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 이야기

episode 1 : 형민이의 발표회

몇 일 전... 형민이가 다니고 있는 어린이 집에서 재롱 잔치가 열렸습니다. 1년에 한 번 부모님들을 모셔다 놓고 그 동안 배운 율동이나 노래, 학습 내용 등을 발표하는 시간으로, 어린이 집으로선 일년 중 가장 큰 행사입니다.

귀국 직후... 작년 11월부터 우리 아파트 바로 위에 위치한 '예명 어린이집'을 다니게 된 형민이도 이 발표회에 참여하게 되는데 몇 일 전에는 발표회에 흰 스타킹이 필요하다고 해서 형민이랑 단둘이서 손을 잡고 양산 시장에서 하얀 색 스타킹을 사 오기도 했습니다. 형민이는 만 4세 반 아이들로 구성된 개나리 반에 다니고 있는데 어쩌다가 지각한 형민이의 손을 잡고 개나리반 교실에 들어가 보면 그야말로 병아리들만 모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개나리 반 아이들이 어린이 집에 갈 때마다 매고 가는 가방 속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한 비상용 팬티 하나, 아랫 도리가 하나씩 들어 있지요. 아마도 이런 개나리 반 아이들이 이같은 발표회를 준비하려면 몇 달 동안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게다가 재롱 잔치를 앞 둔 시점에서 형민이의 어린이 집 출석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엄마가 출산하는 바람에 외할머니집에 머무느라 1주일 정도 빠져야 했었고 긴 설날 연휴를 지나면서 형민이는 웬지 어린이집에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시은이와 함께 집에서 노는게 더 재미있나 봅니다. 그래도 우린 형민이를 어린이 집에 보내려고 갖은 회유와 압박을 동원해 집 밖으로 내 몰았는데...형민이가 어린이 집에 가야 엄마가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형민이가 정 가기 싫다고 한다면야 억지로 보낼 순 없는 노릇이지요.

드디어 대망의 '예명 페스티벌'이 열리는 날이 다가 왔습니다. 선화는 출산 이후인지라 직접 가 볼 순 없었고 제가 우리집 대표로 형민이를 응원하기 위해 예명 어린이집으로 올라 갔습니다. 난생 처음 학부모로서 아이의 발표회에 참석하려고 비탈길을 오르는 동안 변해 버린 제 모습이 그저 어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를 것만 같던 형민이가 이제 자라서 뭔가를 발표한다고 하니 그 사실이 내심 뿌듯하게 느껴지기도 했지요. 아마 이런 일들을 반복하면서 아이는 자라고 아빠는 늙어가는 모양입니다.

모든 아이들의 부모들이 자기 아이가 특별한 줄 여기지만 형민이는 객관적으로 봐서도 음악적 재능은 타고 태어났습니다. 뭐 그 재능이란게 특별한 건 아니고...음악을 듣는 걸 무지 좋아하고, 보면대에 악보 올려 놓고 노래 부르는 걸 즐기고, 아빠가 기타 치거나 엄마가 피아노 치는 걸 그냥 두질 않고, 한 번 들은 음악은 어떤 상황에서 들은 것인지 절대 잊어 버리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가끔씩 어떤 음악이 스쳐 지나갈 때 형민이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어 보면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암기력이 얼마나 뛰어난 지 놀라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노래와 율동을 한다는 재롱 잔치에서 형민이가 보여 줄 모습이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던 것이죠.

어린이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발표회장은 아기를 응원하러 나온 엄마, 아빠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벤트 회사에서 나온 사회자도 보였고 저마다 아이들의 모습을 담느라 비디오 카메라를 들이 대고 있었습니다.

 왼쪽이 발표회장의 모습이고 오른쪽이 몰려 든 부모님들의 모습입니다. 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엄마, 아빠도 있었지만 손자, 손녀를 응원하러 나온 할머니까지...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몸짓을 바라보면 박수 치고 웃음을 터뜨리고 있습니다.

형민이가 소속된 개나리 반은 모두 세 개의 율동곡을 선 보였습니다.

"다음 순서는...예명 어린이 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아기들의 차례입니다...." 사회자의 소개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우리 아기를 찾느라 기린 목이 되어 버렸습니다. '형민이가 어디 있지...'

형민이는 맨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손에 이끌려 무대 위에 올라 왔습니다. (왼쪽)

다른 아이들보다 키도 커 보이고 화장을 했는지 입술도 빨갛게 칠하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온 걸 알고 있을까?' 영문도 모르고 무대 위에 올려진 어떤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제대로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서성 거리는 아이도 보였습니다. '형민이가 잘 할 수 있을까?'

무대 위에 올려진 형민이를 바라보며 집에서만 보던 형민이를 생각하면 아빠의 염려는 음악이 시작되면서 완전히 깨져 버렸습니다. 음악 소리가 들리자 말자 누구보다 빠르게 어깨와 엉덩이를 흔들며 '우유송'을 불러댄 아이는 바로 형민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어린이 집 선생님이 이런 얘길 하시더군요. " 형민이는요...쑥스럼도 많이 타고 내성적인 면이 있으면서도 어떤 일을 할 때 너무 열심히 해서 주변을 놀라게 한답니다."

얼마나 연습했는진 모르겠지만 형민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뭘 할지 몰라 그냥 서 있는 주변의 아이들과 달리 열심히 손과 허리를 흔드는 형민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야...우리 형민이 잘 한다..." 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랑스러움과 대견함이 가득 밀려 왔습니다.

제가 얼마나 기뻐했느냐 하면...이 날 뒤쪽 한 구석에서 캠코더를 들고 무대 위를 촬영하고 있는 제 모습을 본 사회자가 "저기 계시는 분이 아버지신가요? 아니면 삼촌이세요?..야...저기 저 아버지는 그냥 발표회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만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저렇게 서 계시네요...예! 좋습니다." 라고 지적할 정도였답니다.

이렇게 집이 아닌 장소에서... 형민이만 알고 준비해 왔던 특별한 것들을 구경하게 된 아빠의 맘에는 단순하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피어 올랐습니다. 장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조바심 나기도 하고...무대 위에 서 있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맘이 이렇게 복잡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겨우 만 3살이 지난 형민이를 바라보면서도 이런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데...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열심히 몸을 흔들고 집중하는 형민이의 귀여운 동작을 보며 마치 내가 저 무대 위에 올라 가 있다는 착각을 느끼고 있는 건 내가 아빠이기 때문이고 무대 위에 서 있는 형민이의 감정을 자꾸 떠 올리게 되는 것도 아빠이기 때문이겠지요.

이 날 참석한 아빠들이 불려 나와 게임을 하는 시간도 있었는데 형민이 아빠는 최종적으로 남은 두 사람에 선정되어 선물을 받기도 했습니다. 모든 순서가 끝난 뒤 어린이 집 안쪽 방에서 기다리고 있던 형민이는 아빠의 "형민아..."라는 소리에 특유의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따라 나섰지요. 캄캄한 밤...풍선을 든 형민이의 손을 잡고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는 기분은 세상이 모두 내 것인것만 같았습니다.

episode 2: 셋째의 이름

셋째 아기는 이제 태어난 지 만 3주가 되어 갑니다. 2시간마다 분유를 약 90cc 가량 먹고, 자정이 가까워도 눈망울을 굴리는 올빼미형 인간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몸이 자라고 있습니다. 이미 두 아이를 길러 봤던 터라 셋째의 발달 과정은 자연스럽게 비칠 수밖에 없지만...아기들은 저마다 특색이 있습니다. 이번 아기의 특징은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며 잔다는 것이죠. 낮밤을 가리지 않고 자든지 놀든지 이런 소리를 내는 바람에 베테랑 엄마, 아빠도 긴장하곤 한답니다.

 아직은 눈에 뭐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기에 사람 얼굴도 알아 보지 못하지만 몇 주만 더 지나지만 우릴 보고 싱긋이 웃을 때가 있겠지요? 태어난 지 한 달만에 출생 신고를 해야 하는데 내일 쯤 동사무소에 가서 출생 신고를 하고 호적에 올릴 예정입니다. 아기 이름은 뭐냐구요? 우리 부부는 많은 시간 동안 고민한 끝에 "성은" 으로 정했습니다. 언니가 시은(施恩)인지라...'은'을 돌림자로 사용하고 '성'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로 한 거죠. 시은이는 '베풀 시(施)','은혜 은(恩)' 즉,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곳'이란 뜻의 시은소(施恩所: 법궤의 덮개를 일컫는 말)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혹자는 시은이가 커서 여러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라고 지은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이 이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는 사실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셋째 성은이는 '거룩할 성(聖)'을 가져와서 '성은(聖恩)'이라고 짓습니다. 말 그대로 '거룩한 은혜'입니다. 세상에 거룩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없습니다. 거룩은 하나님의 품성이십니다. 그러기에 '성은'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좋은 이름을 가지고도 잘 못 사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성은이가 되면 좋겠습니다.

episode 3: 가방을 맨 시은이

시은이는 일주일에 4일은 외할머니 댁에서 지냅니다. 산후조리를 하는 엄마를 돕기 위해 자원(?)해서 유배를 떠난 것이죠. 시은이가 떠나고 나니 형민이가 무척 심심해 했습니다. 특히 바깥이 어두워지는 밤만 되면 "형민이 이제 뭐 하지요?(형민이가 지금 심심해요. 뭘 해야 되지요?)" 라고 엄마 맘을 태운답니다.

하지만 시은이도 주일부터 화요일까지는 우리 집으로 돌아 옵니다. 이 때는 아빠가 시은이를 봐 줄 수 있는 여력이 있기 때문에 온 가족이 함께 지낼 수 있는 거지요.

언제부턴가...시은이는 유치원 가방을 메고 아침마다 어린이 집으로 가는 오빠가 부러웠나 봅니다. 이번에 외갓집에서 돌아온 뒤로는 오빠가 애지중지하는 가방에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떨어져 지내 그런지 지난 몇 주 동안 시은이가 자란 모습이 눈에 쏙 들어옵니다.

왼쪽 사진처럼 시은이는 오빠만이 맬 수 있는 어린이 집 가방을 매고 거실을 다니고 있습니다. 손에는 볼펜이 쥐어져 있지요? 전에는 볼펜을 쥐면 무조건 입에 넣고 빠는 게 다였는데 요즘은 종이를 달라고 해서 뭔가를 쓰는 시늉도 한답니다.

시은이가 자신의 가방을 매는 걸 본 형민이는 처음엔 속상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해 합니다. "아하...얘기가 가방을 매네..." 라며 아기 어깨에 두 손을 올리고 기차 놀이를 하지요.

시은이가 매는 또 다른 가방도 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시은이는 이 노란 가방을 매고 지냈습니다.

이 가방을 매고 밥을 먹었고... 이 가방을 매고 이렇게 아빠 팔을 베고 잤습니다. 시은이의 손에는 오빠 물건인 '장난감 비행기 원격 조종간'이 들려 있습니다.

사실 시은이는 동생이 생긴 뒤로 엄마, 아빠의 사랑을 전처럼 독차지하지 못합니다. 성은이가 생기는 바람에 외갓집 신세도 져야 했고 아빠 품에 안기는 행복한 시간도 줄어 들었습니다.

하지만...이렇게 짜투리 시간을 내어 그렇게도 좋아하는 아빠 품에서 잠을 자는 이 순간만은 행복합니다. 이제 겨우 13개월...자칫 마음의 병을 앓을 수도 있지만...여전히 시은이는 엄청난 식욕을 과시하며 퉁퉁하게 자라나고 있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난 주에는 교회의 어느 초등학생에게서 '황비홍'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희소한 머리카락 때문입니다. 하지만 '황비홍' 시은이는 화를 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젠가 머리카락을 많이 주실 거라 믿기 때문이죠.

이렇게 오늘도 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면 또 그만큼 커 있는 아이들을 봅니다. 아이들이 이렇게 자라는 것은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바로 그 은혜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004.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