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 아저씨와의 만남

까작스탄은 한반도의 12배나 되는 큰 나라입니다. 까작스탄은 14개의 주로 이루어져 있는데....제가 와 있는 알마티 시는 남쪽 수도라고 불리는 큰 도시로 13번째 주(州)인 알마티 주(州)의 중심 도시이기도 합니다. 알마티 주만 해도 한반도 크기 만큼 된다고 하니까.......작은 나라에 살다 온 저로선 부러운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큰 나라에 살다 보니....사람들이 자동차를 많이 이용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러시아, 유럽, 아시아, 미국에서 많은 차들이 들어와 있고 한국보다 훨씬 다양한 차들을 볼 수 있어....만일 차를 좋아하시는 분이 계시다면...마음껏 여러 나라의 좋은 차들을 구경할 수 있는 곳이 될 것 같습니다. 여기서도 현대,대우,기아 등...한국 차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한국차의 인기가 요즘은 좀 식었다고 합니다. 그래도 다마스나 티코에서 소나타, 크레도스, 에스페로, 무소, 엑센트, 로얄 살롱까지 다양한 차들을 볼 수 있었고 며칠 전에는 포니를 보기도 했습니다.....시내 곳곳에서 한국 자동차 업체들의 로고를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한 때 IMF 파동 때 환율 변동에 힘입어 한국차가 많이 들어왔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지에서 한국차의 부품 조달이 어렵고 AS가 원활하지 않아....한국차의 비율이 점점 떨어진다는 주변 분들의 얘기였습니다.  

 이 곳에 처음 온 저로선....앞으로 제가 몰고 다닐 차를 고를 때까지 저희 가정이 여기 저기 다닐 수 있는 차가 당장 필요했는데 다른 분의 안내로 러시아인 운전기사가 딸린 닛산 승용차를 빌릴 수 있었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자동차를 렌트할 때에는 반드시 그 차에 딸린 운전기사를 함께 빌려야 한다고 합니다. 저나 선화나 운전 면허가 있지만....이 곳 지리를 전혀 모르는 데다가 우리를 도와 주실 현지인이 필요하기도 해서 운전기사가 딸린 렌트카를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기사 아저씨의 이름은 이글입니다. 작은 체격에 콧수염을 기른 러시아인입니다. 이 곳에 온지 이틀만에 이 분을 만나게 되었고 러시아어를 하나도 모르는 상태에서 이 분과의 만남이 시작되어야 했습니다.

이글아저씨와 높은 TV송신탑이 있는 깍주베 언덕에 올라가서 알마티 시내를 바라보았습니다.

처음 이 곳에 와 제투스 호텔에 묵고 있을 때부터는 이글 아저씨와 함께...대사관, 박물관,  람스토르, 공원, 질료니 바자르(청과물 시장), 여러 선생님 댁 등을 다녔는데 다행히 이글 아저씨가 몇 마디 영어를 알고 계시기에 그걸 최대한 이용해서 서로 의사를 전달하고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는 법...선화와 전 아저씨께열심히 뭔가를 설명하다가도....웃어 버리고 없던 일로 하자는 표정을 지은 적이 많았습니다.

비록 계약에 의해 맺어진 관계이지만...이글 아저씨는 참 좋은 분입니다. 처음 만난 날....우린 아저씨와 함께 하얀 색의 닛산 써니를 타고....처음으로 람스토르, 박물관, 깍주베(미국에서 지어 준 TV 송신탑이 있는 언덕)에 가 보았습니다. 공기가 좋은 깍주베 위에서 아저씨와 차를 마시며 담을 헐어 버리려고 했었는데....영 말이 안 통해 어려운 점이 많았었습니다...하지만 그 날부터 낯선 땅에 온 젊은 부부와 아저씨는 한 마음이 되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형민이를 귀여워 해 주시고(형민이는 미안하게도 한 번씩 이글 아저씨를 보고 웁니다. 그럴 때면 저희가 더 어쩔줄 몰랐지요....) 선화와 제가 장을 볼 때 따라와서 물건도 들어 주시고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러시아어로 어떻게 부르는지 종이에 적어 주기도 하셨습니다. 아저씨와 조금 다니다 보니....아저씨의 부인이 꽃을 기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제는 꽃송이가 큼지막한 붉은 장미 3송이를 들고 와 선화에게 선물하기도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형민이 침대를 고르고 싶다고 얘기드리자...여기 저기 데리고 다니시면서 아저씨가 먼저 "도르가(비싸다...)" 라고 얘기하면서 물건을 여러 개 보여 주시려고 애쓰셨습니다. 오늘도 저희 집의 전화선을 고쳐 주기도 하는 등.....단순한 운전 기사 이상으로 저희 가정을 돌봐 주시는 역할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러시아어 공부가 시작된 후로는 러시아어를 해 보라고 한 뒤...제 발음 중에 어색한 것이나 틀린 것을 교정한다고 열심이십니다. 알파벳 발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하시며...한국이 하기 힘든 p(영어의 r발음인데 혀를 떨며 소리를 냄), ,   를 계속 반복해 보라며 더 안달이십니다....차를 운전하면서도 이것 저것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러시아어로 하면(빠-루스끼) 어떻게 부른다고 가르쳐 주시는데....어떨 때는 오늘은 아저씨에게 뭘 배웠다고 말을 할까....고민될 정도입니다.

깍주베 언덕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를 탄 뒤...몇명의 까작 여학생들을 만났습니다. 형민이를 무척 좋아하더군요

러시아인인 이 분과 함께 지내면서...공과 사를 잘 구별하려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관계가 친밀해져도.... 저희 집에 몇 번이나 들어가자고 얘기해도 한사코 마다하셨고....함께 장을 본 뒤 헤어질 때 아저씨께 드릴 체리(과일)를 전하는데도 엘리베이터 앞에서 몇 번이나 옥신각신 해야 했습니다.

이 곳에 온지 며칠이 지나자 개방 이후 이 사회에도 어두운 부분이 있음이 조금씩 보였습니다. 어떤 자본주의 사회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아파트 벨을 누르는 구걸하는 아이와 여인들 그리고 아파트 앞 쓰레기 하치장 뚜껑을 열어 보는 거리의 노숙자들이 있었고....힘들게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습니다. 유럽의 호화 백화점과 같은 큰 건물이 들어서고 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는 자본주의 냉엄함이 이 곳 사람들을 차차 억누르고 있었습니다. 이 나라는 산업 기반 시설이 취약해서 농축산물의 가격은 한국의 1/2-1/3 수준이지만...공산품의 경우 한국보다 비쌀 정도로 사회 간접 자본과 공장 시설이 부족하고....따라서 국민이 일할 일자리도 부족합니다. 물론 광활한 중앙 아시아 초원 지대에서 양을 치며 일차 산업에 종사할 수도 있지만....이 곳 알마티에 모여 사는 도시 사람들의 대부분은 부족한 일자리와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사회에 쫒기고 있고...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지 못해....이 곳에 와 있는 외국인 가정의 가정부나 운전기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깍주베 케이블카 앞에서 까작 아주머니들을 만났습니다. 분위기가 우습지요?

이글 아저씨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전...잘 되지도 않는 러시아어를 구사하면서 아저씨에 대해 조금씩 알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글 아저씨의 아버지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후...이글 아저씨는 지난 30여년간을 이곳 알마티에서 살아왔다고 합니다. 올해로 카작스탄이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한 지 딱 10년이 되는 해인데...아저씨께 독립 이후 살아가는게 좋아졌는지 물어 봤습니다. 아저씨는 인근의 우즈벡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크스탄 등은 독립 후 국가적 환경이 더 나빠졌지만...이곳 까작은 그래도 약간 나아진 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옛날 소비에트 시절에는 지금 차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구걸하는 노인들이 전혀 없었다고 단호하게 말하시면서...독립 후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살아가는 건 오히려 더 힘들다고 얘기했습니다.

얘기가 조금씩 통하자...전 고르바쵸프에 대해서도 물었고..아저씨는 고르바쵸프는 훌륭한 정치가이긴 하지만...각 민족국가들의 독립을 막았어야 한다고 자신의 뜻을 피력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는 교육열이 정말 대단하다고 하시면서 한국도 그러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때 제가 어떻게 말했는지는 안 적어도 아실 겁니다.

 차를 렌트하는 조건으로 이글아저씨에게 저희는 월 200불을 드립니다. 언젠가 이글 아저씨는 그 200불 중 100불은 자신의 아들이 대학에서 공부하는데 사용되고 100불을 가지고 부인과 함께 생활한다는 얘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한국에서는 의사들이 얼마나 버는지도 물어 보셨습니다. 왜냐햐면 이곳의 의사들은 예전 소비에트 시절의 통제된 시스템이 여전히 작용해서인지...월 급료가 100불도 채 안되고...대부분의 의사들은 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00불도 안되는 급여로 가정을 꾸리기에는 불가능하기에...남자가 하는 직업은 아니고..주로 여성들이 대학에서 계속 공부해서 의사의 길로 들어선다고 합니다. 얼마전 이 나라는 '의사의 날' 이라는 기념일을 지켰는데...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브랏치(의사)라고 하면서 축하해 주는 걸 보며...참 이상한 나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낮은 급여를 주면서...국가적 기념일로 '의사의 날'을 지키다니....마치 한국의 '경찰의 날'이나 '집배원의 날' 의 개념으로 이곳 사람들은 의사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의사의 날 기념행사가 열리는 알마티 시청에 가 보았었는데...모인 의사들의 대부분이 여성이였고...여기 한카병원에 와 계시는 민선생님 말로는 이곳 의사의 8-90%가 여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글 아저씨는 새파랗게 젊은 제가.... 의사라고 하면서.....멀리 이 곳까지 와서 차도 렌트하고 집도 구하는 걸 보고 도대체 얼마나 버는지 궁금하셨는가 봅니다(여기와서 제대로 일하는 것 같지도 않고...)....이 나라 근로자들의 평균 월 소득은 월 100-200불(13만원-16만원) 이고 .제일 돈을 많이 버는 부류는....은행원이나 대사관 직원들로 월 500불 가까이 된다고 하지요.

 한국에 비해선 턱없이 낮은 급여라고 해서.....이곳의 물가가 그 만큼 싼 것은 더욱 더 아닙니다. 공산품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기에 공산품은 한국보다 더 비싸서 형민이의 하기스 기저귀(freedom, 36짜리)가 3000텡게(우리 돈으로 3만원)나 하니까요.....개방 이후 이곳에는 하루가 다르게 소비 성향이 화려해지고 사치가 심해져 가고 있는데... 람스토르의 비싸고 화려한 고급 옷들을 본 뒤로는 항상 얇은 T셔츠 하나만 입고 다니시는 이글 아저씨가 너무 가엾어 마음이 아픕니다. 이곳 주민들에겐 좋은 섬유를 사용한 고급 옷들이 꿈에서나 입을 수 있는 옷들이기에...예전 소비에트 시절...모두가 똑같은 옷을 입고...거지가 없던 시절이 더 나았다는 이 곳 사람들의 얘기에 정말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도 이글 아저씨를 만나러 내려가야 합니다. 말없이 운전대를 잡고 창밖 세상을 가리키며....졩기(돈) 얘기를 하면서 손을 들어 보이며 웃으시고....어린이 놀이 동산이 있는 중앙 공원에서 어떤 놀이 기구를 가리키며 저걸 타면 무섭다며... 익살스런 인상을 짓는 천연덕한 그 분을 떠 올리며 이 나라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져 봅니다.

막심 고리끼 공원 내의 동물원 입구에서 이글 아저씨와 함께

국제 협력의사로 이 곳에 와 있는 난...."함께 잘 사는 인류 사회 건설" 이라는 모토 아래 한국에서 파견되어 온 사람입니다. 이곳에 사는 러시아인인 이글 아저씨와의 만남은 이곳 구 소련...까작스딴에 살고 있는 사람도 비록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더 하게 만들어 주었고....앞으로 이 나라 사람들을 섬겨야 하는 제게 정말 '그렇게 하고 싶다' 라는 애착을 심어준 귀한 만남이었습니다.

언젠가 28공원(알마티 시내의 공원, 1,2차 세계 대전 기념물들이 있음)에 가서 그리이스 정교 사원을 보면서 이글 아저씨에게 그리이스 정교를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이라고......' 고 말하시더군요....지금까지 카톨릭에 대해서만 개신교와의 차이에 대해 고민을 하며 그들의 구원 문제를 생각했었는데....이제 그리이스 정교까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오늘 차에 타면 한 번 물어 볼 생각입니다. "이글.....뷔 즈냐옛제 이수스 크리스도스?"(이글 아저씨....예수님을 아세요?)   200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