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는 마음 ( I I )

디어 그 날이 다가옵니다. 선화와 아이들이 돌아올 날짜를 확정짓지 못하는 바람에 마음 졸이는 기다림에 지쳐 있던 지난 주말... 또 한 번의 극적인 반전을 겪으며 우리 가족은 희망의 빛줄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 시은이의 여권과 비자 수속이 늦어져 귀국 날짜를 장담할 수 없어 기도 부탁드린다는 글을 our story에 올린 지 불과  8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에 '시은이의 여권이 나왔고 비자 수속 중' 이라는 얘기를 한국의 선화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고 그 다음 날(16일)....알마티 소재 KOICA 현지 사무소로부터 '둘째 아이 비자에 필요한 서류가 17일 나올 예정이니 아마도 21일 비행기를 타고 까작스딴으로 귀국하는 데에는 별 무리가 없겠다' 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가족을 애타게 기다리는 제 맘을 읽은 많은 분들이 저희 가족을 염려해 주시고 기도해 주셨음을 지난 며칠 동안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귀국 날짜를 이틀 남겨 놓은 오늘까지도 시은이의 비자를 받은 건 아니지만  출국일인 금요일까지 이 문제가 잘 매듭지어져서 알마티에서 반가운 상봉을 할 수 있을 거라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인(sign)을 주고 계시니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시은이의 비자가 지연되고 있다는 건 우스운 일입니다. 아빠가 까작스딴에서 외교적 신분 보장을 받으며 일하고 있고 온 가족이 2003년 6월까지 복수 비자를 받고 있는 마당에... 막 태어난 둘째 아기를 데리고 까작스딴의 집으로 돌아 오는 게 어떻게 어려울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우리 가족이 지나가야 할 훈련이고...한국에서 선화와 아이들이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게 하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쨋든 전...오늘 알마티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알마티로 내려 갑니다. 물론... 아직 시은이의 비자를 받았다는 연락을 받진 못했습니다. 하지만...나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오늘 밤 8시 7분 기차를 타게 됩니다.

아스타나에서 알마티까지는 1200Km 정도 거리이고 기차로는 21시간 정도 걸립니다. 알마티에서 악따우나 알라따우 같은 카스피해 연안의 도시로 가려면 같은 나라 안인데도 기차로 3일이나 걸린다고 하니...까작스딴이 얼마나 큰 나라인지 실감하시겠지요? 재작년 가을... 알마티에서 아스타나로 올라올 때 탄 기차는 무려 26시간이나 걸렸었는데 그 기차 여행이 제 생애에서 가장 긴 단일 철도 여행 시간이었습니다.  

한국에 있는 선화와 형민이도 아빠를 만나러 간다는 생각에 들떠 있을 게 분명합니다.

오늘..한국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받았는데 부산 남포동의 어느 닭갈비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는 장면입니다.

형민이는 매운 닭갈비 양념을 먹을 수 없기에 선화가 인근 피잣집에 가서 스파게티를 사서 먹였다는데...포크를 들고 열심히 스파게티를 떠 먹는 형민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 보고 있으려니 지나간 4개월이 훌쩍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 맞아... 내게 저런 아들이 있었지...' 사진 속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보고 싶은 맘을 누를 수가 없습니다.

참 많이 큰 것 같습니다.  저 자리 한 쪽에는 아빠가 앉아 있어야 하는데....아빠의 빈자리를 형민이는 알고나 있는지...요즘 형민이는 아빠가 자기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걸 깨닫고 있나 봅니다. 처음 한국에 가서는 한 달 이상 동안 "아빠 어디 갔니?" 라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테니스 채를 들고 휘젓는 시늉을 하면서 '아빠는 지금 테니스 치러 갔다' 고 표현했었습니다. 그러나...아무리 기다려도 테니스 치러 간 아빠는 오랫동안 돌아 오지 않고...병원에 갔던 엄마만 조그만 아기 하나를 데리고 들어 왔지요.  그리고 형민이는 지금껏 겪어 보지 못했던 환경과 감정의 변화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가에 가 있는 선화와 나눈 전화 통화에서도 "오빠..형민이가 정말 많이 컸어요...형민이는 이미 주변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기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자신에게는 덜 집중한다는 걸 눈치채고 있거든요...오늘도 우진(고종사촌, 생후 3개월)이에게 사람들이 모여들자 슬며시 방을 나와선 할아버지나 삼촌이 있는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어요. 그런데...그 때 걸어가는 형민이 얼굴 표정이 얼마나 심각하고 진지하던지...약간은 체념한 듯한 형민이의 모습을 보면서 형민이가 이제 많이 자랐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자기 맞은 편에서 사진 찍는 아저씨를 쳐다 보는 형민이의 모습은 마치...'항상 저렇게 사진기를 들고 날 바라보는 사람은 아빠였는데...' 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형민이에게 있어서 아빠는... 늘 새로운 것을 보여 주는 사람, 카메라를 들이 미는 사람, 자동차로 새로운 장소를 안내하던 사람, 자신의 곁을 지켜 주던 사람, 엄마와 늘 함께 있는 사람 이었습니다.

아마도 형민이는 사진 찍는 저 순간...아빠의 모습을 문득 떠올렸는지도 모릅니다.

아빠와 헤어져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아빠의 음성은 전화기에서만 들리는 소리였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람스토르, 비행기, 빵빵(자동차).." 같은 낯익은 단어를 들먹이며 빨리 돌아오라는 얘기를 하는 아빠의 음성을 들은 지도 이제 수 개월...이제 형민이의 머리 속에는 어딘가에 있을 아빠를 만나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있나 봅니다.

" 우리 모두 감기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구요.. 저도 시간이 다가올수록 힘이 나요. 형민이도 부쩍 아빠한테 전화를 많이해요. 장난감 전화기로... " (2월 17일 선화의 편지에서 )

" 요즘은 형민이가 아빠한테 비행기 타고 간다는 이야기를 많이해요.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는걸 많이 들어서 그런지... 이렇게 형민이는 또 떠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나봐요. 형민이가 요즘 자주 쓰는 말이 부사로 많이 확대되었는데... 아까, 위에, 밖에.. 같은 말도 하고... 그리고 기도도 합니다. 밥 먹을 때 형민이가 먼저 기도하고 누군가 다시 해요. 신기하죠. 기도에는 아빠, 삼촌, 할아버지, 할머니도 들어가고 때론 '다---만 악에서..' 가 들어가는 주기도문도 하지요. 그리고 3일 전부터 밤에 기저귀를 안 할려고해서 그냥 재우는데 결국 어제는 이불에 지도를 그렸지요. 집에 돌아가면 본격적으로 밤에 쉬- 가리기도 해야겠어요." (2월 8일 선화의 메일에서)

이제 만 2년 4개월이 지난 형민이는 이렇게 아빠와의 만남을 준비하고 있나 봅니다.

한국으로 들어가기 한 달 전인 2002년 10월의 어느 날...혼자 남은 아빠가 먹을 김치를 담그고 있는 선화와 형민이의 모습입니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고 씻은 뒤 양념을 만들어 배추에 버무리는 모든 작업을 엄마와 형민이가 함께 합니다. 소금을 뿌릴 때도 형민이는 꼭 자기 손을 뿌리려고 하고...양념에 배추를 버무릴 때도 사진에서처럼 앞치마를 두르고 아예 자신만의 김치를 담급니다.

지난 4개월 동안 우리의 아름다운 일상 생활은 정지했던 것 같습니다. 전...지난 4개월 동안 깰 수 없었던 꿈 속을 헤매 다녔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이제 꿈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분명 한국에서도 까작스딴에서도 4개월을 보내며 열심히 생활했지만....또 귀여운 둘째 아기도 태어 났지만....선화와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이 함께 몸을 맞대며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사랑하며 지낼 수 없었던 지난 4개월은 괴로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요즘 선화의 전화 음성도 아주 밝아졌습니다. 아내가 없는 남편은 참 불쌍합니다. 지난 4개월 동안의 제 생활을 돌아 보면 그렇기 때문입니다. 결혼 전만 해도 혼자서 어떤 일이라도 할 수 있었고 혼자 있는 것이 편하고 멋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이제는 아닙니다. 혼자 있는 내 모습은 이제... 불완전한 모습입니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도 내가 가장 '나' 다울 때도...선화가 옆에 있는 때라야 가능합니다. 지난 4개월 동안 다른 사람에게 터놓기 힘든 많은 결정의 순간들....선화에게 이런 저런 넋두리를 늘어 놓고 싶은 수 많은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내 주변에는 적막함만 맴돌뿐이었습니다.

가족과 떨어진 4개월 동안 내 맘 속에는 '하나님은 그동안 가족을 통해 내게 그렇게 큰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셨구나...' 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어떤 어려움도 없이 아름다운 에덴동산에서 살던 아담에게도 외로운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우리 하나님은 외로워 보이는 아담을 위해 하와를 이끌어 오셨습니다. 가족은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이기에...가족을 내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아스타나는 아직 한 겨울입니다. 오늘도 영하 30도에 이르는 추위가 눈보라를 날리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선화가 아스타나를 떠난 4개월 전에도 이미 아스타나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습니다. 겨울이 가려면 아직 2개월 이상 기다려야 하는 추운 이 계절에... 선화와 형민이 그리고 아직 얼굴을 대면하지 못한 시은이가 온다는 소식은 내 삶에 더할 수 없는 기쁜 소식입니다.

사실...항공편을 이용하면 1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알마티를 굳이 21시간이나 걸리는 기차를 타고 가는 이유도....돈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스타나에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하루 더 아스타나의 빈 집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보다는 가족을 만나러 가는 흔들리는 열차 속에 몸을 싣고 있는 게 더 행복하니까요.

아마...다음 소식은 우리 네 식구가 만나는 기쁨을 소개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혼자 생활하는 저와 남편을 떠나 혼자 두 아이를 데리고 살아야 했던 선화를 격려해 주신 많은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해 드립니다.

그리고...오는 2월 21일 밤...인천 국제 공항에서 출발하는 에어 까작스딴 비행기가 6시간의 비행 시간 동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알마티 국제 공항에 도착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또 오늘도...언제나 우리 가정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 보시며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변함 없는 사랑에 언제나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내 모습이지만 내 맘에 가장 큰 감사로 올려 드립니다. Thank you, Lord!    2003.2.19

후기) 이 글의 제목을 '기다리는 마음(II)' 라고 한 것은 '기다리는 마음' 이라는 제목의 글이 이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글은 다름 아니라 지난 2000년 6월 11일 임신 6개월인 선화의 뱃 속에 있는 형민이가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린다는 의미로 적은 글이었습니다. 2년 반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 때와 마찬가지로 형민이와 선화를 기다리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