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거름 때의 저녁 놀이터 

까작의 여름 날씨는 그 자체 만으로도 정말 이국적입니다. 한국에서의 여름 더위는 '찜통 더위', '물 더위' 라는 표현 처럼 습기가 가득한 무더위 지요? 해마다 여름이면 축축하게 땀에 젖은 셔츠를 입고 여기 저길 뛰어 다녔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은 지금가 장마가 한창인 것 같은데...아마 그 어느 때보다 이 무더위 라는 단어가 실감이 나는 시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까작스딴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 때 뿐이고 이내 메마르고 뜨거운 기운이 지면을 구워 버립니다. 낮에는 걸어 다니지 못할 정도로 강한 태양 광선이 비치는데 이렇게 더울 때는 건물 안이나 그늘에서 더위를 피해야만 합니다. 이마나 등에서 땀이 주루루 흘러 내리는 더위가 아니라 마치 건식 사우나 속에서 뜨거운 열기를 호흡해야 하는 더위이기에 어떤 분들은 한국보다 견디기 쉽다고 말들 하시더군요. 여름 낮 아스타나의 경우 기온이 40도 까지 올라 갑니다.

하지만 이런 여름에도 아침이나 저녁에는 쌀쌀한 기온을 보입니다. 아침 9시 정도 집 밖을 나서면 싸늘하고 알싸한 기운이 온 몸을 휘감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전 개인적으로 이 순간을 가장 좋아합니다.) 공기 내 수분 함유량이 적다 보니 열이 대기 중에 오래 저장되지 못하고 해가 지면 이내 식어 버리고 다음 날 다시 지면이 달아 오를 때까지는 마치 늦가을 처럼 싸늘한 공기를 만드는 것이죠. 그래서 필리핀 같은 곳에서 온 선교사들은 여름 날씨가 이상하다면서...적응의 어려움을 자주 토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곳에서 여름 해는 11시가 되어야 지기 시작합니다. 물론 6월 21일 하지 즈음에는 11시 반이나 되어야 어두워지지만 요즘 같은 7월에는 보통 11시가 되어야 어두워지지요. 위도가 높은 지역으로 갈 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서 알마티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아스타나(북위 51도)는 30분 이상 여름 해가 늦게 지는 곳입니다. 이렇게 여름 해가 길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활동 시간도 길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저녁 9시 정도 되면 더위는 한 풀 꺾이고 시원해 지기 시작하는데 이 때가 바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밖으로 나오는 시간입니다. 하루 종일 뜨거운 햇살을 피해 집 안에 피해 있던 사람들이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기 위해 집 앞 놀이터와 공원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이 시간은 그야말로 까작스딴 사람들의 생명선과도 같은 시간이지요.

이 때가 되면...우리 가족 역시 아파트 앞 놀이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이 대열에 합류합니다.

더운 햇살에 검게 그을린 제 모습이지만 '장난꾸러기 형민이'와 '만만치 않은 시은이'는 아빠를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형민이와 함께 있으면 시끄럽습니다. 얼마나 질문을 많이 하고 종알거리는지....그래도 말을 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형민이를 보는 일은 더 재미있어졌습니다. 무심코 털어 놓는 말을 통해 형민이의 속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고 형민이가 뭘 보고 자라고 있으며 뭘 원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형민이가 구사하는 문장에는 일부 조사와 접속사가 아직 불완전합니다. 하지만 시간의 순서도 정확하고 사용하는 단어도 엄청 늘었지요.

"형민이 키가 작아(진지한 눈빛으로)... 교회 가면 아빠가 기타 쳐... 형민이는 의자에 앉아... / 나중에 형민이 키가 크면(손으로 크게 표시하면서).... 형민이가 기타 쳐... 아빠 의자에 앉아..."

번역하면 "형민이는 지금 작아요. (그래서) 교회 가면 아빠가 기타를 치고 형민이는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해요. (그러나) 형민이가 나중에 키가 크면 형민이가 기타 칠 거예요. 그 때는 아빠가 의자에 앉아 있어야 해요."

주일은 교회당으로 가는 특별한 시간입니다. 형민이의 눈에는 예배 전에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인도하는 아빠의 모습이 퍽이나 좋았나 봅니다. 그리고 자기도 크면 그렇게 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형민이로부터 직접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제 맘 역시 뿌듯했습니다. 뭐랄까....완전히 이해하진 못하고 있겠지만...그래도...내 아들에게 앞으로 찬양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심어 준 것 같아 그 사실이 감사했습니다.

주일 예배를 드린 뒤에는 온 교인이 모두 한 식탁에 앉아 빵과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습니다. 집에서 식사 전에 늘 기도하던 것을 떠 올린 형민이는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사람이 빵을 먹고 있을 때 큰 소리로 "아니야...형민이(가) 기도 하고 먹어야지..." 라고 말하는 바람에 모두들 먹던 것을 중지하고 다시 손을 모아야 했습니다. 모두가 눈을 감은 것을 확인한 형민이는 기도를 시작했는데 또록또록한 목소리로 집에서 하듯이 (자기만 아는) 어떤 어떤 사실에 감사드린다는 내용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 아마 형민이가 최초로 드린 교회에서의 대표 기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대부분의 현지인 성도들에게는 만 3살도 안 된 아이가 여러 사람들 앞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며칠 전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여름 옷을 사러 나갔습니다. 우리 아이들의 옷은 대부분 한국을 떠나 오기 전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들인데 주로 봄, 가을 옷들이 많았습니다. 선화가 지난 겨울에 들어오면서 가져온 겨울 옷도 많고....결국 여름에 입을 아이들의 옷만 부족했습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아스타나 시내 여기 저기를 다니며 예쁜 옷들을 고르기 시작했습니다. 아스타나에도 아동복 전문 매장이 최근 들어서고 있는데 4개월 쯤 전부터 '베네통' 매장이 문을 열었고 시티 마켓 1층에도 고급 아동복 코너가 생겼습니다. 물론 이전에도 미라-씨풀리나 거리의 '푸차'에 가면 아이들 옷만 파는 곳이 있긴 했었지만 대형화, 고급화 추세는 최근 들어 생기는 경향인 것 같습니다. 그 만큼 아스타나에 그런 옷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다는 얘기겠지요.

왼쪽 사진이 선화가 고른 시은이 윗도리입니다. 어릴 때라야 소매 없는 옷을 맘대로 입을 수 있다면서 하나 고른 것이죠. 시은이 옷을 고르면서도 자기 옷을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즐거워 하는 선화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딸을 키우는 엄마의 맘이 어떤 것인가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녁 9시....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아파트가 모여 있는 주택가에는 길게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때가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오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말라죠즈니'라고 불리우는 지역인데 주로 아파트가 밀집된 곳입니다.  아파트 종류도 다양해서 새로 지은 좋은 아파트에서부터 금방 쓰러질 것 같은 낡은 아파트까지... 다양한 건물들이 이 지역에 모여 있습니다 .

까작스딴의 주거 공간은 크게 아파트와 땅집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러한 아파트 주거 공간의 특징 중 하나는 아이들이 놀 수 있는 놀이터를 우선적으로 배려한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은 한국보다 더욱 철저하고 엄격하게 지켜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개의 아파트 단지가 있으면 1-2개의 놀이터는 기본적으로 붙어 있고 심지어는 놀이터가 3-4개씩 붙어 있는 것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광경입니다. 게다가 놀이터에는 낡고 구식이긴 하지만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그네, 미끄럼틀, 축구장, 흙장난터를 비롯해서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놀이 기구(한국의 놀이 동산에서는 볼 수 있는 스릴 있고 위험해 보이는 기구)까지 갖춰 놓고 있지요.

바로 이 놀이터가 저녁 해거름에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 됩니다.

왼쪽 사진은 놀이터 한 쪽에서 흙장난을 하고 있는 형민이의 모습인데 그늘 진 아파트 한 쪽에는 유모차를 탄 아이들과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형민이는 전용 흙장난 놀이 기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놀이 세트가 없었고 빈 그릇이나 PET 병 같은 것으로 흙장난을 했었는데 다른 아이들이 좋은 도구를 가지고 흙을 퍼 담는 걸 본 선화가 형민이를 위해 람스토르에서 특별히 사 준 것입니다. 그 안에는 삽, 양동이, 채 등등...없는 게 없지요.

저녁이 되면 형민이는 비닐 봉지에 자신이 아끼는 흙장난 도구를 차곡 차곡 넣은 뒤 아파트 계단을 걸어 내려가 놀이터로 향합니다. 물론 아빠, 엄마, 시은이도 다 동행하지요. 시은이의 경우는 주로 아빠가 안고 있습니다.

 

사진에 보이는 것이 이곳 놀이터의 대표적인 그네입니다. 우리 나라 그네와 비슷하긴 하지만 주로 철봉으로 이루어져 있고 옆에 여자 아이가 타고 있는 것처럼 앉는 게 아니라 그냥 달라 붙어 타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많습니다.

우리 뒤쪽으로는 보이는 것은 좀 큰 남자 아이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축구장인데 사방을 철그물로 쳐 놓고 축구 골대를 양쪽에 설치해 놓은 꽤 훌륭한 체육 시설입니다. 이런 시설은 한국에선 온 우리가 볼 땐 부러운 점입니다. 우리 나라 같으면 어디 아파트 단지에 저런 공간을 놔 두겠습니까? 아파트 몇 동 더 짓든지...주차장으로 만들어 버리겠지요?

보이는 건 또 다른 놀이터의 미끄럼틀입니다. 사실 지금 형민이가 놀고 있는 것은 통나무를 매달아 놓은 그네 비슷한 놀이 기구인데 아빠하고 같이 통나무에 올라가서 흔드는 걸 좋아합니다.

물론 이것보다 좀 더 괜찮아 보이는 미끄럼틀도 있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한국보다 미끄럼틀의 품질(?)은 좋지 못합니다. 하지만...저희 집 앞만 해도 3-4개의 놀이터가 밀집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충분한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한국보다 나은 점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리 가족이 이렇게 놀이터에 나오면 일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이미 몇 해 동안 이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알고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간접적으로 우리가 외국인이고 심지어 한국에서 왔다는 것 까지도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게 말을 붙여 오는 사람들은 주로 남자 꼬마들입니다. 주로 묻는 내용은...얼마나 이곳에서 살았냐? 형민이가 지금 무슨 말을 했냐? 같은 것들이고 함께 놀기를 원하는 아이들입니다. 간혹 공을 가지고 나오는 날이면 여러 아이들이 같이 축구하자고 들어 붙기도 하지요.

형민이도 친구를 사귀는데 주로 잘 놀아 주는 누나들이나 너그러운 형이 그 대상입니다. 아니면..자기 또래의...그러니까 러시아어도 잘 못하는 꼬마들이 주로 형민이의 친구들입니다.

지금 사진에 보이는 꼬마도 흙장난하면서 사귄 친구인데 지나가는 개가 짖자 계단 위에서 함께 돌멩이를 던지며 괴성을 지르는 등...말은 안 통해도 잘 어울려 놀았습니다 .

간혹 오후에 비라도 내리고 난 다음이면 저녁 놀이터에서 마시는 공기는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신선합니다. 광활한 까작 초원을 가로 질러 온 공기는 빗줄기에 한 번 걸러지고 나면 자연 그대로의 맑은 공기입니다. 이 곳에서 두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는 것...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주신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름이 지나갈 때까지 우리의 저녁 산책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때로는 다른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이렇게 놀이터에 함께 모여 아이들의 흙장난을 구경하고 그네를 타고 한가로움에 젖어 있다 보면 마치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고향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까작스딴 생활을 하면서 겪게 되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가끔은 이곳 사람들에게 환멸감을 느끼게 될 때도 있었지만 그 모든 감정이 치유되고 회복된 것은 바로 이 저녁 놀이터 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해거름의 저녁 놀이터는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 주고 다시 한 번 일어설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휴식처였습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우리는 늘 삶이 메마르지 않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끊임없이 필요로 합니다. 늘 새로움으로 입혀 주시는 그 분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놀이터에서의 시간을 통해서도 우리 가족을 어루만지고 계셨습니다.  2003.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