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와 둘째 (임신 15주 이야기)

지난 5월말...홈페이지를 통해 둘째 아이 임신 소식을 알려 드리면서 선화에게 보이는 절박 유산(임신 초기의 하혈)의 증상과 초음파 상의 혈종(Hematoma)으로 인해 이곳 의료진으로부터 속히 입원하라는 권유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드렸었습니다. 하지만...그 당시...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그냥 집에서 안정을 취하면서 기다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사실...선화는 첫 아이 때도 절박 유산의 증상이 있어 절대 안정을 취했야만 했었는데...당시에는 말 그대로 절대 안정이 가능했습니다. 형민이가 없었던 때라...남편이 아침 일찍 병원에 출근하고 난 뒤면 아무도 없는 집에서 가만히 누워 있을 수 있으니까요...게다가 식사나 반찬 거리 고민은 친정어머니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모든 것이 편리한 한국에서는 전화로 해결되는 것들도 많아 산모에게 필요한 안정을 취하기 용이했었습니다.

하지만 둘째 아기 때는 사정이 많이 다릅니다. 아직까지 엄마와 떠나 있어 본 적이 없는 형민이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형민이를 안을 수 없다는 제스쳐를 취하자 엄마의 변심에 울어댈 수 밖에 없습니다. 아기를 돌봐야 하다 보니...끼니 마다 형민이 밥도 챙겨야 하고 빨래도 챙겨야 하고...무거운 몸을 이끌고 "옹알이 그림책"을 넘기며 형민이의 질문에 대답해 줘야 하는 임무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눈을 뜨자 말자 놀기 시작하는 형민이의 체력은 가공할 만합니다. 눈을 감고 잠이 드는.. 그 날의 마지막 순간 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형민이를 돌보다 보면...우리도 역시 온 몸이 무쇠같이 느껴지면서 지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아빠가 출근하고 나면 재미있게 놀기 원하는 형민이와 집 앞 놀이터에도 나가야 하고...블록 쌓기도 해야만 하니...그야 말로 절대 안정은 불가능하게만 보입니다.

요즘은 형민이에게 밥 한 숟가락 떠 먹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먼저 형민이가 안고 있는 피노키오 인형에게 한 숟가락 줘야 하고 다음에는 부엌 벽에 걸린 말 그림으로 숟가락을 가져가야 합니다. 벽에 걸린 말 입에 밥 숟가락이 닿는 것을 보고 난 다음에야 형민이는 비로소 입을 벌립니다. 친구들이 밥을 먹어야 자기도 밥을 먹겠다는 것이죠....

거실에 좀 앉아서 쉬려고 해도...형민이의 손에 이끌려 부엌으로 가야 할 때가 많습니다. 형민이는 냉장고를 열어 달라고 한 뒤...그 안에 있는 된장 통을 정확하게 찾아 내어 뚜껑을 열어 달라고 한 뒤 손가락에 된장을 가득 묻히고 나서야 부엌을 빠져 나옵니다. 짭짤한 된장 맛에 흡족해 하며 거실로 가는 뒷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얄밉기도 하지만...하고 싶은 욕구를 무조건 막는 것도 안되겠다 싶어..하루에도 몇 번 씩 냉장고 문을 열어 줍니다.

책상에 앉아 책을 보려고 하면...스케치북과 크레파스를 가지고 와서...손을 잡아 당기며 "물...무..." 합니다. 형민이가 말하는 "물" 이란 단어에는 많은 의미가 포함되는데...그 중 하나가 바로 "물고기" 입니다. 스케치 북을 열어 초록색이나 파랑색 크레용을 가지고 커다란 물고기를 그려 야만 합니다.

김을 간장에 찍어 먹는 것을 보고 난 뒤로는...모든 음식을 간장에 찍어 먹으려고 합니다. 밥도 간장에..김치도 간장에...미역도 간장에... 입맛이 너무 짜게 길들여 지는 것 같아 걱정되지만....도무지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집 안에 있는 간장 병은 눈에 보이지 않게 감춰야 합니다. 콜라도 마찬가지여서...콜라 맛을 본 뒤론 까만 색의 콜라 병만 눈에 띄면 한 컵 달라고 난리를 피웁니다. 그래서... 어쩌다 우리가 콜라를 마시고 싶어 사 온 날에는... 현관 입구 한 쪽에 콜라병을 살짝 숨겨 놓고 번갈아 가면서 몰래 마시고 와야 합니다.

요즘 형민이는 소변 가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름철이 오자 형민이(현재 1년 9개월)에게 기저귀를 채우지 않고 소변을 가리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오줌이 마려우면...형민이는 부엌에 있는 선화에게 가서 "쉬......" 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 선화는 "형민아...예쁜 곰돌이 병에다 쉬 할까?"  라고 물어 본 뒤 ....곰돌이 인형 모양의 병을 받쳐 줍니다. 그러면 거기다가 소변을 보지요.. 하지만....소변이 마렵지도 않은데..엄마에게 와서 "쉬..." 라고 얘기하는 빈도가 늘어나서...한 시간에도 몇 번씩 곰돌이 병을 들고 화장실을 왔다 갔다 해야 합니다. 정말 소변을 가리는 것은 많은 공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게다가 한국도 아닌 까작스딴에서....둘째 아기를 가진 선화는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안타까운 것은 둘째 아이에 대한 태교 역시 첫 아이에 비해 아주 부족한다는 것입니다. 형민이가 뱃 속에 있을 때에도 좋은 음악도 가려 듣고 형민이에게 속삭이기도 하면서 아기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았었는데...둘째 아이는 이게 쉽지 않습니다. 이미 밖에 나와 돌아 다니고 있는 형민이 때문에 뱃 속의 아기는 생각지도 못하고 하루 해가 저물 때가 많으니까요...

절대 안정을 권고받은 뒤 3주 째...우리는 다시 초음파 검사를 받기 위해 제가 근무하고 있는 1병원으로 갔습니다.

저번에는 이곳의 '1 산과 병원'을 방문해서 초음파 진단을 받았지만...병원이 멀기도 했고...제가 근무하고 있는 1병원에서도 산모를 위한 초음파 검사를 시행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이왕이면 남편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검사 받는 게 좋겠다 싶어 옮기게 된 것입니다. 이 때가 임신 12주 때입니다.

한국에서는 산과 초음파를 하는 경우...대부분이 그 산모를 진료하는 담당 선생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법인데...이곳은 초음파 실에서 간, 콩팥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초음파 담당자에 의해 모든 검사가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조그마한 기계가 아스타나 1병원을 대표하는 초음파 기계입니다. 이 기계 하나로 일 년 내내...이 병원을 찾는 모든 환자의 간, 콩팥, 갑상선을 포함한 모든 부위의 초음파 검사를 시행합니다. 한국 같으면 개인 병원이라고 하더라도.. 화면도 크고 성능이 우수한 초음파 기계를 사용하는데...이곳의 초음파는 마치 장난감처럼 화면도 작고 성능도 우수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민이를 임신했을 때에는 한국에서 3차원 초음파 장비를 통해 검사를 받기도 했었는데...검사자와 제대로 말도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 딱딱한 매트 리스에 누워  있는 선화의 맘은 아마 착잡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지난 번 검사에서 아기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지라...이번 검사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 지 저 역시 궁금했습니다.

첫째 아이 형민이 때에는 초음파 검사를 마치고 나면 항상 출력된 초음파 화면 사진을 스캔해서 홈페이지에 올리면서 아기 소식을 알렸었는데..이곳 초음파 검사실에선 인쇄 용지를 구할 수 없어 초음파 화면을 출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태 중에 있는 아기 초음파 사진은 한국에 있는 부모님들도 아마 보고 싶어 하실 텐데...생각하던 끝에 전 제가 가지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로 초음파 화면을 바로 촬영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후레쉬를 사용해서 촬영하면 영상이 흐리게 나오고..후레쉬를 터뜨리지 않으면 노출시간이 길어져 영상이 흔들리는 현상이 생겨 출력한 사진보다 좋을 순 없었습니다.

왼쪽이 바로 그 사진입니다. 그래도 대강 형체는 알 수 있습니다. 양수로 가득 찬 아기 집 안에 둘째 아이가 둥둥 떠 있는 모습입니다. 화면 속에 비치는 아기는 손 발을 열심히 움직이면서 자기가 무사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한국처럼 해상도가 좋은 초음파라면.....아기의 모습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는데...아쉽긴 했지만....초음파 담당자의 "아무 문제 없다..아기도 건강하고 특별한 결함을 확인할 수 없다" 는 말에 모두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초음파 실을 나오면서.....그동안 우리 맘 한 쪽에 자리 잡고 있던 무거운 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고... 낯선 땅에서도 인도해 주시는 변함없는 하나님의 손길에 깊이 감사드렸습니다.

형민이 때문에 절대 안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도...외국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생활이었음에도...눈 앞에 닥친 고비를 무사히 잘 넘기고 아기가 무럭 무럭 자라도록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선화는 임신 15주입니다. 이제 외출하면 주변 분들이 갑자기 배가 불룩해졌다면서 한마디 씩 하십니다. 출석하는 교회의 현지인들도 선화를 바라 보면서 한 마디씩 인사를 하고 지나갑니다.

재미있는 건...이곳에 사는 고려인들은 형민이가 옷이나 수건 같은 것을 자꾸 어깨에 두르려는 것을 보면서 둘째 아기도 아들일 거라고 넘겨 짚는 다는 것입니다. 고려인 풍습에 둘째 아기가 임신해 있을 때...첫 아기가 머리 위에 옷이나 수건을 얹고 돌아 다니면 딸이고 어깨에 두르면 아들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선화 말로는 우리 나라에도 그런 얘기를 한다고 하네요...

물론 ..그런 내용을 믿는 건 아니지만...아빠 허리띠까지 가져 가서 어깨에 두르는 형민이를 보며 행여나 둘째 마저 아들이면 어쩌나 하는 살벌한 상상을 해 보곤 합니다. 우린 둘째가 딸이 되어 집 안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바라지만...어떤 분들은 첫째 아기가 아들인 경우 둘째가 함께 놀 수 있는 아들이 아닌 경우 서로 외로울 수 있다고 하시며 아들인게 좋다고 강변하시기도 하더군요...

딸이든..아들이든...하나님이 귀한 둘째 아기를 우리 가정에 보내 주셔서 감사할 뿐이고...세상 밖으로 나와 형민이와 함께 네 식구가 살아가는 날이 빨리 왔으면 하는 바랭입니다.

형민이가 잠 든 사이...하늘로 솟구쳐 오른 머리카락을 다듬기 위해 거실 중앙에 눕혀 두고 이발 하고 있는 선화의 모습입니다.

형민이가 태어 나고...벌써 이런 이발을 한 게 몇 번인지...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진 것 같습니다.

이발 전용 가위가 아니라...일반 사무용 가위에다 커다란 대야를 가져다 놓고 잠든 형민이를 이 쪽 저 쪽으로 눕혀 가며 머리를 깎고 있는 선화의 모습을 보면서...아기에 대해 모든 것을 주길 원하는 선화의 모습을 봅니다.

잠 든 사이....예쁘게 이발해 주는 엄마를 가지고 있는 형민이가 유달리 행복해 보이는 것은 자신의 존재 만으로 즐거워 하고 감사하는 부모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째 아기를 기르면서...또 둘째 아기를 기다리면서... 이러한 정성으로 우릴 길러 주셨을 우리들의 부모님께 다시 감사드리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잠 든 사이 머리를 다듬어 주시던 부모님의 수고가 있었고 기저귀를 떼기 위해 하루 종일 병을 들고 다니며 "쉬..."를 외쳤던 부모님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까지 자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영원 전부터 살아 계시지만...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목하시며 사명을 주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손길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우린...둘째 아기의 출산은 한국에서 할 계획입니다. 계획대로라면...선화는 형민이를 데리고 올 11월 한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형민이를 기르는 분주함 속에서 둘째 아기에 대한 기대와 기도가 끊이지 않도록 함께 기도해 주세요.

또..아울러.... 우리를 위해 지금도 수고하시는 양가 부모님들께 깊은 감사의 마음을 드립니다.  아기를 기를 수록 깊어지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우리가 받았던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뒤늦은 깨달음인 것 같습니다.  2002.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