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이란 말은 마세요.

요즘 우리 생활에는 '마지막'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 다니고 있습니다. 마지막 00 교회 진료, 마지막 바라보예 방문, 마지막 운전, 마지막 손님, 마지막 라면 1봉지, 마지막...마지막...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카자흐스탄 시절을 마무리 짓는 요즘... 우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방문객들과 분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카자흐스탄에서의 나머지 시간들이 덧없는 아쉬움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약속하는 만남들로 채워지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두 주간 동안 저희 가정이 만났던 분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방문 기간

누가

무엇을

2003.9.16-9.18

알마티 시온 교회의 김창식 선교사님 방문

아스타나 현지 정탐, 2박 3일 간 묵으심

2003.9.24-9.27

알마티 한카병원의 국제협력의사(치과) 장재필 선생님

바라보예 방문

2003.9.26

알마티 라큼 교회의 최진규 선교사님

남성택 선교사님과 함께 만남

그 와중에... 어제는 지난 2년 반 동안 우리 가정을 든든하게 지켜 주었던 자동차를 새 주인에게 넘겨 주었습니다. 자동차를 팔기 위해 3주 동안 아스타나의 유력한 세 가지 신문에 광고를 게재해 왔었는데 마침내 차를 사겠다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흰 차체에 빨간 외교 번호판이 유난히 선명했던 우리 서니(닛산 자동차의 Sunny)를 팔게 된 것입니다. 깨끗하게 세차를 한 뒤 약속 장소로 나가 차 열쇠를 건네 줄 때 밀려 오는 가슴 뭉클한 섭섭함이란...그야 말로 가족을 떠나 보내는 듯한 감정이었습니다. '안녕...서니야...'

지난 주에는 우리 가족과 함께 카자흐스탄에 왔다가 다시 함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알마티의 장재필 선생님(국제협력의사, 치과)이 처음으로 아스타나를 방문해 주셔서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어제(토요일)는 장 선생님이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는 바라보예 국립 공원을 아스타나에서 활동하는 국제협력단(KOICA) 가족들과 함께 다녀왔는데 덕분에 우리 가족도 다시 한 번 가을 바라보예를 볼 수 있었지요.

바라보예 방문에는 아스타나에서 활동하는 국제협력의사(외과) 김대동 선생님 가정과 구정아(특수교육), 이순영(한국어), 김영우(태권도) 선생님도 함께 했는데 아이 포함해서 모두 12명이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다녀 왔습니다.

사진은 체바치예 호수를 배경으로 한 사진인데 여름에 비해 물 빛이 한 층 더 짙어 보입니다. 호수도 이제 겨울 준비를 하는 모양이지요.

사실 아스타나는 지난 9월 25일에 눈발이 날렸고 26일 아침에는 기온이 영하 4도까지 내려가는 등 초겨울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우리가 바라보예를 방문했던 날 만큼은 기온도 올라가고 햇살도 포근하게 비치는 좋은 날씨를 보였습니다.

협력의사(외과) 김대동 선생님 가정은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첫 딸인 나영이와 우리 집 형민이는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형민이가 나영이보다 한 살 많긴 하지만 둘은 서로를 너무 좋아하고 노는 방식도 거의 흡사해서 함께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냅니다.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마다 장난감, 책 등을 가지고 자기들만의 대화를 나누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이 방 저 방을 뛰어 다니는 등...오랜 우정을 쌓아 왔지요.

또래 한국 친구들이 없는 아스타나 상황으로선 김선생님 네의 나영이와 형민이는 서로에게 딱 맞는 둘도 없는 놀이 친구였지만...이제 3주 후면 둘은 누구보다 친했던 단짝 친구를 잃고 맙니다.

하지만 둘은 오늘도 변함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고 미소를 지어 보내고 있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듭니다. 바라보예에서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사진을 찍는 등...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지요. (위 사진) 어쩌면... 아이들이 옳은지도 모르겠습니다. 다가올 수 많은 걱정거리들을 미리 염려하기 보다는 오늘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근심은 부질없는 것이 될테니까요.

아스타나에서 북쪽으로 300Km 지점에 떨어져 있는 바라보예 국립 공원에 대해선 앞의 많은 글에서 소개했었기에 부연은 생략하겠습니다.

옆 사진은 바라보예 국립 공원에 있는 큰 호수들 중 하나인 '슈치 호수'입니다.

이미 차가와진 호수 바람을 맞으며 지난 여름의 추억이 깃든 호숫가에서 넘실 거리는 푸른 물결을 보며 마지막 시간을 후회없이 보냈습니다. 선착장에 서서 호수와 하늘과 주변의 산들을 다시 한 번 마음 깊숙히 담아 두었습니다. 

슈치 호수에서 점심 시장기를 참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바라보예 호숫가로 돌아와 컵라면과 빵 등으로 때 늦은 식사를 하는 것으로 마지막 바라보예 방문을 접어야 했습니다.

바라보예도 마지막 방문이었지만 지난 주 금요일에는 지난 2년 동안 2주에 한 번씩 꼬박 꼬박 방문해서 진료해 왔던 베라 교회의 마지막 진료 시간이 있었습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진료 가방 속의 약을 책상 위로 옮겨 놓은 뒤 한 사람 한 사람씩 혈압을 재고 증상을 묻고 필요한 약들을 챙겨 주는 시간이 흘러 갔습니다. 그 동안 쭉 고혈압 약을 먹어 오던 할머니들에게는 '이제는 마지막' 이라는 생각이 들어 두 달 치의 약을 넣어 드렸는데 모두의 눈에는 섭섭함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습니다.

진료를 마친 뒤 일어나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베라 교회의 담임 사역자인 '세르게이' 가 다가와 '당신을 위해 특별한 순서를 순서가 준비되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알려 왔습니다. 잠시 후....차이가 들어 오고 어디서 구했는지 예쁜 또르뜨(케잌)도 두 개나 상 위에 놓였습니다.

송별회가 준비된 것입니다. 다른 할머니가 속삭였습니다.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을 그냥 보내지 않을 겁니다."

착한 사람들...따따르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가난하고 추운 동네이지만... 지난 2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 있어 준 젊은 한국인 의사를 위해 정성을 다해 마련했다는 자리를 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언어 소통을 완전히 할 수 없다는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고작 한다는 말이 "정말 고맙습니다", "저도 꼭 다시 이곳을 방문하고 싶습니다." 뿐이었지요.

그들에게 장차 아스타나에 기독 의료기관을 세우겠다는 꿈을 얘기했더니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거라며 함께 기뻐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따지고 보면 아스타나에서의 교회 지원 활동이 가장 먼저 시작된 곳이 바로 이 곳 베라 교회(믿음 교회) 에서였습니다. 2001년 10월부터 나사렛 교회의 박유석 선교사님이 개척한 이 곳에서 진료 활동을 펼치며 이들과 부대끼면서 '섬기는 것'에 대한 생각들과 '선교지에서 내가 해야만 할 일'들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오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지요.

그들에게 이제 마지막이라는 말을 차마 꺼낼 수 없었습니다. 공허한 기대를 남기기도 싫지만...이젠 그만이라는 얘기도 하기 싫었습니다. 따뜻한 차이와 정성스럽게 준비한 케잌을 먹으며 '장기 의료 선교사로서 카자흐스탄에 나오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지난 여름과 같은비젼 트립(의료 선교 활동) 형태로 자주 찾아 오겠다' 는 약속을 남겼습니다. 저로서도 아스타나를 잊지 않으려면 이 곳으로 자주 단기 의료 선교 활동을 나오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하심이 나의 앞 길을 밝혀 주시겠지요.

그러기에... 베라 교회에서의 마지막 진료는 마지막이 아니었습니다.   2003.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