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의 임신

최근 저희 주변에서는 출산과 임신 소식들이 끊이지 않고 들려 왔었습니다. 새벽별(부산의대기독학생회 학사모임)에는 세 명의 아기들이 연이어 태어났고 그동안 기다렸던 시누이의 가정에서도 반가운 임신 소식이 있었습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가면 형민이의 친구, 동생들이 많아서 참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희 가정에 둘째 아이를 주셨습니다. 미리 계획한 것도 있었지만 적절하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서 나올 때는 외국에서 갓난아이를 어떻게 기르겠냐 싶어서 형민이와 터울이 많이 지더라도 한국으로 돌아간 뒤 둘째를 낳아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이곳 생활에 익숙해지고 보니 한국보다 아기를 기르기에 좋은 점들이 더 많은 것 같아 둘째를 계획했습니다. 이곳의 전체적인 환경이 한국보다 좋진 않지만.. 우선 엄마인 제가 다른 활동이 적으니까 아이를 기르는 데 필요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고 아빠도 한국보다 바쁘지 않으니까 많이 도와줄 수 있는게 최대의 장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많은 선교사님 사모님들이 그렇다면서 격려해주신답니다.

둘째 아이의 임신도 임신 진단용 키트를 이용해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한 주 전에도 의심(?)을 가지고 검사를 했었는데 당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판정이 나왔었기에 한 주 만에 임신 양성 반응을 보인 결과에 한 동안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해 했습니다.

두 번째 임신이지만 기분은 첫째 아기를 가졌을 때와 비슷합니다. 정말 아기가 있는 건가 궁금하고 신기하면서 약간을 얼떨떨한..... 우리는 산부인과 책을 들여다보면서 아기의 크기나 모양을 상상해 봤습니다.

며칠 뒤 소화가 잘 안되고 메쓰꺼운 입덧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쳣 아기를 가졌을 때도 심한 입덧을 하지는 않았던지라...이번에도 견딜 만 했고 요리하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첫 아기 형민이를 가졌을 때와 똑같이 임신 8주에 접어 들면서 약간의 하혈이 관찰되는 절박유산의 증상이 보였습니다. 절박유산은 아시다시피 임신 초기에 하혈이 있는 증상을 가리키는 말로 말 그대로 threatened abortion(절박유산)...그러니까 유산의 위험이 닥쳤왔다는 것을 뜻합니다. 실제로 50%에서 유산이 된다고 하구요.....

이날은 오래간만에 성훈이 오빠와 형민이를 데리고 중앙바자르를 가서 장을 보고 온 날인데 형민이와 함께 장에 가다 보니 한 사람은 형민이를 안아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장바구니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 정도야 평소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번에는 몸에 무리가 되었나 봅니다. 성훈이 오빠가 무거운 것 들지 말라고 여러번 이야기했지만 상황이 그렇지 못해 좀 도왔던게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죠. 남편의 처방으로 저는 휴식에 들어갔고 우선 두고 보기로 했습니다. 지난번보다 출혈이 양이 좀 많은게 걱정이었지만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고 그저 기도하며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그 날은 "승리의 날" 이라는 3일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승리의 날"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비에트 연방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독일군을 격퇴한 것을  기념하는 공휴일입니다. 아주 큰 명절이죠. 당시 전쟁에 소비에트 연방 내의 여러 민족...그러니까 까작 민족도 전쟁에 참여 했고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이끌어 낸 승리였기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기리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3일을 기다린 뒤.... 다음주가 되어 우리는 이곳의 산과 병원을 찾았습니다. 러이아어로는 '롯돔'이라고 하는데 아스타나 시에는 딱 두 개가 있다고 합니다.  아스타나의 모든 아기들은 이 두 병원에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산전 관리부터 출산까지 전 과정을 돌보는 곳인데 이곳에 들어섰을 때는 아래 사진과 같이 이미 많은 산모들이 진료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국과 비교하면 턱 없이 떨어지는 시설이었습니다. 한국같으면 초음파 검사를 하고 나면 초음파 결과를 예쁘게 출력해서 산모에게 주곤 하는데...이곳에서는 초음파 화면 출력용 인쇄지가 없어 그저 눈으로 아기의 모습을 확인하는 게 전부라고 합니다.

하지만 외국인인 우리는 이곳을 찾아 오기에도 쉽지 않았습니다. 마침... UBF의 변찬석 선교사님 사모님이 먼저 임신을 하셨고 이곳에서 산전 진찰을 받아 오셨기에 ...다행스럽게 병원과 담당 선생님을 쉽게 찾을 수 있었습니다. 먼저 통역아주머니를 통해 증상을 설명하고 초음파를 하기 위해 누웠는데.. 엄마가 낯선 검사용 침대에 눕는 것을 본 형민이는 엄마에게 이상한 일이 닥친 것을 아는지....온 병원이 떠나갈 듯 울어 댔고 성훈이 오빠가 우는 형민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통역 아주머니를 통해 다행히 아기는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 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얘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출혈을 멎게 하려면 당장 입원을 해서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물리치료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선은 보호자(성훈이 오빠)와 상의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전 밖으로 나왔고 오빠에게 들어가 보라고 얘기했습니다.

우는 형민이를 달래면서 마음이 답답했습니다. 처방대로 하진 않겠지만 우선은 쉬어야하는데 형민이를 누군가에게 맡기지 않는 한... 쉰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아닌 이곳에서는 내가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지 않으면 당장 식구들이 끼니를 이어갈 수 없는 지라 친정이나 시댁 부모님들이 계시는 한국이 아닌 이곳에서 맞은 이 상황은 약간은 암담한 것이었습니다.

초음파를 보신 현지 선생님과 얘기를 마친 성훈이 오빠의 말로는 초음파 상에 작은 혈종(hematoma)이 관찰되고 있는데 그것이 제거되지 않으면 유산의 위험이 커지기 때문에 이를 위해 물리치료와 약물치료를 하라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내과 의사인 남편은 이런 권유에 일단 한국의 산부인과 선생님의 의견을 알아 보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고 우린 그냥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모두 걱정스러웠습니다. 다행히 형민이는 엄마가 아픈 걸 아는지 보채지 않고 혼자 잘 놀아줬습니다.

성훈이 오빠가 한국의 몇 몇 지체들에게 메일을 보냈는데 감사하게도 빨리 답변이 왔습니다. 초음파 상에서 관찰되는 혈종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절박 유산의 경우 한국에서의 처방은 무조건 쉬게하는 것 외에 특별한 것이 없다는 것이었지요...물론 크게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까지 덧붙여 왔습니다. 저희도 그 처방에 따르기로 하고 저는 침대위로 올라가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훈이 오빠가 형민이 돌보는 일과 여러 집안일을 떠 맡게 되었습니다.

하필이면 이날은..... 저희들이 이미 일주일 전에 이곳에서 사역하고 있는 IVF 소속의 캐나다, 필리핀 형제, 자매들을 초대한 날이었습니다. 몇가지 한국음식을 준비해야 하는데.... 잠시 쉬다가...성훈이 오빠와 함께 음식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앉아서 김밥을 싸는 동안 성훈이 오빠는 고기를 썰고 씻는 등 힘든 일을 다 해주었습니다. 저녁 모임은 아주 즐거웠고 오래간만에 젊은이들과 모임을 가지니 기분도 좋았습니다. 물론 영어권 사람들과 짧은 영어로 이것 저것 대화를 나누는 즐거움도 있었구요.

출혈은 3일 정도 소량씩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입덧도 심해져서 힘들었습니다. 소화 불량 증상이 심해서 음식을 조금만 먹어도 명치끝이 볼록해지면서 오랫동안 음식물이 안 내려 갔습니다. 입에 맞는 걸 먹고 나면 메슥거리는 건 좀 좋아지지만 먹은 게 오히려 소화가 되지 않아 다시 힘들었습니다. 입덧을 심하게 해서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임산부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한국보다 단조로운 생활을 해야 하는 이곳은 재미있는 TV프로나 떡볶이나 어묵 같이 맛있는 걸 먹으며 메슥거리는 증상을 잊을 수 있는 곳이 아니라 더욱 힘들었습니다. .... 가끔은 혹시 이 아이가 나빠지면 다시는 이곳에서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나쁜 생각마저 들었답니다.

그러다가 며칠이 지나면서 출혈 증상이 많이 좋아졌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알고 기도해준  한국의 여러 지체들의 기도 응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리 있지만 기쁜 일, 어려운 일을 늘 함께 나누는 좋은 지체들이 있다는게 이곳에서 사는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이 때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안정이 되자 그제서야 부모님들께도 임신 소식을 즐겁게 말씀드릴 수 있었고..... 아주 기쁘게 축하해주셨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오래간만에 집을 나와 외출을 했습니다. 어제는 알마티에서 이곳으로 사역지를 옮기신 김기태 목사님댁 집들이가 있었는데 목사님네는 12살 되는 딸과, 10살 되는 아들을 두고 계십니다. 사모님 말씀이 제겐 큰 위로가 되었는데... 두 아이를 터울이 많이 나지 않게 가져 기를 때 함께 빨리 기르고 나니까 5년후에는 자기의 시간을 찾을 수 있더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실 전 이곳에 올 때는 새로운 언어도 확실히 익히고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도 하려고 계획했었는데....아이를 기르느라 일년이 지나도록 언어 능력에 큰 진보가 없고 웬지 다른 사람(특히 남편)에게 뒤쳐지는 것 같아 싫었었습니다. 그런 절 보시며...사모님도 아이를 기를 때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며 지금이 가장 힘들 때라고 위로하셨고 또 한 편으로는 이곳 현지인들에게 아이를 맡기지 말고 세 살까지는 무조건 엄마가 품고 키워야 된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실 전...형민이를 너무 제 손에서만 키우는 것 같아 가끔씩 다른 사람에게 맡겨 보려고 굳게 마음먹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내 마음이 그걸 허락하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아빠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형민이를 맡기지 않고 키우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게 좋다고 하시니 참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설사 이렇게 러시아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손 치더라도 두 아이가 엄마, 아빠의 품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감정적으로 풍부하게 자라 건강하게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그게 내가 엄마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역할이었다고 생각하며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몸이 조금 좋아지자...형민이를 데리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가 놉니다. 놀이터에는 우리 아파트에 사는 많은 아이들이 나와 그네나 미끄럼틀도 타고 소꿉장난, 흙장난을 즐깁니다. 날씨가 따뜻해지자..이제 형민이도 여기 형님, 누나들 틈에 끼여 소리도 지르고 말도 걸어 보면서 재미있게 지내고 있습니다.

이제 곧 두 아이의 엄마가 된다는 기쁨은 잠시동안의 메스꺼움이나 생활의 어려움 등을 날려 버리기에 족한 것입니다.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또 다른 작은 생명을 느끼며....온 세상이 파랗게 옷을 갈아 입고 있는 까작스딴에서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거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2002.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