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산 지 일주일...

선화와 형민이가 없는 아스타나에서 혼자 산 지... 오늘로 일주일 째가 됩니다. 아스타나로 혼자 돌아온 다음 날부터 이 곳에는 많은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내리기 시작한 눈은 간간이 멎기는 하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거실이나 안방의 창문을 통해... 하염없이 내리는 눈과 눈밭을 지나 다니는 자동차들을 보면서 내 마음은 어느 새 깊은 상념에 빠져 듭니다. 그리고 슬그머니 한국에 가 있는 선화와 형민이의 곁으로 날아갑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창가에 옹기 종기 모여 바깥을 내다 보곤 했는데...이젠 나 혼자입니다.

안방에는 형민이의 장난감들이 여기 저기 보입니다. 보자기로 덮어 놓은 장난감 통 안에 이런 장난감들을 하나씩 주워 담습니다. 형민이가 와서 이 시끄러운 고양이 장난감, 전화기 장난감들의 소리를 다시 울려 주길 바라며 조심 조심 쌓아 올린 뒤 보자기로 덮었습니다. 아직 건조대에 걸려 있는 형민이의 빨래들...내 방 창가에 세워져 있는 형민이와 선화의 사진들...지금이라도 어디선가 "아빠...."하고 소리치며 다가올 것 같은 어두운 방은 떠나간 두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입니다.

부엌, 욕실에는 선화가 남기고 간 메모들이 붙어 있습니다. 욕실에는 "1. 빨래는 두가지로 분류한다. 1) 속옷 및 흰옷 (속옷과 ..."  로 시작하는 세탁기의 사용법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고 부엌에는 "밥하기  - 먼저 쌀을 3컵 정도......"  로 시작하는 부엌 살림에 대한 선화의 조언이 적힌 종이가 붙어 있습니다. 이 종이들을 볼 때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이 글을 치던 선화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또 말 없이 결혼 생활 동안 묵묵히 선화가 해 왔던 수 많은 일들이 생각납니다.

전 선화에게 매일... 메일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메일에는 그 날 일어난 일들이 옆에서 얘기하듯 적혀 있고... 간혹 제가 차린 식탁의 모습이나 이곳 모습을 담은 사진들을 첨부합니다. 물론 그 사진들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지요. 이별 후 며칠 동안은.... 삼발이를 세우고 내 모습을 찍을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았었습니다. 식탁 사진도 our story에 이미 올려져 있는 대로 덩그러니 밥, 국, 반찬, 수저만 나와 있을 뿐입니다.

며칠 지난 뒤....마음은 좀 안정되었고...선화에게 보내 줄 생각으로 내 모습을 담은 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집 앞에서 삼발이를 세우고 카메라에 타이머를 작동시킨 뒤 선화와의 이별 후 처음으로 내 모습을 담았습니다.

미리 구도를 잡을 수 없는 혼자만의 촬영으로 엉성하게 찍혔지만...이것이 혼자 살고 있는 요즘의 내 모습입니다.

선화와 형민이에게...손을 저어 인사를 하고 싶어 손을 들었지만...얼굴에는 미소가 떠 오르지 않습니다.

카메라 렌즈에 떨어지는 눈가루와 회색 하늘을 통해 알 수 있는 이곳의 날씨처럼... 표정없는 얼굴로 그저 그렇게 손만 들고 서 있을 뿐입니다.

선화와 형민이가 가고 난 뒤 남은 자리에는 외로움만 찾아 왔습니다. 물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그 누구도 선화와 형민이의 빈 자리를 채워 줄 수는 없기에...짐작하고 준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찾아 드는 외로움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아스타나를 떠나기 전 날까지 해 왔던 것 처럼...혼자서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찬송을 부르고 우리가 읽던 사무엘상을 읽고 기도 노트에 오늘의 기도 제목을 적고 기도합니다. 형민이도 선화도 없지만....한국에 간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가정 예배를 드리기로 약속했기에...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매일 가정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면...힘이 다시 생깁니다.

혹...마음이 힘들어지면...3개월 후 알마티 공항에 다시 나가....형민이와 형민이의 동생을 데리고 돌아 올 선화와 나눌 감격과 기쁨의 만남을 그려 보곤 합니다. 3개월은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다시 말하면서....

선화가 가고 난 뒤...당장 닥치는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당장 음식을 준비하는 문제일 겁니다. 하지만...이 문제 만큼은 잘 해결하고 있습니다.아스타나에 돌아온 그 날부터 밥 짓고 국을 끓이기 시작한 이후...지금까지 한 번도 혼자서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들어 온 적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집에서 해 먹고 있습니다.

대학 시절부터...학교(부산의대)가 집 근처에 있는지라...점심 시간이 되면 아무도 없는 집에 혼자 들어와 상을 차린 뒤 밥을 먹고 나갔었고 심지어 인턴 시절, 레지던트 시절에도 웬만하면 병원(부산대병원) 근처에 있는 집에 와서 혼자 식사를 하고 일터로 들어 가곤 했습니다. 의대 시절...아무리 큰 시험이 앞에 닥쳐도 절대 학교 도서관에서는 공부하지 않고 강의실이나 집에서 공부했던 제게는 종종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보다 혼자 있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활발한 학교 생활, 써클 생활을 했었습니다.)  이런 경향은 혼자서 밥 하고 빨래하는 지금의 생활을 힘들지 않게 만들어 주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혼자 어떤 작업을 하는 것에는 익숙해 있으니까요...그리고 일반적으로 볼 때 저 처럼 장남인 경우... 막내의 경우 보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혼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하더군요.

밥이야 한국에서 가지고 온 전기 압력 밥솥이 있으니 별 어려움이 없는데...문제는 국입니다.

선화는 냉동실에 10회 분의 만두국 재료와 10회 분의 시래기 국 재료를 넣어 두고 갔습니다. 사실상...그것 외에는 제가 당장 만들 수 있는 국은 없는 셈입니다.(계란 국 정도...) 앞으로 국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여긴 한국처럼 콩나물이나 어묵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이 아니거든요...조언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반찬으로 지금까지 해 본 것은 계란찜(2회 시도, 1회 성공), 햄 구이(3회), 삶은 계란(2회), 계란 후라이(2회)가 전부 입니다. 주로 계란을 괴롭히는 편이죠...그 외에는 선화가 두고 간 김치와 김을 꺼내 매 끼 식사에 사용하고 있습니다.

알마티에서 사온 짜파게티 5개 중 2개을 이미 써 버렸고 선화가 남겨 놓은 만두국, 시래기 국을 각 2회 분씩 이미 먹어 버렸으니...뭔가 새로운 방안이 나와야 할 것 같습니다.  이곳에 사시는 몇몇 분들이 집에 와서 식사하라고 몇 번이나 초대하셨지만...전 그렇게 가서 식사하는 게 영 마음에 내키지 않아 아직까지 한 번도 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이별의 충격이 좀 완화되면 감사하는 맘으로 방문해야 되겠지요.

어떤 분이 시래기 국을 한 냄비 끓여 주셨는데...냉장고에 안 넣어 둔 바람에 다 상해 버렸고...한 번은 선화가 빚어 놓은 만두를 꺼내 밤 늦게 국을 끓여 먹은 뒤...다음 날 먹으려고 일부를 남겨 뒀다가...다음 날 다시 데우는 과정에서 깜빡 잊고 홀랑 태워 버리기도 했습니다. 오늘은 몇몇 분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귀한 고구마를 보내 주시더군요. 아마도 알마티에서 고구마를 구해 오신 모양입니다. 덕분에 삶은 고구마(원래 구황 작물이지요?) 로 오늘 점심은 간단히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하던 끝에 내일은 이곳에 와 있는 코이카 태권도 단원인 영우 씨와 함께 쇠고기 장조림을 만들 예정입니다. 이미..선화로부터 만드는 법을 메일로 전수받았기에...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식탁의 반찬은 좀 더 풍성해 지겠지요.

요즘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치 선화가 옆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면서 기분이 좋아집니다.

또..실제로...그 소리는 뭔가 작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이기에 단지...적막함이 싫어 음악을 크게 틀어 놓은 것과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선화가 가고 난 뒤...빨래를 위해 이틀에 한 번 정도 세탁기를 돌리고 있는데...집에 들어와서 세탁기를 돌리면서 반찬을 준비하는 게 하나의 패턴으로 정착되고 있습니다.

아스타나에는 저 말고 5명의 코이카(KOICA,국제협력단) 소속의 단원들이 일하고 있습니다. 외과 의사 선생님이야 가족과 함께 와 계시지만...나머지 네 사람(한국어 2, 특수교육1, 태권도1)은 혼자 이곳에 와 있는 독신 단원들입니다. 요즘...혼자 살면서 이 분들의 어려움이 얼마나 큰 지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남자 독신 단원인 태권도 단원과 자주 어울리고 있습니다.

매일 선화가 보내 주는 메일을 보는 것은 새로 생긴 즐거움입니다. 그 메일 속에는 혼자 남은 남편을 걱정하는 선화의 마음과 형민이의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 저희는 정말 잘 들어왔어요. 형민이는 그때 아빠와 헤어져서 아빠가 오는 줄로 알고 기다리다가 안오니까 "엄마, 아빠?"하고 몇번 묻더군요. 그래서 나중에 아빠 만나자... 하면서 비행기 탔답니다. 형민이는 비행기 타자 말자 쥬스주는 이모야를 기다리고.... 쥬스를 마시고는 또 "엄마, 아빠?"를 한 10번쯤 하고.... 잘려고 하더구요.... 옆에 눕혀서 그런대로 잘 잤어요. " (11월 14일 자)

" our story나 메일에 첨부된 사진에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군요.... 혼자 쓸쓸히 사진을 찍을 오빠를 생각하니..... 새로 올린 글을 읽는데 눈물이 막 나네요... 그래도 2002년 11월 11일은 앞으로 추억하기에 좋은 날이되겠지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어머님이 밥은 다 준비해주시고, 전 좀 돕고 있고 설거지도 하루에 한번이나 두번 정도.... 오히려 이곳에서 부모님들의 도움으로 지내고 있어요. 그리고 아가씨가 중간 역할을 잘 해줘서(알죠?)...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수도 있고, 형민이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즐거워하고 있구요... "

"지난 수요일에는 형민이랑 목욕탕에 갔는데 처음에는 막 울더니 들어가서는 얼마나 신나게 놀던지.... " (11월 15일 자)

"형민이는 교회에서 약간 어색해하더니 인사도 잘하고.... 대예배 후에는 인준이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신나게 놀았어요. 기관별 찬양대회를 했는데... 아가씨랑 나랑 특별 찬양도 했구요.(반 강제로)........

"오빠가 매일 보내주는 식탁사진만 보면 눈물이 날려고 해요. 난 이곳에서 잘 먹고 있어요. 어머니 반찬이 맛있잖아요.... 깍두기, 콩나물, 조기구이, 무나물 등등... 여전히 김치에 김통을 꺼내 놓은 모습이.... 그래도 힘내세요. 2월달에 동키치킨이랑 회 사갈께요..........요즘에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부부가 서로를 향해 보고 서 있는게 아니라 손잡고 하나님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요... 오빠의 어설픈 생활을 생각하면 그냥 마음이 아프고 미안하고 내내 우울해지기도 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부분... 그저 형민이와 저녁마다 아빠 위해 기도하고... 오빠의 얼굴만 보고 서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 향해 같이 서 있는 우리 가정을 떠올리면 힘이 나요."

"이곳에서도 매일 자기 전에 형민이와 간단히 예배드려요. 찬송 한 2절 정도 부르고 성경은 한 장만 읽고 있는데 형민이도 잘 따른답니다. 누가 "아빠 어디 갔어?"하고 물으면 여전히 한 발을 들고 테니스 치는 흉내를 내지만.... 여전히 아빠가 마음에 가득 들어있는지... 혼자 중얼 중얼 기도할 때는 아빠, 엄마, 에에를 부른답니다. "(11월 17일 자)

"형민이가 이제 막 잠들었어요. 여기와서 부터는 낮에 신나게 놀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인지 밤에 일찍 잔답니다. 9시 30분쯤 되면 코-- 자러 가자고 하고 같이 예배드리고 누워서 노래도 불러달라..... 뭐라 뭐라 이야기도 하다가 잠이 듭니다. ....양산에 와서도 잘 적응하고 있어서 다행이예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에게도 금방 익숙해져서 인사도 잘 하고 잘 안기곤 한답니다. 아빠는 여전히 테니스 치러 간 걸로 되어 있구요...."

"2주일 사이에 형민이 단어가 많이 늘었고 발음도 상당히 좋아졌어요. 전에는 왜 물고리를 그저 물--- 했었잖아요.. 그런데 요즘엔 물-꼬끼... 한답니다. 고-ㅁ야도 잘 하고 아-ㄹ-니(할머니)도 하고... 또 귤도 배웠어요. 어딜가든 신기해하고... 오빠랑 같이 이런 형민이 모습 보면 좋을텐데... 내일부터는 필름을 사서 틈틈이 사진을 찍을까 싶어요." (11월 19일 자)

이 글들을 읽으면서 눈시울이 뜨거워 지기도 하고...다시 만날 날이 기대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곧 제게 그런 기쁜 날을 주실 줄 믿습니다. 형민이는 아직 아빠가 테니스 치러 가서 안 왔는 줄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4개월 간의 긴 테니스 여행을 마치고 훌쩍 커진 형민이와의 재회를 그려 봅니다.

이번 주에는 혼자 사는 어려움 위주로 지금의 생활을 소개했지만...다음 주에는 혼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소개할 생각입니다. 혼자 있기에 좋은 점도 있다는 건 아마 누구나 짐작하시겠지만...요즘 저의 생활은 낮 시간동안 집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을 만큼 바쁘게 많은 일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새로 시작한 일들도 많구요..다음 주에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저희 집 안방 창문입니다. 아스타나의 중심부가 내다 보이는 이 창문에는 선화와 형민이가 붙여 놓은 예븐 스티커 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글라스 데코" 라고 부르는 것인데...그림 물감 처럼 생긴 튜브를 짜서 비닐 위에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나서 말리면 다음과 같이 떼어 냈다 붙일 수 있는 그림 스티커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형민이는 아스타나를 떠나기 전 날까지...엄마에게 "글라디코(정확한 발음 표기 불능)" 라고 얘기하면서 글라스 데코레이션을 하자고 졸라 댔습니다. 저는 형민이와 선화가 보고 싶을 때마다...창문에 다닥 다닥 붙어 있는 "글라스 데코" 들을 바라 봅니다. 형민이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가리키면서 이름을 물어 올 때마다... 전 늘..."삭개오...요나...사자...펭귄....골리앗..." 하면서 사물들의 이름을 불러 줘야 했습니다. 그러면 형민이는 아주 좋아하면서 그 이름들을 다시 되뇌이지요...

빨리 선화와 형민이가 돌아 와서 이 아름다운 창을 "글라스 데코" 로 가득 채워 주길 바래 봅니다. 그래도...반가운 것은 지금 이 시간도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곧 두 사람...아니 세 사람과 꿈에도 그리던 만남을 이룰 테니까요...시계 바늘이 좀 더 빨리 돌아갔으면 좋겠습니다.   2002.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