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족(KAZAKH)
튀르크 역사학자 바르톨드(Barthold)에 의하면 현재 '카작인' 이라고 불려지는 중앙 아시아의 튀르크 족들이, 몽골 제국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신들의 종족에서 이탈하여 방황하며 도적 생활을 하고 지내게 되면서 카작이라는 말이 유래하였다고 한다. 즉, 그는 카작 qazaq 이라는 말이 qaz - '배회하다' 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라고 주장한다. 한편 카작 민간인들 사이에서는 카작이라는 말이 qaz '거위' 와 'aq''흰' 의 합성어라고 믿고 있다. 이러한 미간 어원론은 그들의 민간 전설을 반영한 것인데, 전설에 의하면 하얀 거위가 처녀로 둔갑해서 사람들을 낳게 되었는데 이들이 카작인들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카작이라는 말은 15세기 러시아 제국의 문서에 최초로 등장한다. 여기에서 카작은 한 사회 계층 그룹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당시 지배층인 카슴(Kasym)가에 예속된 사람들을 다른 하층 계급의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 카작이라 불렀던 것이다.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상황을 보면 몽골 제국이 와해되면서 설립된 튀르크계 타타르 인들의 카잔 칸국이 러시아 제국에 의해 붕괴된 후, 타타르인들 중 자신들의 부족장들과 함께 러시아인 지배자들을 섬기기 위해 집단으로 들어온 사람들을 카작인들이라 불렀던 것이다.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이들 카작인들은 단순히 타타르인들이었다기보다는 여러 튀르크계 부족 즉, 크림 타타르인, 카잔 타타르인, 그리고 큽착, 노가이 인등 튀르크게 부족들로서 러시아 지배층에 예속되어 일하는 집단을 일컬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15세기 중반 볼가 튀르크인들 사이에서 '자유 용사들'이라는 의미로 카작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카작인' 이란 말은 원래 종족명이 아니라 한 사회 계층, 즉 몽골 제국과 카잔 칸국 붕괴 후, 러시아 인들에게 고용되어 군인으로 봉사한 새로운 튀르크계 부족 그룹을 의미하는 것으로써, 어원적으로 이 단어는 qaz- '배회하다'에 명사 형성 접미사 -aq 이 붙어 파생하였다. 즉, 정치적인 이유로 몽골 제국의 지배를 이탈하여 집단을 이루고 지내던 튀르크계 집단으로써 몽골 제국 붕괴 후에 러시아 제국에 예속된 사람들을 지창하여 카작인이라 불렀던 것이다.
15-16세기 카작인들이 러시아 중앙부에서 남방 변경 지대로 이주하여 자치적인 농민 군사 공동체를 형성하였는데, 이들 집단을 가리켜 카작인들이라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이러한 농민 군사 공동체를 러시아어로 카자체스트보(kzazchestvo) 라고 한다. 이는 '초원의 말타는 자' 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모험자','자유인'이라는 의미도 있다. - 중앙 아시아 연구 (하) - 최한우
카자흐스탄의 원주민인 카자흐인의 역사는 복잡하기 그지없다. 카자흐스탄 땅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100여 개의 씨족과 종족과 민족의 운명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현 카자흐 민족의 직접조상은 기원전 1세기경 현재의 카자흐스탄 영토에 정착한 터키계와 몽골계 종족이다. 카자흐스탄 땅에 들어온 터키계 종족은 선주민이었던 유럽계의 스키타이 등의 종족들과 섞였고 거기에 13세기 몽골군의 침입이후 몽골계의 요소가 새로이 더하여져 현재의 카자흐인이 형성된 것이다. 학자들에 따르면 기원 전후 카자흐인에게는 유럽 인종적 요소가 70%를 차지했었는데 지금은 반대로 터키 및 몽골 인종적 요소가 70%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카자흐인의 민족적 기원이 복잡한 만큼 ‘카자흐’란 명칭이 언제 나타났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카자흐인에 관한 최초의 주목할 만한 정보는 11세기 터키의 서한문에 기록되어 있다. ‘카자흐’라는 민족 명칭의 기원에 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학자들간 논쟁이 있었지만, ‘카자흐’란 명칭은 자기의 종족에서 떨어져 나와 생활하는 사람을 지칭하며, 나중에는 독립적 생활을 영위하는 자유인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카자흐인들은 오랫동안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드넓은 땅에서 느슨한 몇 개의 세력권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다가 1219년 몽골제국이 카자흐스탄을 점령하여 차카타이 한국(汗國)이 세워지면서 카자흐스탄 지역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카자흐인으로 통칭하게 되었다.
이후 카자흐 영토에는 15세기 경 카자흐인이 주축이 된 카자흐 한국이 출현하였고, 이후 대올다(Great Horde : 카자흐 남부), 중올다(Middle Horde : 카자흐 중부), 소올다(Little Horde : 카자흐 서부)로 분열되어 호족들이 할거하는양상을 보였다. 3개 올다는 18세기 중엽 동쪽으로부터 알타이계 유목 민족 국가인 중가리국의 침입을 받아 러시아 황제에게 보호를 요청하면서 점차 러시아의 영향권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700년대 초, 피터 대제 시절부터 중앙 아시아 경략을 시작한 러시아는 코사크 기병대를 앞세워 알타이 지역과 텐산지역에 국경 요새를 건설했고 1860년대에는 러시아 제국에 편입되었다.
소련 혁명 후 카자흐스탄은 공산당의 민족 정책에따라 1923년 자치공화국이 되었다가 1936년 연방공화국으로승격,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 2007, 주 카자흐스탄 대사관 제공
카자흐 족은 투르크족과 몽골의 혼혈인 카자흐족은 중앙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이슬람 민족이다. 과거에 이들은 중앙 아시아의 다양한 민족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민족이다. 대부분의 인구가 카자흐스탄에 거주하지만, 이는 전체의 40% 정도만을 차지한다. 몽골이나 우크라이나, 러시아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카자흐인들은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독특한 민족 특유의 정체성을 만들어 왔다. 이들은 몇 개의 씨족끼리 서로 연합하여 상호 보호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연합을 통하여 민족 특성에 정치적인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19세기 동안에 러시아는 점진적인 합병과정을 통해 중앙 아시아를 획득했고 결국 카자흐스탄 영토 전체를 요구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러시아 내란 중에 카자흐인 절반이 죽어 갔고 이 때 많은 사람들이 몽골이나 중국으로 토피했다.
카자흐인들은 16세기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후 지금까지 자신들을 무슬림으로 생각하고 있다. 러시아에 의한 종교적 억압으로 이들은 이슬람에 더욱 더 친밀하게 되었다. 현재도 이슬람의 관습들이 이들의 전통 민속 신앙과 결합된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전통적인 카자흐 민속 신앙에 따라 영혼의 존재를 믿고 있다. 그들은 애니미즘과 조상 숭배를 한다. (애니미즘: 인간 이외 다른 존재도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신앙이다.) 오늘날 카자흐 인들은 여전히 무당에게 도움을 구한다. (무당은 마법으로 상처를 치료하거나 영혼과 교접하는 등의 일을 주관한다.) 결혼 전후와 출생, 장례식 때에 다양한 전통 의식을 거행한다. 2000년 현재 7,028,300 명.
카자흐인 내부의 종족 그룹들
전통적인 카작인 그룹들: 카자흐스탄의 카자흐인은 언어와 그에 따른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크게 두 종족 그룹으로 나누어진다. 한 그룹은 '전통적인 카작인' 이고 다른 한 그룹은 '러시화된 도시의 카작인' 이다. 그리고 이 두 그룹 사이의 중간자적인 그룹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이들을 '변화하는 그룹 또는 현대화된 그룹' 으로 칭한다. 이들 그룹들을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되는 언어는 이들이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에 좌우된다. 즉, 카작학교를 나왔는가, 러시아학교를 나왔는가에 따라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드르며 이것은 곧 이들의 세계관 형성에도 큰 영향을 준다.
전통적인 카작인과 러시아화된 카작인들 사이에는 많은 차이점이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가정에서 사용하는 언어에서부터 시작해서, 교육, 거주지역, 직업, 가족, 정치적 성향, 세계관, 종교 모든 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드러낸다.
특히 이 양 그룹 사이에서는 적대적 감정이 존재하기도 했다. 카작어를 할 줄 모르는 도시 카자인들에 대한 지방 카작인들의 냉소와 비판, 시골 카작인들을 향해 도시 카작이들이 '시골뜨기' 라고 간주하는 것은 이들 갈등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대립의 근저에는 항상 정체성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시골에 있는 전통 카작인들은 러시아의 지배와 통치 속에서 가축과 땅을 잃었던 쓰라린 역사를 잊지 않고, 소비에트 시절에도 자신을 모슬렘으로 인식했던 사람들이다. 이에 반해 러시아화된 카작인은 더 좋은 기회를 찾아 러시아어를 배우고 학교를 다니고 사회적 지위를 얻어왔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후 이들 그룹들 사이에는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정치 우세권이 소련에서 카자흐스탄 공화국으로 옮겨지면서 카작인들은 스스로 자신의 문화적 뿌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이전에 아무런 저항이나 생각없이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 학교에 보냈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 현대화된 그룹으로 이동했다. 이전에 음성적으로 냉소와 비판을 보냈던 전통 카작인들은 이제 공개적으로 러시아화된 카작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교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러시아화된 카작인들은 비록 언어가 통할지라도 러시아인들이 참여하는 교회(다민족교회)에 출석하기를 꺼렸다.
이제 사회는 또 다른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예전에 양 계층 간에 굳게 닫혀 있던 지역적, 문화적 장벽들이 전환기의 과정 속에서 허물어지고 있다. 과거 시골 집단 농장에서 목축과 농업, 그 가공 공장에 종사했던 전통 카작인들은 집단 농장의 폐쇄로 인해 직장을 잃고 생계 수단을 위해 인근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과거 시골 마을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집했던 전통 카작인들이 새로운 변화의 흐름 속으로 나오고 있다. 이제 언어와 세계관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소통되지 못했던 두 그룹은 양 극단으로부터 중간지대에 위치한 현대화된 카작인이라는 그룹으로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 현대화된(변화하는) 카작인 그룹: 변화하는 카작인 그룹 내의 카작인들은 그들이 러시아 학교를 다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통 카작인들과 비슷하다. 그들은 전통적인 카작인에 비해 대학 교육을 받은 이들이 많다. 카작어보다 러시아어를 잘하고 집에서 양쪽 언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인 카작의 환경(가정이나 마을에서 카작어를 사용하는 분위기) 가운데서 자라왔다. 그들의 세계관은 서구적이라기보다는 동양적이다.
카자흐스탄의 언어 생활은 러시아어와 카작어를 섞어 사용하고 있다. 이들이 사용하는 카작어라는 것은 러시아 명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 어휘량은 카작 어휘보다 훨씬 풍부하다. 러시아어는 친구들과 말할 때 사용하고 그 밖에는 카작어를 사용한다. 그들 전부는 러시아어를 더 잘 사용하지만, 카작어로 더 말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공식어는 카작어, 민족간 소통어는 러시아어이다.
1. 카자흐 민족 및 국가 형성
1999. 10.12. 토카예프(Tokayev) 내각 출범 2002.1.29. 타스마감베토프(TASMAGAMBETOV) 내각 출범 |
카자흐는 터키어로 ‘반도(叛徒)’, 즉 ‘본국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행동을 취한 사람들’을 의미하며 '초원의 말타는 자'로서 모험자, 자유인을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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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자흐인이 나타나기 전 :
기원후 4-6세기 돌궐제국을 건설했던 고대 튀르크족은 8세기에 이르러 중국 당에 의해 붕괴되기 시작하여 현재 카작스탄 지역에 유입했다. 8세기 초 튀르크계 튀크케쉬 부족이 일리강과 추강 중간지역에 칸국을 건설하였고 751년 탈라스 국제전에서 아랍의 도움으로 중국군을 격퇴한 튀크크계 카를룩이 766년 이 지역에 칸국을 세웠다. 탈라스 국제전을 통해서는 이 일대의 튀르크족들이 이슬람화 되었고 8세기에서 10세기까지 이슬람은 남부 카작스탄에 널리 퍼졌다.
9세기에서 11세기에는 카작스탄 남부와 남서부에 봉건국가를 이룬 튀르크계 오우즈부족의 지배를 받았다. 이무렵 북부와 중부지역에는 목축을 하는 튀르크계 부족인 키막과 큽착 부족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후 카라한조와 셀축제국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였으나 카라한이 거란에 의해 1130년 붕괴되면서 12세기 등장한 몽골제국 때까지 거란이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13세기 초, 카작스탄 지역은 몽골제국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징기스칸 후손들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2) 카자흐인의 출현 후 :
카자흐스탄은 고금을 통해 동서양의 서로 다른 문화나 산물을 교역하는 통로의 요충에 입지하여 민족의 이동과 성쇄가 복잡하였다. 현재의
카자흐스탄의 주요 주민인 카자흐족의 기원은 15세기로
올라간다. 몽골제국의
4개의 한국(汗國)의 하나인 킵차크 한국이 붕괴된 후, 15세기 중기에 그 일족인 샤이바 니이가(家)의 아불 하일한이 우즈베크족을 이끌고
시르다리야강을 넘어서 서투르키스탄에 침입하여, 샤이바니 왕국을 세웠다.
이 때 일부의 집단이 분리해서 카자흐스탄(키르기스초원)의
중부와 남동부의 세미레체
지방에서 독립하여 카자흐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카자흐는 터키어로
‘반도(叛徒)’, 즉 ‘본국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행동을 취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카자흐족 최초의 군주는
킵차크 한가(汗家)의 후예인 카심 한으로, 그 영역은 서쪽의 우랄 산맥과 카스피해 북서해안에서,
동쪽으로 발하슈호(湖)에
이르렀다. 그러나 카심 한의 왕족이나 귀족이 카자흐스탄의 각지에 할거(割據)하면서 17세기 중반에 카자흐족 사회는 3개의
오르다(지역집단), 즉 대오르다(발하슈호 주변에서 시르다리야강
유역), 중오르다(키르기스초원 중부), 소오르다(아랄해 북부의 초원)로
나뉘어 카자흐 전체의 한은 없어지게 되었다.
카자흐족은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일부는 상공업과 농업에 종사하였고, 종교는 수니파(派)의 이슬람을
믿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의 관습법에 따랐다. 제정러시아는 17세기 중반에 시베리아 정복을 거의 끝내고
우랄강 유역에서 서부의
이르티슈강 유역을
연결하는 서시베리아
남측에 많은 요새를 구축해서 카자흐족의 침입을 막고,
동시에 이들 요새를 중앙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18세기 초 동방의 중가르의 침략에 고전하던 카자흐족의 한과 왕족은 차츰
러시아의 보호를 추구하게
되어 1740년에는 소오르다 등 일부가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다.
( 사진은 2003년 1월... 아브라이 한의 고향인 바라보예를 방문했을 때 아브라이 한의 동상 옆에서 촬영한 것입니다.)
1760년 대오르다, 중오르다를 지배하던 아브라이 한은 중가르와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한 청조(淸朝)의 군사력을 두려워해서 청조에 조공을 바치고 외교통상관계를 맺어 한의 권력을 강화함과 더불어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일리와 우루무치와 통상을 해서 카자흐족의 말을 중심으로 한 가축과 청조의 견직물, 면포, 차 등의 교역을 19세기 중반까지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카자흐스탄 중부와
남부에 진출하여, 정치 군사면의 지배를 강화하고 식민지화를 기도하였으며
1850년까지 카자흐의 한과 왕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문화를 도입하고
카자흐스탄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와 함께 러시아인,
카자크인(코사크인)도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 1917년 카자흐스탄 민족주의자들이 카자흐스탄의
완전 자치를 요구하면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에는 카자흐를 포함해 키르기스 자치공화국으로 발족, 올렌부르그를 잠정수도로 하였다. 1925년에는
카자흐스탄자치공화국이 되고 수도를 크질오르다에 두었으나
1929년 알마아타로
옮겼다. 1997년 12월에 수도를 알마아타에서 아크몰라로
옮겼다. 1936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고, 1954년 소련의 처녀지개척운동 때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카자흐에 대량으로 이주했다. 소련의 붕괴로 1991년
1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두산 대백과 사전
(사진설명: 아스타나의 유라시아 대학 내 박물관에 전시된 그림으로서 그림의 내용은 현재 까작스딴 공화국이 있기까지 까작 민족의 역사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들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는데...까작 민족의 시조부터 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까지 그림 속에 등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