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0시 20분에 해가 지는 나라(38도의 더위...)

이 곳에 온 이후... 이 곳 생활을 느낀 그대로... 그 때 그 때 기록해 두고 싶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밀려 왔습니다. 하지만 제 컴퓨터는 다른 짐과 함께 해상과 철도를 통해 몇 주 더 지나야 도착하는 형편이라.....알마티에서 겪는 첫 감정들을 놓치는게 아니냐는 안타까움에 사로잡혀 있었지요....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월세로 얻은 사말 드바의 집에서 집 주인의 대학생 딸이 당분간 두고 간 컴퓨터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6월이 되면 컴퓨터를 가지러 오겠다고 얘기하고 갔지만... 당분간 만이라도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어찌나 반갑던지....덕분에 이 곳에서의 일들을 그 때 그 때 한글 워드 프로세서로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주신(?) 귀한 컴퓨터로 지금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까작에서 구한 집에 컴퓨터가 준비되어 있을 줄 제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주인집 딸이 두고 간 컴퓨터는 러시아어 윈도우 98 이 깔려 있고 러시아어 키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맘으로....한국에서 가져 온 한글 815 CD를 실행시켜 보았더니....거짓말처럼 한글 97이 설치되더군요....한글과 컴퓨터 社에서는 한글 97부터는 한글 윈도우가 아닌 곳에서도 한글 97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다는 것도 이 때 알게 되었습니다. 다만 처음 설치할 때 "모두 다 설치"를 선택해야 다른 언어의 윈도우에서 한글 97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러시아어 키보드인데도...한글 키보드 처럼 자판을 두드리면...한글이 모니터에 나타납니다. 한글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 곳에서 한글 97을 사용하는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어쨋든 덕분에...저의 고질병(?)이자 최대의 장점인 "기록화"는 어김없이 계속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해가 질 떄 우리 집에서 서쪽의 지평선을 바라본 모습

카작스탄(앞으로는 까작스딴을 줄여 '까작' 이라고 쓸께요...영어식 표기보다는 러시아식 표기가 더 적합하니까요....) 에 와서 겪는 변화 중 하나는 낮 시간이 아주 길다는 것입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5월 말인데도 밤 10시까지도 해가 지지 않는 걸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요즘은 10시 20분이 넘어야 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면서 서쪽 평원에 석양이 지고....침불락 위의 남쪽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며 청색으로 변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일이죠..

한-카 병원(한국의 국제협력단에서 까작스딴에 프로젝트 사업으로 건설한 병원이고 한국-카작스탄 친선병원 이라는 정식 명칭을 줄여 한-카병원이라고 부릅니다)을 예로 들면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 근무시간인데... 근무 시간이 마치고 난 뒤에도....5시간 가까이 해가 남아 있기 때문에 저녁에 개인적으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여기와서 본 이 곳 사람들의 생활 방식의 특징 중 하나는 저녁 시간에 다른 사람을 집으로 초청하거나 다른 가정에 초대되어 함께 10시 정도까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주 많다는 것입니다. 전...총각 시절....부산에 있을 때..새벽별 멤버들과 함께 밤달총(밤마다 달리는 총각들의 모임:밤마다 놀러 다니는 총각들)을 조직해서 일주일에도 여러 번... 밤마다 모임을 가지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이 곳에 와 보니...밤달총은 상대도 안 될 정도로 매일 저녁 모임이 있고....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케익과 차를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서로 얘기를 나누며 교제하는 만찬의 문화가 발달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해가 늦게 지는 탓이라 여겨집니다. 물론 어디 마땅히 갈 데가 없는 것도 한 몫 하겠지만....어디 가기보다는 서로의 집을 방문하는 것이 훨씬 편한...그야 말로 사람 사는 정을 느낄 수 있는 사회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38도까지 올라간 날 정부파견의 선종욱 선생님 집에서 저녁 식사 모임을 하는 모습

제가 까작에 오고 난 뒤...저녁 시간은 거의 항상 다른 분의 초대를 받아 그 곳에서 함께 지냈습니다.  까작에 온 23-24일에는 김선생님 댁에서 25일은 한카병원의 민병훈 선생님 댁에서....26일은 협력단의 권영복 소장님 생신 축하 자리에서...27일은 권소장님 댁에서....29일은 데이빗 김 목사님 아기 돌 잔치에서....매일 매일 저녁 모임이 이어지더군요...물론 새로 부임한 협력의사와의 상견례도 있기에...한-카 병원에서 근무하시는 정부파견의(이하 정파의) 이신 민병훈 선생님과 선종욱 선생님 가정에서의 즐거운 저녁 모임과 대사님과의 만찬 그리고 권소장님 이하 여러 협력단 봉사단원들과의 모임이 이어졌습니다. 특히 소장님 댁이나 김선생님 가정은 알마티 정착 초기에 여러 번 방문하면서 좋은 시간을 많이 가졌습니다. 이곳에 와 계시는 최진규, 최에스더(예장,고신) 선교사님의 초대도 빼놓을 수 없구요....

점심 시간을 이용해서도 모임이 있는데 24일 점심에는 박은호, 심현주 선교사님(예장,통합) 가정의 네 번째 애기의 백일 잔치가 열리는 한국 식당 신라를 방문했다가 모임을 마친 뒤 선교사님 가정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데이빗 김 목사님 아기의 돌 잔치도 땅집이라고 불리는 현지 주택에서 있었는데..처음으로 아파트가 아니라 까작의 현지 가옥에서 벌어지는 잔치 자리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이 날 잔치 자리에서 형민이가 얼마나 귀엽게 재롱을 떨면서....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많이 했던지...모두들 형민이를 보며 많이 웃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만나는 한인들은 대부분 선교사님들이거나 상사 주재원들...그리고 개인 사업 하시는 분들입니다. 뜻밖의 모임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까작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선교사님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았고....선교사님들의 현지에서의 모습을 가감없이 볼 수 있어 더욱 좋았습니다. 그 분들 역시 하나님을 섬기며 동시에 이 땅에서 또 하나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분들이기에....겪어야 할 어려움이 있는 것이 당연했고 앞으로 이런 것들을 옆에서 보며 나눌 수 있다는 기대감도 찾아왔습니다.

 각종 돌 잔치와 생일 모임....새로운 일원을 소개하고 반기는 축복과 나눔의 문화가 이곳 한인들(적어도 크리스챤)의 생활 속에 담겨 있었습니다. 어쨋든 처음 까작에 오면 한 달 정도 현지 적응하느라 특별히 움직이지 않더라도 많이 피곤하다고들 하는데...몸은 피곤하지만...이곳 저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어 좋았고...이런 모임들이 처음 까작에 정착하려는 우리 가정을 더욱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알마티의 더위에 대해서도 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이곳 알마티의 날씨는 여름엔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의 기간이지만....한국의 여름보다 오히려 견디기 쉽습니다. 이유는 습도가 낮기 때문이지요...그래서 아무리 덥더라도 땀이 잘 나지 않습니다. 자매들은 화장이 지워질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그야말로 기가 막힌 곳입니다. 습도가 낮다 보니...아무리 더워도....견딜만 하고 불쾌지수도 올라가지 않습니다. 한-카병원의 민선생님은 아주 더울 때 자동차 윈도우를 내리고 '내가 지금 사우나(건식) 안에 들어와 있다....' 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 오히려 이런 더위는 따뜻하고 좋게 느껴진다고 까지 말씀하시니까요...

 지난 6월 1일....오전에 러시아어 공부를 마치고....오후에 시장을 보러 나갔었고...저녁은 한-카 병원에 정부파견의로 와 계신 한의사 선종욱 선생님 집에서 만찬 회동(?)을 가졌습니다. 정원과 마당이 넓은 현지 가옥에다...현대식으로 잘 꾸며 놓은 집이었고 아이들도 9살 정도로 다 자란... 저희보다 훨씬 더 연륜이 쌓인 가정이었습니다.

 모두들 함께 식사를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오늘 날씨가 38도 였다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왔습니다.  "오늘이 영상 38도 였다구요?" 물론 오늘 아주 더웠던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온도가 높게 올라갔을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전 깜짝 놀랐습니다.

 '마당에서 보이는 침불락에는 아직 하얀 눈이 그대로 쌓여 있는데....38도 였단 말이지......' 정말 알마티에 와 있다는 것이 실감이 되는 얘기였습니다.

 까작에서 집을 구하고 난 뒤로....한 낮에는 되도록 외출을 삼갑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저녁 5시나 되서야 움직이려고 하는데....말이 저녁 5시지....한국으로 따지면 낮 1-2시의 불볕 더위가 이 때가지도 계속됩니다. 저녁 9시 정도 되어야....시원한 바람이 불어 오면서 햇볕이 한 풀 꺾이니까요......

 너무 더워 그런지....형민이는 이곳에 와서 낮잠이 늘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정도 열심히 놀다가 잠깐 자고.....오후 3시 정도 되면 또 한 2-3시간 정도 정신없이 잡니다. 아마 기압이 낮은 곳에서 생활하는 데다....온도까지 높아 피곤한가 봅니다. 선화 역시...낮잠을 자야 하루 종일 움직일 수 있습니다.

형민이는 낮에 잠이 늘었습니다. 저녁 모임에 참석했다가 자고 있는 형민이와 세진이(김동환 선생님 아들)

한-카 병원에 정부파견의사로 오신 민선생님 말에 의하면....해가 길기 때문에 여기서 하루는 한국의 2-3일 정도의 시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그만큼 낮 동안에 한국보다 훨씬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는 뜻입니다...민선생님의 경우 이 곳에 5년 정도 계셨는데...그 동안의 생활을 돌이켜 보시면....아마 한국으로 치면 10년이 넘는 시간이 될 거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낮이 길어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얘기하십니다. 예를 들면, 병원이 끝난 뒤에도....친구를 만나고...골프를 치러 가고....운동을 하고...학교에 가신다니까요....

이렇게 더운 날씨지만....막상 현지인들은 별로 이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하루는 제가 임시로 고용하고 있는 러시아인 운전기사인 이글이 내일 함께 쩬뜨럴 빠르끄(공원)에 놀러 가자고 하더군요... 전 그렇게 하겠다고 얘기했고 약속한 다음 날이 되었습니다. 그 날 따라 햇볕이 따가운 더운 날씨였습니다. 다른 약속도 생겼고 해서.....이글에게 전화를 걸어 날씨가 너무 덥기 때문에 다음 기회로 미루자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이글은 덥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듯이....전혀 문제가 안된다는 말만 되풀이하면서 너무 덥다는 제 말에 잘 수긍하지를 못하더군요....아마 이 곳 사람들은 이 정도 날씨 쯤은 더운 축에도 끼워 주지 않는 모양입니다....

 10시가 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38도의 더운 열기가 온 몸을 휘감는 나라...바로 까작스딴에 지금 와 있습니다. 지금 당장은 이곳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만 밤 10시에 해가 지는 게 당연하게 느껴지고 뜨거운 뙤약볕이 친근해질 즈음엔.....저도 어느새 이 곳 알마티의 당당한 일원으로서 변해 있겠지요...그 때까지는 매일 밤 10시가 되면 창가에 나와 붉은 석양이 내려 앉는 북쪽 지평선을 바라보며 일찍 해가 지는 한국과 두고 온 사람들을 떠 올리며 고향 생각을 할 것 같습니다.....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불고 언제든지 바닷가를 찾을 수 있는 나의 고향을 그리워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