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작 민족주의 운동

소련의 러시아 화를 위해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 족을 비슬라브계 민족 집단 속으로 이주시키는 재배치 정책의 결과로 중앙 아시아 인구는 급격히 증가했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슬라브계 민족 뿐 아니라 소수의 고려인, 유대인, 게르만 인들이 중앙 아시아에 강제 이주되어 왔고 이로 인해 카자흐스탄 내 카작인 인구 비율이 줄어들게 되었다.

  카자흐스탄에 대한 슬라브인의 유입은 현지 카작인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기득권이 박탈되는 것이었기에 민족 부르주아적 계층의 거센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20세기초부터 소규모 카작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10월 혁명 이후 공산 세력에 대항하는 무력을  동반하는 조직적인 무슬림 - 민족주의 저항 운동, 즉 비스마치 운동이 생기게 되었다. 민족 저항 운동은 특히 스탈린의 탄압 정책 이후 국민 사이에 깊게 뿌리 내리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반 러시아 민족 감정은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카작인의 민족주의 운동은 부르주아적 반사회주의 운동으로써 단호하게 탄압되었다. 1916년, 노동력 징발을  거부하며 일어난 카작인 반란자 약 2천명이 학살당했으며 1930년 초, 농업 지역 내 유목민들을 강압적으로 정착시키는 정책을 반대하던 유목 카작민들을 대량 학살하려 했던 사건 등은 카작인 차별 정책으로 유명하다.

카작인들의 반 러시아인 감정은 구 소련의 개방 정책이 추진되면서 재발하였다. 1986년 2월 16일, 당시 소련 대통령인 고르바쵸프의 요청에 의해 22년간 카자흐스탄의 공산당 제 1 서기로 근무하였던 브레즈네프 파(派) 카작인 쿠나예프 정치 국장을 부정 부패로 해임시키고 그 후임자로 러시아인 겐나디 콜빈을 기용한 사건이었다. 소련에서는 각 공화국의 민족 감정을 자극시키지 않기 위해 공화국의 제 1 서기만은 그 공화국 출신자로 결정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민족 감정 문제에 대해 경솔하게 생각했던 고르바쵸프가 이 관례를 깨뜨린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앞서 언급한 듯이 1986년 2월 17-18일, 수백명의 학생들과 청년들이 가세한 격렬한 시위로 인해 카작인 2명이 사망하고 시위대 200여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7명의 경찰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