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민이의 세 번째 생일

형민이의 생년월일은 2000년 10월 5일이고 오늘(10월 5일)은 바로 형민이가 세상에 태어난 지 만 3년 째 되는 날입니다. 형민이는 카자흐스탄에서 첫 돌, 두 돌, 석 돌을 다 맞는 그야말로 카자흐스탄 아이 입니다.

첫 돌을 맞을 때는 할아버지, 할머니 없이 아스타나의 선교사님들만이 모여 형민이의 돌을 축하했었고 두 돌 때는 출산을 위해 선화가 한국으로 들어가기 한달 전에 맞은 이별의 생일이었습니다. 토마토 하나에 촛불을 두 개 켜 놓고 엄마, 아빠만 크게 박수쳤던 일이 아직도 눈 앞에 생생합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생일을 맞습니다.

세 번째 생일이 오면 친구들도 초청하고 그럴 듯하게 음식도 올려 놓겠다고 약속했었지만 이번 생일도 그냥 지나 가고 맙니다. 이 방 저 방에는 카자흐스탄을 떠나기 위해 싸 놓은 짐 박스들로 가득 차 있고 다음 날 우리 집에서 열리는 선교사 협의회 모임 준비로 분주한 부모의 마음은 형민이의 생일을 제대로 챙겨 줄 여유를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왼쪽은 2001년 10월 5일 형민이의 첫 돌 때의 사진이고 오른쪽은 2002년 10월 5일 두 돌 때의 사진입니다.

아기 옆의 두 사람의 모습은 변함이 없는데 형민이만 부쩍 자란 게 눈에 띄입니다.

그래도 이번 생일 부터는 조연이 한 명 더 늘었습니다. 오빠를 무척이나 좋아하고 따르는 동생 시은이가 형민이와 함께 자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시은이는 아침에 일어나 눈을 뜨면 아직도 자고 있는 오빠의 얼굴을 만지작 거리며 같이 놀자고 깨웁니다. 오빠 볼에 입술을 비비고 오빠 배 위에 올라 타고 형민이를 흔들어 깨우지요. 마침내 오빠가 눈을 뜨면 시은이는 입을 크게 벌리며 활짝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오빠...오늘도 재미있게 놉시다..."

이제 9개월 된 시은이가 만 세 살의 형민이보다 용감할 때도 있습니다.

아직도 형민이는 헤어 드라이어 소리나 진공 청소기의 기계음을 겁내고 도망 다니는데 비해 시은이는 소리 나는 곳으로 기어 가 보는 대담성을 보이지요. 형민이가 시은이 만할 적엔 생각도 못했던 일이거든요.

그래서 우린 시은이가 나중에 크면 당찬 여자 아이가 될 거라고 짐작해 봅니다. 반면에 형민이는 아주 감수성이 풍부한 아이로 자라고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자면...우리가 출석하는 아스타나 장로교회의 주일 예배 기도 시간에는 잔잔한 배경 음악이 깔리도록 카세트를 켜 놓습니다. 그런데 그 배경 음악이 간혹 아주 슬픈 멜로디일 때가 있습니다. "갈보리 산 위에..." 라든가 "예수 나를 위하여..." 같은 곡들이 슬픈 바이올린 연주로 들릴 때가 바로 그럴 때입니다. 이런 곡조가 흘러 나오면 형민이는 그만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왜냐구요? 슬프기 때문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은 조그만 꼬마의 훌쩍거리는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신기하다며 고개를 갸우뚱 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형민이는 음악을 통해 느껴지는 정서를 순수하게 받아 들이고 표현할 줄 하는 아이로 자라고 있습니다.

언어 영역

만 세 살 된 아이는 뭘 할 수 있을까요? 요즘 형민이는 속옷부터 잠바까지 혼자서 옷을 입을 줄도 알고 의외로 많은 것들을 알아 듣고 표현합니다. 아빠로서 형민이를 볼 때마다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어떻게 저걸 알았을까?'

하지만 형민이에게는 카자흐스탄 생활로 인해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언어 영역이지요. 형민이는 아마 한국에서 사는 동갑내기에 비해 한국 말이 늦을 것 같습니다. 물론 형민이의 한국어 실력은 이미 경지에 올라 있긴 합니다.

"아빠...하늘이 이쁘지요? 하하...구름이 이쁘네..."

"아빠...오늘은 뭐 하지요? 아....바자르(시장) 가서 나물 사고...람스토르(슈퍼) 가서 아기 분유 사고 젤리(형민이 과자) 사고....하지요?"

형민이는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표현합니다. 그러나 형민이의 말을 가만히 들어 보면 아직 의문사(언제, 어디서, 왜 등등...)에서 혼란을 보이고 있고 의문문의 패턴도 제대로 익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령 자신이 뭘 하고 싶다는 표현을 하려면 "형민이....하고 싶어요.." 라고 얘기 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질 않고 "형민이....하지요?" 라는 이상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아마 이건 부모만 알아 듣는 문법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어투의 말을 들으면 금새 형민이가 뭘 묻고 있는지 알아 채고 바른 표현으로 대답해 줍니다. "형민이 토마토 쥬스 먹고 싶지요?" 이런 일은 형민이가 깨어 있는 동안 계속 반복됩니다.

그렇지만 형민이가 모국어를 익히는 환경은 과히 좋지 못한 편입니다. 집 안에서는 아빠, 엄마가 듣는 저녁 9시 뉴스(러시아어 하바르 TV 뉴스) 외에는 러시아어에 노출될 기회가 없지만 집 밖에 나서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모든 얘기가 한국어 아닌 외국어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놀이터에서 흙놀이를 하고 있어도 또래 꼬마 아이들이 러시아어로 말을 걸어 오고 마가진(가게)에 과자를 사러 가도 상점 아줌마는 어김없이 러시아어로 얘기합니다. 가장 심각한 곳은 교회입니다. 교회에 가면 3시간 정도 계속 러시아어로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듣고 유치부 활동까지 하게 되니 그야말로 형민이에게는 이상한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던 중 형민이는 최근 들어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환경에서는 러시아어로 얘기한다고 방언 비슷한 소리를 내면서 돌아 다니고 엄마, 아빠와만 함께 있을 때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보통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점입니다. 형민이의 뇌 속에서 두 가지 언어를 구별하고 있는 걸 보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간혹 러시아어가 아니라 카자흐 어를 TV나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게 될 때면 형민이는  또 다른 고민에 빠지는 것 같습니다. 카자흐어는 액센트나 발음이 러시아어와는 또 다르거든요...'저건 또 무슨 소리지?'

형민이 만 2살 5개월 때의 사진입니다. (2003년 3월)

이 때쯤부터 형민이는 책상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를 일정한 영역에 붙이는놀이를 즐겼습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제가 주로 그림을 그리고 형민이는 그저 줄만 긋는 수준이었는데...요즘은 제법 세련되게 한 쪽 면을 색칠할 정도로 형민이의 실력이 늘었답니다.

수리 영역

만 세 살이 되는 형민이에게서 최근 발견되는 변화는 두 자리 숫자를 읽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전에는 두 자리 수를 보더라도 그냥 숫자 하나 하나씩 읽고 다녔습니다. 형민이가 처음 숫자를 알게 되었을 때 세상에 있는 모든 숫자를 다 읽으려 했습니다. 건물에 씌어진 주소나 지나가는 버스에 쓰여진 숫자, 과자나 장난감에 붙은 조그만 숫자들도 모조리 다 읽으며 재미있어 했던 형민입니다. 얼마 전 우리 집 앞에 있는 박물관에 간 적이 있었는데 목걸이, 귀걸이 등 보석류가 전시되어 있는 방에서 어른들은 휘황찬란한 금은 보석에 정신을 팔고 있었지만 형민이만은 그 옆에 붙은 조그마한 숫자 스티커만 보면서 "칠(7), 삼(3)...." 이라고 중얼거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숫자 2개를 동시에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아마 한 달 쯤 전인 것 같습니다. 여느 때 처럼 세 식구가 함께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형민이가 제 등 뒤 벽에 붙은 달력을 가리키면서 "엄마 빨간색 일, 이가 있네요?" 하고 물었습니다. 빨간색으로 씌여진 12 라는 숫자를 보고 "일 이" 라고 발음하는 걸 보고 우린 "형민아 십이 야" 라고 말해 줬고 다른 두 자리 숫자들을 몇 개 더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날 이후로 두 자리 숫자를 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간 혹 앞의 숫자를 읽고 뒤에 "십" 이라는 단어를 붙여야 함을 깜빡 할 때도 있지만 이젠 응용력을 발휘해서 87, 94,26 같은 다양한 숫자들을 읽고 있습니다. 숫자를 읽는데 필요한 연관성이나 법칙을 스스로 체계화 시키는 것을 보면 신기하기만 합니다. 87을 팔, 칠의 순서보다는 칠, 팔 순서로 읽는 등 완벽하지는 않지만 요즘 숫자는 형민이에게 가장 신기한 부분입니다.

형민이의 놀이의 기본은 엄마, 아빠가 하는 걸 흉내내는 것입니다. 설거지 하기, 걸레 빨기, 방 닦기, 냄비에 수도물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기, 건전지를 충전지 같이 생긴 홈에 집어 넣기, 다리미질 흉내내기, 아기 기저귀 갈아주기, 방 한 쪽에 장난감 자동차를 주차하기("주차장 어디지요?" 하고 물어 본답니다.), 아빠가 밖에 나갈 때 돈 쥐어 주기, 물 배달 아저씨 왔을 때 물 값 건네 주기....

모든 게 형민이의 놀이입니다.

음악 영역

모든 부모가 자기 아이가 천재라는 착각에 빠진다고들 하지만...우리 부부가 빠진 착각은 바로 형민이에게 놀라운 음악적 재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민이는 한 번 들은 특정한 노래의 박자와 리듬을 정확히 파악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른도 구사하기 힘든 리듬이나 멜로디를 정확한 음정으로 반복하는데...아마 이건 부모가 아니면 느끼지 못할 사실입니다.

형민이가 좋아하는 음악은 미국의 Hosanna Integrity 의 찬양 CD 들과 동요 CD 몇 가지입니다. 대개 즐겁고 리듬감 있는 음악들이죠. 형민이는 우리 집에 있는 수십가지의 음악 CD 들을 자유자재로 오디오에 넣어 들을 줄 알고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들을 리모콘으로 선택할 줄 압니다. 어떤 곡이 어느 CD에 있는지도 정확히 알고 무엇보다 다음 나올 곡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같은 곡이 다른 CD나 테이프에 있을 경우에는 "어! 여기도 있네.." 하면서 자신의 memory list에 올려 놓지요. 음악을 들으면서 형민이가 하는 놀이 가운데 "찬양 인도" 놀이도 있습니다. 항상 보면대 위에 찬송가를 펴 놓고 CD 속의 찬양 인도자가 하는 것처럼 음악을 리더하는 형민이는 갑자기 음악을 정지시키고 자신의 이야기(멘트)를 곁들이기도 하고 난데없이 헌금 시간을 가지기도 합니다. 성경을 펴 놓고 설교 하는 건 기본입니다.

형민이는 드럼 치는 것도 좋아합니다.

최근 일년 동안 전 이곳 학생회관 지하 스튜디오의 드럼 연습실에서 드럼을 계속 배워 왔습니다. 아침 일찍 나설 때마다 형민이는 아빠를 보내기 싫어 하며 물어 봅니다.

"아빠..어디 가요?"

"응...아빠 드럼 치러..."

"아...드럼...다녀 오세요..."

언젠가 형민이를 직접 데리고 연습실에 가기도 했기에 형민이는 아빠가 드럼 치러 간다고 말하면 아빠와 놀고 싶어도 알았다고 하면서 아빠를 놓아 줍니다. 그러던 중 형민이는 우연히 나영이네 집에서 빌려 온 "방귀대장 뿡뿡이" 비디오 중에서 '드럼 놀이'를 하는 장면을 보고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위 사진처럼 간이 드럼을 만들어 놓고 매일같이 두드리고 있지요. 사진은 형민이가 만 2년 6개월 되던 지난 4월에 찍은 사진입니다.

드럼 외에도 형민이는 건반을 좋아합니다.

최근까지는 엄마가 혼자 피아노나 신디사이저를 연주하면 울면서 같이 해야 한다고 떼를 썼으나 요즘 들어선 엄마가 연주하는 걸 듣기도 하는 등...착한 아이로 거듭나고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도 형, 누나들을 피아노 옆으로 모이게 한 뒤 자기가 직접 건반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비록 피아노의 소리와 형민이의 곡조가 다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이 박자에 맞춰 건반을 움직이는 형민이의 날렵한 손놀림에 혀를 내두른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형민이가 중학교 졸업 때까지는 피아노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본인이 하고 싶어 해야 하겠지만...형민이의 음악성을 보고 있으면 재미있게 유도하기만 한다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생과의 관계

동생과의 관계요? 많은 분들이 동생이 생기면 큰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거나 성격이 변한다고들 하지만 형민이에게만 예외인 것 같습니다. 형민이는 동생 시은이를 극진히 보살피기 때문입니다.

이미 선화가 올린 our story 글들을 봐서 아시겠지만 시은이를 하루 24시간 붙어서 밀착 경호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형민입니다. 형민이 눈에 시은이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고 비쳐지면 이내 엄마에게 이 사실을 통보하지요. "엄마...애기가 침대에서 내려 오려고 해요..."

형민이가 있기 때문인지 시은이의 언어 발달은 형민이 때보다 빠른 것 같습니다. 8개월인 지금..."가자...", "엄마", "아빠" 같은 소리를 정확하게 내고 엄마와 아빠를 번갈아 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 등 갓난아기 답지 않은 행동도 곧잘 합니다.

둘은 하루 종일 이렇게 거실에서 함께 지냅니다. 사진처럼 시은이는 요즘 위태위태하게 혼자 서려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뭐든지 바닥에 놓여 있으면 그걸 받치고 일어 서려고 하지요.

이렇게 두 아이가 늘 함께 붙어 있다 보니 형민이가 혼자 자랄 때보다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훨씬 많이 생기고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2003년 10월 5일...형민이의 세 번째 생일 날...선화는 라이스 피자를 만들었습니다. 라이스 피자가 뭐냐구요? 쌀밥으로 만든 피자입니다. 이건 새로 올라온 KOICA 한국어 단원에게서 배운 요리인데 빵 대신 밥을 깔고 쌈장과 케찹을 바른 뒤 모짤렐라 치즈와 김치 그리고 다른 토핑 재료들을 올려 후라이팬에 잠깐 올리면 완성되는 피자지요. (우리는 김치를 못 구해 양배추 김치를 사용하지만 그래도 맛있습니다.)

우린 멋진 축하 잔치 잔리를 만들지 못해 미안하지만 형민이는 엄마, 아빠가 분주하게 자기를 위해 뭔가 준비하는게 좋은 모양입니다.

엄마가 형민이가 세 번째 생일을 맞았다고 일러 주자 손가락으로 "3" 이라고 표시하고는 흐뭇해 합니다.

시은이도 처음으로 오빠의 생일상에 앉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리는 우리 가족의 호칭은 "형민이 네"입니다. 형민이는 우리 가족의 대표나 다름 없습니다. 형민이 손을 잡고 집 밖을 나서면 바자르에 가던지 람스토르에 가던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세 살밖에 안 된 아들의 손을 꼭 잡고 걸어 가도 내 맘 한 구석이 든든해지는 걸 느낍니다.

오늘 만 세 살이 되는 형민이의 생일 날 우리는 라이스 피자를 앞에 두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형민이가 만 세 살이 되었어요. 한국과 카자흐스탄에서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이렇게 무사히 형민이가 자랐답니다. 앞으로도 형민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게 해 주세요. 그리고 엄마, 아빠도 더욱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형민이를 잘 기르도록 도와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는 짧았지만 우리의 감사는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2003.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