 부분에 대해 더 관심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과 의사는 자신의 전문 분야에 맞는 특정 질병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필요하지만...대부분의 사람들이 앓는 '난치병 감기'를 담당해야 할 사람들이기도 하니까요.

어쨋든...요즘은 카자흐스탄에서와는 달리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한국에서의 의사 생활이 가끔씩 힘들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제 아이 하나 제대로 봐 주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 진료 한다고 설쳐 대는 내 모습이 한심하기도 하구요.

우리 세 아이들은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 보냅니다.

가끔 아빠가 운전을 하고 삼남매를 데리고 외출해야 할 때가 되면 선화가 세 아이와 함께 뒷 좌석에 오릅니다.

차만 타면 자는 아이들은...이렇게 서로 머리를 맞대로 자기 일쑤이고 선화의 품에는 성은이가 자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만 있으면 어디로 가더라도 안심하고 따라 가는 아이들...엄마, 아빠만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이 여느 때보다 독한 감기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거의 두 주 동안 세 아이들이 차례로 감기 증상을 앓고 있지요.

시은이와 성은이가 감기에 걸렸다가 나아갈 무렵...형민이가 콜록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어린이 집에서 다른 종류의 감기 바이러스를 가지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형민이가 기침을 하고 콧물을 흘리자...다 나아가던 밑의 두 동생들도 다시 열이 나고 기침, 가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만 2주가 넘도록 계속되고 있는 우리 아이들의 감기로 인해 아이들은 물론이고 저나 선화에게도 무척 힘든 시간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아픈 탓에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선화는 애타기만 합니다.

15개월이 다 되어가는 시은이는 지금 12Kg정도의 체중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래 나이의 아이들보다 체격도 크고 팔, 다리가 굵어 우린 '터프 베이비','우량아' 로 부르고 있지요.

그런데 이번 감기에는 시은이도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떨어질 줄 모르는 기침, 가래에 두 번이나 소아과 의원에 다녀와야 했습니다.

그래도 아침에 아빠가 병원에 간다고 현관문을 나서면 큰 소리로 "아빠..."하고 웃는 게 바로 시은입니다. 시은이는 형민이와는 달리 "엄마" 라는 단어보다 "아빠"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딸이라서 그럴까요?

형민이는 요즘 '사람들에게 인사하기'에 대해 집중적으로 교육받고 있는 탓에 출근하는 아빠에게도 90도로 머리를 숙이고 인사합니다. "아빠..잘 다녀 오세요..."

형민이는 이 인사 말고도 아빠에게 꼭 물어 보는 말이 있습니다. "아빠! 오늘 병원에서 자고 오나요?"  카자흐스탄에서 국내로 들어온 이후 생활비를 충당하느라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섰었는데... 병원에 간다고 해 놓고 밤에도 들어오지 않는 아빠가 싫었나 봅니다. 밤에는 꼭 자기랑 같이 자야 하는데 말이죠...그래서 형민이는 병원에 간다는 아빠에게 밤에 들어올 건지...안 들어올 건지 꼭 물어 봅니다. "아니!...아빠는 저녁에 올거야..형민아! 아빠가 집에 올 때 뭐 사올까?" 이 말을 듣는 형민이의 얼굴이 얼마나 밝게 변하는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그럴 때면...마음이 찡해 오지요.

셋째 성은이도 이제 일 주만 있으면 만 3개월이 됩니다.

2주 전부터는 아빠, 엄마 얼굴을 알아 보는지 우리에게 빙긋이 웃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생후 두 달부터 익히기 시작하는 엄마, 아빠 그리고...언니(시은), 오빠(형민)의 얼굴은 이 아이의 마음 속에 또렷이 새겨지겠지요....

성은이도 가래가 끓는 기침에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감기로 고생하는 통에 지난 2주간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지도 못했고 바깥 세상에 벚꽃이 피는지...목련이 지는지...집 안에만 박혀 있습니다. 4월 5일에 봄 소풍 가기로 한 것도 아기들의 감기가 낫지 않아 이뤄지질 못했습니다.

아이들의 감기가 빨리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선화와 세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산들 산들 불어오는 봄바람을 맞으며 꽃 구경도 하고 마음껏 거닐었으면 좋겠습니다. 지하철 호포역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 줄기도 함께 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이번 감기가 다 나으면 전보다 더 건강하게 해 달라고.... 2004.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