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민이의 기도

지난 7월 5일은 형민이가 만 21개월 되는 날이었습니다. 2주 전...형민이는 무척 아팠습니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그렇게 오랫동안 고열에 시달렸습니다. 설사와 고열이 계속되는 동안 밥맛도 없었는지 늘 아빠나 엄마 품에 안겨 있으려고만 했고 힘없이 우릴 쳐다 보곤 했습니다. 그 고통의 일주일을 함께 보내면서...우리 부부는 만일 하나님의 보호가 우리 가정을 외면한다면 얼마나 앞이 캄캄할지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 어떤 것 하나 손에 제대로 잡히는 게 없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기더라도 아파하는 형민이 때문에 우리 맘은 밝아지지 않았습니다. 아빠, 엄마가 의사, 간호사지만....할 수 있는 건 없었습니다. 밤에도 몇 번씩 조심스럽게 형민이 손발을 잡고 열이 있는지 체크해 보면서 불덩이 같은 형민이 목을 끌어 안고 '하나님...하나님..형민이가 낫게 해 주세요....' 하고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형민이만 건강해진다면...어떤 어려움이라도 극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형민이가 아픈 탓에 빠진 참석 못한 교회 야유회는 안 중에도 없었습니다. 감사하게도 힘든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열흘이 지난 뒤 살이 빠진 헬쓱한 모습이지만 형민이는 건강을 되찾았고 다시 우리 세 식구는 전과 같이 거실에 모여 늦게 지는 아스타나의 석양을 느끼며 도란 도란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참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이런 저런 고비를 넘기며 이제 22개월로 접어 든 형민이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형민이는 이제 노래를 할 줄도 알고 피아노를 연주할 줄도 압니다. 일반 책을 집으면 책장을 넘겨 가며 책을 읽는 시늉을 하고 그림책을 보면 혼자 읽다가 아빠에게 가지고 와서 읽어 달라고 조릅니다.....만약 우연히 꺼낸 책이 악보가 가득한 찬양집이라면...형민이는 거실 한 쪽에 놓여진 보면대(악보를 놓는 기구)를 끌고 가서 한 쪽에 그럴 듯하게 세운 다음...그 위에 그 악보집을 올려 놓고 노래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손은 항상 뒤로 해서 뒷짐을 지고 노래합니다.

형민이의 눈에도 글자만 가득한 책과...악보와 기호로 가득한 찬양집이 구별되나 봅니다. 피아노도 엄마가 치는 걸 눈여겨 봤는지..그럴 듯하게 양손을 사용해서 침착하게 건반 하나 하나를 누릅니다. 교회에 가서도 예배만 마치면 교회 피아노로 달려가는 건 형민입니다. 다른 형, 누나들이 피아노를 치더라도..그 옆에 슬며시 붙어서 손가락으로 피아노 건반을 눌러 봅니다.

다른 일에 정신을 팔고 놀다가도...피아노 소리가 들리면..."엄마..."하고 외치면서 피아노 소리 나는 곳으로 달려 갑니다. 형민이에게는 피아노 소리는 엄마의 소리입니다. 형민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 임신 8개월 때까지 선화는 한국에서 출석하던 교회에서 찬양 반주를 맡아 하고 있었습니다. 수요 예배 반주도 몸이 불편할 때까지 계속했었는데..아마도 뱃 속에서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와 피아노 소리를 함께 들었던 형민이로선...피아노 소리가 마음 편하게 느껴지는가 봅니다.

개월 수가 늘어나면서 형민이가 하는 말도 엄청 늘었습니다. 물론..아직 알아들을 수 없지만 ....나름대로의 말을 시끄럽도록 해 댑니다..

가만히 있는 제게 다가와...뭐라고 하면서 하하..웃는 형민이는 사용하는 소리도 이제 꽤 다양해져서...조금만 있으면 우리가 하는 말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시작되는 형민이의 얘기는 하루 종일 엄마, 아빠를 오가며 쏟아집니다. 어디서 그런 소리를 배웠는지..한글 기호로 표시하기도 힘든 독특한 소리로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얘기합니다.

거실의 오디오에서 익숙한 찬양이 들리면 음의 높낮이를 따라 가며 외워 부릅니다. "알렐루야...알렐루야..." 같이 반복하는 가사가 나오면 비슷하게 따라 불러 우릴 놀라게 합니다.

요즘은 말보다도 몸짓(body language)언어가 더 많이 는 것 같습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일을 뜻하는 행동을 하는데..우린 형민이가 표현하는 행동을 보면서 뭘 뜻하는 것인지 알아 맞춰야 합니다. 때로는 형민이가 의도하는 것을 알아 내지 못해 양쪽이 다 답답해 할 때도 있지만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웃기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노래를 할 때는 거실을 뱅뱅 돌면서 손뼉을 치기도 하고.. 발을 들어 올리기도 하는데..온 몸을 사용합니다. 아직 아무런 선입견도 존재하지 않는 이 시기에...아무도 가르치지 않는데도 음악에 맞춰 노래하고 율동하는 형민이를 보며 '사람이 노래한다는 것...'에 대해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됩니다.

엄마로부터 독립을 시도하고 있는 것도 큰 변화입니다. 요즘은 출근하는 아빠 품에 매달려 함께 나가자고 졸라 대면서 엄마에게는 "바이 바이..."하고 손을 흔듭니다. 한 번은 알마티로부터 온 방문객들에게 아스타나를 소개하려고 외출하게 되었는데 형민이가 같이 나가려고 해서 데리고 나가 보았습니다. 엄마에게 손까지 흔들며 나간 형민이는 두어 시간 후 집에 돌아올 때까지 엄마를 찾지도 않고 아빠 차에 탄 채 점잖게 아스타나 이곳 저곳을 둘러 보았습니다. 우린...이렇게 성장한 형민이가 대견하고 뿌듯하기만 합니다. 낯선 사람과도 잘 지내고...오히려 다가 가서 악수까지 청하는 걸 보며...하나님이 정하신 프로그램대로 아기가 발달하는 단계가 그저 놀랍기만 합니다.

우리 집 부엌 옆에는 발코니가 하나 있습니다. 발코니라고는 하지만...벽이 나무 판자로 둘러져 있고 창문도 잘 나 있기 때문에 마치 또 하나의 방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공간이 바로 형민이의 공간입니다. 아빠가 출근하고 난 뒤...오전 내내 엄마와 함께 있어야 하는 형민이는 지금까지 처럼 부엌에서 주방기구를 다 끄집어 내어 놓고 놀다가 새로 발견한 이 작은 방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 발코니로 주방기구...특별히 가스버너를 가지고 들어가 한 참동안을 놉니다. 까작스딴은 여름철에 나오는 살구가 크고 참 맛있습니다. 보통 6월이면 나오기 시작하는데..커다란 살구에 씨가 하나씩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6,7월 동안 형민이의 노리개로 쓰려고 먹고 남은 살구 씨앗들을 모아 두었습니다. 부엌 옆 형민이의 주방에서 가스 없는 가스 버너 위에 냄비를 올려 놓고 살구씨를 넣은 뒤 물을 붓는 형민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 만의 방식으로 뭐라고 얘기해 가며 놀고 있는 형민이...20개월이 지나면서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이젠 자동차를 타고 거실을 빙빙 돌다가도...아빠나 엄마보고 타 보라고 건네 줄 줄도 알고 TV를 끄고 켜는 법에다...비디오를 켜는 법까지 익혔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오디오 기계를 사용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 오디오도 CD와 2개의 카셋트가 붙어 있는 시스템입니다. 형민이는 CD는 어떻게 작동시키고 tape 1과 tape2는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선화의 이런 말도 이해 합니다.

"형민아...tape1 누르고 플레이 해야 돼...."

"형민아..그거 말고 tape2를 누르고 볼륨을 키워..."

한 2년 동안 한 집에서 살면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을 지켜 본 형민이는 이제 우리의 말과 동작을 거의 다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화 말로는 일상적인 대화의 90% 정도를 알아듣는 것 같다고 합니다. 아직..우리 말을 하지 못하는 형민이지만...생각과 이해하는 정도는 다 큰 것 같습니다.

또..한 가지 형민이의 모습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기도하는 형민이의 모습입니다.

사실..기도하는 습관은 돌이 되기 전...생후 10개월 쯤부터 몸에 배였습니다. 이유식을 시작하면서...항상 기도하고 음식을 먹었던 형민이는 돌이 되기 전부터..음식 앞에선 늘 기도해 왔고...어느 덧 우리가 기도하자고 하기 전부터 기도하자고 무릎을 꿇고 손을 모읍니다. 식사할 때뿐 아니라 자기 전에도 늘 기도했었는데...잘 때가 되어 침대에서 뒹굴뒹굴 하다가도..잠이 온다 싶으면...이내 침대 위에 바로 앉아 두 손을 모읍니다. 이제 잘 거니까 기도 하자는 거지요.

이 동작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더욱 습관화 되었고...이제 훨씬 원숙해졌습니다.  

사진에서 형민이는 냄비에 있는 살구씨를 푸른색 바구니에 옮겨 담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건 먹는 것도 아닌데...푸른 바구니에 살구씨를 다 옮긴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건지...형민이의 기도는 진지하기만 합니다.

형민이의 기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우리도  형민이의 기도가 끝날 때까지 함께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이 때.....간간히 들려오는 형민이의 기도 내용을 들을 수 있습니다.

형민이의 기도 내용은 뭘까요?

밥 먹기 전..자기 전...형민이와 함께 오랫동안 기도한 내용들은 지난 시간들에 대한 감사와 아빠,엄마,형민이에 대한 특별한 간구들이었습니다. 이런 기도 내용을 2년 가까이 들어온 형민이는 이제 그 내용을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형민이의 기도를 옮기면 이렇습니다.  "....#333#333..아빠...#%$%#$...엄마...$#$#$...에에..%%$#&%#"  

특수한 기호로밖에 표시할 수 없는 형민이만의 언어는 흉내내기도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말소리 중간에서 똑똑하게 들을 수 있는 건...'아빠', '엄마', '에에'..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를 할 때는 호흡을 고르고 새로운 문장을 시작하는 듯 해 보입니다.

'에에'..는 형민이 만의 단어 인데..형민이 자신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형민'이란 단어를 형민이는 구사하지 못합니다. 발음이 어려운 모양인지...손가락으로 아빠, 엄마를 가리키며 아빠, 엄마라고 말한 뒤 자신을 가리킬 때는 항상 "에에.." 라고 말합니다. 아마 '형민'이란 단어가 형민이의 귀에는 '에에..'와 유사하게 들리는 지도 모릅니다.

아빠와 엄마가 지난  세월동안 해 왔던 기도 내용을 알아 들을 순 없었겠지만...시간이 지나면서 그 기도 내용 속에 아빠와 엄마, 형민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눈치 챈 형민이는 자기만의 기도 시간에도 "아빠..엄마...에에..."를 집어 넣고 있는 거지요.

처음 형민이가 이렇게 기도한다는 것을 알았던 날....가슴이 뭉클했습니다. 비록 대상도 알지 못하면서 흉내내는 기도이긴 하지만...항상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기도하는 형민이를 보며...감사하기도 하고 도전이 되기도 했습니다. 또 아울러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민이의 기도는 먹을 때나 잘 때만 행해지는 행사가 아닙니다. 장난을 치거나 어떤 일을 시도하다 어렵다 싶으면 기도합니다.

사진을 보시면 형민이의 얼굴에 크림이 묻어 있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엄마가 둘째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절대 안정을 취하고 있던 어느 날...형민이는 엄마 화장대에 있는 영양 크림을 온 얼굴에 바르고 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방에 들어온 전...형민이를 보며 나무랬지요..."형민아..이게 뭐야...." 아빠의 말 소리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형민이는 이내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아빠....#@$@엄마.....에에...."

형민이는 이제 난처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기도를 하는가 봅니다.

사진에서 형민이를 안고 있는 아이는 제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의 막내 아들 창규입니다.

형민이는 이렇게 창규에게도 편안하게 안길 정도로...엄마, 아빠 외의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다가갑니다.

특별이 약간 나이가 많은(4-5살) 누나들에게는 과도한 친근감을 드러 내는데...놀이터에서 마음씨 좋은 누나들을 만나기라도 하면...두 시간 내내 집에 들어 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아직까지는 엄마, 아빠가 가장 친한 놀이 대상인 것 같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침대 위에서 형민이에게 비행기도 태워 주고 목마도 태워 줍니다. 형민이는 퇴근하고 돌아오는 아빠에게 달려가 푹 안기고 난 뒤...톡톡하고 제 등을 두드립니다. 누군가에게 안길 때..상대방이 자기 등을 톡톡 두드려 주는 게 참 좋았나 봅니다. 아빠에게도 ...똑같은 사랑을 나눠 주고 있으니까요.

성경에서 사람의 수명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고 얘기합니다. 팔십이라고 하더라도...우리 인생은 참 짧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정말 덧 없는 나그네 인생 길이라고 푸념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인생길에서....자식을 기른다는 건 참 기쁘고 위로가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가정을 세우고 아이를 기르는 일에서 느끼는 다양한 경험과 감정들은 마치 인생은 종착역이 없다고 착각할 정도로 재미있습니다. 이젠...'애들 기르다가 평생을 보냈다' 며 웃음 짓는 우리네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유한한 인간에겐...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는 다음 세대의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중요한 이유가 될 수 있을 테니까요...

최근에 처가집에서 보내 준 책 중에 동안교회 김동호 목사님이 쓰신 "자식의 은혜를 아는 부모" 가 있습니다. 자식을 기르면서 오히려 자식으로부터 입는 은혜가 많음을 이 책에선 얘기합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로...형민이와 함께 지내면서 오히려 형민이에게 감사하며 하나님에 대해서...인생에 대해서...많이 배우게 됩니다. 이 배움은 사람의 수명은 길어야 팔십이라는 것과 사람의 제일되는 가치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제 기억 속에도 제가 4-5살 때의 기억이 존재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형민이도 제 나이가 되고...전 육십을 넘은 나이가 되겠지요.....

이 모든 것 속에서.... 어제나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를 지켜 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합니다. 그 분이 계시기에..우리의 삶은 덧 없거나 헛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유한하지만...우리의 사랑을 받으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면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삶은 덧없는 나그네 길이 아닙니다. 그 분 때문에 이 세상에서 소명을 느끼며 일할 수 있고 참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형민이를 보면서...이 아이와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은 욕심을 내 봅니다. 화살같이 빠른 시간 속에서 나는 잊혀지고 사라지겠지만...내가 가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가 만난 사람들...내가 가르친 사람들에게 기억되고...그 마음이 그 다음 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질 수 있도록 제대로 살아 보고 싶은 열정이 생깁니다.

또... 비록 오늘도 실패했지만.....자주 찾아 오는 실망감 속에서도 굴하지 말고....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네 이웃을 사랑하라..." 는 가장 고귀한 계명을 힘써 지켜 보겠다는 다짐을 오늘도 다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라는 건 형민이 뿐 아니라 우리 모두입니다.  2002.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