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이름 - 고려인

 우리 가족이 까작스딴에 와서 살게 된 뒤 알게 된 놀라운 것 중 하나는 이곳 까작스딴에 한국인이 10만명 이상이나 살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한국에 있을 때에도 신문이나 TV를 통해 언젠가 이 사실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었지만 그 때는 그저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 갔던 뉴스 중 하나일 뿐이었는데 막상 이곳에 와 보니 정말 우리와 똑같은 한국 사람들이 '고려인' 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면서 까작스딴 국민으로 살아 가고 있는 현실을 눈으로 목도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구 소련 지역에서는 '고려인' 으로 불리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미 알려진 대로 1937년 경 펼쳐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극동 지방에서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사람들의 자손들입니다.

하지만 지금 까작스딴에서 살아가고 있는 모든 고려인들이 1937년도에 강제 이주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큰 오류가 있습니다. 그들 중 상당수는 1937년도가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뒤인 해방 후에 소련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해방 이후 한반도에 몰아 닥친 새로운 사상 '사회주의'에 큰 기대를 걸고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던 사람들은 한국인의 독특한 능력을 살려 소비에트 연방 내에 정착하면서 문인, 과학자, 언론인, 기술자, 학자, 의사 등 각 방면에 뛰어난 실력을 나타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후예들이 구 소련권에 남아 소수 민족으로 자리 잡고 살고 있고 독립된 까작스딴에도 남아 있는 것이죠. 이 보다 더 최근에 소련 땅으로 들어온 한국인도 있는데 이들은 주로 북한에서 구 소련으로 건너온 사람들입니다. 배를 타고 나갔다가 난파한 뒤 구 소련으로 흘러 들어갔다는 시나리오도 자주 듣는 내용인데 제 통역을 맡아 보는 김 라이사 아줌마의 남편도 북한에서 소련으로 들어온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줌마는 이주 3세대인데도 불구하고 한국말을 잘 하는 편입니다.

또 한 부류가 더 있는데....그들은 오히려 1937년보다 훨씬 전에 러시아 혹은 소련 지역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입니다. 오는 2004년은 러시아에 고려인들이 이민한지 120년이 되는 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1884년부터 한반도에 있던 많은 한국인들이 블라디보스톡을 포함한 연해주 등지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야말로 러시아 땅에 한국인으로서 처음 진출한 세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구한 말 기근과 가난을 피해 국경을 넘어 갔던 사람들도 있었을 테고, 한일 합방 이후 독립 운동을 위해 연해주를 드나들며 일본군과 싸우던 독립 투사들과 일제의 강제 징용을 피해 국경을 넘었던 사람들도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어쨋든 이런 저런 경로를 거쳐 러시아 혹은 소련 땅으로 들어갔던 한국인들은 그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백여개의 민족 가운데 한 민족으로 다민족 국가인 소비에트 연방을 이루며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1991년 구 소련 연방이 해체되면서 각 지역에 살던 고려인들은 고스란히 각 민족 공화국에 포함되고 맙니다.

어쨋든 중앙 아시아 특히 까작스딴, 우즈벡스딴에 40만이 넘는 고려인이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 1937년도에 벌어졌던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을 드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 짐도 제대로 꾸리지 못한 채 강제로 시베리야 횡단 열차에 실려야 했던 극동 지방의 많은 한국인(고려인)들은 초기 고려인들의 정착촌이라고 불렸던 우스토베, 끄질오르다 등과 같이 오늘 날 까작스딴 내에서 가장 고려인의 밀도가 높았던 지역 등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 강제로 버려지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아스타나(소련 연방 때는 쩰리노그라드)도 당시 고려인들을 내려 놓았던 곳 중 한 곳이라고 합니다.

스탈린이 극동 지방에서 살아 가고 있던 한국인들을 중앙 아시아로 유배시킨 이유는 일본의 첩자 노릇을 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소련에 대해 충성되지 않거나 원한을 품는다고 여겨지는 기타 민족들도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는데 대표적인 민족이 독일인들입니다.

당시 볼가강을 따라 수 세대에 걸쳐 살고 있던 많은 독일인들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히틀러를 도울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크림 반도에 살고 있던 그리이스인들과 따따르인들도 같은 이유로 중앙 아시아로 이주되었는데 제가 진료하는 베라 교회 근처는 따따르인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입니다. (위 사진은 아스타나에 있는 강제 이주 희생자 위령비입니다. 이 비는 스탈린 당시 강제 이주되었다가 추위와 기근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워졌는데...이 비가 아스타나에 있는 이유는 아스타나 역시 그러한 유배지 중 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자세한 설명을 보시려면 여기를 누르세요)

우리 가족이 까작스딴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아주 다양했지만 대부분 이주 3세대나 4세대 들이었습니다.  나이는 40-50대 정도이고 아버지가 깝차가이 반도나 쟘불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한국어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에게는 한반도는 이미 기억에서 사라진 할아버지의 나라일 뿐이었고 구 소련 연방에서 한 사람의 국민으로 살아야 했던 냉엄한 현실만이 존재할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련 땅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한국인의 탁월한 근면성과 지혜를 바탕으로 수 많은 다른 민족들 가운데서 존경받는 위치로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논농사 방법을 중앙 아시아에 보급한 것도 바로 고려인들의 솜씨였습니다. 들판에서 자라는 풀들 가운데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골라 내고, 채소를 이용해 독특한 한국식 샐러드(김치)를 만들어 내고, 해가 뜨기 전부터 밭으로 일하러 나가 밤 늦게 까지 일하는 그들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르고 땅만 바라 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들을 수 있는 얘기는 구 소련 시절, 고려인의 사회적 지위가 대단히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판사, 의사, 교수, 과학자 중에는 고려인이 유독 많았고 고려인 사회의 교육열도 상당히 높았었다고 합니다. 고려인들은 '침술과 약초'라는 새로운 첨단(?) 기술을 주변 민족들에게 선보이기도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제가 한국에서 온 의사라고 하면 으레 침을 놓는 의사라고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위력을 떨친 것 같습니다. 까작스딴 분리 독립 이후 유명한 러시아 의사들이 까작스딴을 떠난 현 시점에서 이곳 사람들은 까작인 의사보다는 고려인 의사를 선호한다고 하는데 그들 스스로도 까작인보다는 고려인들이 모든 면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지요.

이렇게 조국을 등지고 말과 글이 다른 나라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이지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잃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이 고려인입니다. 

왼쪽 사진은 지난 2001년 9월 어느 날 아스타나에서 벌어진 어느 고려인의 결혼식에 초청되었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신랑 신부 옆에 서 있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보이시죠?

이 날 결혼한 신랑이 고려인이었습니다. 신랑의 부모는 고려인끼리 혼인해야 한다며 적당한 규수를 물색했지만 여의치 않았고 결국 아들이 사귀고 있던 까작 여자와의 결혼을 허락해야만 했었습니다. 그 날 참석했던 많은 고려인 하객들은 "고려인과 결혼했어야 하는데...." 라며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미 까작스딴의 주류 민족인 까작인과의 결혼인지라 싫지 않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이 날 결혼한 신랑 옆에 서 있는 노인들이 보이시나요? 그들은 신랑의 할아버지, 할머니 들인데 바로 이주 2세대입니다. 할아버지에게 다가 가서 이름을 물으면 '김태경' 이라고 대답하신답니다. 평생을 소련과 까작스딴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이름은 김태경입니다. 할아버지 옆에 서 있는 할머니는 '양 올가'입니다. 성은 '양' 이고 이름은 러시아 식인 '올가'입니다. 이 두 분은 젊은 시절 소비에트 연방에서도 높은 지위에 올라 갔었던 분들이라고 합니다. 이 분들을 처음 인사를 나누었을 때 제 손을 꽉 잡으시며 "한국에서 왔소?" 라고 반기시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소련 땅에서 태어나고 이 곳에서 뼈를 묻을 사람임에도 그 분들의 고향은 한국이었습니다.

자랑스런 이주 2세대의 모습입니다. 김태경 할아버지는 폐결핵 탓에 폐가 하나밖에 남지 않았고 늘 기침과 가래로 고생하고 계셔서 제가 한 달에 한 번씩 약을 가져다 드리곤 했습니다.

한국말을 어느 정도 구사하시기에 약을 가져 갈 때도 큰 부담없이 찾아 뵙는데 늘 "찬 물이라도 마셔야지...." 하시며 뭐라도 내 오시려는 두 분을 보면 한국에서 흔히 보던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똑같다는 생각을 늘 하곤 했습니다.

올해 90세가 되는 이분들의 부모님들은 아마도 구한말 한반도에서 러시아 땅으로 들어가셨던 분들이시겠지요.

그런데 최근에 이주 1세대로서 이곳에서 살아 가고 계시는 분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 91세의 이 고려인 할머니는 고등학교까지 서울에서 나오신 분이셨습니다.

선화 옆에 보이는 할머니가 바로 그 분이신데 성함은 '주동일' 할머니입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해방 이후 밀어 닥친 사회주의 물결에 관심을 가지고 1946년에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사회주의 운동과 학문에 전념하던 할머니는 '레닌 기치'라는 고려인 신문사에 들어가 오랫동안 편집 일을 하기도 하셨는데... 그러던 중 1990년대 초 끄질오르다에서 한국에서 들어왔다는 선교사를 만나게 되고, 단지 한국에서 왔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선교사님을 열심히 돕다가 신앙을 가지게 되어 지금까지 교회에 출석하시며 신앙 생활을 하셨다고 합니다.

작년에 끄질오르다에서 자식들이 사는 아스타나로 올라 오셨다가 아들의 건강이 좋지 안아 할머니를 모실 수 없게 되자 스스로 양로원으로 들어가신 할머니는 가끔 예배를 드리기 위해 우리 교회를 방문하시곤 하십니다. 위 사진도 교회당으로 임대해서 사용하는 미술관 홀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교회에서 자기 소개를 부탁했을 때 "나는 러시아어를 잘 못합니다. 한국어로 소개하겠습니다." 라고 얘기하셨습니다. 70년간 소련에서 러시아어를 접하며 사셨지만 한국어만큼 아름다운 언어도 없다고 한국어 자랑까지 하시더군요.

주동일 할머니는 한국에서 온 젊은 부부인 우리를 보고 참 반가워 하셨습니다. 특히 어린 아기인 형민이와 시은이를 보시고는 귀여워 어쩔 줄 몰라 하셨고 주머니에 있는 쌈지 돈 200텡게를 꺼내 과자를 사 주라며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원래 고려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인사를 하는 법이라고 하시면서....양로원에 계신 할머니의 쌈지돈을 받긴 쉽지 않았지만 할머니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올라 오는 반가움과 사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에 감사함으로 받았습니다.

주동일 할머니가 계시는 양로원은 KOICA 특수 교육 단원인 구정아 선생님이 근무하시는 곳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 양로원에 2주에 한 번 꼴로 찾아 가서 질병이 있는 노인들을 돌아 보고 약품을 나눠 드리고 있습니다.

이 양로원에도 3명의 의사가 있지만 하나 같이 돈이 없어서 필요한 약을 살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국에서 왔다는 의사가 거의 모든 종류의 약(항파킨슨 약물까지)을 공짜로 나눠 주니 그들의 반응은 그야말로 반가움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이곳 의사들의 환대를 받으며 양로원의 환자들을 돌볼 수 있게 되었지요.

사진은 양로원 진료 시간 중에 수축기 혈압이 220 까지 올라가는 고혈압이 있는 주동일 할머니와 당뇨로 인해 시력이 좋지 않고 오른쪽 발가락의 당뇨성 괴사로 늘 소독을 해야 하는 러시아인 할아버지와 함께 찍은 것입니다.

주동일 할머니를 처음 진료하던 날...할머니는 제 가운의 왼쪽 어깨에 새겨져 있는 태극기를 쳐다 보시며 미소를 지으셨습니다. "할머니, 보세요...이게 대한민국 국기랍니다." "아...그렇습니까?" 할머니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넘쳐 흘렀습니다. 고향을 등진 지 70년...젊은 시절 따라갔던 사회주의는 몰락해 버렸고  평생을 돌아 볼 때 외롭기만 했던 할머니에게는 한국에서 온 젊은 의사의 존재가 작은 충격으로 받아 들여 졌나 봅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인데 할머니는 제가 양로원을 다녀간 다음 날, 자신을 찾아 온 어느 선교사님께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복을 주셔서 내 인생의 마지막 때에 생각도 못했던 영광스러운 광경을 목격하게 해 주셨습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에서 온 의사가 이곳 까작스딴의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는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날 살려 주셨는가 봅니다."

이주 1세대 주동일 할머니는 까작스딴 국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한국인이었습니다.

사실 까작스딴 분리 독립 이후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고려인들의 상황은 더욱 나빠졌습니다. 까작인들이 정권을 잡고 난 뒤 실력있는 고려인들은 까작인들에 밀려 고위직에서 모두 쫒겨 내려와야 했고 공직 사회에 들어서려면 까작어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기에 러시아어를 기반으로 살아왔던 고려인들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까작인들의 득세에 능력있는 러시아인들은 이미 러시아어로 다 돌아갔지만 한국어를 한 마디 못하는 고려인들로서는 아버지가 태어나고 할아버지가 태어난 까작스딴 땅이 고향 땅인지라 돌아갈 곳도 없습니다.

혹시 재외동포법에 대해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1998년 8월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재외 동포들에게 국내 거주 국민들과 거의 같은 권리를 부여하기 위해 '재외동포법' 이라는 법안을 만들었습니다. 잠시 용어를 설명하면, '재외국민'이라 하면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 국적자를 일컫는 말이고 '재외동포'라고 하면 해외에 거주하면서 해당국 국적을 취득하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저희 가족은 까작스딴에 살고 있는 재외국민이고 이곳의 고려인들은 까작스딴 국적을 가진 재외동포인 셈입니다.

재외동포법은 이러한 재외동포들을 같은 민족으로 인정해서 '현재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자유롭게 입출국을 할 수 있고 국내에서 취업, 부동산 취득 및 보유, 예금, 외국환 거래 등의 경제 활동은 물론이고 의료보험, 연금 등에도 가입할 수 있도록 혜택을 주는 등'  궁극적으로 내국인과 똑같은 대우를 해 주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입법 과정에서 이 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재외동포의 범위가 크게 축소되었는데 그 이유는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항의해 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중국 정부의 입장은 이러했습니다.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한국법에 따라 규율하는 것은 주권 침해이며 중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중국인과 한국 동포로 분류해서 혈통에 따라 다른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지요. 중국 정부는 재중 조선족 동포도 중국 내 55개 소수 민족 중 하나로서 중국 국민이라는 확고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에 한국 정부가 조선족을 재외동포로 인정, 특별대우할 경우 중국 정부의 소수 민족 정책 전반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인다는 입장이었습니다.

결국 정부는 중국의 입장을 받아 들여 재외 동포법의 대상에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전에 해외로 나간 사람들은 제외하기로 결정했고, 결국 이 때문에 중국 동포(조선족) 188만명, 구 소련 동포(고려인) 52만명, 강제 징용으로 끌려 갔던 무국적 재일 동포 15만명 등 260만명이 재외동포법의 혜택을 볼 수 없게 되어 버렸지요.

이 결정이 있고 난 뒤....수 많은 시민, 종교단체들이 1948년을 기준으로 해서 재외 동포들을 차별하고 있는 현재의 재외동포법은 위헌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그리고 헌법 재판소에 이 문제가 상정되었지요. 결국... 지난 2001년 11월 29일 헌법 재판소는 기존의 재외동포법은 헌법 정신에 위배된다는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고 2003년 12월 31일까지 관련 법 조항을 개정하라고 명령하게 됩니다.

아직 재외동포법은 개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국회에서 공청회와 좌담회 등을 거치고 있다고 들었는데 올해 말까지 조선족과 고려인을 포함한 재외동포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 고려인과 조선족을 포함하는 재외동포법이 발효된다면 국내외적으로 미칠 파장이 클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재외동포법의 혜택을 보는 동포들은 주로 미국이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이지만 앞으로 이 법이 중국, 러시아 동포들에게까지 확대되면 중국이나 러시아, 까작스딴 등과의 외교 마찰은 둘째라 치더라도 당장 국내 고용시장에 큰 혼란이 초래될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의견입니다. 현재 재외동포법은 신고증만 제출하면 비자를 받은 뒤 2년 동안 체류할 수 있으며 자유롭게 체류 기간을 연장할 수 있고 재입국 허가 없이 출입국할 수 있는 혜택을 주고 있어서 값싼 노동력이 대량 유입될 경우 국내 노동시장에 큰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 노동부 관계자는 " 중, 러 동포 240만명 중 50만명만 몰려 와도 노동 시장은 혼란에 빠질 것" 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결국 앞으로 이 재외동포법은 조선족과 고려인을 포함시키면서 그 혜택을 대폭 줄이는 방향으로 개정될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따라서 이미 이 법의 혜택을 보고 있는 미국 교포사회에서도 이 법의 개정에 대해 아주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조선족과 고려인도 우리와 같은 민족이고 차별되어선 안된다는 헌법 재판소 결정문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고려인들이 재외동포법에 포함되면 한국에 왕래하는 것을 포함한 여러 방면에서 혜택을 보게 될 것 같은데.... 저는 올해 이곳 까작스딴에서 이 법이 어떻게 개정되는지 주시해 볼 작정입니다.

사실 구 소련 지역에 살고 있던 많은 민족들은 구 소련 붕괴 이후 자신의 민족 국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독일인들은 독일로, 러시아인들은 러시아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로, 그리이스인들은 그리이스로....독일의 경우에는 구 수련 지역에 살고 있는 독일인의 후예들을 자신의 국민으로 받아들여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독일로 돌아와 살 수 있도록 여러 환경을 조성해 주고 있습니다. 간혹 이 곳 비행장에서 독일인이 포함된 가족이 독일로 돌아가는 것을 볼 일이 있는데(아스타나에는 프랑크푸르트 직항 노선이 있습니다) 부모 중 한 사람만이 독일인이기만 해도  전 가족이 독일 국적을 취득할 수 있기에 그 일행 중에 딸려 가는 많은 러시아, 까작인들이 많이 보입니다.

하지만...고려인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같은 동포인데도 외국인 취급을 받아야 했고 재외동포법 제정 당시 그들 가슴에는 큰 못까지 박혔습니다.  그들을 재외동포의 범위에서 제외시켜 버렸으니까요...

다행히 이 법의 개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독립 투사의 후예들이 포함된 고려인들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활짝 피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왼쪽 사진은 지난 2002년 2월 12일 설날을 맞아 고려인들이 아스타나의 시민회관에서 설날 행사를 벌일 때의 모습입니다. 러시아어와 까작어 뿐인 이 도시에 이 날만큼은 한국어가 선명합니다. "설날" 이라고...)

우리가 까작스딴에서 산 지 벌써 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미 이곳에서 살고 있던 어떤 분들로부터 "고려인을 믿어선 안된다.", "고려인을 조심해라.." 라는 얘기를 듣기도 했었는데 같은 민족이라고 가깝게 지내고 속을 내보였다가는 큰 코 다친다는 충고들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고려인도 있을 수 있겠지요. 마치 한국에도 나쁜 사람이 있듯이 말입니다. 또...경제 사정이 좋지 않은 까작스딴에서 살다 보니 부유한 환경에서 온 한국 사람들을 봤을 때 뭔가 얻을 게 있는가 하고 다른 맘을 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2년을 지내고 난 우리 가족의 맘 속에는 남아 있는 건... 고려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입니다.

가끔 이런 생각도 해 봅니다. '내가 만약 백년 전 국경지대에 살고 있던 한국인이었는데 일제의 강압 정치를 참지 못해 국경선을 넘어갔다가 강제 이주되어 이곳 중앙 아시아에 살게 되었다면....' 역사 속에서 '만약'이란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중앙 아시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바라보는 내 맘은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중앙 아시아에서 이루어지는 한국인 선교사의 활동과 관련해서 고려인들의 역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러시아어를 사용해야 하는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1-2년 만에 선교지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고려인이라는 확실한 통역 자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1991년 까작스딴 개방 이후 제일 먼저 까작스딴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소수의 사업가와 선교사들 뿐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어도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는 고려인들의 도움을 얻어 새로운 선교지에서의 활동을 어려움없이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중앙 아시아에 고려인이 흩어져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중앙 아시아의 고려인들을 가리켜 '한국인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진 사람들' 이란 뜻으로 팔레스타인 지역 밖에 살고 있으면서 그들의 신앙을 지키던 유대인들을 일컫는 말)' 라고 까지 말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즈음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본토보다는 다른 지역에 더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바빌로니아에 포로로 잡혀 가는 바람에 여러 지역에 흩어져 살게 되었지만 나중에는 장사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져 살 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팔레스틴에는 250만명 가량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으나 이집트,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에도 각각 100만명의 유대인이 그리고 이태리와 북아프리카에도 약 10만이나 되는 교포들이 살고 있었죠. 그 외 로마 제국 내 도처에 산재해 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디아스포라는 당대의 국제 도시였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는데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전 도시를 장악하고 있었고 구약성경을 헬라어(그리이스어)로 번역하기 까지 합니다. BC 250년에 출간된 이 구약 성경이 바로 그 유명한 '70인 역'입니다. 디아스포라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던 것이 유대인의 회당이었는데 대부분이 유대인이었던 초대 교회의 전도자들은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동포들을 방문했고 바로 이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도움으로 전도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안식일을 비롯하고 절기마다 모이는 여러 번 모이는 유대인 회당에서 국제어로 번역된 구약성경을 가지고 복음을 외쳤던 것이죠.

다른 어느 나라의 선교사들보다 한국 선교사들이 까작스딴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고려인 디아스포라'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입니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을 반가운 친척을 맞아들이는 마음을 도와 주었고 까작스딴 초기 선교 사역의 큰 밑거름이 되어 주었습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사실은....중앙 아시아를 비롯한 구 소련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던 고려인들은 1920년대부터 한국말로 된 신문을 펴내며 지난 80년 동안 한국 문화와 글을 지켜 왔다는 것입니다. 그 신문의 이름은 처음에는 '선봉 신문' 이었고 이후 '레닌 기치' 라는 이름으로 전성기를 보냈었고 지금은 '고려일보'라는 이름은 까작스딴 내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8면으로 된 러시아어 판이 주된 내용이지만 여전히 4면으로 된 한국어판 고려일보가 나오고 있어 까작스딴에서 사는 우리 가족으로선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까작스딴 뉴스를 한국말로 볼 수 있는 행운을 얻고 있습니다.

알마티에는 한국신문들을 짜집기 한 '한인 일보'라는 신문이 교민 사회에 돌고 있지만....역사성으로 따지자면 8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려일보를 흉내낼 순 없을 것입니다. 1920년대 부터 '선봉 신문', '레닌 기치', '고려일보' 라는 이름으로 계속 내려온 이 신문은 구 소련 전역의 유일한 한글 신문이었고 한글로 작품 활동을 했던 문인들은 이 신문을 통해 많은 작품들을 발표했었다고 합니다. 김기철, 김준, 임화, 김세일, 정상진, 한상욱, 차원철, 전동혁, 이은영, 강태수, 김광현 등이 소련 조선 문학의 한 세대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1960년대는 고려일보의 전신 '레닌기치'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데 1주일에 다섯 번씩 큰 규격으로 출판되고 부수도 1만 5천부 가량 전 소련 땅에 배포되었다고 합니다. 보도 자료도 고려인들의 생활 전반에 걸친 내용들이었다고 하는데 1주일에 한 번씩 발표되는 문예 페이지를 통해 앞에서 언급한 문인들이 작품을 발표하고 활동했다고 합니다. 고려일보를 통해 고려인들은 민족 문화의 역사를 창조할 수 있었고 민족성을 보존하며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요.

'레닌기치' 신문사는 한 때 끄질오르다에 위치하다 알마티로 위치를 옮겼고 까작스딴 독립 이후 까작스딴 내에서 '고려일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잊고 있습니다만 한글로 기사를 쓰는 옛 기자들이 하나 둘씩 운명을 달리하면서 존폐의 기로에 몰려 있습니다. 한글을 기억하는 이주 1,2세대는 이제 거의 사라졌기에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여전히 매주 한글판 신문을 러시아판과 함께 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스타나에서 우체국을 통해 고려일보를 정기 구독하고 있습니다. 한 주에 한 번 금요일에 발간되는 이 신문은 일년 구독료가 2000텡게 정도입니다.

말을 맺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주 1,2세대는 이제 역사의 뒷 편으로 사라지고 없지만 한국의 국력 신장과 함께 이주 4,5세대들이 '할아버지 나라' 한국말을 배우기 위해 알마티 주요 대학의 '한국어과'와 교회 부설 '한글 교실'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은 까작스딴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LG, 삼성과 같은 한국 기업들을 바라보며 한국을 향한 남모를 긍지와 동경심을 키우고 있는 세대입니다. 이제 그들의 나라인 까작스딴에서 고려인 후예들이 마음껏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며 살아가게 되길 빕니다.

내가 있었을 수도 있던 역사의 한 자리에 남아 중앙 아시아의 빈터를 말없이 지켜 왔던 고려인들...다행히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선교사의 교회로 찾아 들고 있기에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위로가 하늘로부터 각 사람에게 풍성히 임하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아울러 2003년에 개정될 재외동포법이 고려인들의 한국 방문을 더 편하게 도와주고 구 소련 지역에 흩어진 동포들에 대한 한국민의 따뜻한 애정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봅니다. 2003.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