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작스딴에 온 형민이

7월 6일은 형민이가 만 9개월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까작으로 오기 전...주변 사람들에게 형민이 나이가 7개월이라고 얘기하면서 염려섞인 얘기를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벌써 9개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주변 사람들에게 우린 "형민이가 가장 적응을 잘 하는 것 같아요..." 라고 얘기하곤 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한국에 있을 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웃음 소리와 행동으로 변함없이 지내는 형민이는.... 까작에 왔다고 해서 변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낯선 나라에 떨어져 있는 우리에겐 든든한 원군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형민이가 우리 가정의 꽃인 것 같아..."

"형민이가 있으니까...웬지 든든한 것 같지 않니?....." 이렇게 우린 서로에게 형민이의 존재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자주 말하곤 했습니다.

엄마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형민이...절대 선화를 배신하지 않을 것 같아 보입니다.

까작에 오기 전...형민이는 5월 17일 저녁....누군가의 도움으로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장인 어른이 이 날짜를 기억하시고 제게 말씀하시더군요.

"이서방...형민이가 처음 앉은 날이 2001년 5월 17일이네....내가 바닥에 앉혔더니....기대지도 않고 혼자 앉아 있구만...."

앉아 있는게 너무 신기하기만 했던 형민이는 까작에 온 이후 매일매일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선화가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으면...보행기를 이리 저리 끌고 다니면서 모든 서랍을 다 열어 보고...쓰레기 통을 들쳐 보고....거실과 부엌 구석구석을 휩쓸고 다닙니다. 행여나...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 싶으면..소리를 질러 대는데...무슨 일인가 싶을 정도로 괴성을 질러 대기도 합니다.

 우유도 이젠 밤에 자는 도중에 몇 번 먹고 대부분 밥을 먹습니다. 물론 죽도 먹이지요..선화가 여기 와서 형민이에게 제대로 된 이유식을 먹이느라 늘 걱정하고 있습니다. 호박도 넣고 당근도 넣고...이가 난다고 칼슘을 공급해야 한다며 치즈도 먹이고...고깃가루도 갈아 먹이지만...형민이는 아무 반찬 없는 맨 밥도 아주 잘 먹습니다. 다만 분유 제조업체에서 만들어 내는 이유식은 잘 안 먹습니다. 쌀가루만 들어 있는 미국에서 나오는 이유식을 약간 먹기도 하지만.....대개의 경우 된장국에 밥 말아 주는 걸 제일 좋아합니다.(다른 국은 재료가 없어 잘 끓여 먹이지 못하는 게 아쉽습니다.)

 형민이가 자라면서 저희 부부는 형민이의 습관을 보고 깜짝 놀라곤 합니다. 대표적인 게 형민이의 잠자는 자세입니다. 제가 언젠가 저희 집 어른들은 아기를 반듯하게 눕히는 걸 싫어한다는 걸 적은 적이 있는데 기억 나실 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저를 포함한 저희 집 아기들은 지금까지 늘 옆으로 누워 잤습니다. 전...특히 엎드려 자는 걸 좋아합니다. 제 생각엔..아마 엎드려 자면 엄마 등이라고 생각해서 잠이 잘 오는 것 같습니다. 결혼을 한 후에도 전...잠을 잘 때면 배를 바닥에 깔고 머리를 옆으로 누이고 잡니다. 물론 베개는 절대로 안 배고 잡니다. 머리가 들리면 잠이 잘 안 오거든요....항상 베개는 멀리 던져 버리고 엎드려 잡니다. 심장의 고동소리를 느끼며......

 그런데 형민이가 아무로 안 가르쳐 줬는데도...그렇게 엎드려 잔다는 사실이 우릴 경악하게 했습니다. 옆으로 눕혀 놓아도 잠이 들면서 이내...저절로 엎어지더니...아침에 깰때까지 엎드려 잡니다. 선화가 옆에서 잠을 자다가...혹시 숨을 쉬는데 답답하지 않을까 싶어 자주 바로 눕혀 보지만...곧 형민이는 자기가 원하는 자세를 취하고 잠을 잡니다. 어떻게 이런 것까지 아빠를 닮을까?.... 형민이를 키우면서...사람이 얼마나 부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는지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자는 도중에 항상 위로 위로 올라가서 침대 끝에 머리를 대고 자는 게 형민이의 습관 중 하나입니다.

민선생님 집에 갔을 때...형민이 몸무게를 재어 보았습니다. 9Kg 정도 되더군요...그래서 요즘은 안고 다니는 것도 힘들고 해서.... 두 손을 잡고 걸음마를 시키면서 놉니다. 그런데 몇번 그렇게 하고 난 뒤로 이 녀석이 서지도 못하면서..자주 걸으려고 하는 바람에 안고 있는 것만으로는 형민이를 만족시킬 수 없고 함께 손을 잡고 놀아야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형민이는 축 늘어진 커텐이나 윈도우 블라인드.. 같은 손에 잡히는 긴 구조물을 좋아합니다. 흔들고 당기고....부엌에 있는 커텐도 형민이가 하도 당기는 바람에 떨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다치지는 않았지만.....  

 까작에 온 게 5월 23일데...5월 24일날 형민이를 본 뒤...한 달 반이 지난 7월 7일...형민이를 보신 WEG 소속의 이승호 선교사님(목사님)은 형민이가 까작에 온 이후 너무 많이 컸다고 하시며...놀라와 하십니다. 덩치도 커지고..얼굴도 점점 아빠 닮아간다고 하십니다.  

 하지만....형민이가 자라가는 게 좋은 일들만 가져 오는 게 아닙니다. 8개월에 들어서면서 낯선 사람을 꺼리고 엄마에게서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엄마가 시야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울어 대니....어떤 모임에 가더라도...형민이 울음 때문에 저나 선화나 당혹스러운 게 한 두번 아닙니다. 결국...형민이를 24시간 항상 따라 다녀야 하는 선화의 부담이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그것도 함께 놀아줘야 하니까요....

 협력단의 권소장님으로부터 시작해서 목사님들과 사모님들이 형민이가 귀엽다고 여러번 안아 보려고 하셨지만....엄마 외의 사람들에 대해선 낯을 가리는 터라...금새 얼굴을 찌푸리고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어댑니다. 사태가 이렇다 보니...선화가 힘들어졌지요... 러시아 어학 공부를 위해 가정교사를 초청해도...선화는 형민이가 울어대고 보채다 보니...제대로 수업을 듣지도 못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해 보려고....집안 일을 도우시는 분을 구해서 형민이를 맡겨 봤지만...형민이는 엄마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자신을 달래 보려고 한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지 않습니다. 제가 오전에 병원에 출근하고 난 뒤...선화와 형민이 단 둘이 남아 있게 되는 시간부터 형민이는 엄마를 떠날 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이 한 달이상 계속 지속되다 보니...저희 부부 사이에도 약간의 갈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형민이의 육아 부담을 두 사람이 똑같이 질 수 없는 상황에서(전 오전에 병원에 가니까...) 몸이 지쳐 버린 선화는 형민이를 좀 떼놓고 싶을 때가 생기는가 봅니다.....저처럼 러시아어 공부도 신경쓰고...다른 새댁(이제 막 결혼한 치과 선생님 사모님이나...아기가 다 커 버린 젊은 사모님들)들처럼 수영장에도 가고...모임에도 편하게 참석하고 싶지만 형민이의 기저귀를 챙기고 매끼 밥을 챙기고 물을 끓여야 하는 선화는 제가 도와 준다고 해도....여전히 많은 부담을 지고 있고...힘들고....남편에 대한 요구가 생길 수 밖에 없는 거지요...

 저도 형민이를 돌보고 있지만...선화처럼 잘 보지 못합니다. 선화는 형민이를 앉혀 놓고 노래도 부르고 손이나 발도 주무르고 이것저것 장난감 될 만한 것으로 함께 놀지만....전 기껏해야 화장품 뚜껑이나 오뚜기를 던져 주는 게 다이고 형민이가 잠이 온다 싶으면 노리개 기저귀를 빨리 물려서 업어 재워야 된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짐이 도착하지 못해 형민이가 한창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만져보고 노는 시기에 충분한 장난감을 공급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 빠져 있는 선화는 제가 형민이와 함께 놀아주는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나 봅니다.

아침에 일어나기 전...형민이와 엉켜 자고 있는 걸..선화가 발견하고 찍었습니다.

집에 한 살이 안 된 아기가 있는 엄마들에게 물어 보세요...아기가 엄마의 인생에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얼마나 되는지......선화는 아침에 눈을 뜬 이후....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형민이와 함께 하는 것이 모든 것입니다. 형민이가 자고 나면...선화는 제게 한 번씩 푸념을 늘어 놓습니다.

"나도 한 때는 잘 나갔는데......영화도 마음대로 보고....일본어 공부도 하고...좋았는데...이제 모든게 끝나버렸다...으....내 청춘을 돌려 줘....."

물론 선화와 우리 가족에게 형민이는 귀한 존재이고...선화 역시 세상에 있는 어떤 것보다 형민이를 사랑하지만....형민이가 생긴 후....특히 까작에 온 이후... 친정 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도움없이....형민이를 돌보는 일에만 파묻혀.....자신을 위해선 이제 더 이상 어떤 새로운 시도나 투자를 할 여유가 하나도 없어진 현실은 선화를 간혹 아주 깊은 절망이나 이젠 뒤쳐져 버렸다는 감정에 빠지게 하곤 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때...남편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건...두말하면 잔소리이지만....제 사정이 좀 여의치 않습니다. 아직 완전한 근무처가 아닌 한카병원에서 임시로 출퇴근하는 것에서부터...언어 미숙으로 인한 각종 사회활동에 대한 부담감, 아직 도착하지 않은 짐, 기타 금전적인 문제 등으로 몸과 마음이 피곤해 있을 때가 자주 생기게 되었고 하필이면 그럴 때....낙심에 빠진 선화와 부딪히는 일이 최근 빈번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말도 실수하게 되고 서로가 얼마나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를 알면서도 서로에게 원망의 화살을 날리게 되고.....

 그저께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세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비슷한 맥락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서로 불만스러운 점들을 얘기하다가 선화가 집 안에 있는 게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해서 형민이를 업은 채 문을 나섰고...전...따라 나갔습니다. 집 앞의 큰 도로인 알파라비에서 질주하는 차를 바라 보다가....람스토르로 내려가는 거리를 좀 걸었습니다.....형민이를 업은 선화의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몇몇 아가씨들의 시선을 무시하고 우린 거리의 벤치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5분여....특별한 말도 없었고...특별한 생각도 없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문제의 핵심을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겐....여의치 않은 환경과 형민이의 육아 부담이 우릴 힘들게 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어떤 해결방법이 있지는 않을까...하고 멍하게 바닥만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다가....다시 일어나서....아파트 주위를 돌아 집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우린....서로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서로는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어려운 환경 특히...이제 막 여러 가지 소리를 지르며...엄마를 괴롭히는 형민이로 인한 어려움이 우리에게 있지만...형민이 역시 우리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 주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가족 안에서 먼저 훈련하고 배워야만 하는 과정입니다.

 선화와 전...오늘도 사랑하면서 또 사랑하는 훈련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떨 때는 서로 예수 믿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하나님의 백성이라면...용납하고 용서할 줄 알아야 함에도 전 자주 그렇게 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면...전 부끄러워 집니다. 솔직히 선화에게도 부끄러워 집니다.

우리집 아파트 앞 길에서 형민이와 함께....뒤에 눈덮인 침불락이 보입니다.

까작에 오면서 우린 시댁과 처가집에서 뚝 떨어져 나왔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멀리 있습니다. 보고 싶지만 볼 수가 없습니다. 선화와 형민이 그리고 나....이렇게 세 명이 한 가족입니다. 내 가정을 먼저 돌보고 그 다음 내 교회의 어려운 이들을 먼저 돌보고 그리고 더 넓은 범위의 이웃으로 사랑을 확대하는 게 사도 바울의 부탁이었습니다.

까작에 온 우리 부부는...더욱 더...서로 용납하며 이해하는 걸 배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2001.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