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맞닿은 곳에서

봄이 왔습니다. 아니..이제서야 봄이냐구요? 예...아스타나는 이제 겨우 봄이라는 계절에 들어왔습니다. 물론 아직 집 안이 추워 전기식 난방기를 돌리고는 있지만 거리마다 작고 푸른 나뭇잎들로 푸릇푸릇해진 가로수들이 줄 지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여러 번 말씀 드린대로 아스타나는 '겨울 도시' 입니다. 내세울 만한 관광지 하나 없고 산 하나 없는 허허벌판에 조성된 신도시인 탓에 온 세상이 눈과 얼음으로 하얗게 뒤덮여 버리는 겨울 모습이 차라리 더 볼 만하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죠. 뜨거운 햇살을 피할 만한 큰 나무 하나 없는 여름 공원보다는 얼음 조각전이나 강 얼음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편이 더 신나기에... 아스타나는 겨울이 더 매력적인 곳입니다.

봄은 길어야 2주....아스타나에서는 봄이 왔다 싶으면 바로 여름이 시작됩니다. 2주 전만 해도 아침 기온이 0도에서 5도 사이를 오르내렸는데...갑자기 지난 주부터 아침 기온이 10도 이상으로 오르면서 낮기온은 20도 이상으로 치솟고 있습니다.

갑자기 날씨가 따뜻해지자...겨우내 숨 죽이고 있던 나무들도 서둘러 움을 틔우고 푸른 잎들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습니다. 갑자기 바빠진 거죠... 봄이 왔지만 사실상 이것은 녹음이 우거지는 여름의 시작입니다. 아스타나의 4계절 분포를 말하라고 한다면 '겨울 7개월, 여름 4개월, 봄 2주, 가을 2주' 가 정답인데... 사실상 여름과 겨울만이 존재하는 셈이고 그 사이 잠깐 동안의 봄 기운이 비칠 뿐입니다. 그래서 봄이 왔다 싶으면 이내 한 여름 더위 속으로 온 도시가 빠져 들지요. 오늘도....봄 기분에 들떠 여기 저기 돌아 다녔었는데 거리 온도계 눈금이 영상 23도를 가리키고 있더군요. 겨울이 끝났다 싶으면 바로 더워지는 것이 위도가 높은 지방의 특징인가 봅니다. (아스타나는 위도 51도 입니다.)

봄이 찾아온 아스타나....아니 이미 시작된 여름 아스타나에서 가장 볼 만한 건 뭐가 있을까요? 이심강 빼고는 산이나 계곡 하나 없는 이곳에는 알마티 처럼 관광객들이 모여 들만한 탁월한 자연 경관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피할 곳 없는 따가운 햇살 뿐이라 도시 구경하느라 30 분만 걸어 다니면 금방 지쳐 버리는 곳이죠.

하지만...하절기 아스타나에도 볼 만한 것이 하나 있는데...그건 바로 하늘 입니다. 좀 의아해 하실 수도 있겠지만.....아스타나의 하늘은 그야 말로 압권입니다.

한국에서는 하늘을 보려면 자기 머리 위를 쳐다 봐야 하지요? 앞을 바라 보고 걸을 때는 건물들과 사람들만 보이지 하늘은 거의 보이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한국에선 하늘은 그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있는 집들과 빌딩들로 포위된 머리 위 작은 공간일 뿐입니다. 그러나...아스타나는 다릅니다. 아스타나는 동서남북이 하늘로 탁 트여 있습니다. 도로의 끝에서도 하늘이 보이지요. 도시 한 가운데에서도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곳....바로 아스타나입니다.

산 하나 없는 스텝 지역인 까작 초원의 북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아스타나에서는 우람하고 웅장한 기세로 땅을 향해 돌진하는 하늘의 역동적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홈페이지 독자들은 이 풍경에 익숙하시겠지요? 바로 저희 집 앞을 지나는 '바라예바'라는 도로의 모습입니다. 비교적 하늘이 많이 가려지는 곳이죠.

까작스딴에선 모든 주소가 도로 이름에 따라 매겨져 있습니다. 저희 집도 바라예바 도로의 26/2 번 건물입니다.

이 지역은 아스타나에서도 가장 중심부이고 많은 건물들이 밀집해 있는 곳 중 하나이지만... 멀리 노란색의 '아스타나 타워' 쪽으로 바라 보고 있으면 푸른 색의 하늘이 눈에 확 들어 옵니다. 특히 도로 끝을 따라 시선을 옮겨 가 보면 마치 하늘을 향해 자동차들이 달려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요. 공기의 흐름이 자유로운 넓은 평원에 자리 잡은 도시인지라 대륙의 저 끝에서 불어 오는 봄 바람이 맑고 싱그럽게 느껴지는 아스타나의 하늘은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니라 코 앞에 펼쳐지는 자연 색입니다. 

지난 5월 8일 우리 가족 모두 봄 나들이를 나갔습니다.

처음 들른 장소는 나무가 없는 도시 안에서도 비교적 가로수가 많기로 유명한 '아바야' 길인데...인터콘티넨탈 호텔 맞은 편이고 아스타나의 중심부에 속합니다.

왼쪽 사진에서 쭉 뻗은 도로가 바로 '아바야' 도로인데..이곳에서도 하늘과 맞닿은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과 구름의 모습...멋지지요?

높은 빌딩이라곤 없는 데다...울창한 나무 숲도 거의 없는 이곳 아스타나야말로 하늘을 만끽할 수 있는 최적지인 것 같습니다. 사진 속의 가로수들을 보시면 이제 막 푸릇 푸릇 봄 색깔로 옷을 갈아 입는 나무들임을 아실 수 있습니다. 가지마다 이제 막 파란 잎사귀들이 돋아 나고 있거든요...

 이 도로 변은 작년 가을...아스타나의 가을을 보여 드리기 위해 홈페이지를 통해 소개해 드렸던 곳이기도 한데...새 봄의 모습도 소개해 드리려고 우리 가족은 길 가의 작은 자작 나무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까작스딴 북부 지역과 러시아의 숲을 대표하는 낙엽수를 들라면 바로 왼쪽에 보이는 자작나무를 들 수 있습니다. 상록수야 소나무, 전나무...다양하지만 낙엽수는 자작 나무가 가장 일반적이더군요.

아직 작은 나무인지라 우리 가족들의 키와도 딱 맞았습니다. 이제 막 뒤집기에 성공한 시은이를 안고 서 있는 선화는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도 걱정없는 산들 바람 부는 이 계절이 가장 맘에 든다고 합니다.

우리가 나들이를 한 5월 8일은 어버이 날입니다. 까작스딴에도 부모님의 날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날과 아버지의 날이 따로 있던데 5월 8일이 아닌 다른 날을 기념일로 지키더군요.

어버이 날 새로 돋아 올라온 잎사귀들을 바라 보며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들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아이 둘 데리고 살다 보니 가족의 의미가 다시금 소중하게 다가 오면서 내가 어린 시절 몸 담았던 가족에 관한 기억들이 많이 떠 오르기도 하는 요즘입니다. 이제...우리가 맡고 있는 형민이와 시은이도 우리 부부와 함께 한 가정을 이뤄 살면서 수 많은 추억과 꿈들을 차곡 차곡 쌓아가겠지요....

자작나무 새 잎이 두드러져 보이는 이 사진도 같은 장소에서 찍은 것입니다.

아기들은 모두 시큰둥한데 선화의 얼굴은 활짝 폈습니다. 선화는 가끔...'나도 뭔가 표가 나는 일을 하고 싶다' 며 하루 종일 두 아이에 얽매여만 하는 자기 생활에 투정을 할 때가 있습니다.

밥 하고 청소하고 아기 기저귀 갈고....이 모든 일들이 해도 표가 안 나는 일들인지라 가끔씩 남편에게 뭔가 특별한 자기만의 일을 하고 싶어하는 속내를 보이곤 하지요.

하지만...저 뿐 아니라 이 홈의 모든 독자들은 선화가 지금 얼마나 '표가 나는' 일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는 두 아이가 지금 이렇게 선화의 품에 안겨 있으니까요.

게다가....이곳에서 지내는 까작스딴 생활 3년 동안만큼은 육아에서 엄마, 아빠가 평등하게 짐을 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녁 설거지, 아기 젖병 세척 및 소독, 집 안 청소(진공 청소기&물걸레질) 같은 것은 기본이고....매주 두 번씩 엄마가 러시아어 수업 하러 집을 비울 때 혼자서 2시간씩 아이를 돌보는 것과 온 가족을 태우고 람스토르에 가서 장 보는 일이나 수영장에서 운동하는 일....무엇보다 오후에 아이들과 함께 놀아 주는 일들로 아빠의 시간표는 늘 꽉 채워져 있으니까요. 진료하는 시간과 드럼 레슨 시간 외에는 항상 가족과 함께 지내지요.

하루 종일 병원 생활에 묶여 있다가 잠깐 집에 들어 와야 했던 한국에서의 결혼 생활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온 가족이 늘 붙어 지내게 되다 보니 간혹 몇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아빠의 꼼꼼한 정리벽들이 하루 종일 집 안을 어지럽히는 두 아이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든가, 늘 원인을 찾아내고 결과를 얻기 위해 추진하고 준비해야 했던 직장 생활에 길들여진 아빠가 온 가족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도록 요구하는 공포정치(?)를 펴기 쉽다는 것 등이죠. 하지만...요즘은 이런 일에도 서로가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어쨋든 '표가 나는' 일을 하기 위해 선화는 새로 러시아어 공부도 시작했고 운동도 열심히 다니고 있으니....시간이 흘러 한국으로 돌아갈 때 쯤이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표가 나는' 주부로 성장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바야 길을 떠나 다음으로 들른 곳은 주광장(main square)입니다.

주 광장은 까작스딴의 입법, 행정, 사법부가 모두 모여 있는 곳에 만들어진 큰 공간으로 쭘(백화점)과 콩그레스 홀(시민회관)이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주광장 분수대에서는 시원스런 물줄기를 종일 뿜어 댑니다.

봄이 시작되면 바로 여름이라고 말씀드렸죠? (아니.. 겨울이 끝나면 바로 여름이 찾아 온다고 했던가요?) 이 날도 자동차 안은 한증막 같이 더운 열기로 가득 찼었고 거리에도 따가운 햇살이 구석 구석 내리 쬐는 뜨거운 초여름의 날씨였습니다. 영상 25도 정도 올라갔으니까 여름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죠. 하지만 집에 들어오면 전기 난방기를 돌려야 할 만큼 추워 일교차가 20도 이상되는 환절기를 겪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이렇게 실내가 추워지는 이유는 겨울에 따뜻하도록 만들어진 아스타나의 건축술 때문인데...안팎으로 열이 전달되지 않도록 두꺼운 벽과 이중창을 가지고 있어서 중앙 난방이 끊어지는 요즘 시기가 되면 햇볕을 받지 못하는 실내 온도가 오히려 뚝 떨어지게 됩니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 이곳의 건조한 기후를 들 수 있는데 하도 건조하다 보니 공기의 열 전도율이 떨어져 햇볕이 있는 곳은 덥고 햇볕이 없는 곳은 춥게 되지요. 실내 공기가 추운 것도 바깥의 더운 공기가 잘 전달되지 않은 원인도 한 몫 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최근 형민이는 좀처럼 앓지 않던 감기를 하고 있습니다. 밤에도 기침 때문에 제대로 잠을 들지 못해 우리 맘을 많이 아프게 하고 있지요. 어서 빨리 형민이의 감기도 낫고 일교차를 심하게 만드는 실내 공기도 따뜻해지면 좋겠습니다.

이 사진은 사실...홈에 올리기에는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이지만...재미있어 올립니다.

뒤로 보이는 하늘과 맞닿은 도로 변에서 울음을 터뜨린 시은이를 안고 눈이 안 보이도록 웃고 있는 모습이 오늘도 아스타나에서 이리 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제 모습입니다. 

눈 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하늘을 바라 보며... 두 아이를 데리고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우리들의 삶은 오늘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보다 25배 이상 넓은 땅 까작스딴(세계 9위의 면적)....요즘 들어 훗날 한국으로 돌아가면 '푸른 하늘로 가득 찬' 이 아스타나의 넓은 하늘이 그리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이 두 아이와 함께 이 낯선 곳에서 하나로 엉겨 지냈던 말 못할 많은 추억들도 함께 그리워 지겠지요.   2003.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