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한의 아스타나

달력은 이제 맨 마지막 장만 남았습니다. 헤어짐의 아픈 기억이 아직도 묻어 있는 11월 달력을 지나간 시간의 저편으로 훌쩍 넘겨 버리고 나니...내 마음도 한결 밝아지고 모든 게 희망적으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는 생각은... 이렇게 말 없는 위로가 되고 있고... 보고 싶은 선화와 형민이도 곧 내 곁으로 돌아올 거라 믿어집니다.

매년 12월 초 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 왔던 아스타나의 추위는 올해도 변함없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사실...최근 몇 년 사이 아스타나의 날씨가 따뜻했다고는 하지만....12월 초에는 항상 영하 30도를 밑도는 추위가 찾아 왔었습니다. 올해도 지난 11월 30일 늦은 밤부터...눈가루들이 흩날리더니...갑자기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12월 1일에는 영하 28도까지 떨어졌고....온 도시는 급격하게 초저온으로 냉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 안방 창문에는 온도계가 붙어 있는데 아침에 일어 나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바로 이 온도계를 보는 일입니다. 온도계의 눈금을 보고 나서야 밖으로 입고 나갈 옷의 종류를 결정할 수 있는데...난방이 잘 되는 아파트 안에서는 바깥 기온을 점치기 어렵기에... 온도계는 이곳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필수품입니다.

12월 2일 아침...여느 때와 다름없이 온도계의 눈금을 보려고 창가로 다가 갔습니다. 하지만....유리 창에 두껍게 달라 붙어 있는 얼음으로 인해 제대로 눈금을 읽을 수 없었습니다. 부엌으로 가 뜨거운 물을 행주에 묻혀 와 유리창에 비비고 나서야 어렴풋이 눈금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영하 35도 였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아스타나에서의 첫 겨울을 맞아야 했던 작년 이맘 때....아스타나 여기 저기에 설치되어 있는 온도계에서 촬영한 최저 온도들을 소개하면서 이곳의 겨울 날씨를 간접적으로 알려 드리곤 했었습니다.  하지만...실제로 최저 기온은 해 뜨기 직전 새벽녘에 기록되는 게 일반적이어서....이른 아침 유리창 온도계에서 기록적인 저온을 확인했다고 하더라도....아침 식사를 하고 옷를 챙겨 입고 바깥으로 나가 보면...이미 거리의 온도계는 몇 도 정도 상승된 온도를 보이는 게 일반적이라...기록적인 이곳 추위를 제대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작년 이맘 때...영하 28도를 보이고 있던 리스푸브리카 거리의 온도계를 촬영한 것이 제 카메라에 포착된 범위 내에서의 '지난 겨울 최저 온도 신기록' 이었습니다.

유리창 온도계에서 영하 35도를 확인하자 말자... 급히 디지털 카메라와 삼각대를 챙겨 밖으로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어쩌면...작년 최저 기록보다 낮은 온도계 숫자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이미...해는 하늘에 떠 있고 온도는 올라가기 시작하고 있었지만...서둘러 까작스딴 국회 앞의 온도계로 차를 몰았고...마침내....작년 최저 기록보다 더 낮은 영하 32도의 온도계 숫자를 촬영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온도계 뒤의 높은 빌딩이 까작스딴 국회이고....12월 2일 이라는 날짜와 함께 영하 32 도 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 곳에서 추위에 벌벌 떨며 사진을 찍으면서...한국에 가 있는 선화와 형민이 생각을 했습니다. 이 추위에 여기 있었더라면...집 밖으로는 꼼짝도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을 텐데...선화에게 이 사진을 보여 주면...한국으로 간 게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지요.

한국에 있었으면 영하 32도의 추위를 제가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영하 30도 대의 추위에서는 거리에서 걷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입니다. 숨을 쉴 때는 반드시 입을 이용해야 하는데...코로 숨쉴 경우 극도로 냉각된 공기가 코 끝을 얼게 만들어 떨어질 것 같은 통증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추운 도시 아스타나에서는 이상하게도 실내 주차장이나 지붕 달린 실외 주차장을 찾기 힘듭니다. 실내 주차장은 전 아스타나 시내를 통틀어 손에 꼽을 만한 정도이고...이렇게 추워지면 몇 군데 안되는 난방이 되는 주차장은 일찌감치 꽉 차 버리기에 대부분의 차들은 지붕 하나 없는 거리의 주차장에서 얼 수 밖에 없습니다.

또...아무리 난방이 되는 좋은 주차장이 있다고 한들...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면 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도 매일 저녁 주차를 끝내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뒤...다음 날 아침...눈보라를 맞으며 다시 택시를 타고 주차장으로 가 자신의 차를 끌어 내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차를 이용할 수 있는 곳에 주차장이 있어야 정상적입니다.

지금 제가 이용하는 주차장의 모습입니다. 빨간 번호판의 하얀 자동차가 우리 집 자동차 '닛산 서니(Sunny)' 입니다. 이렇게 그냥...아무런 보온 장치도 없이 추운 겨울과 맞닥뜨려야 합니다.

마침내..지난 12월 1일...우리 차는 갑자기 찾아온 영하 30도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얼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동을 걸어 보려고 아무리 차 열쇠를 돌려도 "....끄끄끅..." 하고... 뭔가가 약하게 돌아가는 느낌만 들 뿐...차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혹한 속에서 이렇게 시동이 안 걸린다면 ...몇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흔한 게 축전지의 방전입니다. 너무 온도가 낮다 보니...축전지의 충전 상태가 유지되지 못하고 다 방전되 버리는 경우지요. 보통 오래된 축전지의 경우가 이에 해당되는데....오래된 구 소련제 자동차(지굴리, 스푸뜨닉, 볼가, 니바) 인 경우...이에 해당될 가능성이 더 높은 편입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추운 날이면...주차장에 차를 세워 둔 뒤 차 앞 덮개를 열어 축전지만을 떼어 내 집으로 들고 갑니다. 그러면 축전지의 방전을 방지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자동차의 경우는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실내등도 다 들어오고 오디오도 정상 작동하는 걸 보면 축전지의 방전이 원인이 아님을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시동이 안 걸리는 걸까요?

다음으로 많이 지적하는 것은 윤활유 입니다. 윤활유가 영하 40도 정도의 온도에서 얼 수 있다는 것이죠. 사실...아스타나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 오면 반드시... 필수적으로...어김없이... 새로운 윤활유와 부동액으로 교체합니다. 상식으로 통하는 일이죠. 윤활유는 반드시 영하 40도까지 얼지 않는다는 표시가 된 유명 메이커의 제품(Shell 등...)을 쓰는 것이 안전합니다. 만일 남쪽의 알마티에서 몰고 다니던 차로 ...그냥 아스타나에서 겨울을 맞았다면...윤활유가 꽁꽁 얼어 붙어 시동이 걸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남쪽 지방에서는 영하 40도 까지를 확실히 보장해 주는 비싼 윤활유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동차의 경우도 이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지난 11월...영하 40도 까지도 안전한 Shell 사의  윤활유로 미리 교체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물론...시동이 안 걸린다면 점화 플러그나 연료 펌프 같은 것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기본적으로 이것 역시 잘 관리해 왔었다고 생각한다면...추운 겨울이라고 왜 시동이 안 걸리는지 여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를 어떻게 다시 움직이게 할 수 있을까요? 위에서 말한 항목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시동이 걸리지 않는 자동차의 경우...이곳 사람들은 인위적으로 움직이게 만듭니다.

이를 위해서는...정상적으로 움직이는 또 다른 자동차 한 대와 튼튼한 줄이나 쇠줄이 필요한데...이 줄로 두 자동차를 연결해서 앞에 차가 꽁꽁 얼어 붙은 뒷 차를 끌고 몇 십 미터 정도 끌고 가게 해야 합니다. 이 때...끌려가던 뒷 차의 운전자는 시동 키를 돌려 "전원" 위치에 놓고.. 기어는 2단에 두고 왼발로 클러치를 밟은 상태에서 끌려 가도록 해야 합니다. 끌려 가는 자동차의 속도가 어느 정도 붙게 되면...왼발을 약간 들어 기어가 들어가도록 만드는데...이 순간에는 자동차에 저항이 생깁니다.

운이 좋은 경우...이 한 번의 동작으로 시동이 걸릴 수 있습니다. 만약 시동이 안 걸렸다면 다시 클러치를 끊고(왼발을 밟고) 얼마간 더 끌려 갑니다. 그러다가...다시 속도가 어느 정도 나면 클러치를 뗍니다. 그러면..."부르릉...."하고 시동이 걸리게 되지요.....

영하 32도의 사진을 찍기 바로 전 날 저녁 ...얼어 붙은 제 차도 이런 식으로 다시 시동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얼어 붙은 도시를 배경으로 온도계의 숫자를 담느라 바쁘게 돌아 다닙니다.

선화와 형민이가 없는 아스타나에서...혹한이 밀어 닥치면...제일 먼저 신경 쓰이는 게 자동차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혹한기에 우리 자동차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유에 대해 윤활유는 동결되지 않았지만...기어 오일과 핸들 오일이 거의 얼어 붙어 버려 자동차가 움직일 수 없는 거라고.....나름대로의 답을 내려 놓고 있습니다. 물론...딱 한 가지의 이유 만으로 단정하기 어려운 복합적 요인도 작용하고 있겠지만요....

이야기는 재미없는 자동차 얘기로 흘러 갔지만....아스타나의 추운 날씨를 얘기하고 싶은 바람에 빚어진 일입니다. 전....영하 30도 대의 추위를 눈으로 확인하고 피부로 체험하며 지내면서... 평생 잊지 못할 얘깃거리를 하나씩 쌓아가며 살고 있습니다.

영하 32도의 아스타나.....날씨는 아주 추워졌지만 제 생활은 오히려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선화가 간 지 이제 한 달...약간 씩 맘의 여유도 생기는 것 같고...선화와 매일 나누는 전자 우편을 통해 혼자 떨어져 있지 않음을 확인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쓴...오늘 밤에도 선화로부터 아래의 메일을 받았습니다.

 -----Original Message-----
From: 이선화 [mailto:selah21@hanmail.net]
Sent: Wednesday, December 04, 2002 12:12 AM
To: holy3927@netian.com
Subject: 오빠... 오늘도 잘 지내셨어요...

" 지금 여긴 비가 온답니다. 아침부터 흐리더니 오후부터는 제법 비가 오고 있어요. 이 집은요... 24층이라서 빗소리를 듣긴 힘들지만 온 거리가 촉촉하게 젖어있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어서 아주 운치가 있어요.

영하 32도.... 우와... 오늘 우리 차는 어땠는지 궁금하네요. 소장님과 다녔어야 했을 텐데... 혹시 또 자동차가 섰다면.... 소장님이 아스타나 단원들이 정말 고생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셨겠네요. 그리고...오빠가 방명록에 답장을 단 걸로 봐서는... 저녁에는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있나 보네요...(여자들은 하나를 보면 10가지를 추정해낸다는 거 알죠?) 뜨거운 차나 쌍화차 마시면서 추운 몸 녹이세요...

우리 홈 카운터가 6만을 넘어섰죠? 저도 너무 기뻐요. 오빠가 홈페이지 작업을 좀 많이 한다 싶으면 내가 바가지를 많이 긁었었는데... 미안해요... 오빠, 하지만 난 좋은 홈페이지도 갖고 싶고 오빠랑도 같이 붙어있고 싶거든요...

형민이는 아주 좋아졌답니다. 부민동(시댁)에서 옛날에 오빠가 쓰던 삐삐를 가져와서 건전지를 넣어줬는데 오늘은 그걸 가지고 전화로도 쓰고 카메라로도 쓰면서 잘 가지고 놀았어요. 요즘은 카메라(삐삐, 혹은 장난감 카메라)를 멀리 세워놓고 우리보고 다 벽에 기대서 서래요. 멀리서 타이머를 이용해서 찍는 것, 그걸 흉내내는데.... 형민이 요구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사진 많이 찍었답니다.

오빠, 형민이가 요즘 노래를 얼마나 잘 하는지 몰라요. 여기 와서 어휘도 부쩍 늘고(버스, 기차, 휴지, 비누, 치약, 사탕, 요구르트 등등) 노래도 제법하는데 물론 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음과 박자만 가지고도 얘가 뭘 노래하는지 알수 있을정도로 정확하답니다. 주로 부르는 노래는 " I love you, You love me..."(바니에 나오는 그 노래), 그리고 "생일축하합니다" 또... "펄펄 눈이 옵니다." 예요. 자기 전에는 "띠뗘빠쮸" 를 불러달라고 하는데 바로 "샛별같은 두 눈을..." 을 말하는 거에요. 그리고 제법 따라 부르구요... 오빠가 보면 너무 신기해 할 꺼에요.

내일은 검사하러 병원에 갈 예정이에요. 형민이가 괜찮으면 데려 가고, 아니면 다시 떼어 놓을까 싶어요.그래서 이제부터 금식에 들어갑니다. 별일 없겠지만... 혹 임신성 당뇨가 있으면 좀 교정 받으면 되겠지요. 사실 형민이때는 출산때 몸무게가 65kg이었는데 이번엔 벌써 67kg이 되니까 좀 몸이 둔한게 사실이거든요. 그러나 오빠 말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사정을 아시고 순산하게 해 주실꺼라고 믿어요.

혹시 내일 미추리나 진료있는 날인가요? 남목사님 교회와 겹치지 않는 주에 하는 것 같은데... 좀 헷갈리네요. 오빠, 늘 안전운전하시구요.... 멀리서 브레이크 밟는 거 잊지마세요... 그럼 오빠, 내일 만나요.."

 

 

선화의 글을 읽고 나면...제 맘은 안정감을 더욱 찾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옆 사진에 나오는 이심강 변의 "께네사리 한"(까작 부족의 영웅적인 왕) 동상 처럼...혼자 외롭게 지내고 있지만....또... 영하 32도를 밑도는 추운 날씨 속에서 온 몸을 웅크리고 눈보라 사이를 피해 다니고 있지만...날 사랑하고 기다려 주는 선화와 형민이 생각에 작년 보다 추울 거라는 이번 겨울이 조금도 걱정되지 않습니다.

또...다시는 자동차가 혹한에 꽁꽁 얼어 붙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자동차를 얼지 않게 하는 좋은 방법을 알아 내어 벌써 효험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은 지금 아스타나의 모든 주차장에서 시행되고 있는 공통적인 방법인데...바로...주차장을 지키고 있는 관리 아저씨에게 50 뗑게(우리 돈으로 400원 정도...)를 쥐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아저씨가 밤새도록 2시간 간격으로 자동차에 시동을 걸어 혹한으로 인해 자동차가 얼어 붙는 것을 막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방법은 난방 주차장과 실내 주차장이 거의 없는 아스타나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혹한기 주차 방법' 이라고 하네요...덕분에 영하 40도에 접근하는 며칠 밤 동안에도 우리 차는 끄떡 없이 추위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혹한의 아스타나....참 색다른 곳이죠?   2002.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