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심강에 내리 쬐는 나우리즈의 기운

아스타나도 봄 기운이 완연합니다. 지난 3월 22일은 까작스딴의 주류 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까작인들의 설날인 '나우리즈' 였는데 낮과 밤의 길이가 똑같아지는 춘분을 설날로 지키고 있습니다. 비단 까작인들뿐 아니라 중앙 아시아의 몇몇 민족들이 춘분을 전후로 나우리즈 와 같은 전통 명절을 가지고 있다는데...신기하게도 나우리즈 3 일 전부터 아스타나의 날씨가 갑자기 따뜻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영하 10도 이하로 내려가는 일은 거의 드물고 낮기온이 영상 1-2도 까지 올라가는 신비로운 자연의 섭리를 보며 봄이 가까이 왔음을 실감하는 요즘이지요.

물론 지난 주에도 눈은 자주 내렸습니다. 자고 일어나서 창 밖을 내다 보면 마치 무슨 마법에 걸린 것처럼 커다란 함박눈들이 도시 전체를 하얗게 만들며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하지만 이젠 '이렇게 눈이 오는 모습도 곧 사라지겠구나...' 라고 중얼거려야만 합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겨우내 아기들과 집 안에 갇혀 있어야 했던 선화 였습니다. 물론 교회에 가거나 가끔씩 다른 집에 초대받아서 함께 외출할 때가 있긴 했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지난 몇 개월 동안은 아이들과 산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었습니다.

'나우리즈' 였던 22일은 하루종일 비와 눈이 섞여 내린 궂은 날씨였습니다. 도시 곳곳에서 나우리즈를 축하하는 많은 깃발이 나부끼고 있음에도 우린 하루종일 집 안에만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후...지난 24일 다시 하늘이 맑아지자 우리 가족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뜻한 봄 기운을 맞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습니다.

까작스딴에 살고 있으면 다른 어떤 계절보다 봄, 가을을 만끽하기 어렵습니다. 4월이 다 지나가더라도 매서운 찬 바람은 그치지 않고 있다 5월이 되면 여기 저기 잔디밭이 푸릇푸릇 해지기 시작하면서 봄이 시작되는데... 6월에 들어서면 벌써 숨 막히는 뜨거운 햇살이 내리 쬐기에 봄은 그야 말로 짧은 순간입니다.

게다가 까작스딴에서는 '봄' 을 연상시키는 여러 가지 소재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봄' 하면 떠오르는 개나리, 철쭉, 진달래 같은 정겨운 우리네 꽃들은 아예 구경할 수 없고 쑥, 냉이 같은 봄 음식들도 맛 볼 수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게 물어 보면 쑥이 있긴 있는 모양인데... 바자르(시장)에서는 팔지 않고 도시 외곽에 나가야 찾을 수 있다고 하더군요. 물론 이것도 확인된 정보가 아니라 그저 추측일 뿐입니다. 글쎄요...올해는 쑥을 찾으러 공항 쪽 들판으로 나갈 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봄 기운이 완연해 졌다고는 하지만 아스타나 도심을 가로지르는 이심(Ishim)강은 아직도 꽁꽁 얼어 붙어 있습니다. 매년 10월이면 얼어 붙기 시작해서 4월이나 되어야 녹기 시작하는 이심강은 이제 가는 겨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죠. 영하 40도의 강추위 속에서 1미터 가까이 얼어 붙었던 두꺼운 얼음도 이제 조금씩 얇아지고 있는 때입니다.

네 식구가 이심강 강 위로 내려 갔습니다. 강둑을 따라 예쁜 아파트가 줄 지어 있어 이심 강변은 언제나 아스타나의 볼거리 중 하나이지만... 겨울에는 그저 강인지 들판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흰 눈과 얼음만 보이는 곳이죠.

뒤로 보이는 다리가 요즘 새로 보수하고 있는 인도교(사람이 통과하는 다리)의 모습입니다. 이제 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데 예쁘게 색칠만 하면 이심강에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 작년 봄 예전 다리 위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시려면 여길 누르시면 됩니다.)  

형민이는 강 얼음에 깔린 눈에 반사된 빛 때문에 눈을 제대로 뜨질 못하고 있네요. 선화는 둘째 시은이을 앞으로 매달고 다니는데 아직도 매서운 바람 때문에 늘 포대기를 앞으로 걸치고 다닙니다. 한국에서 구입한 신을 신고 까작스딴으로 돌아 온 선화는 아스타나의 미끄러운 눈얼음 위를 적응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안전하게 다니려면 눈얼음 위에서 다니기 쉽도록 만든 이곳 신발을 사야하는게 상식이지만 곧 겨울이 갈 거라 보고 계속 한국 신을 고집하고 있답니다.

강 둑 옆으로 산책로가 나 있고... 아래로는 눈얼음에 덮인 이심강이 보입니다.

이 사진이 아스타나의 대표적인 경치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지요. 98년부터 까작스딴의 수도가 된 아스타나에는 아직 CIS권 국가(우크라이나, 벨라루시...) 외에는 대사관을 설치한 곳이 없습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훨씬 기후가 따뜻하고 도시 인프라가 잘 구축된 이전 수도, 알마티에  대사관을 그대로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까작스딴 정부는 강력하게 새로운 수도 아스타나로 대사관을 옮겨줄 것을 각국에 요청했고 대통령 나자르바에프 대통령도 2년마다 한 번씩 여는 영내 외교관 공식 모임을 앞으로는 아스타나에서 개최하기로 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또 실제로 장관급을 만난다거나 대통령과의 모임을 위해서는 각 공관장들이 늘 아스타나로 올라 와야 하기에 대사관 이전의 필요성은 각 공관들이 이미 느끼고 있기도 하지요.

한국 대사관은 올해(2003년) 대사관 연락 사무소를 아스타나에 개설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미 일본이 아스타나에 연락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행정 수도인 아스타나에 외교 채널을 두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에 의해 우리 나라도 올 하반기부터 영사 업무도 취급하는 연락 사무소를 이곳에 열게 된다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내년(2004년)에는 한국국제협력단(KOICA) 연락 사무소가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옮겨와 까작스딴 내 KOICA 활동을 지원하고 추진하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교민 사회는 아직 미미하지만 아스타나에 대한 한국측의 관심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봐야 겠지요?

우리 가족이 강으로 나갔던 3월 25일은 눈꽃이 활짝 피기도 했던 날입니다.

아스타나의 경우 눈이 와서 눈꽃이 생기는 경우는 드물다고 봐야 합니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바람이 나무에 눈이 쌓이지 못하니까요...

그 대신 전날 밤 습도가 높았던 경우 새벽녘에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나뭇가지에 물기들이 꽁꽁 얼어 붙으면서 마치 눈처럼 쌓여 하얀 눈꽃을 연출하게 됩니다. 서리가 눈에 주렁 주렁 매달려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미 11시를 넘긴 시간이라 대부분의 눈꽃들은 이미 햇볕에 녹았지만 응달에 있는 몇몇 눈꽃들이 아직 살아 있어서 그 아래에서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이제 점점 따뜻해질테니 이런 눈꽃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요? 이심강변에서 봄볕을 느끼던 우린 나우리즈 축하 장식물이 아직 좀 남아 있는 주 광장으로도 나가 보기로 했습니다. 나온 김에 확실하게 산책하는 거지요.

각 민족마다 한 해의 시작을 축하하는 설날이 다르다는 건 재미있는 일입니다. 우리 민족은 월력에 의존해서 지난 1월 31일을 설날로 지켰지요? 러시아인들의 경우 태양력을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1월 13일을 전통 설날로 지킵니다. 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율리우스력(로마시대부터 사용해 왔던 태양력, 서구 세계는 1582년부터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의 제정된 그레고리력을 사용해 왔으나 동방 교회의 정통을 잇고 있던 러시아는 1918년까지 율리우스력을 그대로 사용해 왔습니다.) 은 그레고리력보다 매년 11분이 늦어 현재는 총 13일로 차이가 벌어져 있고 서구보다 13일 늦게 설날을 맞는 셈이죠.

까작인의 경우 설날은 3월 22일입니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을 일년의 시작으로 삼는 전통은 '노오루즈', '노브루즈' 라는 다른 이름으로 여러 아시아 국가에서 기념하고 있다는데 명절을 지키는 풍습이 각각 차이가 난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아제르바이젠 공화국에서는 "샘물을 깨끗이 청소하라" 는 얘기를 하면서 샘물가를 청소하고 " 이 나무를 베는 자는 열배로 나무를 심어라" 라고 얘기하며 나무를 심고 우유를 끼얹는다고 합니다.

까작인들의 경우에는 주로 화해와 용서의 의식으로 나타나는데 옛날에는 전쟁터에서라도 이 날이 되면 무기를 서로 교환하고 화해를 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나우리즈가 되면 까작사람들은 서로 화해하면서 사람들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 음식을 나누며 친척과 같은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데 하루 종일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위 사진은 나우리즈 장식이 남아 있는 주광장에서 찍은 사진인데 정면에 보이는 높은 빌딩이 까작스딴의 국회이고 왼쪽 건물이 정부 청사 입니다. 많은 대형 그림들과 오색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지요? 나우리즈 당일에는 '유루트' 라고 부르는 까작 전통 가옥들을 설치해 놓고 전통 음식을 만들어 팔기도 합니다. 그야 말로 잔치날이지요.

나우리즈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는 의식 아래에는 '태양 숭배' 라는 고대 사상이 깔려 있기도 한데...나우리즈 때가 되면 일출을 맞이하면서 " 평안하십니까? 우리의 어머니 태양이여! " 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그들은 태양의 순결함이 평안과 절대 선을 마음에 가져다 준다고 믿고 있이죠.

어쨋든 춘분을 설날로 지키는 까작인의 나라에서 형민이는 나부끼는 오색 깃발을 보며 신나게 한 때를 보냈습니다. 광장에서 "나비야..나비야..." 노래도 부르고 엄마 손을 뿌리치고 여기 저길 뛰어 다녔으니까요.

이곳 까작스딴 사람들도 지금 바로 근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 전쟁에 관심이 많습니다. 2003년 까작스딴 투자 순위 1,2,3위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 이지만 까작스딴의 외교 원칙은 '러시아 우선 정책' 이 기본입니다. 비록 까작스딴 영토 내의 재래식 무기 철거를 조건으로 미국으로부터 수백만불의 원조를 받고 있긴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까작스딴은 러시아, 벨라루시, 우크라이나 등과 함께 중앙 아시아 경제 공동체를 만들려고 애써고 있고 어느 국가보다 러시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비록 까작 민족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민족의 국가이지만 당장 까작스딴이 경제, 외교적으로 일어서기 위해선 러시아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프랑스, 중국, 러시아와 같은 나라들이 미국, 영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동조하지 않았던 것 잘 아시죠?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도 러시아는 UN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이라크 파병이 상정되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라고 천명했고 까작스딴도 전쟁보다는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을 거듭 밝혔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까작스딴에 대한 미국의 발빠른 접근이 계속되었습니다. 미 국무 장관의 전화...미 대사의 접견 요청...이슬람 민족인 까작인의 국가이지만 미국이 내미는 여러 가지 현실적이 조건을 뿌리치기 힘들었겠지요. 며칠 전...정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이라크 무장 해제를 위한 국제 공동체의 노력을 지지해 왔지만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제출하지 않은 사담 후세인 파괴적 입장 때문에 이 문제의 평화적 해결 가능성이 없어졌다" 라고 발표했습니다. 물론 "까작스딴은 UN 테두리 안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길 원한다" 고 거듭 말했지만 자국 이해가 걸린 사안에 대해선 우리 나라처럼 함부로 속내를 드러 내지 못하는 게 현실인가 봅니다.

지구 한 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 소식으로 걱정스러운 요즘이지만...봄은 어김없이 찾아 오고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까작스딴에서 '나우리즈'를 한 번 더 맞은 뒤 한국으로 돌아 갈 예정입니다만...우리가 귀국할 내년 4월 초 아스타나는 봄이라고 말하기엔 이른 계절일 것이 분명하기에....이번 5월 우리가 맞이할 봄이 이국 땅 까작스딴에서 맞을 마지막 봄처럼 느껴집니다. 이곳에서 보내는 하루 하루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게 느껴지는 요즘...얼어붙은 땅에 생기를 불어 넣을 자연의 섭리를 조바심 나는 맘으로 기대합니다.

주 광장 한 쪽 편에는 꽃을 가득 든 까작 아이의 모습을 그려 넣은 대형 휘장이 세워져 있는데 그 앞에 형민이가 서자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민족은 다르지만 사계절을 맞고 자연의 변화를 받아 들이는 사람의 마음은 동일하다는 것을 느끼며 우리 가족은 새 봄을 맞습니다.

이심강에서 본 겨울의 뒷 모습은 이제 저편으로 사라지고....봄이 던져 주는 새로움과 희망을 가득 안고 우리 가족은 다시 한 번 힘찬 발걸음을 내딛고 있습니다.  2003.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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