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

네 식구가 평화롭게 모여 사는 우리 가정에 분실 사고가 급증하기 시작한 것은 약 2개월 전 부터입니다. 처음에는 책상 위에 올려 놓았던 자동차 열쇠가 사라지더니...그 후로는 우체국 사서함 열쇠, 고가 약품, 필기 도구, 칼, 유리 테이프, 어학용 녹음 테이프, 망치, 드라이버 등...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물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물건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갔습니다.

출근 시간이 바쁜 아침 시간에 으례 있어야 할 자동차 열쇠가 없어지면 그야말로 난감한 일이죠.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는 건망증을 탓하며 어제 입었던 저고리 안 주머니, 바지 뒷 주머니, 서랍 등을 뒤져 보지만 열쇠는 눈에 띄지 않고...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 들게 됩니다. '이게 어디로 갔을까?...'

사실...이런 류의 분실 사고가 가장 먼저 발생한 것은 지난 2001년 9월 경의 일입니다. 당시...아스타나로 처음 이사 왔던 우린....허름한 건물 6층에 자리 잡은 방 2칸, 거실 하나 짜리 아파트를 임대해서 이제 막 새 살림을 시작한 때였습니다. 아스타나의 치안이 좋다고는 하지만 모든 아파트 출입문이 바깥은 철문, 안쪽은 나무 문으로 된 이중문으로 만들어져 있는 걸 보며... 낯선 곳에서의 보안에 그 어느 때보다 염려했던 시절이었지요.

출입시에 문을 꼭 잠그고 다녀야 했던 우린... 아파트 열쇠 관리에도 신경을 많이 기울였습니다. 열쇠는 비상용을 포함해 딱 두 벌이었는데 외출할 때마다 각자 하나씩 몸에 지니고 다녔지요. 그런데....어느 날 이 중 하나가 홀연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거실 복도 전화기 밑 서랍에 늘 넣어 두던 열쇠가 없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열쇠를 찾지 못한 우린... 바깥에서 잃어 버린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아파트 철문의 잠금 장치를 바꾸기로 결정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 열쇠를 가져 갔다면 무엇보다 신경 써야 할 보안에 큰 구멍이 뚫린 셈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끼르끼즈스탄이나 까작스딴 같은 곳에선 외국인이라면 돈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도난 사고나 주택 침입 사고가 많이 일어나고 있거든요.

그런데...철문의 잠금 장치를 다시 만들기로 그 저녁....장난감을 가지고 형민이와 놀아 주던 선화는 우연히 장난감 상자 속에서 그렇게도 찾던 아파트 열쇠 꾸러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알고 보니...당시 아직 한 돌도 지나지도 않았던 형민이가 전화기 아래 서랍을 열고 그 안에서 아파트 열쇠를 꺼내다가 자기 장난감 통 속에 넣어둔 것이었습니다.

돌이 되기 전부터 뛰어 다녔던 형민이는 전화기나 집 안에서 보이는 특별한 모양의 물건들에 관심을 많이 보였습니다. 특히 아빠, 엄마가 소중하게 들고 다니는 열쇠 꾸러미는 어린 형민이의 눈에는 아주 특별하게 비쳤던 모양입니다.

왼쪽 사진은 그 당시 사진 중 하나인데...사진에서 보이는 전화기 아래 서랍에서 열쇠 뭉치를 슬며시 꺼내 자기 장난감 꾸러미 속에 넣어 둔 것이죠.

아무든 어린 형민이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놀랍고 재미있었지만...한 편으로는 중요한 물건은 형민이 손에 닿지 않게 해야 한다는 사태 인식을 새롭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로는 미궁에 빠져 든 분실 사건이 생길 때마다 '유주얼 서스펙트(흔히 의심을 받는 용의자)'로 떠 오르는 인물은 늘 우리 집에 사는 꼬마였습니다. 첫 번째 사건 이후 1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러 갔지만 형민이의 물건 수집 버릇은 더욱 발전해 갔고 우린 미궁 속으로 빠져 드는 사건이 생길 때마다 형민이에게 그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 보는 웃지 못할 수사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형민이는 그 물건의 이름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빠, 엄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떤 물건에 대해 얘기하는 걸 듣고 나면 쪼르르 달려가서 실종된 물건을 찾아 오곤 했지요.

자동차 열쇠를 잃어 버린 그 날도 온 집안을 이잡듯 뒤져 발견하지 못하자 '유주얼 서스펙트(usual suspect)'에게로 관심이 집중되었습니다.

"형민아...아빠 빵빵 열쇠 알재? 그거 어디 놔 뒀니? 아빠가 운전할 때 사용하는 주황색 열쇠 알재?"

이렇게 물어 보면 으례 사실을 실토하던 형민이는 그 날 따라 입을 열지 않았고....우린 형민이의 물건들을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형민이 장난감 박스 그리고... 장난감 자동차가 조사 대상 1호입니다.

그리고...그 날도 예외없이 장난감 자동차 안에서 아빠 자동차 열쇠가 발견되었습니다.

옆의 사진에 형민이의 장난감 자동차가 보입니다. 차에 앉는 부분을 위로 제치면 그 안에 제법 큰 공간이 나오는데...형민이는 이 속에 자신이 애지 중지하는 물건들을 보관해 두곤 합니다.

지금 사진 속에는 테니스 공이 잔뜩 들어 있었던 것 같은데....형민이는 이 곳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여기지요.

자동차 열쇠를 찿은 뒤 의기양양하게 문 밖을 나서는 아빠를 바라 보는 형민이의 모습은 말 그대로 "섭섭함" 그 자체입니다. 감춰둔 자신의 물건이 발각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얼굴에 짙게 배여 나오지요.

그 후론 형민이의 보물 창고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몇 군데 되는데...아빠 책장 맨 아래 칸, 서랍 장 첫 번째 칸, 부엌 식기장 아래 등 다양한 곳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장난감 자동차를 애용하고 있기도 하지요.

우리 가정의 '영원한 용의자' 형민이는 최근 들어 더욱 눈부신 활약을 펼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형민이가 잘 때마다 방수포를 침대 위에 깔아 줍니다. 한 번씩 밤에 소변 가리기를 실패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부자리 보호를 위해 물이 스며들지 않는 방수포를 침대 위에 까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자려고 보니...형민이의 방수포가 침대에 없었습니다.  항상 침대 위에 그대로 두고 지내는데...어디론가 사라진 것입니다.

"어...방수포가 어디 갔지? 오빠...방수포 봤어요?"
제법 큰 방수포인지라 눈에 금방 띌 텐데 안방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조금 찾다가.... 잠도 오고 해서 더 이상 찾지 않고 그냥 자려고 준비를 하는데...이불장 안에서 아마추어 솜씨로 서툴게 개어 놓은 방수포를 발견했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형민이는 이불장 안에 방수포를 곱게 개어 놓은 것입니다. 방수포가 거추장스러웠는지는 모르겠지만....그 일 후로는 이불장에만 넣는 게 아니라 옷장, 엄마 옷장 등에다가도 방수포를 넣어 두더군요.

지금까지의 사례는 비교적 양호한 경우였지만....우리 집의 유주얼 서스펙트는 가끔 더 심각한 사고를 치기도 합니다.

며칠 전에는 컴퓨터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를 부숴 뜨렸으니까요...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보고 자란 형민이는 돌이 되기 전부터 마우스를 가지고 놀았고 지금은 한글 프로그램을 열어 달라고 한 뒤 키보드를 두드릴 때 모니터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보며 놀 정도로 컴퓨터에 익숙해 졌습니다.  

그런데...형민이 눈에는 조그마한 플로피 디스켓을 디스크 드라이버에 넣는 게 신기했나 봅니다.

아빠가 선물로 준 작은 디스켓 하나를 들고 집어 넣었다 빼기를 며칠 간 반복하더니...급기야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버를 망가뜨리고 말았습니다. 디스켓을 받아 들이는 부분이 깨져 버린 것입니다.

현장에서 붙잡힌 우리의 불쌍한 용의자는 엄마에게 주의를 듣고 있지만...너무 재미 있었던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엔...형민이게는 '인생은 놀이' 라고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민이는 자는 걸 싫어 합니다. 누군가 자기에게 "잠 오재?" 라거나 "자러 가자..."라고 말하는 걸 제일 싫어하지요.

형민이는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이제 다 잤다..." 라는 말을 먼저 합니다. 이 말의 속 뜻은 '어젯 밤에는 아쉽게도 자고 말았지만...이젠 다 잤으니 다시는 안 잘 거예요...' 라고 말하는 겁니다. 다시 놀겠다는 선언인 셈이죠.

눈을 뜨고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빠와 엄마 그리고 아기와 함께 신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형민이는 차 안에서도 운전석의 아빠에게 딱 붙어 재잘재잘 거리다 갑자기 고개를 뚝 떨구면서 선 채로 잘 정도로 잠이 오는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유주얼 서스펙트'는 프로 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럼 우리 집에 살고 있는 용의자의 특징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인상 착의

'돌콩' 이라는 단어를 떠 올릴 만큼 단단한 체구를 가진 순하게 생긴 두 살 중반의 남자입니다. 운동으로 다진 몸인 것 같은데....눈은 큰 편인데 속눈썹이 길어 눈이 더 커 보입니다. 하지만 웃을 때는 아빠처럼 사라지는 눈을 가진 게 특징이죠. 밥을 많이 먹는데도 살이 찌지 않는 건....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작업에 몰두하기 때문입니다.

2. 작업 도구

용의자가 잘 사용하는 도구는 받침대입니다. 이 받침대는 작년 여름 알마티의 한국 가게 '마돈나'에서 사 온 것인데 원래 빨래나 목욕시에 사용하도록 만든 다목적 받침대입니다.

하지만 용의자는 이 받침대를 사용해서 각종 활동에 이용하고 있습니다.

왼쪽 사진처럼 이 받침대를 사용하면 세면기 수독꼭지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고 거실 창가에 올려 놓은 각종 책이나 놀잇감들을 원하는 곳에서 꺼낼 수 있습니다.

이 받침대는 작업에 이용되기도 하는데...손이 안 닿도록 올려 놓은 부엌 선반 위의 그릇, 양념통, 과자, 쵸콜렛 같은 것에 접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칼이 있는 곳에도 손을 댈 수 있지요.

늘 한 손에 이 받침대를 들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적절하게 사용하는 걸 보면 지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또...용의자는 음악을 아주 좋아해서 거실 오디오를 틀어 놓고 춤추고 노래하는 걸 즐기는데 문제의 받침대를 사용해서 아빠, 엄마가 아끼는 CD나 테이프 등을 무작위로 꺼내 지문을 묻히는 등의 일을 상습적으로 벌입니다.

3. 작업 수법

용의자는 철저하게 주변 사람들에게서 신망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 같습니다. 부엌 일이나 집안 일을 특히 잘 도우는데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듯한 낌새를 발견하면 재빨리 부엌으로 달려와 비닐 장갑을 끼고 함께 일하려고 달려 듭니다.  

사진은 용의자가 가족의 신임을 얻기 위해 진공 청소기로 거실 청소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용의자는 이미 깨끗하게 청소된 거실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진공 청소기 소리를 울리며 열심히 바닥을 청소함으로써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용의자는 작업 도구로 사용되는 장난감 자동차를 끔찍하게 아끼지만 가끔씩 주변인들에게 장난감 자동차에 타 보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물론 도저히 탈 수 없는 장난감 자동차에 올라 타야 하는 주변 사람들의 어려움이 있긴 하지만....자신이 아끼는 물건을 선뜩 제공하면서 환심을 사려는 것 같습니다.

4. 주변 관계

인간 관계는 비교적 좋은 편입니다. 새 아기 시은이가 생긴 뒤로 갑자기 아기처럼 어리광을 피우면서 아기의 노리개 젖꼭지를 뺏어 물거나 아기 침대에 똑같이 누워 응석을 피우는 일이 발생하긴 했지만... 반대로 아기를 기르는 엄마 흉내를 내면서 아기와 차별화를 시도하는 것이 최근의 모습입니다.

왼쪽 사진에서도 그러한 면이 단적으로 보여 지고 있는데 시은이를 업고 다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자기가 아끼는 뚝딱이(인형)을 업고 다님으로써 새로 태어난 아기와 차별화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업거나 안고 다니는 것의 종류는 다양해서 사진에서 나타난 뚝딱이 외에도 코카콜라 백곰, 아기 베개 등을 가슴에 품고 다니며 자기에게도 아기가 있다는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과시하곤 합니다.

아기 시은이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데 울면 젖병을 물려 주고 달래 주기까지 하며...목욕 후에는 베이비 크림을 직접 발라 주는 등 새로 태어난 아기와 좋은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척 애를 쓰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물론 새로 태어난 시은이는 눈 앞에서 얼른 거리는 이 조그만 아기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는 문제겠지만....

5. 만찬 석상에서

최근 잦은 모임에 참석한 이후로 함께 모여 유리잔을 부딪히며 "건배" 하는 것이나 조그마한 잔에 콜라나 사이다를 담아 마시는 것을 배웠습니다. 큰 유리잔을 가져다 주더라도 보드카 잔으로 쓰이는 조그만 잔에다 음료수를 부어 마시지요..

특히...다른 사람들과의 모임이 있는 경우 엄마, 아빠에게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게 바짝 붙어 호의를 베푸는 것이 눈여겨 볼 만한 대목입니다.

특히...예쁜 이모들이나 누나들이 있는 곳에 가서 앉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인데 그런 곳에 가면 건배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등...온갖 기분을 다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상과 같이 즐거운 맘으로 유주얼 서스펙트 형민이에 대한 얘기를 적어 보았습니다.  왼쪽 사진은 에브라지야 바자르 안에 있는 장난감 가게 앞에 서 있는 우리의 유주얼 서스펙트 형민이의 모습입니다.

형민이 때문에 사라지거나 망가지는 물건들이 하나 둘씩 늘어가긴 하지만... 보고 있을수록 재미있고 웃음이 나오는 형민이의 어린 모습도 세월이 가면 볼 수 없을 거라는 아쉬움에 지레 겁을 먹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들이 행복하기만 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사랑스러운 유주얼 서스펙트 형민이가 더욱 더 열심히 작업해 주길 바라고 있지요.

아마 조금만 더 크면...아빠의 자동차 열쇠를 장난감 차 속에 숨기지도 않을 테고 플로피 디스켓을 집어 넣는 바람에 드라이버를 고장내는 일도 없을 테지만...웬지 그 때가 되면 지금의 형민이를 그리워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또렷하지 않은 발음으로 "오 주여 나의 마음이...", "온 땅이여 주를 찬양...", "갈릴리 호숫가에서..." 같은 찬양을 큰 소리로 부르는 형민이의 목소리가 언제까지 계속될진 알 수 없지만...우리의 사랑스러운 용의자 형민이가 하나님이 계획하신 단계 안에서 무럭 무럭 키와 몸과 사랑이 자라나는 모습을 기대하는 맘으로 지켜 보고 싶습니다. 

형민이는 이제 만 2년 6개월이 지났습니다. 앞으로 일년 더 까작스딴 생활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아마도 용의자 딱지를 떼지 않을까 예상되지만....웬지 그 때가 되면 지금이 그리울 것 같습니다. 2003.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