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동 교수의 중앙유라시아 역사 기행  (2008년 조선일보 연재)

    (1) 황금의 유목문화 / 스키타이

    (2)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 헬레니즘의 물결

    (3) 격돌하는 고대제국 | 흉노와 한

    (4) 한혈마의 고향 |‘서역’의 세계

    (5) 흉노와 훈족, 민족 대이동의 시대

    (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중국정치·문화까지 주물러

    (9) 파미르 원정대를 이끈 고선지와 그의 시대

    (10) 이슬람 세력의 동진과 중앙아시아의 운명

    (11)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투르크 유목민

    (12) 중화 질서의 붕괴와 다원체제의 동아시아

    (13) 칭기즈칸과 몽골 세계제국의 등장

    (14) 팍스 몽골리카의 성립과 동서 문화교류의 확대

    (15) 동방기독교의 확산과 쇠퇴

    (16) 몽골제국이 남긴 최대 유산은 세계사의 탄생

    (17) 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18) 무슬림들의 마음을 지배한 신비주의 교단의 성자들

    (19) 몽골의 부흥과 달라이 라마

    (20)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러시아의 동방 진출

    (21)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청제국과 러시아

    (22)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의 운명

    (23) ‘대중국’의 탄생

    (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25) 소비에트 혁명과 중앙아시아

 
(1) 황금의 유목문화 | 스키타이
스키타이는 인류 최초의 유목민족, 페르시아도 굴복
기원전 7~6세기경 출현, 흑해 북안·이집트·시리아 휩쓸며 황금강국 건설… 왕족·유목·농경 스키타이 부족으로 구성돼
▲ 스키타이 고분에서 출토된 황금빗 상부의 전투장면 장식(러시아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           

구약시대에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진 예레미아라는 이름의 선지자가 있었다.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 6세기 전반에 걸쳐서 활동했던 그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이 극심한 종교적 타락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리라는 것을 신의 계시를 통해 거듭해서 경고했던 인물이었다. 그런데 그가 쓴 ‘예레미아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보라! 한 민족이 북방에서 오며 큰 나라가 땅 끝에서부터 떨쳐 일어나나니, 그들은 활과 창을 잡았고 잔인하여 자비가 없으며 그 목소리는 바다가 흉용함 같은 자라. 그들이 말을 타고 전사같이 다 항오(行伍)를 벌이고, 딸 시온 너를 치려 하느니라!”(6장 22~23절) 여기서 그가 마치 환상을 본 듯 서술하고 있는 활과 창을 잡고 말을 타고 줄을 지어 엄습하는 전사들은 아시리아인도 바빌론인도 아니었다. 바로 인류 역사상 최초의 유목민족이라 칭해지는 스키타이였다.

스키타이인들은 인도·이란 계통의 민족이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에 의하면 종족의 명칭도 ‘스쿠타(skuta-)’라는 고대 이란어에서 나왔으며, 이는 오늘날 영어에서 ‘shooter’와 동일한 어원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스키타이는 ‘궁사’를 뜻하는 셈이었다. 아마 큰 무리를 이루어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던 그들의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은 다른 민족들이 붙여준 이름일 것이다. 스키타이라는 명칭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데,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 우리 문화의 원류 가운데 하나로 ‘스키타이’ 혹은 ‘스키토-시베리아’ 문화라는 것이 소개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민족의 기원과 역사에 관해서 가장 상세한 기록을 남긴 인물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인 헤로도투스였다. 그는 ‘역사’라는 책에서 스키타이의 기원에 대해 몇 가지 설화를 전하면서 자신이 보기에 가장 신빙성이 있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그들은 원래 아락세스강(오늘날의 볼가강) 동쪽에 살던 민족이었는데, 마사게태라는 민족의 공격을 받게 되자 서쪽으로 도망쳐 강을 건너서 흑해 북안(北岸·북쪽 해안)의 원주민 킴메르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킴메르인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도망치자 스키타이는 그들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그만 도중에 길을 잘못 들어서 근동(近東) 지방으로 내려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예레미아는 바로 그때 내려온 스키타이를 목격한 것이었다. 이 스키타이에 관한 최초의 기록도 당시 근동의 강국이었던 아시리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다. 즉 이슈파카이 왕이 이끄는 아슈쿠자이라는 집단이 아시리아의 왕 에사르핫돈(기원전 680~669년)과 전투를 하여 패배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서 아슈쿠자이가 스키타이를 지칭한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당시 근동 지역에는 아시리아, 메디아, 우라르투 등 여러 세력들이 각축을 벌여 정치적으로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무대에 출현한 스키타이는 이들 국가와 때로는 연맹하고 때로는 적대하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이슈파카이의 아들인 파르타투아는 과거의 적이었던 에사르핫돈과 혼인동맹을 맺게 되었는데, 후일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가 메디아에 의해 포위 공격당할 때 그의 아들이 스키타이의 왕이 되어 원군을 이끌고 와서 메디아를 격파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뒤 스키타이는 이집트 원정에 나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거쳐 남진했는데, 겁을 먹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직접 선물을 갖고 올라와 스키타이의 국왕 마디에스에게 바치고 화평을 맺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스키타이는 이처럼 28년 동안 중근동 각지를 호령하면서 여러 민족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고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지만, 메디아의 국왕 퀴악사레스가 그들을 연회에 초대하여 술에 잔뜩 취하게 한 뒤 몰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패권은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고 한다.


▲ 스키타이 시대의 중앙유라시아
 근동을 떠난 스키타이인들은 다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서 흑해 북안의 초원으로 돌아갔다. 헤로도투스는 이들이 북방으로 귀환한 뒤 일어난 흥미로운 사건에 대해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키타이인들이 근동을 원정하는 동안 부인들이 현지의 노예들과 관계를 맺어 낳은 자식들이 귀환한 옛 주인에게 예속되기를 거부했고, 양측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스키타이인들은 그들을 제압할 수 없었다. 그런데 노예들을 상대할 때는 칼이나 활이 아니라 채찍을 써야 한다는 누군가의 제안을 받아들여 채찍을 휘둘렀더니 겁을 먹고 다시 복종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안 즉 돈강과 다뉴브강 사이의 초원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건설할 때 군사적 정복과 함께 현지 주민과의 민족적 혼합도 동시에 일어났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흑해 북쪽 해안을 근거로 건설된 스키타이 국가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우선 ‘왕족 스키타이’라는 집단인데 최고의 지배층을 이루었고, 그 다음에는 일반 유목민으로 구성된 ‘유목 스키타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피정복민 ‘농경 스키타이’가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구조는 스키타이 국가가 결코 단일한 종족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질적인 다양한 부족들의 결합체였음을 말해준다.

흑해 북안으로 돌아온 스키타이는 기원전 6세기 말 페르시아 제국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냄으로써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다리우스 대제는 80만명의 대군을 이끌고 스키타이를 잡기 위해서 초원을 헤맸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스키타이인들에게 사람을 보내 비겁하게 도망만 다니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나와서 싸우자는 전갈을 보냈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우리는 도망다니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생활방식이 원래 그렇다”는 조롱 섞인 답신뿐이었다. 식량이 고갈된 페르시아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스키타이는 초원에 물이 귀하므로 그들이 물이 있는 곳을 따라 퇴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맹추격을 시작했으나, 페르시아인들은 초원의 지리에 어두워 물도 없는 엉뚱한 길로 가는 바람에 전멸 위기에서 벗어나 구사일생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파지리크 고분에서 발견된 미라의 피부에 새겨진 동물양식의 문신.

외부의 위협을 극복하고 성취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추진된 그리스와의 교역은 스키타이 국가에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 주기에 충분했다. 스키타이의 발전과 번영은 그들이 남긴 고분에서 발견된 출토물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흔히 ‘쿠르간’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고분들은 흙과 돌로 쌓여진 작은 언덕의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규모가 큰 것은 높이 20m에 이르며 그 아래에는 목곽분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들 스키타이 고분들은 특히 쿠반 반도(켈레르메스, 코스트롬스카야)와 크리미야 반도(쿨 오바, 체르톰리크, 솔로하)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어, 그곳이 스키타이 국가의 핵심적인 중심지였음을 말해준다. 유물 중에는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히 많아서 스키타이 귀족들의 재화와 부의 규모를 추측케 할 뿐만 아니라, 스키타이 특유의 문화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자들은 흔히 스키타이 문화의 3대 요소로 마구, 무기, 동물양식을 드는데, 이 가운데 특히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동물양식이다. 이같은 스키타이 동물양식이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학설이 대립되어 왔다. 하나는 남러시아 자생설이고, 또 하나는 서아시아 기원설이며, 마지막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이 있다. 스키타이의 유물들을 보면 남러시아나 서아시아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전반 남시베리아의 투바공화국에 위치한 아르잔이라는 곳에서 직경 120m에 달하는 거대한 고분이 발견되었고,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은 결정적으로 중앙아시아 기원설의 손을 들어주었다. 탄소 연대측정 결과 지금까지 발견된 어떤 동물양식의 유물들보다 시기가 빠른 기원전 9세기 중후반으로 판명된 이 고분에서 후일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중요한 요소를 분명히 갖고 있는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스키타이 국가의 중심지는 흑해 북안이었다. 그러나 동물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고대 유목문화는 유라시아 초원에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었고, 이는 고고학적인 발굴을 통해서 확인된다. 1940년대 후반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라는 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 고분은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목곽분의 구조를 지녔다. 적석총의 특징을 지닌 신라시대 고분들과의 유사성 때문에 우리나라 학자들에게도 큰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파지리크 고분은 이미 오래전에 도굴되었지만, 묘실 안팎으로 스며든 이슬과 빗물이 결빙되어 고분 전체가 일종의 냉장고가 되어버려, 그 속에 있던 시신과 많은 부장품들이 전혀 부식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었다.

미라 처리되어 실로 꿰맨 흔적이 보이는 시신의 피부에는 동물양식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손가락 끝으로 눌러보면 피부가 들어갔다가 다시 나올 정도로 보존이 잘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 순장된 말들과 거기에 씌웠던 말가면이 나왔고, 목제품·펠트·직물 등에도 스키타이 특유의 양식들이 보였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헤로도투스가 묘사한 바와 같이 제사의식을 행할 때 대마초를 흡입하는 데에 사용하는 도구들이 그대로 발견되어, 그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하고 신빙성이 있는가 하는 점을 확인시켜 주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에서 직조된 카펫,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 등도 발견되어 광범위한 교역의 존재도 짐작케 한다.

그 뒤 1969~1970년에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라는 도시에서 멀지않은 이식 쿨 호수 부근에서 기원전 5~4세기에 속하는 다수의 고분이 발견되었고 여기서 소위 ‘황금인간’으로 알려진 유해가 발굴되었다.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장 165㎝로 추정되는 청년이 입고 있던 황금으로 된 의상 때문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4개의 화살이 꽂혀 있는 장식을 한 모자이다. 고대 페르시아 자료에는 ‘사카 티그라하우다(Saka Tigrahauda)'라는 종족이 언급되어 있는데, ‘티그라’는 화살을, ‘하우다’는 모자를 뜻하며, ‘사카’는 ‘스키타이’와 동일한 어원을 갖는 종족명칭이다. 따라서 그것은 ‘화살 같은 모자를 쓴 사카족’을 뜻한다고 할 수 있으니, ‘황금인간’은 바로 이 종족에 속한 귀족청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스키타이 동물양식의 특징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더 서쪽의 몽골리아 초원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924년 울란바토르 북방 80㎞에 위치한 노인 울라 고분은 동방의 유목민족인 흉노인들의 것으로, 여기서 나온 다량의 부장품 가운데 그리핀이 순록을 공격하는 모양이 수놓인 카펫이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직물이나 칠기 등이 다수 있고 그 중에는 전한 건평5년(기원전 2년)의 명문(銘文)을 갖고 있는 것도 있는데, 이는 흉노가 한나라와 조공 관계를 통해서 상당량의 물품들을 입수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키타이 문화의 영향은 고비사막 남쪽의 내몽골 지역에서도 강하게 발견되고 있다. 흔히 ‘오르도스 청동기’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초원 청동기 제품들 중에는 맹수가 초식동물을 덮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최초의 유목민 스키타이가 출현했을 때부터 중앙 유라시아는 대륙의 주변부와는 구별되는 독특한 문화적 특징을 나타내었다. 그것은 흑해 북안에서부터 내몽골 초원에 이르기까지 중앙 유라시아 전역을 관통하며 나타난 현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고립된 문명이 아니었다. 크리미아 반도에서, 알타이 산중에서, 또 몽골고원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이미 3000년 전부터 중앙 유라시아의 주민들이 주변의 그리스, 페르시아, 중국 등과 밀접한 접촉과 교류를 해왔음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지역은 유라시아 문명권의 공통된 접점으로서 주변 지역의 다양한 문화적 요소들을 흡수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요소들을 수용하고 변화시킨 뒤 다시 주변지역으로 방출함으로써, 수동적 전달자가 아니라 적극적 참가자로서 유라시아 역사를 움직여갔던 것이다. ▒

동물양식(animal style)

기원전 7세기에서 기원후 2~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초원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난 예술적 표현양식이다. 스키타이인들의 고분에서 발견된 수많은 유물에서 전형적인 형식이 보이기 때문에 ‘스키타이 동물양식’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나무·쇠·청동·금·은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하였고, 사슴·양·말·표범·매·그리핀과 같은 동물들의 모양을 양식화(stylize)하여 표현하였다. 특히 황금으로 만들어진 항아리·머리핀·목걸이·버클·장식판 등은 매우 정교하고 풍부한 예술적 표현을 담고 있다. 항상 이동하는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작고 가벼운 물건들을 휴대했고 따라서 장식물의 작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동물의 몸이 둥글게 말려 있는 모습, 무릎을 완전히 꺾어서 구부린 상태, 맹수의 공격에 저항하면서 목이 180도 젖혀진 모습 등이 묘사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또한 맹수가 공격하는 모습이 표현된 장식품을 의복과 무기에 부착한 것은 그러한 장면이 지니는 상징적 주술성과 공격성이 그것을 부착한 용사에게 전이되기를 바라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었다.

 
(2)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 헬레니즘의 물결
헬레니즘을 아시아로 전파한 숨은 공신은 페르시아 제국
헬레니즘 확산 이후 불상 출현

 

▲ 탁티바히의 간다라식 불상
 

이집트에서인도까지 광대한 영토를 연결한 간선도로 건설
페르시아 멸망시킨 알렉산더 동방원정이 헬레니즘 전파
아프가니스탄 고지대에서도 그리스식 도시 발견돼

석가모니 사망 후 500년 동안은 불상 없어
간다라 지방 불상의 옷·자세 등 그리스 신상과 비슷
중국 서북부 둔황 지역 넘어 한반도까지 영향 끼쳐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 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
즉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20세기 초 중국의 가장 서북쪽인 신장(新疆)에서 타클라마칸사막 아래에 묻혀 있던 폐허의 도시 미란(Miran)이 발견되었다. 거기서 주민의 주거지, 불교 사원의 흔적과 함께 고대인의 생활을 추측케 하는 많은 자료가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로마풍 인물이 묘사된 벽화였다.

거기에는 ‘티타(Tita)’라는 화가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었다. 이름으로 미루어볼 때 그가 서방 계통의 순회화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사실 신장 지방에서는 이 벽화 외에도 그리스의 신상이 조각된 인장(seal)도 상당수 발견되어, 여기서 수천 ㎞나 떨어진 지중해를 본산지로 하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강하게 보여준다. 도대체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헬레니즘의 물결이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그리고 거기에서 다시 파미르고원을 넘어서 지금의 중국 서북부 지방에까지 이르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물론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일 것이다. 비록 그에게 무너져버리긴 했지만 소아시아 반도에서부터 중앙아시아 변경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페르시아 제국이 없었다면 헬레니즘의 광범위하고도 신속한 확산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헬레니즘을 운운하기에 앞서 페르시아 제국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야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지금 이란의 서북부 케르만샤 지방에 가면 비스툰 비문을 볼 수 있다. 높이 105m의 깎아지른 절벽에 가로 22m, 세로 7.8m의 면적에 새겨져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비문은 ‘비문들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손색이 없다. 중앙에는 등신대 사이즈(1.72m)의 다리우스(Darius) 대제가 위로는 최고신 아후라 마즈다의 축복을 받으며, 발 아래로는 찬탈자 가우마타(Gaumata)를 짓누르고, 뒤에서 궁수와 창수의 호위를 받으며 반란을 일으킨 수령들 9명을 사슬에 묶어 부리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그 주위로는 다리우스의 업적을 칭송하는 명문이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고, 내용은 고대 페르시아어, 엘람어, 아카드어 등 모두 세 가지 다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주인공은 사실 다리우스가 아니라 퀴로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기원전 539년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서아시아의 주인이 되었지만, 기원전 530년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을 호령하던 마사게테(Massagetae)라는 부족과의 전투에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퀴로스가 죽은 뒤 제위를 이은 그의 아들 캄비세스는 이집트를 원정해 영토를 확장시키기도 했으나 기원전 522년 사망하고 말았고, 캄비세스의 아들을 참칭(僭稱)한 가우마타가 등장하면서 제국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혼란을 수습한 인물이 바로 황족 출신의 다리우스였으며, 내란을 평정한 직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스툰 비문을 새겼으니 기원전 519년의 일이었다.

다리우스에 의해 설계된 통치의 기본 구조는 ‘성(省)’제도였다. 전국을 20개 정도의 성으로 분할하고 각각에 총독(kshatrapa, 영어 satrap의 기원)을 임명했는데, 그에게는 군사권을 제외한 사법·징세·행정 등 광범위한 민정권이 부여되었다. 각 성은 매년 은을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행정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잇는 주요 간선도로를 건설했다. 특히 소아시아의 사르디스에서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 이르는 2470㎞ ‘제왕의 길’에는 111개의 역참이 설치되었고, 신속을 요하는 사항은 하루 300㎞ 이상 달려 일주일 만에 전 구간을 주파했다고 한다. 또한 문화적으로도 통일을 기해 아람어·문자를 제국의 공용언어·문자로 정하고, 조로아스터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폼페이의 모자이크.

이처럼 이집트와 소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아우르던 대제국 페르시아의 영화도 계속될 수는 없었다. 당시에는 변방에 불과하던 마케도니아 출신으로 약관 24세의 알렉산드로스(알렉산더 대왕)에게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기원전 334년 약 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다넬즈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들어온 그는 먼저 그라니쿠스(Granicus)와 이수스(Issus)에서 페르시아군을 연파하고, 마침내 기원전 331년에는 티그리스강 동쪽에 위치한 가우가멜라(Gaugamela)라는 대평원에서 5배가 넘는 적군에게 괴멸적 타격을 주었다. 도주하던 마지막 황제는 피살되었고 이로써 페르시아 제국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빌론·수사·페르세폴리스에 무혈입성하면서 제국의 중심부를 그대로 접수했지만, 뒤이어 터진 반란을 진압하고 제국의 변경을 넓히기 위해서 아프간·중앙아시아·인도를 전전해야 했다. 고향을 떠나 10년이 다 돼가도록 계속되는 원정에 지친 그리스 병사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알렉산드로스는 세계 정복의 꿈을 접고 귀환길에 올랐으나 바빌론에서 33살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이제 갓 탄생하려던 제국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의 지휘관들은 제국을 셋으로 분할해 통치하였다. 그리스 본토에 마케도니아 왕국, 이집트 방면에 프톨레마이오스 왕국, 페르시아 제국의 중심지에 들어선 셀레우코스 왕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왕국은 후일 로마제국에 병합되었지만 셀레우코스 왕국은 헬레니즘 문화를 동방에 확산·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헬레니즘 문화의 정착과 확산은 도시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는데, 그리스인이 도시(polis)를 중시한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정복지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도시들을 건설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러한 전통은 셀레우코스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은 물론 부인과 아들의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이 같은 헬레니즘 도시의 실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아프가니스탄 북단에서 발견된 아이 하눔(Ay Khanum) 유적지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 직후 아무다리아강과 콕차강이 만나는 곳의 삼각형 고지대(높이 60m, 넓이 1800×1500m)에 세워졌다. 도로는 그리스 도시 특유의 격자형으로 만들어졌고, 도시 중앙에는 137×108m의 넓은 광장이 있었으며 거기에서 도리아식·이오니아식·코린트식으로 장식된 108개의 열주(列柱)가 발견되었다. 그리스인의 도시생활에 필수로 여겨지던 시설들, 즉 체력 단련을 위한 김나지온(gymnasion)과 5000명 수용 가능한 극장도 있었다. 플루타크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동방에서는 소포클레스나 유리피테스의 비극 대사들을 외워서 공연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한 가지 흥미로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즉 클레아르코스(Clearchos)라는 사람이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 있던 150조의 잠언을 석주(石柱)에 새겼는데 석주는 없어지고 그 받침만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 클레아르코스라는 인물이 3세기 후반에 활동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즉 솔리(Soli) 출신의 클레아르코스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처럼 그리스인이 주로 거주하던 도시를 중심으로 발전한 헬레니즘 문화는 비(非)그리스인 주민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인도를 지배하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 대왕(기원전 274~236년)이 남긴 석각칙령이 좋은 예이다. 칸다하르에서 발견된 이 석각에는 불교로 개종한 그가 스스로 살생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한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이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새겨져 있었다. 박트리아를 무너뜨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인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을 지배한 쿠샨 왕국은 북방 유목민인 월지(月氏)인이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역시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들은 카로슈티(Kharoshti)라는 인도 고유의 문자와 더불어 그리스 문자를 병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발행한 금화나 은화의 한쪽 면에는 제우스·헤라클레스·아테나·아틀라스·디오니소스 등 수많은 그리스 계통의 신이 부조되어 있었다.

 

▲ 비스툰 비문

헬레니즘이 동방세계에 미친 영향을 말할 때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불상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의 사망부터 불상의 출현까지 약 500년 동안은 무(無)불상의 시대였다. 즉 석가모니는 한 사람의 ‘위대한 각자(覺者)’로 여겨졌고, 회화적으로 그의 존재는 보리수나 발자국 혹은 빈 대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암시될 뿐 그를 어떤 신적 존재로 여겨 숭배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에 변화가 생겨났고 드디어 기원후 1세기경에 불상이 탄생한 것이다. 불상의 기원과 관련해 소위 간다라·그리스 기원설과 마투라·인도 기원설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고, 이에 관한 논쟁은 아직도 분명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간다라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나 보살상의 모습에서 헬레니즘의 영향을 도외시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부처의 얼굴 모습이 그러한 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가 걸치고 있는 승복도 그리스·로마인의 토가(toga)를 그대로 본뜬 듯하며, 서 있는 자세 또한 그리스 신상에서 흔히 보이는 콘트라포스토(contraposto), 즉 한쪽 다리를 살짝 구부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심지어 사자가죽을 걸치고 몽둥이를 손에 든 헤라클레스가 부처를 협시하는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고, 번개를 휘두르는 제우스를 모방한 듯한 집금강(執金剛·Vajrapani)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헬레니즘의 문화적 영감과 연관되어 탄생한 간다라식 불상의 도상적 표현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불상 제작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반가상과 교각상 같은 독특한 자세의 불상·보살상이 계속 만들어졌고, 석가모니의 생애, 즉 ‘불전(佛傳)’을 주제로 하여 만들어진 예술적 표현도 아주 빈번하게 나타났다. 중앙아시아 쿠차의 키질이나 중국 서북부의 둔황 등지에서 간다라 양식의 입김은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물론 그 입김은 동쪽으로 올수록 점점 약해진 것이 사실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내기가 더욱 어려워지지만, 불상이 지닌 기본적인 도상적 요소들이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점에서 헬레니즘의 물결은 한반도에까지 그 파장을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가우가멜라 전투

이 전투는 전쟁사에 대서특필되는 유명한 전투이다. 횡대로 뻗은 전열의 길이만 30㎞가 넘었다고 하는 20만 대군을 맞아 알렉산드로스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길이가 3~7m에 달하는 긴 창으로 무장한 밀집보병대(phalanx)가 적의 기병대를 저지한 사실도 주목할 만하지만, 후대의 전쟁사가들은 무엇보다도 알렉산드로스의 천재적인 전술을 지적하였다. 밤중에 기습공격을 하자는 제안에 대해서 “나는 승리를 훔치러 오지 않았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그는 결코 혈기만 넘치는 무모한 젊은이가 아니었다. 그는 그리스군 좌ㆍ우익을 중심으로 전투를 전개시킴으로써 적의 막강 기마부대의 주력군을 양쪽으로 갈라지게 하고, 자신은 직속 최정예 컴패니언 기병대를 이끌고 허약해진 적의 중앙을 돌파하여 곧바로 황제의 목숨을 노린 것이다. 폼페이에 남아 있는 거대한 모자이크는 이수스의 전투를 묘사한 것이지만, 적의 정중앙을 파고드는 젊은 영웅과 겁에 질린 눈으로 그를 응시하는 무너지는 제국의 군주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다. 

 
(3) 격돌하는 고대제국 | 흉노와 한
흉노 VS 漢, 전쟁과 평화의 300년史 유라시아 역사를 바꾸다
기원전 200년 항우 이긴 유방, 흉노족 공격했다 되레 죽을 위기
굴욕적 조약 맺고 공주·조공 바쳐… 한 무제 때 강공책 급선회
‘왕소군의 恨’등 숱한 드라마 남겨
‘이릉의 화’등 비사 남긴 반세기 전쟁으로 두 제국 국력 쇠퇴
서역·한반도까지 넘나들며 유라시아 문명교류에 큰 공헌
▲ 흉노 전사의 모습 스케치
 

우리는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이 격돌하는 초한쟁패(楚漢爭覇)에 대해서는 많이 들었지만, 역발산의 기개세를 자랑하던 항우를 꺾고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 그 당시 흉노(匈奴)라는 유목민과 전쟁하다가 구사일생으로 도망쳐 나온 사실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중국인의 입장에서 위대한 한제국의 건국자가 당한 수치스러운 사건, 그것도 북방의 ‘야만인’에게 당한 것이라면 알려져서 무엇이 좋았겠는가. 그러나 사실은 사실이고 그것은 엄연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한 고조(高祖), 즉 유방은 천하통일의 기세를 몰아 기원전 200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북방의 강호(强胡·강한 오랑캐라는 뜻) 흉노를 치러 나섰다. 마침 겨울에 큰 추위와 함께 많은 눈이 내려 병졸 열 명에 두셋은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그러나 묵특이라는 이름을 가진 흉노의 선우(單于·군주의 칭호)는 짐짓 패한 척 도망치며 한나라 군사를 유인하였다. 유방은 ‘32만명’의 대군을 데리고 추격에 나서 마침내 산서성 평성(平城)의 백등산(白登山)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그는 미처 주력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흉노의 정예 ‘40만 기병’에 포위되고 말았다.

유방은 한겨울에 일주일을 꼬박 갇혀서 식량도 떨어진 채 죽기만 기다리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묵특의 부인에게 몰래 최고급 모피코트를 뇌물로 건네주었고, 이를 받은 그녀가 묵특에게 “당신이 지금 한나라 땅을 차지한다고 해서 거기서 살 것도 아니지 않소?”라고 하며 유방을 풀어줄 것을 권유했고, 이를 받아들인 묵특은 포위망의 한쪽 귀퉁이를 열어서 그를 보내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시작된 한과 흉노 제국의 전쟁과 화평의 관계는 이후 약 300년간 지속된다.

이러한 내용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흉노열전’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으니, 비록 군대의 수에 다소 과장이 있을 수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신뢰할 만한 보고이다. 포위에서 풀려난 유방은 사신을 보내 흉노와 ‘화친(和親)’이라는 이름의 조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것은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되었는데, (1) 만리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삼는다 (2) 상호 형제관계를 맺는다 (3) 한나라 공주를 흉노 왕에게 시집보낸다 (4) 매년 흉노에게 옷감과 음식을 보낸다는 것이었다.


▲ 기원전 1세기 무렵 한과 흉노 지도
 앞의 두 항목으로 보아서 양국이 평등한 관계인 듯하지만 한나라가 흉노에게 일방적으로 공주와 물자를 바치는 형편이라서, 말이 ‘화친’이지 실제로는 불평등 조약이나 다름없었다. 그 같은 사정은 유방의 미망인 여후(呂后)와 묵특 사이에서 벌어진 소위 ‘농서(弄書)’사건에서 잘 드러난다.

유방이 죽은 뒤 묵특은 여후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내용인즉 “나는 외로운 군주로서 습한 소택지에서 태어나 소와 말이 가득한 들판에서 자라났소. 여러 차례 변경에 가보았는데 중국에 가서 놀고 싶은 희망이 있었소. 이제 그대도 홀로 되어 외롭게 지내고 있으니, 우리 두 사람이 모두 즐겁지 않고 무엇인가 즐길 것이 없는 듯하오. 그러니 각자 갖고 있는 것으로 서로의 없는 것을 메워 봄이 어떻겠소?”라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성질이 강퍅하기로 소문난 여후는 이 편지를 받고 모욕과 수치심으로 펄펄 뛰면서 즉각 전쟁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등산의 치욕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던 많은 대신이 만류했고, 이에 하는 수 없이 부드러운 내용으로 묵특을 달래는 답장을 써서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내용도 가관이어서 “폐하께서 저희 조그만 고장을 잊지 않고 글을 내려주시니 저희는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저는 이제 늙어서 기력이 쇠하고 머리카락과 이도 다 빠졌으며 걸음걸이도 주체가 안됩니다. 폐하께서 누군가의 말을 잘못 들으신 듯한데, 저와 같이 지내봐야 공연히 힘드시기만 할 것입니다. 저희 고장이 지은 죄가 없으니 널리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의 전용수레 2대에 말을 같이 붙여 보내드릴 테니 항상 타고 다니는 데 쓰옵소서”라는 것이었다.

 
▲ 중국 전국시대 흉노의 금관 /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초상화

그러나 한제국으로서는 이처럼 치욕적인 상황을 계속해서 끌고 나갈 수 없었다. 더구나 서서히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자리잡아 가던 유가사상의 관점에서 천하의 중심이자 덕치의 상징인 천자가 야만의 군주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건국된 지 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에 힘입어 국력도 훨씬 더 신장되어 있었다. 이러한 변화를 배경으로 기원전 140년에 즉위한 한 무제는 외교정책을 급선회하여 흉노에 대한 강공책을 채택하였다.

전쟁의 서막은 변경의 조그만 마을 마읍(馬邑)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에 한 무제는 흉노와 정면대결을 가능하면 피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원전 133년 선우를 마읍으로 유인하여 잡으려는 계략을 세우고 수십만의 병사를 그 부근에 배치시켰다. 그러나 계획은 들통이 나버렸고 무제는 할 수 없이 전면전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무제는 위청, 공손오, 공손하, 이광과 같은 장군을 일제히 장성 북방으로 출격시켰고, 이로써 한과 흉노 두 제국 사이에서 50년을 끌게 되는 전쟁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전쟁은 뚜렷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일진일퇴의 양상을 보이며 계속되었다. 그때까지 내몽골을 본거지로 삼고 있던 흉노는 거듭된 한나라의 공격으로 인해 고비사막을 건너 북몽골로 근거를 옮겼다. 무제가 파견한 군대도 이들을 추격하여 북몽골 초원을 전전하였지만 확실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농민들로 충원된 보병이 주력을 이루던 한나라 군대가 기동력을 주무기로 삼는 유목민을 잡는다는 것은 역시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절망에 빠진 무제는 사신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천자가 직접 병사를 지휘하고 변경에서 기다릴 테니 만약 선우가 대항할 수 없거든 남면(南面)하고 신하를 칭하도록 하시오. 어찌해서 멀리 도망만 다니면서 북방의 춥고 물도 풀도 없는 곳에 숨어 있단 말이오?”

한 무제는 흉노를 측면에서 제압하기 위해 서역으로 진출하여 무위, 장액, 주천, 돈황 등 하서사군(河西四郡)을 설치하고 동방으로는 한반도에 한사군(漢四郡)을 두면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당한 패배는 참담하기 그지없었고, 조파노(趙破奴), 이릉(李陵), 이광리(李廣利) 등의 장군이 잇따라 흉노에 투항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중에서도 특히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연루된 저 유명한 ‘이릉(李陵)의 화(禍)’는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원전 99년 장군 이릉은 보졸 5000명을 이끌고 가다가 흉노의 기병 3만명에게 졸지에 포위되고 말았다. 사방에서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화살을 세 번 맞은 사람은 수레에 싣고 두 번 맞은 사람은 수레를 끌며 한 번만 맞은 사람은 전투를 계속했지만, 부하를 몰살시키지 않기 위해 결국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투항 소식을 들은 무제는 불같이 화를 냈고 마침 그 자리에 있던 사마천은 이릉이 처했던 상황을 설명하며 이해를 호소했다가 오히려 무제의 분노를 사서 궁형(宮刑)을 당하고 말았다. 한나라가 자신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고향에 남은 노모와 처자를 포함한 일족을 참살시켰다는 말을 전해 들은 이릉은 비통의 눈물을 흘리며 북방의 ‘이역인(異域人)’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반세기에 걸쳐 계속된 전쟁은 두 강대국을 모두 피폐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기동력이 떨어지는 한나라 군대였지만 해마다 계속되는 원정군의 공격은 흉노인에게 초원의 정상적인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한나라는 매년 막대한 수의 원정군을 파견함으로써 엄청난 재정지출을 감당해야 했고 그로 인한 백성의 곤핍은 극에 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침내 기원전 89년 무제는 “이제부터는 가혹한 정치를 중지하고 지나친 세금을 걷지 말며 농사에 힘쓰도록 하라”는 소위 ‘윤대(輪臺)의 조칙’을 내림으로써 흉노와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한이 건국한 이후 흉노와 가졌던 화친과 전쟁의 역사는 원거리 외교, 인적 교류, 기술과 지식의 전파를 통해서 유라시아의 문명교류사에 큰 유산을 남기게 된다. 그 중에서도 가장 획기적인 사건은 장건(張騫)의 서역방문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릉과 같은 ‘이역인’의 모습을 추적해 보기로 하자.

먼저 ‘화번공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여인들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자 그대로 ‘화번(和蕃)’, 즉 변방 민족과의 화평을 위해 시집 보낸 ‘공주’인데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빼놓고는 황제의 친딸이 보내진 적은 없고 종실의 여자를 ‘공주’라고 꾸며 보낸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왕소군(王昭君)이었다. 그녀는 기원전 33년 흉노의 선우에게 시집 보내져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흉노의 우익을 담당한 제후왕이 되기까지 하였으니 나름대로는 잘살았던 셈인데, 어쩐 일인지 그녀는 비운의 여인으로 여겨져 수많은 중국 문인의 심금을 울렸고 급기야 중국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미화’되기에 이르렀다. 한 예로 당나라 때의 시인 동방규(東方叫)는 ‘왕소군의 한(昭君怨)’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오랑캐 땅에 꽃과 풀이 없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저절로 옷띠가 느슨해지니/ 결코 허리 몸매 위함은 아닐세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오늘날 우리가 자주 쓰는 ‘춘래불사춘’이라는 말도 바로 이 시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처럼 왜곡된 왕소군의 이야기는 원나라 때 마치원(馬致元)이라는 작가가 쓴 ‘한궁추(漢宮秋)’라는 희곡에서 절정을 이룬다.

초원의 유목민에게 시집보내진 화번공주들은 종종 천막에 살면서 이동생활을 했던 것 같다. 이는 ‘오손공주’가 남긴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한 무제가 흉노에 대항할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중앙아시아의 오손(烏孫)이라는 유목국가의 임금에게 시집보낸 여인인데,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천막을 방으로 삼고 펠트를 담장으로 여기면서, 고기를 밥으로 발효한 젖을 장으로 먹는다”고 읊었던 것이다. 화번공주들은 물론 홀몸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많은 수행원과 몸종이 따라갔는데 북방의 낯선 땅으로 가기 싫은 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중항열(中行說)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는 화번공주의 수행원으로 강제로 끌려가면서 “내가 반드시 한나라에 화를 입히리라!”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 그는 한나라에 화를 입히기 위해서 흉노를 강국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고, 흉노왕에게 문서를 기록하는 방법과 사람과 가축의 수를 헤아려 세금을 걷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한나라와 외교서신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문서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어, 종래 ‘흉노의 대선우’라는 단순한 칭호를 ‘하늘과 땅이 탄생시키고 해와 달이 즉위시킨 흉노의 대선우’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바꾸도록 했다. 다시 말해 중항열은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발달된 통치방식과 천자 개념까지도 흉노 국가에 전달하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대 유라시아 대륙의 동부세계는 한과 흉노가 대립하는 남북체제를 기본적인 구조로 갖고 있었다. 이 두 제국은 ‘화친’과 ‘조공’이라는 외교적 틀을 유지했다. 평화가 유지될 때에 거대한 규모의 물자교류가 이루어진 것은 물론, 전쟁에 돌입해서 서로 대치할 때에도 포로와 투항자를 매개로 한 광범위한 인적 교류가 발생했다. 그리고 이 두 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격렬한 접촉은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남북 두 나라는 물론 동쪽으로는 한반도에, 서쪽으로는 서역지방에 깊고 큰 파장을 남겼던 것이다.


왕소군을 주제로 한 희곡 ‘한궁추’의 스토리

한나라 원제 때 흉노에 팔려간 비운의 궁녀

▲ 내몽골 후흐호트에 있는 왕소군 묘.

한나라 원제(元帝) 때에 모연수(毛延壽)라는 이름의 화공이 있었는데, 황제의 후궁이 될 만한 여인들의 모습을 그려서 궁정에 바치는 일을 맡았다. 그는 뇌물을 받고 얼굴을 예쁘게 그려주곤 했는데, 가난한 농부의 딸인 왕소군이 돈을 주지 않자 그녀의 눈밑에 흉터를 그려넣었다. 그래서 소군은 황궁에 들어온 뒤에도 총애를 얻지 못하고 홀로 지냈는데, 어느 날 밤 그녀가 비파를 타며 울적함을 달래다가 마침 뒤뜰을 거닐던 원제의 눈에 뜨여 사랑을 받게 되었다.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한 모연수는 흉노에게 도망쳐 왕소군의 진짜 초상화를 선우에게 바치자, 절세의 미모에 놀란 그는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소군을 부인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흉노의 군사력을 당할 수 없었던 한나라는 거부하지 못하고 소군을 보내기로 결정했고 원제도 애통해하며 이별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흉노로 팔려 시집가던 도중 국경에 이르자 소군은 흑수(黑水)라는 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흉노의 선우는 소군의 일편단심에 감동하여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고, 모연수는 압송되어 한나라로 보내져 처형되었다.

 
(4) 한혈마의 고향 |‘서역’의 세계
漢 무제, 對흉노 연합전선 구축 위해 서역에 장건을 밀사로 파견
장건, 수차례 구금·탈출 끝에 13년 만에 돌아와
대완·오손·대하·안식 등 서역의 나라들 중국에 알려
漢, 한혈마 뺏기 위해 서역 정벌
말 숭배사상 강해… 한혈마, 천마(天馬)의 후손으로 알려져
기원전 60년 서역도호부 설치 후 본격 서역 진출 교두보 마련
200년 후 사신 감영, 안티오크 진출
중국 비단 중개 독점한 안티오크 상인, 감영의 로마행 막아
실크로드 통해 로마의 화폐·유리제품 등 유라시아 전역에 유통돼
▲ 유라시아의 천마 숭배 사상을 보여주는 경주 천마총 천마도 장니.
 6세기경 중국의 양(梁)나라 사람인 종름(宗)이 강남지방의 세시풍습을 기록한 ‘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는 칠월 칠석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어느 물가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매년 8월경이면 그곳으로 뗏목 하나가 흘러 내려오곤 했다. 하루는 그가 그 뗏목 위에 조그만 집을 짓고 식량을 많이 실은 뒤 출발하여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10개월 남짓 뗏목을 타고 가다가 어딘가에 도착했는데 거기에는 훌륭한 누각이 있었고, 그 안을 들여다보니 한 여인이 베틀에서 옷감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한 남자가 소를 끌고 그곳에 와서 물을 먹이기에, 그에게 그곳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돌아가서 촉(蜀)나라에 사는 모모(某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그 뒤 그는 다시 뗏목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와 그 모모씨를 찾아 연유를 물어보니, “모년 모월 밤하늘에 갑자기 이름을 알 수 없는 별 하나가 나타나 견우성에 접근했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계산을 해보니 그 달은 바로 자기가 뗏목을 타고 그 물가에 도착한 시점이었다는 것이다.

‘별로 가는 뗏목’을 타고 하늘나라를 다녀온 사람. 중국의 민간설화에서는 그 주인공이 바로 장건(張騫)으로 되어 있는데, 그는 한 무제가 흉노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흉노의 적이었던 월지(月氏)와 연맹을 도모하기 위해 서역으로 파견한 인물이었다. 무제의 밀명을 받은 그는 감보(甘父)라는 흉노인을 길잡이로 데리고 기원전 139년 수도 장안을 출발했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는 도중에 흉노에게 발각되어 초원으로 끌려갔다. 거기서 포로생활을 하면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는데, 11년이 지난 뒤 드디어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월지를 다시 찾아 나섰지만 월지는 이미 흉노의 공격을 받아 멀리 도망간 뒤였다. 그래서 그는 중앙아시아를 거쳐서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방까지 내려갔다. 거기서 월지의 왕을 만나서 무제의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정착해 편안하게 잘 살고 있던 월지인에게 사나운 흉노인과 전쟁하기 위해 머나먼 고향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결국 장건은 빈손으로 귀국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흉노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길, 즉 티베트인이 사는 강중로(羌中路)를 이용했는데 불행하게도 또 붙들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행운의 사나이였다. 흉노에서 일어난 정변을 틈타 1년 만에 탈출에 성공했고, 이번에는 전에 남겨두었던 처자식까지 데리고 귀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장건은 출발한 지 13년이 지난 기원전 126년에 마침내 장안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 뗏목 타고 가는 장건.
 역사상 장건의 이 여행은 ‘서역착공’이라 불린다. ‘착공(鑿空)’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땅을 뚫었다는 뜻이다. 

한 무제는 흉노를 치기 위한 예비전략으로 장건을 파견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자 그를 파견한 지 6년 뒤인 기원전 133년 드디어 흉노와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흉노는 예상보다 훨씬 끈질기고 강한 상대였으며 전황은 어렵게 전개되어 갔다. 바로 그때 장건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13년 동안 자기가 보고 들은 ‘서역’의 사정을 황제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월지가 동맹을 거부한 것이 실망스러웠지만 그 대신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에 있는 오손(烏孫)·대완(大宛)·대하(大夏)·안식(安息)·대진(大秦) 등 여러 나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오손은 천산산맥 북방에 살던 유목민이었고, 대완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부근의 나라였으며, 대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의 그리스인 정권 박트리아, 안식은 파르티아, 대진은 로마를 지칭했다.

그런데 장건이 갖고 온 정보 중에서 한 무제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오손과 대완 지방에 산다고 하는 한혈마(汗血馬)라는 이름의 명마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마(天馬)’의 후손인 이 말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하루에 천리를 주파할 수 있고 마치 피처럼 붉은 땀을 흘린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한 무제는 대완이라는 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혈마를 요청했으나 거부되자 군사적인 방법에 호소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이광리(李廣利)라는 장군이 기원전 104년 수만의 군사를 데리고 대완을 향해 출발했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도중에 위치한 도시들이 한나라를 도왔다가 혹시 흉노가 보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성문을 꼭꼭 잠그고 식량 한 톨 제공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한 병사들은 다 도망갔고 이광리는 수천 명의 남은 병사를 추슬러 돈황으로 돌아왔다.

 

▲ 파지리크 고분의 순장말. 장례식에 사용된 모양의 추정도.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 무제는 아예 국경의 관문을 닫아 걸고 나라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는 범죄자와 돈황 현지의 ‘악소년(惡少年)’, 즉 불량배와 변방의 병사로 구성된 6만명을 다시 이광리에게 지휘케 하여 기원전 102년에 제2차 대완원정을 감행했다. 원정군은 대완 지방의 이사(貳師)성으로 들어가는 물줄기를 끊고 40여일 포위했다. 견디지 못한 대완 사람들은 화평을 요청했다. 원정군은 한혈마 수십 필과 보통말 3000여필을 받아서 돌아왔다.

동원된 인력이나 투입된 물자에 비해서 한혈마 수십 필을 얻었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한 무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이광리에게 ‘이사장군’이라는 칭호를 하사했고, 또 그렇게 갖고 싶어했던 한혈마를 보고 ‘천마가(天馬歌)’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 시는 한 무제가 그토록 한혈마를 구하고자 했던 까닭이 단순히 전쟁에서 사용할 쾌속마를 확보하기 위함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는 천마의 후예인 한혈마를 타고 곤륜산에 올라가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불로장생의 영약을 얻고자 했고, 나아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황하의 근원에 도달함으로써 잦은 범람을 일으키는 황하의 치수(治水) 비법을 터득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무제만 유독 ‘천마’에 집착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3000년 전 카스피해 북방에 거주하던 인도·이란인에 의해 말이 처음으로 순화된 이래 말에 대한 숭배사상은 유라시아 대륙 동서에 넓게 퍼져나갔다. 알타이 고산지대의 파지리크 고분에서는 순록의 뿔로 화려하게 치장된 가면이 씌워진 채 가지런히 순장된 수십 필의 말이 발견되었으니, 이는 망자의 영혼을 천상으로 안내해주는 주인공이 바로 말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9년에는 중국 서부 무위의 한 분묘에서 높이 35㎝ 길이 45㎝ 크기의 청동으로 된 말이 발견되었는데, 뒤로 치켜져 날아가는 듯한 꼬리와 발 아래 깔려 있는 제비의 모습으로 미루어볼 때, 문자 그대로 ‘천마’를 형용한 것임이 분명하다. 지금부터 1800년 전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이라는 학자가 지어준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는 별명으로도 유명한 이 청동분마상은 오늘날 중국 관광을 대표하는 로고로 사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77년에는 무위에서 가까운 주천의 정가갑(丁家閘) 5호 고분벽화에서 천마가 발견되었다. 이는 1973년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장니(障泥·말이 달릴 때 흙이 튀어오르지 않도록 안장 아래에 붙이는 차단막)에 그려진 천마와 매우 흡사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아무튼 우여곡절도 많은 사행길이었지만 장건이 전해준 이야기는 세인의 주목을 받아 머나먼 서역에 대한 여러 가지 상상과 설화를 낳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 무제와 같은 통치자에게 서역이라는 신천지는 중국이 정복해야 할 전략적 거점으로 인식되었다. 그것은 한혈마를 비롯한 그곳의 특이한 물산의 확보라는 목적뿐만 아니라 흉노와 같은 북방 유목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었다.

무제는 기원전 108년에는 조파노(趙破奴)라는 장군을 보내어 누란(樓蘭)과 거사(車師)를 정복했고, 그 뒤 이광리를 대완으로 보낸 것은 앞에서 설명한 대로이다. 그러나 이 같은 그의 노력은 예상처럼 큰 성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중국의 서역경영에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온 것은 선제(宣帝·기원전 73~49) 때였다. 서역의 도시국가들이 흉노와 연맹하여 중국에 적대를 계속하자 정길(鄭吉)이 이끄는 군대가 파견되어 이들 도시를 제압하였다. 그리고 기원전 60년 현재 신강성 윤대(輪臺) 부근에 있는 오루성(烏壘城)에 서역도호부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 장건의 서역 루트

그러나 중국이 서역에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때 마침 흉노가 분열되고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왕망(王莽)의 찬탈로 전한이 망하자 중국은 영향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고, 후한이 들어선 뒤에도 진출은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1세기 후반 반초(班超)의 활약으로 서역에 대한 패권이 회복되긴 했지만, 그 후로도 중국의 서역 지배는 단절과 연결이 반복되는 삼통삼절이었다. 아무튼 서역도호부를 통해서 입수된 서방세계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사기’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역사서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한서’의 작자인 반고(班固)는 반초와 같은 집안 사람이었기 때문에 특히 서역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반초가 서역에서 활약할 때 그가 파견한 감영(甘英)이라는 사신의 일화는 당시 서방세계에 대한 중국 측 지식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여서 흥미롭다. 기원전 97년 감영은 가장 서쪽에 있다고 알려진 대진(大秦), 즉 로마를 향해서 출발했다. 당시 대진은 금은보화가 많고 특히 야광벽(夜光璧), 화완포(火浣布), 산호(珊瑚), 호박(琥珀), 유리(琉璃) 및 진귀하고 기이한 물자들이 풍부하게 나는 나라로 알려져 있었다.

감영은 오늘날 아프간과 이란 및 이라크를 거쳐서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 조지(條支), 즉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그가 배를 타려고 했을 때 파르티아인은 “바다가 너무 망망해서 다니는 사람이 바람을 잘 만나면 3개월 만에 건너지만, 만약 풍랑을 만나면 2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 출항하는 사람은 3년치 식량을 싣고 가는데, 바다에서 향수병에 걸려 죽는 사람도 많다”고 말했다. 감영은 잔뜩 겁을 먹고 그 길로 돌아오고 말았다.

파르티아인이 이렇게 과장된 말로 그를 겁준 이유는 바로 비단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은 비단의 유일한 생산지였고 로마는 그 최대의 소비지였으며 파르티아는 그 중개자였다. 파르티아인은 중국과 로마가 직접 접촉하게 될 경우 자신들의 중개무역 이익이 사라지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이다. 우리가 중국과 서방을 연결하는 육상 교통로를 ‘비단길’ 혹은 ‘실크로드’라고 부르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비단 이외에도 많은 물자가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되었고 그것을 판매하는 상인도 왕래하게 되었다. 육상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해상을 통해서도 교류와 접촉은 확대되었다. 로마제국의 화폐가 인도양 해안뿐만 아니라 베트남 남부에서도 발견되었고, 인도양과 동남아 지역에서 나오는 조개와 거북껍질이 중국으로 수입되기도 하였다. 지중해 연안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은 중국은 물론 한반도에까지 수입되어 궁정에서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로마제국의 대도시에서는 중국산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게 비치는 옷을 걸친 귀족여인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이렇듯 지금부터 이미 2000년 전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민족과 역사와 문명을 연결하는 대동맥으로서 힘찬 맥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장건이 한 무제에게 올린 보고
대완은 흉노의 서남쪽에 있고 한나라에서는 정서(正西)에 있으며 한나라에서 대략 만리는 됩니다. 그 풍속은 정착생활(土著)이고 농사를 짓고, 쌀과 보리를 심으며 포도주(蒲陶酒)가 있습니다. 좋은 말이 많은데 말이 피땀(汗血)을 흘리며 그 조상은 천마(天馬)의 자식이라고 합니다. 성곽과 가옥이 있고, 그 속읍(屬邑)으로는 크고 작은 70여개의 성(城)이 있으며, 백성의 수는 대략 수십만 명이 됩니다. (중략) 우전(于    )의 서쪽에서 강물은 모두 서쪽으로 흘러 서해(西海)로 주입되며, 그 동쪽에서 강물은 모두 동쪽으로 흘러 염택(鹽澤)으로 주입됩니다. 염택의 물은 지하로 잠행하는데, 그것이 남쪽으로 흘러와 황하의 근원이 되어 ‘지상으로’ 분출됩니다. 옥석이 많이 나며 황하는 중국으로 흘러듭니다.

‘사기’ 대완열전에서

 
(5) 흉노와 훈족, 민족 대이동의 시대
한족과 신흥 선비족에 쫓겨간 흉노 2세기 후 훈족으로 유럽사에 등장
4세기 중반 흑해 고트족 공격하며 유럽 공포로 몰아넣어
피란민 로마제국 변방에 수십만명 몰려들어 대혼란
게르만 대이동과 서로마 붕괴 불러
452년 아틸라, 알프스 넘어 로마시까지 파죽지세로 진격
피란민들 해안가로 도망가 ‘바다도시’베네치아 등 건설
‘훈족의 영웅’ 아틸라, 황화론 상징
숱한 신화 남기고 결혼식날 급사… ‘니벨룽겐의 반지’주인공으로
고트족 반란 등 내부 분열로 유럽 흔든 100여년 정복 역사 막 내려
▲ 훈족과 고트족을 묘사한 스케치.
 

376년 다뉴브 강가의 전방초소에 배치된 로마제국의 군관에게 긴급한 보고가 접수되었다. 북방 야만인 사이에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동요가 감지되고 있으며, 어디에선가로부터 출현한 무서운 민족의 공격을 받아 고향을 버리고 도망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군관들은 처음에 이같은 보고에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곧 많은 수의 야만인이 다뉴브강 북안에 밀려들어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들은 흑해 북방에 거주하던 고트족이었고, 그들을 밀어낸 새로운 민족은 바로 역사상 유명한 훈족이었다. 훈족은 370년경부터 휘하의 알란족을 이끌고, 돈강과 드니에스터강 사이 지역에 있던 동고트(Ostrogoth) 왕국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동고트의 국왕 에르마나릭은 절망 속에서 자살하고 말았고 훈족의 말발굽에서 피신한 잔중(殘衆)은 서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들을 뒤쫓은 훈족이 강을 건너 서고트(Visigoth)를 압박하자 수많은 고트족이 가재도구를 챙겨서 다뉴브강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일부 기록에 의하면 당시 로마제국의 변경으로 밀려든 피란민의 수가 20만명에 육박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역사상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훈족과 훈제국은 453년 아틸라의 죽음으로 그 세력이 와해될 때까지, 게르만족의 대대적인 이동을 격발시키고 결국은 (서)로마제국의 붕괴라는 사태까지 초래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와 같은 학자는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이동이 유럽사에서 고대의 종말을 가져온 사건이라고 규정하기도 했고, 이러한 주장은 그 뒤 프랑스의 역사학자 피렌에 의해 비판되면서 유럽사의 시대구분 논쟁을 촉발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에 있었던 훈족은 누구였으며 어디에서 온 사람인가. 4세기 후반 동로마의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훈족의 생김새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훈족은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 뺨에 쇠붙이로 깊은 상처를 내어, 어른이 된 다음에 수염이 날 때에도 주름진 상처로 인해 털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도록 했다. 그래서 수염이 없는 그들은 흉물스럽게 되고, 내시처럼 보기에도 역겨운 모습이다. 그들은 지저분할망정 그런대로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다. 어찌나 강인한지 음식에 맛을 내지도 불에 굽지도 않고… (생고기를) 자기 허벅지와 말 등 사이에 끼워 넣어 따스하게 한 뒤에 그냥 먹는다.” 448년 아틸라의 캠프에 직접 다녀온 적이 있는 또 다른 역사가 프리스쿠스도 훈족의 외모에 대해서 넓은 어깨와 가슴, 키는 작지만 말 위에 앉으면 커 보이는 인상, 납작한 코, 작고 찢어진 눈 등을 기록하여 몽골로이드적인 특징을 지적한 바 있다.


▲ 훈족의 이동 경로
 그래서 드 기네(De Guines·1721~1800) 같은 프랑스 학자는 일찍이 훈족은 바로 몽골초원에서 이주해온 흉노족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던 것이며, 그 근거로 훈과 흉(노)이라는 명칭의 유사성, 양자 모두 몽골로이드적인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유목민족이라는 점, 중국 측 문헌에 보이는 기록 등을 지적했다. 그 후 여러 학자들이 흉노·훈 동족론에 대해 찬반의 뜨거운 논쟁을 벌였는데, 현재는 동족론을 지지하는 입장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서 간의 여러 자료를 토대로 흉노가 서방으로 이주하여 훈족으로 나타난 과정은 이렇게 정리된다. 기원후 48년경 흉노는 누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느냐는 문제를 두고 심각한 내분이 일어나 두 조각으로 분열되고, 남흉노는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한나라의 보호를 받고 북흉노가 초원을 호령하는 사태가 되었다. 그러나 북흉노는 한제국과 남흉노 연합세력의 압박을 받는 한편 초원 동부지역에서 흥기하기 시작한 선비족의 공격을 받으면서 약화되어, 91년에는 몽골리아를 포기하고 중앙아시아의 일리강 유역으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다. 흉노는 그곳을 근거로 인근 도시국가들을 지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몽골리아 초원의 새로운 패자인 선비족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2세기 중반경 더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초원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후 이들은 역사적인 기록에서 포착되지 않은 채 사라져 버린 듯했지만, 4세기 중반 갑자기 ‘훈’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 훈족의 침입과 게르만족의 대이동 경로
 당시 유럽인은 이러한 사정을 알 리가 없었기 때문에 훈족의 출현에 대해 기이한 설화들을 지어내어 이해하려고 했다.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고트족 사이에 유포되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옛날에 필리메르라는 이름의 고트족 왕이 있었는데 어떤 마녀를 스키타이인이 사는 황무지로 추방했는데, 황야를 떠돌던 한 악령이 그 마녀를 발견하고 결합하여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민족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초자연적일 정도로 가공할 훈족의 잔인성과 파괴성을 경험한 고트족의 심리를 잘 반영하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인은 다른 설화를 유포시켰다. 즉 훈족은 원래 흑해 북단의 크리미아 반도 부근에 있는 소택지 건너편 동쪽에 살고 있었는데, 어느날 그들이 기르던 암소 한 마리가 쇠파리에 물려 놀라서 서쪽으로 도망치자 그것을 잡으러 온 목동이 소택지 서쪽에 펼쳐진 풍요로운 초원을 보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훈족이 대거 서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환경과 생태적 요인을 지적하고 있으며 전혀 사실무근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훈족의 이동을 설명해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370년대 훈족의 침입과 고트족의 이동이 벌어진 뒤 로마제국의 변경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30년 뒤인
400년경 훈족의 제2차 파도가 덮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울딘(Uldin)이라는 수령이 이끄는 훈족의 공격을 받은 고트족 집단이 헝가리의 판노니아 평원으로 도망쳐 왔다가, 404년에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갔지만, 울딘도 그들을 추격하여 로마와 합세하여 격파하였다. 훈족의 활동은 게르만족의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판노니아 지방에 살던 반달족, 수에비족, 알란족 등이 이동을 시작하여 406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갔고, 거기서 프랑크족과 전쟁을 한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이베리아 반도로 들어가 왕국들을 건설했다. 그 가운데 반달족은 428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아프리카 북안의 카르타고를 점령하고 반달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러한 대혼란의 와중에 서로마제국도 안전할 수는 없었다. 훈족에 쫓긴 서고트족은 알라릭이라는 수령의 지도하에 알프스를 넘어 410년에는 제국의 심장이요, ‘영원한 수도’였던 로마시에 돌입하여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울딘이 사망한 뒤 훈족을 통솔했던 인물은 옥타르(Octar), 루아(Rua), 문디욱(Mundiuc) 삼형제였는데 가장 강력했던 인물은 루아였다. 그는 426년 동로마를 공격하여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게서 막대한 보상금까지 받아내기도 했다. 루아가 죽자 문디욱의 아들인 블레다(Bleda)와 아틸라(Attila) 형제가 지배권을 장악했지만, 블레다가 사망함으로써 드디어 아틸라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443년 그는 훈족 기마군단을 이끌고 동로마 영내로 들어가 70개가 넘는 도시를 약탈하자 테오도시우스는 제국 영토의 반을 할양해주고 막대한 액수의 보상금과 세폐(歲幣·공물)를 바치기로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틸라는 450년경부터 공격의 예봉을 서로마로 돌렸다. 그는 서로마 황제의 여동생인 호노리아(Honoria)를 신부로 줄 것과 결혼지참금으로 영토의 반을 떼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것이 거절되자 451년 그는 예속된 게르만 부족들을 소집하여 50만 대군을 편성한 뒤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로 들어갔다. 당시 번영하던 도시인 메츠(Metz)를 잿더미로 만든 뒤 센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 최대의 요충이던 오를레앙(Orlean)을 포위했다. 때마침 아에티우스(Aetius)가 지휘하는 로마군과 테오도릭(Theodoric)이 이끄는 서고트 연합군이 도착하여 훈족과 일대 결전을 벌였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카탈라우눔(Catalaunum) 평원의 대회전이다.

이 전투에서 테오도릭은 전사하고 고트족도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로마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그렇다고 아틸라의 승리로 끝난 것도 아니었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그는 군대를 이끌고 헝가리 평원으로 돌아가버렸다. 말하자면 무승부로 끝난 셈이었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하루의 전투에서 사망한 인원이 30만명에 달하여 그 흘린 피로 강물이 불어넘치고 밤에는 전사자의 망령이 적을 찾아 헤매고 다녔다는 이야기가 퍼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인은 아틸라의 철수를 자신들의 승리로 착각했지만 그러한 환상은 다음해인 452년 아틸라의 침공으로 산산이 깨어지고 말았다. 이번에 그는 곧장 알프스 동부를 넘어서 이탈리아로 내려왔다. 그는 동북부에 위치한 아길레야(Aguileia)를 3개월간 포위한 끝에 함락시켰는데, 당시 거기서 빠져나와 해안가 섬과 소택지대로 도망간 사람들이 건설한 도시가 후일 베네치아로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틸라는 이어서 포(Po)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는데 밀라노, 파비아 등의 도시에 무혈입성한 뒤 남하하여 로마시로 진격하였다. 궁지에 몰린 시민들은 사신을 보내 화평을 제의했고 아틸라는 이를 받아들여 철군을 결정했다.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의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퍼지기도 했지만, 사실은 아틸라가 이미 넘칠 정도로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고 또 초원을 떠난 지 오래된 병사와 군마가 지친 상태에 역병까지 돌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는 황제의 여동생 호노리아와 결혼지참금에 대한 약속까지 받았으니 전쟁을 계속할 이유도 없었다.

이처럼 로마를 무릎 꿇게 하고 번영과 발전의 미래를 펼치려던 훈제국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버렸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아틸라의 죽음이 가져온 결과였다. 453년 그는 일디코(Ildico)라는 미녀를 맞아들여 혼례를 올린 뒤 잠자리에 들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 아틸라는 코에 피를 흘린 채 시체로 발견되었고 신부는 그 옆에서 울고 있었다. 그가 여인의 칼에 찔려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로마인 사이에 퍼지긴 했지만 시신에서는 아무런 상처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소문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실은 그 전날 밤 과음한 상태에서 잠에 들었다가 자는 도중 코피가 터져 기도가 막혀버리는 바람에 그만 질식사하고 만 것이었다. 충격에 빠진 훈족은 고대 유목민이 그러했듯이 칼로 얼굴을 그어서 상처를 내고 피눈물을 흘리면서 애통을 표시했다. 그의 시신은 초원 한가운데에 세워진 비단 천막 안에 안치되었고, 유목전사들은 그 주위로 말을 달리면서 아틸라를 위한 애가를 불렀다고 한다.

아틸라의 죽음과 함께 훈제국은 급속하게 분열되었고 뒤이어 예속된 고트족의 반란으로 인해 붕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훈족의 침공이 남긴 역사적 기억은 오랫동안 유럽인에게 남았다. 흔히 헝가리(Hungary)도 음이 비슷하여 훈족의 후예가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지만 직접적 연관은 없다. 헝가리라는 말은 ‘온 오구르(On Oghur·열 개의 부족이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훈족의 기억은 게르만족의 서사전승(saga) 가운데 녹아 들어 아틸라는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프랑크족과 부르군드족의 왕을 격파하는 인물로 등장하는 에첼(Etzel)의 원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아틸라는 ‘신의 채찍’으로 불리며 후일 ‘황화(黃禍·Yellow Peril·황인종이 일으키는 재앙)’를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기도 하였다. 유라시아 대륙의 초원을 가로질러 유럽에 등장한 유목민족 훈은 이렇게 해서 유럽의 역사를 뒤흔들어 놓고 유럽인의 기억 속에 깊은 각인을 남기고 사라졌던 것이다. ▒
 


▲ 훈족의 영웅 아틸라를 새긴 로마제국의 화폐.
아틸라를 위한 애가

훈족의 수령이요 왕인 아틸라여!
아버지 문디욱에게서 출생한,
가장 강력한 민족의 영주여!
그에 앞서 어느 누구도 갖지 못했던 강력한 힘으로
스키타이와 게르만의 땅을 장악하고
심지어 두 개의 로마제국을 공포에 떨게 했노라.
(중략)
행운을 입어 이 모든 일을 성취했으니,
나라는 평안한 가운데
적의 찌름이나 벗의 배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복 속에서 아무런 고통없이 쓰러지고 말았도다.
그의 죽음이 복수 때문이라고 누가 감히 생각하는가.

- 6세기 중반 동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가 쓴 ‘고트족의 기원과 활동’에서 -
(6) 신질서를 모색하는 고대 중앙유라시아
동아시아, 한·흉노 양극체제 무너지며 대혼란… 7세기 당제국으로 매듭
중국, 오호십육국·위진남북조 거쳐 수나라로 통일
북방은 선비·유연 지배 거쳐 6세기 돌궐제국으로
수·당, 유목민 영향 漢보다 개방적
중국 역사상 북방민족의 지배기간이 절반 넘어
북방민족, 200년 가까이 산둥성 등 중국 북부전역 약탈
북방 새 강자 돌궐, 카스피해까지 지배
유목민 일부 한반도로 이동, 신라지역 정착 가능성
일부 학자 “일본까지 진출 야마토 정권 수립” 주장도
▲ 내몽골 호린게르에서 발굴된 선비족 묘의 벽에 그려진 수렵도.
 한 학자는 일찍이 수천년의 중국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여 “만리장성을 사이에 둔 남과 북의 대결”의 역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이같은 단언은 중국사의 내적인 변화와 발전을 무시하고 대외적인 측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북방민족과의 갈등과 대결, 정복과 복속이 중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테마의 하나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제국이 출현한 기원전 221년부터 마지막 왕조 청제국이 멸망한 1911년까지 2000여년 가운데, 중국의 일부 혹은 전체가 북방민족의 지배하에 들어갔던 기간은 거의 반 정도에 이른다. 게다가 흔히 한족왕조로 분류되는 수당제국도 사실상 그 건국세력이 북방계의 혼혈인 소위 ‘관롱집단’이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최근 일본의 한 대표적인 학자는 북위는 물론 당제국도 모두 선비(鮮卑)족 계통의 ‘탁발(拓跋)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한 바 있다. 우리가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사를 ‘남과 북’ 대립의 역사로 보는 것도 결코 과장이라고 하기만은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중국의 역사에서 한족에 대한 북방민족의 장기간의 정복과 지배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史實)’이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다. 과거 중국의 학자들은 비록 중국이 일시 군사적으로 북방민족의 지배를 받긴 했지만, 한족의 탁월한 정치·문화적 수준과 인구·경제적 역량은 소수의 이들 지배자를 흡수하고 동화시켜 결국 한민족의 일부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소위 ‘한족중심 동화론’이다.

그러나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중심주의를 명백하게 배격하고 있다. 한족은 다른 55개 소수민족과 더불어 중국의 역사를 성립·발전시켜온 ‘중화민족’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다. 다시 말해 고대의 흉노족, 선비족, 여진족, 몽골족, 만주족 등도 모두 중화민족의 일부라는 것이다. 과거 ‘한족중심주의’는 ‘중화민족중심주의’에 의해서 대체된 셈이다. 이런 논리를 인정한다면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될 수밖에 없고, 현재 ‘동북공정’이니 ‘서북공정’이니 하면서 북방민족의 역사를 중국화하는 작업도 그 필연적인 귀결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중국 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이제까지 외국 학자들의 입장은 어떠했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그 문제점을 지적하고 비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같은 입장을 방조하고 강화시켜 주었던 것 같다. 소위 ‘정복왕조론’이라는 것이 그런 역할을 했다.

 

중국이건 외국이건 불문하고 이렇게 북방민족과 중국의 관계를 관찰할 때 중국 중심의 시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이 한문으로 쓰여 있다는 데에 기인한다. 물론 시대가 내려오면 북방민족도 독자적 문자를 만들고 기록을 남기긴 하지만 여전히 전달되는 정보의 양은 제한적이다. 그렇다보니 문헌기록을 조사하고 연구하는 학자의 관점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기록자의 관점을 취하게 되고, 그것이 하나의 ‘주관’이 아니라 ‘객관’인 것처럼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의 역사를 중국 측 기록에만 의존해서 연구하고 서술한다고 상상해보자. 게다가 현재 다른 소수민족처럼 우리도 중국의 영토 안에 편입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한국사를 서술한 책의 내용은 아마 지금과 판이하게 달랐을 것이다. 따라서 북방민족, 나아가 중국 ‘주변’ 민족의 역사를 연구할 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기존의 텍스트(여러 형태의 사료)를 ‘해체’하여 그 패권적인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은 첫째로 텍스트 안에 내재된 중국중심주의를 비판적으로 극복하는 일과, 둘째로 비(非)중국 텍스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일이다. 한제국 붕괴 이후 약 350년간 일어난 역사에 대해서도 그동안 줄곧 중국 중심적 역사관에 의해 이해·서술·교육되어 왔지만, 이제는 남북의 균형된 역사서술의 틀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먼저 장성 이남 지역에 대해서 살펴보자. 기원후 220년 한제국의 멸망 이후 위·오·촉이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도래했고 뒤이어 (서)위와 (서)진의 짧은 통일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곧 흉노·갈호·선비·저·강 등 소위 ‘다섯 오랑캐(五胡)’ 민족이 잇따라 화북을 정복하고 여러 왕조를 건설하는 ‘오호십육국’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제까지 이에 대한 서술은 ‘역사가 없는 민족’들이 갑자기 중국사의 무대에 나타나 야만적인 약탈과 파괴를 자행한 것처럼 묘사되어 왔다. 그런가 하면 위트 포겔과 같은 학자는 이들에게 ‘정복왕조(Conquest Dynasties)’의 특수한 형태로서 ‘침투왕조(Infiltration Dynasties)’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기도 했다. 그 까닭은 몽골이나 만주처럼 일거에 장성을 돌파하고 중국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조금씩 천천히 마치 물이 삼투되듯이 중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한편 화남지방에는 한족의 망명정권이 고도의 문화수준을 유지하면서 흥망을 거듭했고, 그러는 사이 화북지역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북)위왕조가 통일을 이룩하고 마침내 중국문명의 세례를 받고 ‘한화(漢化)’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다. 이어 그 계승국가들에 의한 통치가 계속되다가 589년 마침내 수나라에 의해 남북을 아우르는 통일제국이 회복되었고, 당제국에 의해 계승되면서 중화왕조는 화려한 부흥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 내몽골 후호호트에서 출토된 북위 시대의 무사 토용(흙으로 빚어 만든 인형).

그러나 장성 이남의 이같은 역사적 전개는 중국사의 맥락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중국사상 위진남북조라는 분열·혼란기는 그에 선행했던 시대에 동부 유라시아 국제질서의 기본적 틀이었던 한·흉노 남북대립의 양극체제의 붕괴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리장성 이남의 농경지대 중국에서 일어났던 혼란과 유사한 현상이 흉노제국 붕괴 이후 북방 초원지대에서도 관찰되는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바로 이러한 혼란의 파장이 확대되면서 중국사상 ‘오호십육국 시대’가 출현한 것이다. 그 과정을 간단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후 1세기 중반 흉노가 분열되면서 일부가 고비사막을 건너서 남하했고 한제국의 영내에 거주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북방민족 남하의 시발이 되었다. 한편 초원에 잔류했던 또 다른 흉노(북흉노)가 91년경 멀리 중앙아시아 초원으로 떠나버리자, 그 자리를 채우고 들어온 것은 동쪽의 선비족이었다. 장성 이북의 새로운 패자가 된 선비족은 잔류한 흉노인을 흡수하며 중국에 대한 대대적인 약탈전을 시작하였다. 2세기 전반이 되면 약탈의 무대는 요동·요서 지역은 물론이지만 서쪽의 대군·오원·삭방 등 산서성 북부도 포함되어 중국 북부 거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이 약탈전은 씨족·부족을 기본 단위로 하여 각 집단의 군장의 지휘하에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연합적으로 진행되었다. 한문자료에는 그들이 ‘대인(大人)’으로 기록되었으나 물론 선비족 고유의 명칭을 의역한 것이다. 2세기 초에는 ‘선비의 읍락 120부(部)’가 각자 중국 측과 외교관계를 맺는 등 각개약진의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2세기 중반 단석괴(檀石槐)라는 인물의 출현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그는 약탈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분산된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동부·중부·서부의 삼부체제로 재편하였다. 이것은 유목군대의 전형적 편제방식인 좌익·중군·우익에 준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므로, 말하자면 선비족은 단석괴의 지도 아래 대규모 군사동맹체를 결성하게 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사망한 뒤 혼란에 빠진 선비는 가비능(軻比能)이라는 인물에 의해 일시 세력을 회복하지만 235년 그가 암살당하자 선비연합체는 각 지역으로 분산·할거하면서 대대적인 이동의 물결이 일어났고 일부는 남하하여 북중국으로 들어갔다. 3세기 말이 되면 화북 지역에 거주하는 호족(胡族)의 숫자가 600만~700만명에 이르게 되는데, 당시 한족이 1000만명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유목민이 남하했는지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민족대이동의 물결 속에 일부 유목민은 북중국이 아니라 한반도로 내려와 신라지방에 자리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이유는 4~5세기가 되면 신라에서 갑자기 대형 적석목관분이 조영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중앙유라시아의 문화적 기류를 느끼게 하는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다양한 마구, 커다란 솥인 동복(), 동물양식의 버클, 아키나케스식 단검, 금관, 유리제품 등이 그러하다. 또한 이 시기에 신라의 임금은 마립간(麻立干)이라는 새로운 칭호로 불렸는데 ‘간’은 유목국가의 군주인 ‘칸(khan)’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칸’이라는 칭호는 바로 그 즈음에 선비 계통의 유목민에 의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의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와 같은 학자는 유목민의 일부가 한반도를 경유하여 일본으로 들어와 4세기 말경에는 최초의 통일국가인 야마토(大和)정권을 세웠다는 소위 ‘기마민족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유라시아 대륙의 서부에서 훈족의 출현으로 민족대이동이 일어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대륙의 동부에서도 그에 못지않게 거대한 규모의 민족이동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평행현상은 대륙의 동서 양단에서뿐만 아니라 장성의 남과 북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즉 양측 모두 한과 흉노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극도의 혼란에서 단계적으로 통일의 국면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밟아 나갔다. 북방에서 선비족의 부족별 난립이 단석괴·가비능에 의해 정리되었듯이, 남방에서도 오호십육국의 초기 혼란기가 티베트 계통의 전진(前秦)에 의해 정리되었다. 뒤이어 북방에서는 선비족의 뒤를 이어 4세기 후반 유연(柔然)이라는 새로운 민족이 초원의 패권을 장악하고 강력한 유목국가를 건설하게 되는데, 거의 같은 시기에 남방에서도 선비족 계통의 탁발(拓拔)부족이 남하하여 북위정권을 세우면서 화북을 통일하고 안정된 국가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이 두 국가는 오랫동안 군사적으로 대치하면서 전쟁을 계속했는데, 몇 년 전 애니매이션 영화로도 소개되었던 ‘뮬란’의 주인공 ‘목란(木蘭)’은 바로 유연과 전쟁에 투입된 탁발족 여인이었다.


▲ 내몽골에서 출토된 말머리와 소머리에 사슴뿔을 접합시킨 선비족의 금관.

그러다가 마침내 중국에서는 589년 수나라가 3세기 반 만에 통일제국 건설에 성공했는데, 북방에서도 552년 돌궐제국의 등장으로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부터 동쪽으로 흥안령 산맥에 이르는 중앙유라시아의 통일 유목국가가 탄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제국의 붕괴 이후 수당제국의 출현이 있기까지 중국이 새로운 통일제국의 모델을 모색했듯이, 중앙유라시아 역시 흉노제국의 붕괴 이후 선비와 유연의 시대를 거치면서 새로운 유목제국의 모델을 탐색했던 것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로운 것은 양측이 찾은 해답 내용의 유사성이다.
수당제국은 오랫동안의 호한융합(胡漢融合)의 결과 탄생했기 때문에 과거 한제국에 비해 서방세계에 훨씬 더 개방적이었으며, 알타이 지방에서 기원한 돌궐인의 제국 역시 과거 흉노에 비해 서방 진출과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과 흉노의 붕괴와 함께 종말을 고한 유라시아 동부지역의 고대는 오랜 혼란기 동안 거듭된 모색을 통해서 결국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 간 교류와 통합에 적극적인 새로운 제국 체제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던 것이다. 그 결과 7세기부터 9세기까지 약 300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계 제국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칼리프제국, 그리고 서구의 비잔틴·프랑크 제국 등과 함께 새로운 국제질서를 형성하며 번영을 구가하게 된다.

정복왕조론

구미나 일본에서 ‘남북의 대립’이라는 측면으로 중국사를 파악하는 가장 대표적인 이론의 틀이다. 이것은 필자가 보기에 다시 구판 정복왕조론과 신판 정복왕조론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사실상 북방민족이 약탈에서 정복과 지배로 발전하다가 결국 중국에 동화되는 과정을 겪는다는 ‘한족중심 동화론’과 거의 다를 것이 없다. 반면 후자는 미국의 신마르크스주의자 칼 비트포겔(Karl Wittfogel, 1896~1988)이 주창한 것인데, 두 개의 상이한 문화가 만나서 서로 변하면서 제3의 새로운 문화가 만들어진다는 소위 인류학의 ‘문화접변론’을 원용하여 정복왕조가 일방적으로 한화(漢化·Sinicization)된 것은 아니었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이 역시 ‘정복왕조론’의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북방민족이 건설한 국가의 역사를 논의할 때 ‘정복’을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의 독자적 역사세계를 잃어버리고 곧바로 중국사의 영역으로 끌려들어와 버린다. 왜냐하면 ‘정복왕조론’은 항상 정복하러 ‘오는’ 것을 말하지 정복하러 ‘가는’ 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중국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다.

 

(8) 실크로드 상권 장악한 소그드인 중국정치·문화까지 주물러

당나라 때 수도 장안의 평강방(平康坊)이라는 곳에 보리사(菩提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 옆에 현종 때 재상이었던 이임보(李林甫)의 사저가 있었는데, 생일이 되면 그는 보리사의 스님을 초청하여 찬불을 올리게 했다. 한 해는 사례로 말안장 하나를 받은 스님이 시장에 내다 팔아 7만전을 받은 일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보리사 스님들 사이에 이임보의 커다란 씀씀이는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다들 그의 생일에 혹시 초대받지 않을까 은근한 기대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한 스님이 과연 초대를 받게 되었고 열심히 찬불을 올리면서 주인의 공덕을 치켜세웠다. 그런데 막상 돌아갈 때 그가 받은 것은 불과 몇 ㎝ 안 되는 썩은 못 같은 것이었다. 크게 실망한 그는 장안 서쪽에 있는 서시(西市)로 나가 ‘상호(商胡)’, 즉 소그드 출신의 상인이 경영하는 가게를 찾아가 보여주었다. 그 가게 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스님께서는 이런 것을 어떻게 손에 넣으셨습니까? 이것을 팔 때는 값을 잘못 매기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래서 스님은 시험삼아 100민(緡·1민은 1000전)을 불렀더니 주인이 껄껄 웃으며 “그렇게 할까요?”라고 되물었다. 그래서 스님은 한껏 더 많이 부를 생각으로 500민이라고 했더니, 주인은 “이것은 천만(千萬)의 가치가 있습니다”라고 하면서 거액을 내놓았다. 그래서 그것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비싸냐고 물었더니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것이 바로 보골(寶骨)입니다”였다.


이 이야기는 단성식(段成式·803~863)이 편찬한 ‘유양잡조(酉陽雜俎)’라는 글에 나오는 것으로, 일본의 학자 이시다 미키노스케의 명저 ‘장안의 봄’에 소개되어 유명해졌다. 물론 이것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설화로 꾸며낸 이야기이긴 하지만 당시의 역사적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우선 ‘보골’이라는 것은 부처님의 사리를 가리키며 당시에는 ‘불골(佛骨)’이라고도 불렀으니, 사리라고 하면 진위를 가릴 여유도 없이 수만금을 주고 사려고 하는 불교 숭배의 풍조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헌종(재위 806~820)은 사리를 궁정 안에 안치하려고 했는데, 한유(韓愈)가 ‘논불골표(論佛骨表)’라는 글을 올려 이를 비판했다가 목숨을 잃을 뻔한 사건도 있었다.



오아시스 정착민 출신으로
동서 오가며 비단으로 막대한 부


그런데 위의 이야기가 반영하고 있는 또 다른 역사적 사실은 ‘상호’ 혹은 ‘호상(胡商)’이라고 불리는 상인이 갖고 있던 엄청난 재력인데, ‘보골’ 한 조각에 상상을 초월하는 현금을 쾌척할 정도의 재력을 갖고 서시를 좌지우지했던 이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물론 한나라 때와 같은 시대에는 ‘호’라고 하면 흉노인과 같은 북방의 유목민을 지칭했지만, 수·당대에 오게 되면 이 말은 거의 전적으로 중앙아시아의 소그드(Soghd)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따라서 ‘호상’은 곧 소그드인으로서 중국에 와서 교역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었던 것이다.


▲ 낙타 위의 소그드인 주막대
아주 오래전부터 ‘소그드’란 명칭은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을 가리켰다. 이미 다리우스 대제 때에 새겨진 비스툰 비문(기원전 519년)에도 언급되었다. 이들은 파미르 산맥 서쪽의 건조지대, 즉 북쪽의 시르다리아 강과 남쪽의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점재하는 오아시스 도시들에 살던 정착민으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수공업과 상업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멀리 중국이나 인도 혹은 서아시아 각지로 나가서 국제무역에도 종사하였다.


‘호상’이라 불리며 중국서 맹활약
장안에만 4000여명 거주

‘호상’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람이 중국 측 자료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후한대 즉 1세기 이후의 일이었고, 중국 측 문헌에는 “장사하러 오는 호상들이 매일 변경에 온다”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소그드인은 쿠샨왕조의 지배를 받으며 중앙아시아~인도~중국을 연결하는 교역로를 장악했던 인도나 박트리아 출신 상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 활동의 정도는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4세기에 들어오면서 북방에서 히온(Chion)이라든가 헤프탈(Hephtal)과 같은 유목민이 대거 남하하고 약탈하면서 오늘날 아프간과 인도 서북부 지방이 황폐해졌고 종래 인도와 연결되는 교역망이 파괴되고 말았다. 이 혼란으로 초래된 공백을 메우고 국제무역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소그드 상인이었다.
 
장사라고 하면 다른 민족에게 뒤지지 않는 중국인의 눈에도 이 소그드인의 상재(商才)는 거의 천부적일 정도로 비쳤던 모양이다. ‘신당서(新唐書)’라는 역사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보인다. “아이가 태어나면 사탕을 물리고 손에는 아교를 잡게 하는데, 이유인즉 그가 커서 달콤한 말을 하고 돈을 손에 쥐면 딱 달라붙게 되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글 쓰는 법을 익히고 장사에 능하며 이익을 탐한다. 남자 나이 스물이 되면 이웃나라로 가는데, 이익이 있는 곳이라면 아니 가는 곳이 없다.”
▲ 소그드인의 교역 네트워크와 거류지 분포
 당시 중국에는 많은 수의 소그드 상인이 활약하고 있었는데 그 수를 정확히 말해주는 자료는 없다. 그러나 8세기 중반 장안에 40년 이상 거주하며 처자식을 두고 전택과 가옥을 소유한 ‘호객(胡客)’의 수가 4000명 정도였다는 한 기록만을 보아도 대충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국제교역에 종사하는 이들은 중국의 비단을 대대적으로 구입하여 육상 실크로드를 통해서 페르시아와 비잔티움 방면에서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막대한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따라서 국제적인 교역망을 유지·운영하기 위해서 이들은 고향이 있는 실크로드 교역로 중간 곳곳에, 그리고 중국 내 여러 도시들에 집단거류지를 형성하였다.
 중국에 오래 거주한 사람은 중국식 성(姓)을 채택하였는데, 그때 출신도시의 이름을 따서 성을 지었다. 예를 들어 사마르칸드 출신은 ‘칸’이라는 발음을 반영한 ‘강(康)’씨를, 타슈켄트 출신은 ‘타슈’가 현지어로 ‘돌’을 뜻하기 때문에 ‘석(石)’씨를 택했다. 이렇게 해서 각각 다른 성을 갖고 교역에 종사하던 소그드인을 ‘아홉 가지 성을 가진 소그드인’이라는 뜻으로 ‘구성호(九姓胡)’ 혹은 ‘소무구성(昭武九姓)’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중앙유라시아 거의 전역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교역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자세한 실태를 알기는 쉽지 않으나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07년 스타인(A. Stein)이라는 학자가 돈황 부근의 봉수대 유적지에서 발견한 고대의 편지들을 통해서 어렴풋이 그 윤곽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들은 중국 영내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이 고향인 사마르칸드로 보낸 것인데, 변경의 관문인 돈황에서 압수당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아무튼 학계에 ‘고대의 소그드 서한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것은 모두 8통인데 어떤 것은 훼손이 심한 단편이지만 일부는 아주 잘 보존되어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 [좌] 돈황에서 발견된 소그드인 편지. [우] 사군묘에서 발견된 연회장면 석상.

예를 들어 제2서한이 그러한데, 중국 무역의 현지 총책인 나나이 반닥(Nanai Vandak)이라는 사람이 사마르칸드 본국에 있는 고용주에게 중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브리핑하고 각 도시에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는 주재원의 활동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편지에는 낙양에 커다란 기근과 화재가 발생하여 황제가 도주했고 ‘훈족’의 공격을 받은 소식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4세기 초두 서진(西晋)왕조가 흉노의 공격으로 멸망하게 된 사건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편지가 씌어진 시기도 저절로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나나이 반닥은 이 편지에는 자기가 중국산 순품 사향(麝香) 800g을 사서 보내니까, 이것을 팔아서 생겨나는 이윤의 일부는 자신이 사마르칸드에 남겨두고 온 아들의 교육비로 써달라는 당부를 적고 있다. 그런데 이 사향을 그 당시의 가치로 환산하면 대략 은 27㎏과 같으니, 그때 금과 은의 비가(比價)를 1 대 20으로 계산하면 금 1.35㎏에 해당하고 오늘날 우리 돈으로 하면 약 2600만원이 되는 셈이다. 당시 이들의 교역규모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중국에 거주하는 소그드인의 대부분은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위에서 말한 서한 가운데에는 돈황에 살던 한 여인이 고향 사마르칸드에 사는 어머니와 남편에게 자신의 힘든 처지를 호소하는 것도 있다. 그러나 역시 캐러밴 무역과 연관된 일을 하는 사람이 다수를 점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남북조 시대 말기인 북제(北齊) 때부터 이들 중국 체류 소그드인을 관리하는 책임자로 임명한 ‘살보(薩寶)’라는 관직의 명칭에서도 확인된다. 이 말은 원래 ‘캐러밴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사르타바하(sarthavaha)’를 음역한 것으로서, 수도에는 2명이 두어지고 각 지방에는 주(州)마다 1명씩 배치되어, 구역 내의 중앙아시아·서아시아 출신 상인을 관할케 했다. 당나라 때 설치된 살보부(薩寶府)의 책임자는 정5품의 관리였다.

최근 중국의 서안에서는 소그드인이 바로 이 살보에 임명되었으며 그러한 상층인사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나왔다. 아파트 건설붐의 영향으로 도시 여러 곳이 파헤쳐지고 개발되는 와중에 소그드인의 묘지가 발견되었는데, 학계에는 묘주의 이름을 따서 안가묘(安伽墓), 사군묘(史君墓) 등으로 알려졌다. 물론 ‘안’과 ‘사’라는 성으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이 중앙아시아의 부하라와 키쉬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안록산의 난’등 정치·군사 개입

더 흥미로운 것은 거기서 출토된 석곽(石槨)과 석상(石床)에 새겨진 조각이다. 거기에는 그들의 일상생활은 물론 연회를 벌이고 수렵을 하는 장면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이들 소그드인과 북방 돌궐인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강조되고 있다. 이 두 집단 사이의 관계는 당나라 현종 때인 755년 반란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이 가서한(哥舒翰)이라는 장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회유한 말을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나의 부친은 소그드인이고 모친은 돌궐인이다. 그대의 부친은 돌궐인이고 모친은 소그드인이다. 그대와 나는 같은 종족이니 어찌 서로 친해지지 않겠는가?” 서안의 소그드인 묘지 출토자료는 이처럼 두 종족의 통혼이 두 사람에게만 국한된 특수한 경우는 아니었음을 잘 보여준다. 돌궐이 몽골리아 초원에서 힘을 잃자 소그드인은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위구르인과 연합하였다.

그렇다면 소그드인과 돌궐·위구르의 연합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그것은 곧 소그드의 경제력과 유목민 군사력의 결합, 그리고 거기서 생겨나는 막강한 영향력이었다. 예를 들어 안록산은 3개의 절도사직을 겸임하여 북방 변경의 군권을 장악했고 이를 기초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반란으로 당제국은 몰락의 문턱까지 내몰렸다. 그러나 소그드인의 영향력이 정치·군사 방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교역활동으로 인한 경제력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지만,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비롯한 중국 측 문헌에 기록되어 있듯이 “시장의 큰 이익이 모두 그들에게 돌아갔다”라든가 “소그드인과 위구르인은 모두 공사(公私)의 큰 우환이 되고 있다”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소그드 문화까지 상품화
중국 상류층에 ‘호풍’ 유행시켜

이처럼 소그드인이 중국을 정치·경제적으로 잠식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고급 소비자층은 소그드인이 수입해 들어온 이국적인 물품과 문화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고, 그런 것을 즐기고 모방하는 ‘호풍(胡風)’이 크게 유행했던 것이다. 골동품 애호가에게 잘 알려진 당삼채(唐三彩) 가운데에는 소그드 상인이 낙타에 비단을 싣고 장사하러 떠나는 모습, 소그드 출신 주악대가 낙타 위에 앉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장면 등도 있지만, 중국인이 ‘호복(胡服)’과 ‘호모(胡帽)’를 착용한 모습도 있다. 또한 중앙아시아 출신의 무희들이 추던 ‘호선무(胡旋舞)’는 백거이(白居易)와 같은 시인의 찬탄을 불러일으켰다. 포도주 역시 당시 최고의 인기상품 중 하나였다. 시인 이백(李白)은 자신이 중앙아시아에서 출생하여 그 쪽 문화에 관심도 있었겠지만, 워낙 포도주를 좋아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기기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봄바람에 꽃잎이 떨어질 때면, 말채찍을 휘두르며 곧장 호희(胡姬·소그드 여인)에게로 가서 술 한 잔을 마시노라! 장안의 청기문에 가면 호희가 흰 손을 내밀어 부르면서, 손님을 청하여 금술잔에 취하게 하는구나!” 이처럼 소그드인은 여러 지역의 특산품을 중개하고 판매하여 막대한 돈을 벌었지만, 그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자신의 문화까지도 상품화하여 중국을 매료시켰던 천재적인 장사꾼이었던 것이다.

백거이의 시 ‘호선녀’
호선녀야, 호선녀야.
마음은 비파에 맞추고, 손은 장구에 맞추니,
비파소리 북소리 하나에 두 손이 올라가고,
마치 빙빙 돌며 날리는 눈발처럼 빙글거리며 돌아가는 춤이여!
왼쪽으로 돌고 오른쪽으로 돌아도 지칠 줄을 모르니,
천 번 만 번 돌아도 그칠 때가 없도다.
 
(9] 파미르 원정대를 이끈 고선지와 그의 시대
고구려 후예인 唐 맹장 고선지
파미르 넘어 타슈켄트까지 정복
중앙아시아 패권 놓고 압바스 왕조와 탈라스 전투
제지기술자 포로로 끌려가 이슬람권에 첫 제지술 전파
패전 후 황제 호위대장군에 임명 ‘안록산의 난’ 진압 지휘
부관 거짓밀고로 전장에서 참형, 비운의 영웅으로 남아

 

▲ 고선지 장군의 활동 무대였던 파미르 산중의 와한 계곡.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접경하는 곳에는 탈라스(Talas)라는 이름의 그리 크지 않은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지금부터 1250년 전 여기서 거의 10만명의 중국군과 아랍군이 격전을 벌여 중국군이 참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이 역사상 유명한 ‘탈라스의 전투’(751)이다. 그때 중국군을 지휘했던 사람이 고구려 유민의 후손이었던 고선지 장군이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중국과 이슬람이라는 두 개의 문명권이 충돌한 것이고, 오늘날까지 이 지역 주민의 대다수가 이슬람을 신봉하고 있는 것도 이 전투의 결과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탈라스전투는 세계사의 전개에서 이처럼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의미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승리를 거둔 아랍 측에서는 이 전투에 대해 거의 아무런 언급도 없을 뿐만 아니라, 수만 명이 몰살당한 중국 측에서도 아주 단편적인 기록만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사건은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별로 하찮은 일 같아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 중요성이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고선지 장군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그가 단지 고구려인의 후예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격돌의 현장에 주역으로 활약했던 그의 생애와 활동이 곧 당시 세계사의 응축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생애에 관한 가장 상세한 기록은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등 중국의 정사(正史) 속에 포함된 열전(列傳)에 보인다. 이에 의하면 처음에 그의 부친 고사계 는 오늘날 감숙(甘肅)지방에 주둔하던 하서군(河西軍)에 배속된 군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공을 세워 사진장교(四鎭將校)로 승진했다. ‘사진’이란 ‘안서사진(安西四鎭)’을 뜻하는 것으로, 현재 신강에 위치한 네 도시, 즉 쿠차(龜玆)·카라샤르(焉耆)·호탄(于)·카슈가르(疏勒)에 배치된 군대를 말한다. 그 사령부 격인 안서도호부는 쿠차에 있었다. 고선지는 서부전선에 장교로 임명된 부친을 따라 처음으로 서역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 고선지 장군의 원정도
 그는 20살쯤 되었을 때 ‘음보(蔭補·아버지가 고관일 경우 자식에게 낮은 관직을 임명하는 제도)’로 유격장군(游擊將軍)에 임명되었는데, “용모가 빼어나고 기사(騎射)에 탁월했으며 용맹”했기 때문에 신속하게 승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도 한계가 있었으니, 아직 최고사령관인 절도사의 눈에 띄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티베트계 출신의 부몽영찰이 절도사로 부임해 오면서 주목을 받아 중책을 맡기 시작했고, 곧 호탄과 카라샤르와 같은 도시를 방위하는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740년경 그는 불과 2000명의 기병을 데리고 천산산맥 서부에 있던 달해(達奚)라는 부족을 정복한 공을 인정 받아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에 임명되고 곧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가 되었으니, 사실상 절도사 다음의 부사령관이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명성을 내외에 드높인 것은 747년의 파미르 대원정이었다. 오늘날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이 접경하는 파미르고원의 해발 4000~5000m 고지를 넘나들면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그는 마침내 공로를 인정받아 서부방위 최고사령관인 안서절도사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당제국이 고선지가 이끄는 원정대를 이처럼 고산지대로 보낸 까닭은 티베트 지방에서 흥기하여 당의 서부 변경을 압박하면서 중앙아시아 각지로 세력을 뻗침으로써 안서도호부의 목을 죄고 있던 토번(吐蕃)이라는 강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파미르 산중에는 20여개의 군소국가가 산재해 있었는데, 이들이 토번의 압력을 받아 당과 관계를 단절하자 당의 서역경영은 심각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行營節度使)로 임명하고 1만여명의 기병을 주어 토벌을 명령하였다. 현존하는 기록을 통해서 원정과정을 재구성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사령부가 있던 안서(쿠차)를 출발하여 소륵(疏勒·카슈가르)을 거쳐 파미르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총령수착(蔥嶺守捉·타쉬쿠르간)을 지났다. 거기서 20일을 진군하여 파미르강에 이르렀고, 20일을 더 행군하여 오식닉(五識匿·시그난)이라는 곳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호밀(護密·와한) 계곡을 거쳐 연운보(連運堡)를 공략했는데, 이곳은 지형이 험난하고 1만명에 가까운 토번의 병력이 수비하고 있는 데다가 요새 아래로 흐르는 파륵천(婆勒川)의 강물까지 불어서 도저히 접근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에 고선지는 희생물을 잡아서 강에 제사를 올리고 병사에게는 3일치 식량만 챙기게 한 뒤 도하를 지시했다. 장병들은 모두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강을 건너고 보니 “사람이 든 깃발도, 말의 안장도 젖지 않은 채” 온전하게 맞은편에 도착했던 것이다. 고선지는 “하늘이 이 반도의 무리를 우리 손에 넘겨준 것”이라고 선포하며 산을 올라 공격을 개시했고, 마침내 5000명을 죽이고 1000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고선지는 여기서 더 전진하여 토번의 영향 아래 있던 소발율(小勃律·길기트)에 대한 원정을 강행했다. 그러나 부장이었던 변령성(邊令誠)을 위시하여 더 이상의 행군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고선지는 변령성에게 3000명의 병사와 함께 연운보를 지키라고 남겨놓은 뒤,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탄구령(坦駒嶺·다르코트)이라는 곳에 도달했다. 4575m 고도를 자랑하는 이 고개에 올라선 병사들의 눈 밑으로는 깎아지른 절벽처럼 가파른 하행길이 40리나 뻗쳐있었고, 가슴이 내려앉은 병사들은 하산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 투르판에서 출토된 신강위구르박물관의 8세기 당대(唐代) 기마인물용.

그러나 그 고개를 내려가지 않고는 아노월(阿弩越·야신)과 소발율에 도달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고선지는 기지를 발휘하여 20여명의 기병을 몰래 미리 아노월 쪽으로 보내놓고, 거기서 적군인 것처럼 변장해 당나라 군대를 환영하러 오도록 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군사의 사기를 회복시킨 뒤 아노월 성채로 들어가 토번을 추종하던 수령들을 참수하는 데 성공했다. 마침내 747년 음력 8월 고선지는 소발율의 왕과 시집온 토번의 공주를 포로로 잡아 귀환길에 올랐던 것이다.

그는 귀환하는 도중에 부하에게 시켜서 승리를 알리는 고첩서(告捷書·보고서)를 써서 직접 황제에게 보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그의 상관 부몽영찰은 극도로 분노했고, 귀환한 고선지를 면전에 두고 “개의 창자를 먹는 고려노(高麗奴)야! 개의 똥을 먹는 고려노야!”라는 욕을 퍼부으면서, 이제까지 뒤를 돌보아주던 은덕을 모르고 자신을 무시한 채 황제에게 직접 보고서를 올린 그의 방자함을 질책하였다.

이로부터 몇 달이 채 지나지도 않아 조정에서 부몽영찰을 해임시키고 고선지를 신임 절도사로 임명하는 명령서가 도착하였다. 이렇게 되자 부몽영찰은 물론 그에게 고선지를 참소했던 사람까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자기의 옛 상관을 전처럼 공손하게 대했고, 참소했던 부하들에게는 “자네들 얼굴은 사나이 같은데 마음은 여자 같으니 어째서 그러냐?”고 꾸짖고는 지난 일을 잊어버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호방한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파미르원정과 고첩서사건은 고구려 출신으로서 갖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성공하고자 하는 강렬한 의지와, 그러면서도 하루빨리 공명을 얻고자 하는 조급성도 동시에 갖고 있는 젊고 패기 있는 장군 고선지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750년 그는 파미르고원 서쪽에 있는 사마르칸트와 타슈켄트에 대한 원정을 감행했다. 이번 원정의 배경에는 토번이 아니라 아랍의 진출이 있었다. 과거 이슬람 군대가 중앙아시아로 들어와 그곳 여러 도시에 압박을 가했을 때, 궁지에 몰린 왕들이 당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황제는 이를 무시했고 결국 이들은 당과 관계를 단절하고 아랍 측에 복속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파미르원정으로 토번의 세력을 꺾은 당제국은 이들을 다시 영향권 아래에 두기를 원했고 그래서 원정이 시작된 것이다.

궁지에 몰린 타슈켄트는 전투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성문을 열었다. 그러나 고선지는 국왕을 포로로 잡아 장안으로 압송시켰고 국왕은 거기서 살해되고 말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슬슬(瑟瑟·lapis lazuli·청금석)이라는 보석 10여가마, 낙타 5~6마리에 가득 실린 황금과 명마들을 전리품으로 가져갔다. 중국 측 기록에서조차 “성품이 탐욕스러웠다(性貪)”고 평가할 정도였으니, 현지 주민의 반발과 분노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타슈켄트는 다른 도시들과 연락하여 아랍 측에 지원을 요청하고, 함께 연합군을 편성하여 안서사진을 공격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제 막 건설된 압바스 왕조는 이에 호응하여 지야드 이븐 살리흐(Ziyad ibn Salih)라는 장군에게 3만명의 군대를 주어 현지에 투입했고, 이 소식을 들은 고선지는 휘하의 군사와 천산 방면에 거주하던 카를룩(Qarluq)이라는 유목부족을 규합하여 모두 7만명의 군대를 편성하여 아랍군을 맞으러 나갔다. 이렇게 해서 751년 음력 7월 탈라스 회전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전투는 아틀라흐(Atlakh)라는 곳에서 벌어졌는데 현재 카자흐스탄 가장 남쪽에 있는 타라즈(Taraz·일명 Aulie-ata, Zambul) 부근이 아니었나 추정된다. 전투는 닷새 동안 벌어졌는데 당군과 연합했던 카를룩이 이반을 하여 당군의 후방을 공격하는 바람에 순식간에 전열이 무너져 버렸다. 대부분의 병사는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고 고선지도 겨우 목숨만 살아 나오는 대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아랍군의 포로가 된 사람들 가운데 제지기술자가 섞여 있었고, 이들에 의해 이슬람권에 처음으로 제지술이 전달되고 그것이 결국 유럽까지 전파되었다는 것은 동서문명의 교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에피소드가 되었다.


▲ 티베트 라싸 조캉 사원의 좌상. 왼쪽부터 네팔공주, 송첸감포, 문성공주.

그가 안서절도사의 직에서 해임된 것은 아마 패전의 책임을 물었기 때문일 텐데, 그 이상의 무거운 처벌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황제의 호위를 책임지는 우우림위(右羽林衛) 대장군에 임명되었고 755년에는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그리고 바로 그 해에 안록산의 난이 터지자 조정은 진압을 위해 11만명의 ‘천무군(天武軍)’을 편성하여 고선지에게 지휘를 맡겼던 것이다.

그러나 이 군대는 파미르를 넘나들던 안서도호부의 정예군과는 달랐다. 섬주(陝州)에서 벌어진 반란군과의 일전에서 패하자 고선지는 수도 장안의 방어를 위해 동관(潼關)이라는 요충지를 지키기 위해 퇴각을 결정했다. 아울러 나라의 창고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그곳에 쌓아둔 돈과 비단을 병사에게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최후를 불러온 빌미가 되고 말았다. 과거 파미르에서도 같이 싸운 적이 있던 변령성이 그를 조정에 고발했고 현종은 당사자의 말을 들어보지도 않은 채 참형을 명령했기 때문이다. 고선지는 퇴각의 죄는 인정할 수 있지만 국고를 사사로이 취했다는 것은 억울하다고 항변했고,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의 주장에 호응하는 가운데 마침내 755년 음력 12월 참수되고 말았다.

이처럼 고선지의 생애는 아이러니컬하면서 동시에 드라마틱한 요소들을 갖고 있다. 즉 망국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던 한 고구려 유민의 후예가 당제국의 서부방위 사령관으로까지 승진했다는 점,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국이 반란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진압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가 모함에 걸려 처형되었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중앙유라시아의 패권을 두고 제국들이 쟁패하던 역사적 현장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우리는 그의 생애와 활약상을 통해서 8세기 중반 토번과 아랍의 팽창과 중앙아시아 진출, 이에 대한 당제국의 군사적 대응, 뒤이은 안록산의 반란과 제국의 동요라는 일련의 역사적 흐름을 보다 또렷하게 읽을 수 있는 것이다.  ▒

당제국과 토번제국의 대립

토번이라는 나라는 원래 7세기 전반 송첸감포라는 인물이 세운 나라였는데, 당태종도 그의 군사적 압력에 견디지 못해 641년 문성공주(文成公主)를 보내줄 정도였다. 그러나 양국 사이에 있던 토욕혼(吐谷渾)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다툼이 벌어져, 670년에는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10만명의 당군이 원정을 갔다가 참패하고 토욕혼은 멸망했으며, 그 여파로 당의 안서도호부 사령부가 함락되는 사건도 벌어졌다. 토번은 그 여세를 몰아 676년에는 감숙과 사천으로까지 밀고 들어왔고, 당은 18만 대군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으나 거의 전군이 사망하는 참패를 당했던 것이다. 그 후 토번의 팽창이 소강상태를 맞긴 했으나 중국의 서부 변경과 중앙아시아를 둘러싼 토번과 당 사이의 줄다리기는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747년 고선지의 원정도 이 두 제국 사이의 오랜 기간에 걸친 대립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10) 이슬람 세력의 동진과 중앙아시아의 운명
8세기 중앙아시아, 아랍과 첨예대치
100년 ‘피의 역사’끝에 이슬람에 굴복
베두인 유목민 통합한 아랍군, 페르시아 점령하고 동방경략부 설치
소그드 지방 평정하며 북상… 모스크 짓고 우상숭배 배척
아랍, 튀르기스 이어 신흥강국 토번, 당과도 패권 다툼
탈라스전투 이후 파미르고원 서쪽 이슬람 급속 확산

 

▲ 무그산성에서 출토된 기마병사상. 방패의 일부분이다.
 

1220년 3월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군대가 당시 중앙아시아 최대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사마르칸트를 포위했다. 도시를 둘러싼 견고한 성벽, 그 주위를 흐르는 강과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 판 못), 그리고 11만명이라는 막대한 수비병력. 그러나 포위가 시작된 지 불과 며칠 만에 도시는 함락되고 말았다. 몽골군은 다른 도시에서 그러했듯이 며칠간 약탈을 자행했고 다시는 저항하지 못하도록 성벽을 파괴했으며, 귀족과 군인 수만 명을 들판으로 끌고 나가 처형했다. 이렇게 해서 2000년 이상 명성을 떨치며 번영을 구가하던 고대도시 사마르칸트는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주민은 폐허로 변해버린 구도시의 남쪽에 새로운 터전을 만들어 살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사마르칸트가 되었다. 주민은 둔덕으로 변해버린 폐허를 ‘아프라시압(Afrasiyab)의 언덕’이라 불렀는데, 아프라시압은 이란 민족의 전설 속에 나오는 투란(Turan)이라는 북방민족 왕의 이름이었다.

아무튼 칭기즈칸에 의해 지상에서 사라지고 나서 600년이 지난 뒤인 1913년 러시아의 한 학자가 아프라시압 언덕을 조사하여 벽화 몇 점을 찾아냈다.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65년부터였다. 이때 비로소 삼중의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의 구조가 드러나고, 도시 중심부에 있던 궁전과 큰 규모의 가옥이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궁전 내부에서는 가로·세로가 각각 11m에 이르는 넓은 홀과 사방 벽면에 그려진 벽화가 발견되었다. 입구에 들어서서 맞은편에 있는 서면에는 왕의 즉위식 장면이 그려져 있었고, 남면에는 시집을 오는 외국의 공주와 그 일행의 모습이, 북면에는 수렵하는 장면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면에는 먼 지역의 생활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즉위식의 주인공은 벽화에 보이는 명문(銘文)을 통해서 바르고만(Vargoman)임이 확인되었다. ‘신당서 서역전’에 의하면 고종 영휘(永徽) 연간, 즉 650~ 655년에 강국(康國)에 강거(康居)도독부를 설치하고 불호만(拂呼 )이라는 인물을 도독으로 임명했다는 글이 보이는데, 이 불호만이 바르고만과 동일인물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궁정의 홀 입구 맞은편, 즉 서쪽면의 벽에 보이는 그림이다. 즉위식을 묘사한 이 장면에는 주변의 도시나 외국에서 축하차 보내온 사신단의 모습이 보이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한반도에서 간 사신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새의 깃털을 꽂은 모자(鳥羽冠)를 쓰고 두 손을 소매에 넣은 공수(拱手)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허리에는 손잡이 끝이 둥근 고리모양을 한 환두대도(環頭大刀)를 차고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한반도에서 간 사람임은 분명하다. 물론 고구려·신라·백제 삼국 가운데 어느 나라에서 갔느냐에 대해서 이견이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고구려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고, 당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구려가 외국의 연맹세력을 구하기 위해 멀리 사마르칸트까지 사신을 파견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아무튼 한반도의 사신과 관련된 다른 문헌자료가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의 지도층이 수천㎞ 떨어진 곳에 있는 사마르칸트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물론 당시 소그드 상인이 중앙유라시아 각지를 무대로 교역활동을 하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프라시압, 판지켄트(Panjkent), 바락샤(Varakhsha) 등지에서 발굴된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소그드인이 국제무역으로 축적된 재화로 궁전과 사원을 건설했고, 거리에는 2~3층의 가옥이 즐비할 정도로 고도로 발달된 도시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번영을 구가하던 바로 그때 서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출현했으니 그것이 바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기치로 내세운 아랍인이었다.


 예언자 무하마드에 의해 창시된 계시적 종교 이슬람은 그때까지 부족단위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약탈을 계속하던 아랍의 베두인 유목민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그 통합된 힘을 집결시켜 외부로 폭발시키는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632년 무하마드가 사망하고 나서 불과 2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아랍군은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지방에서 비잔틴 제국의 세력을 밀어냈으며, 동방으로는 중동 최대의 강국인 사산조 페르시아를 압박해 들어갔다. 고향을 떠나 정복전에 참여한 아랍 베두인은 낙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정복한 도시 안에 들어가지 않고 사막의 변두리에 집단캠프를 치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군영(軍營)이 후일 대도시로 발전해 갔으니, 오늘날 이라크의 쿠파(Kufa)나 바스라(Basra), 이집트의 카이로(Cairo)와 같은 곳이 대표적 예다.

 

▲ 판지켄트 벽화의 코끼리를 탄 용사가 맹수와 싸우는 모습.

아랍군에 대항하여 싸우던 사산조의 마지막 왕 야즈디기르드(Yazdigird) 3세는 동쪽으로 도망치다가 마침내 651년에 이란 동북부 후라산 지방의 메르브(Merv)라는 도시에서 암살됐다. 이로써 한때 동로마 황제까지 사로잡는 맹위를 떨쳤던 사산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버렸다. 한편 그를 추격해온 아랍군은 메르브에 동방경략사령부를 세우게 되는데, 오늘날 투르크멘공화국 영내에 있는 이 도시는 바로 중앙아시아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었다. 그곳에서 동북방으로 300㎞ 가면 부하라에 이르고, 부하라에서 동쪽으로 200㎞ 지점에 사마르칸트가 있다.

아랍군의 동방진출은 7세기 후반 내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지지부진한 양상을 보였다. 이따금 아무다리아를 건너서 약탈전을 하고 돌아오는 정도였다. 이슬람 세력이 동방경략에 집중하지 못한 까닭은 칼리프들의 피살, 그로 인한 권력투쟁의 격화, 우마이야 왕조의 성립,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 등 일련의 정치적 혼란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제작된 아프라시압 벽화에 아랍세력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도 아직은 아랍의 진출이 산발적이고 국지적인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8세기에 들어와 아랍의 진출이 본격화되면서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이라크 총독으로 부임한 하자즈(Hajjaj ibn Yusuf)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은 쿠타이바(Qutayba ibn Muslim)는 이란 지방에 주둔하던 아랍과 페르시아인을 규합한 뒤, 705년에는 먼저 힌두쿠시 산맥과 아무다리아 강 사이에 있던 메르브, 발흐(Balkh), 탈리칸(Taliqan) 등의 도시를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이어 706~712년에는 부하라를 비롯하여 소그드 지방의 중진도시들을 차례로 경략하였고, 713~715년에는 거기서 더 북상하여 시르다리아 유역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예전처럼 약탈한 후 돌아가는 일회성 군사작전이 아니라 점령지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현지에서 병력의 징발과 공납을 의무화하는 등 항구적인 지배체제의 구축을 시도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슬람이라는 유일신교를 믿는 그들은 도시 안에 모스크를 짓고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등, 조로아스터교나 마니교를 신봉하던 현지 주민과 종교적 충돌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쿠타이바의 정책은 도시국가의 귀족은 물론이지만 상인계층과 종교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 아프라시압 벽화의 사신도 스케치. 왼쪽 두 사람은 사마르칸트 관리, 그 오른쪽은 통역, 맨 오른쪽 두 사람이 한반도 사신.

 

결국 중앙아시아의 각 도시들은 아랍에 대항하여 자신을 후원해 줄 새로운 세력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마침 중국에서는 현종이 등극(712년)하면서 주변지역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기 시작했고, 718년 부하라의 투그샤다(Tughshada), 사마르칸트의 구락(Ghurak), 쿠메드의 나라야나(Narayana)와 같은 현지의 왕은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서 연명으로 군사적 지원과 보호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이들의 청원내용은 11세기 초에 편찬된 역사서 ‘책부원귀(冊府元龜)’라는 자료에 남아있는데, 이에 대한 현종의 반응은 극히 미온적이었다.

다급해진 이들은 북방의 튀르기시(T?rgish)에게로 눈을 돌렸다. 튀르기시는 천산산맥 방면에서 유목하던 부족인데, 716년 돌궐제국의 카간 묵철(默)이 사망하자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중앙아시아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때마침 지원요청을 받은 튀르기시는 720년 퀼 초르(K?l Chor)라는 장군이 이끄는 소수의 기마군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현지 지배층의 지원을 받으며 남하했고, 아랍군과 가벼운 전투를 벌이기도 했지만 곧 철수하고 말았다. 한편 새로 부임한 이라크 총독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을 표방하며 721년 늦가을 중앙아시아 경략사령관을 알 하라시(al-Harashi)로 교체했고, 알 하라시의 군대는 722년 여름까지 소그드 지방 전역을 평정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중앙아시아 도시와 주민의 상황은 판지켄트라는 도시 근처에 있는 무그 산성에서 발견된 유물에 의해 잘 알려지게 되었다. 판지켄트는 사마르칸트에서 동남쪽으로 60㎞ 쯤 떨어진 곳에 있는데, 무그 산성은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60㎞ 정도 나온다. 1932년 봄 한 목동이 여기서 양을 치다가 우연히 바구니 안에 처음 보는 글자가 적힌 비단조각을 발견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8.5m×19.5m 크기의 장방형 건물이 드러났고 그 안에서 총 80점의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이곳의 고대 주민이 사용하던 소그드문자로 된 것이 대부분(74점)이지만 아랍문자와 고대 투르크문자로 된 것이 각각 1점씩, 그리고 한문으로 된 것도 몇 점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다수의 목제품과 직물을 포함하여 4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소그드인 기마병사의 모습이 그려진 방패는 특히 유명하다. 이것은 지금 모두 러시아의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학자의 연구결과 무그 산성은 아랍군의 중앙아시아 침략과 지배가 강화되던 8세기 초 판지켄트의 군주였던 디바스티치(Divastich)라는 사람이 항전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며, 튀르기시의 퇴각과 아랍군의 재진입으로 말미암아 722년 산성은 함락되고 디바스티치도 포로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 아프라시압 궁전벽화에 보이는 한반도 사신. / 무그산성에서 발견된 소그드 문서.

그러나 이로써 아랍의 지배권이 확고하게 다져진 것은 아니었다. 불만에 가득 찬 현지 지배층은 계속해서 튀르기시와 연락을 취했고, 724년에는 시르다리아 강가의 호젠드(Khojend)에서 양측이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갈증의 날(Day of Thirst)’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아랍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중앙아시아 지배도 흔들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8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의 국제정세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천산 방면에서는 튀르기시 연합체가 붕괴되고 북방 몽골리아 초원에서도 돌궐제국이 급격하게 쇠퇴했으며, 이슬람권에서는 우마이야조 역시 내적인 분열이 심각해지면서 붕괴를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이제까지 중앙아시아를 놓고 대립하던 두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새로운 힘이 개입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토번과 당나라였고 그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고선지 장군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751년 탈라스의 전투는 그에 앞서 100년 동안 계속되던 이슬람세력의 중앙아시아 진출과 점령이 최종적으로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탈라스전투가 끝난 뒤 파미르 고원 서쪽의 중앙아시아는 빠른 속도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 압바스조의 집권적 장악력이 약화되었을 때 부하라를 수도로 한 새로운 지방정권 사만(Saman)왕조(819~999년)가 건립되었고, 그 지배하에서 많은 수의 주민이 자발적으로 이슬람을 받아들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개종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아랍·이라크·이란 못지않은 높은 수준의 문화적 성취를 이룩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권이 자랑하는 기라성 같은 인물이 수도 없이 배출되었다.

예를 들어 가장 신빙성있는 무하마드의 언행록을 편찬한 부하리(Bukhari·810~869년), 수학자 호라즈미(Khorazmi·780~850년),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이븐 시나(Ibn Sina·980~1037년·일명 Avicenna)와 비루니(Biruni·973~1048년) 등은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태어났고, 이란민족 최대의 서사시인 ‘제왕의 서’를 지은 피르도시(Firdawsi·1020년 사망)는 사만조 궁정에서 활동한 시인이었다. 이렇게 볼 때 중앙아시아는 100년간의 치열한 저항 끝에 이슬람의 물결에 무릎을 꿇고 말았지만, 그 후에 한층 더 높은 수준으로 계속된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번영을 보면 그것은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중앙아시아 국왕들이 당 현종에게 올린 상표문(上表文)

부하라(安國)의 왕 투그샤다(篤薩波) “최근 들어 대식(大食·아랍)의 도적들이 매년 침입하여 나라에 평안함이 없어졌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과 같은 은혜와 풍성한 자애를 베풀어 주시어 저희 신(臣)들을 고난에서 구해주옵시오. 또한 튀르기시(突騎施)에 칙령을 내려서 신들을 구하라고 해주십시오.”


쿠메드(俱密國)의 왕 나라얀(那羅延) “지금 대식이 침공하여 토하라(吐火羅), 부하라(安國), 타슈켄트(石國), 페르가나(拔汗那國) 등이 모두 대식에 복속하게 되었습니다. 신(臣)의 나라 안에 있는 창고의 진귀한 보물, 부락의 백성의 물건을 대식인은 모두 세금으로 거두어 갖고 가버렸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하늘과 같은 은혜를 베풀어 대식을 처치해 주셔서 신의 나라에 세금징수를 면케 해 주십시오. 그러면 신들은 대국의 서문(西門)을 오래오래 지키겠사옵니다.”-‘책부원귀’ 권 999

 

(11) 이슬람 세계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투르크 유목민
이슬람 노예로 팔려온 투르크족
이슬람 제국 주인으로 세계사 호령
가즈나 왕국 세우고 세속군주 뜻하는‘술탄’ 칭호 첫 사용
뒤이은 셀주크 부족 바그다드 점령하고 비잔틴까지 휩쓸어
15세기 아나톨리아 투르크족 중심, 오스만 세력 급부상
콘스탄티노플 시작으로 아시아·유럽·아프리카 휩쓴 대제국 세우며 세계사 뒤흔들어

 

▲ ‘제왕의 서’에 나오는 삽화. 바흐람 구르가 용을 사냥하는 장면. 14세기 작품. 이스탄불 톱카프박물관 소장
 과거 중국인의 세계관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화이지분(華夷之分)’이라 할 수 있다. 즉 세계는 문명의 ‘중화’와 야만의 ‘이적’이 거주하는 권역으로 나뉘어 있고, 역사는 이 두 세계가 충돌하고 갈등하면서 종국적으로 중화의 승리가 성취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되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인도 이와 유사한 문명과 야만의 이항대립적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대 중국과 그리스의 세계관에 보이는 ‘야만인’은 분명히 달랐다. 중국의 경우 방위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붙여서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이라 불렀지만 중화의 문명에 대한 심각하고 현실적인 위협은 뭐니뭐니 해도 북방의 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고대 중국인의 이러한 ‘화이지분’과 매우 흡사한 세계관이 바로 이란인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자신의 역사가 ‘이란(Iran)’과 ‘투란(Turan)’의 대결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란이 중화와 같은 문명세계의 표상이라면 투란은 이적(夷狄)과 같은 야만의 유목세계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계관과 역사관이 잘 드러난 ‘제왕(帝王)의 서(書)’라는 책이 있다. 이것은 11세기 초두에 피르다우시(Firdawsi)라는 시인이 이란인 사이에 전설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영웅들의 이야기와 역사상 실제로 출현했던 제왕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운문으로 만든 장편시이며, 지금까지 이란 민족이 자랑하는 민족의 대서사시이기도 하다.

그런데 중국과 이란 두 민족이 이처럼 유사한 세계관을 갖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인이 만리장성 너머에 있던 투르크·몽골계 유목민과 대결해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란인 역시 아무다리아강 너머에 있던 유목민과 힘든 싸움을 계속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의 결과는 전설 속 이야기와는 달리 농경민족인 이란 영웅들의 화려한 승리로 점철된 것은 아니었다. 고대 페르시아의 제왕 캄비세스를 전투에서 패사시킨 마사게태족, 알렉산더와 그 후계자들을 괴롭힌 사카족과 쿠샨족, 사산조(朝)의 후방을 유린한 헤프탈족 등은 중국의 한나라나 당나라와 대결했던 흉노와 돌궐·위구르 못지않게 무서운 상대였다. 11세기 초에 쓰여진 ‘제왕의 서’에서 ‘이란’과 숙명적 대결을 벌이는 ‘투란’, 즉 투르크인은 오랫동안 이란인의 세계를 엄습하던 북방의 유목민족 가운데 가장 최후에 등장한 민족이었다.

투르크인이 이란의 변경지역을 압박하며 남하하기 시작한 것은 9세기 후반부터였는데, 투르크인의 진출은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이슬람 칼리프 정권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것과 시기적으로 맞물려 있었다. 당시 바그다드를 수도로 극도의 번영을 구가하던 압바스조(朝)는 9세기 중반을 정점으로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천일야화(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하는 칼리프의 화려한 궁정은 하룬 알 라시드(786~809년) 시대의 번영을 배경으로 했다고 하는데, 그가 사망한 뒤 제국의 동부와 서부를 나누어 통치하던 두 아들 사이에 벌어진 암투는 칼리프의 위상에 치명적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아랍인의 충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칼리프들은 ‘맘룩(mamluk)’이라 불리는 노예를 모집하여 자신의 친위부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래 이슬람에서는 같은 종교를 가진 신도를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거나 억제했기 때문에, 이슬람권 바깥에서 노예를 들여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 같은 노예의 공급지역으로는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가 있었고 거기서 노예가 유입되었다. 특히 중앙아시아 초원지역에서 유입된 투르크 유목민 출신의 노예는 기마와 궁술에 뛰어나 탁월한 전투능력을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부족의 질서와 규범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에 주군에 대한 충성과 헌신도 널리 인정 받았다.

귀족과 고관의 수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중앙아시아의 부하라 같은 도시에는 상설 노예시장이 열리게 되었다. 또한 붙잡혀온 투르크인을 그냥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치고 예의범절도 익히게 하여 상품가치를 높인 뒤 시장에 내놓았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했지만 그렇다고 노예 신분에서 즉각 해방되지는 못했다. 아무튼 시간이 흐르면서 이슬람권으로 유입된 투르크인의 수는 점점 늘어났고, 특히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에서는 그들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에 이르렀다.

1072년 최초의 투르크어 사전이 바그다드에서 편찬된 데도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다. 현재 신장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인 카쉬가르 출신의 마흐무드(Mahmud Kashghari)는 중앙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투르크 부족민을 방문해서 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방언을 수집하여 ‘투르크어 사전(Divan Lughat at-Turk)’을 편찬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전에 나오는 많은 단어와 속담을 아랍어로 설명하였고 완성한 뒤에 칼리프에게 헌정한 것이다. 이 같은 사전을 편찬한 것은 바그다드의 칼리프 궁정에 점점 더 많은 투르크인이 모여들었기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생긴 이유에서 비롯됐다.

 

▲ 비잔틴을 정복한 오스만제국의 술탄 메흐멧 초상. 14세기 후반 작품. 이스탄불 톱카프박물관 소장

그런데 처음에는 친위병으로 고용되던 투르크인이 칼리프나 왕의 신임을 얻으면서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되고 군대 사령관으로 혹은 지방 총독으로 임명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결국 정치적으로 독립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최초의 예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 동북부를 중심으로 세워진 가즈나왕조(975~1187)였는데, 이 왕조의 건설자인 사복 테긴(Sabok Tegin)은 원래 투르크족 출신의 노예였지만 중앙아시아의 사만왕조 치하에서 총독으로 활약하던 인물이었다.

그의 후계자인 마흐무드는 998년 ‘성전(聖戰·jihad)’을 외치며 인도 서북부의 힌두교도를 공격하여 막대한 약탈물을 확보하였고, 이렇게 해서 축전된 재화는 아프간 남부의 수도 가즈니(Ghazni)를 화려하게 꾸미는 데 사용되었다. 아울러 그는 이슬람권 역사상 처음으로 ‘술탄(sultan)’이라는 명칭을 취하였다. ‘술탄’은 칼리프라는 성속(聖俗)일체의 지도자 동의를 근거로 그를 수호하는 세속군주로 정의될 수 있는데, 술탄제의 등장은 칼리프 권위의 약화와 더불어 일어난 현상이었다. 그 뒤 이슬람권의 많은 군주가 스스로 ‘술탄’을 칭하며 자신들의 지배권을 합리화하려고 한 것은 아주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가즈나조의 등장은 장차 이슬람권 전체를 덮어버릴 투르크인의 출현을 알리는 서막에 불과했다. 아무다리아강 북쪽의 아랄해와 카스피해 부근에서 유목하던 투르크인 가운데, 오구즈 계통의 방언을 사용하던 셀주크(Seljuk)라는 이름의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가즈나조의 북방을 압박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고, 1039년에는 단다나칸(Dandanaqan·현재 투르크메니스탄 남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 정복자 티무르의 모습 (복원상)

셀주크 부족민은 토그릴(Togril)이라는 수령의 지휘 아래 서진을 계속하여, 드디어 1055년에는 시아파의 부이(Buy)왕조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그리고 자신들은 수니파임을 공언하며 칼리프와 이슬람 공동체의 새로운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1087년 칼리프셀주크의 군주인 말릭 샤에게 ‘동방과 서방을 지배하는 술탄’이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이렇게 해서 투르크인은 이슬람권을 수호하는 ‘칼을 든 사람들’이 된 것이며, 그들은 ‘펜을 든 사람들’인 이란인이나 ‘쿠란을 읽는 사람들’인 아랍인과 구별되었다.

셀주크 부족민의 이동은 바그다드의 점령으로 중지되지는 않았다. 보다 풍성한 약탈물을 획득하기 위해 그들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교도의 땅을 찾아 나섰다.

그 결과 비잔틴 측과 충돌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마침내 1071년 현재 터키 동부에 위치한 말라지기르(Malazigird·일명 만지케르트)라는 곳에서 전투가 벌어져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고, 비잔틴은 아나톨리아 고원 거의 전부를 상실하여 에게해 연안의 소규모 왕국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아나톨리아 고원 중앙부까지 진출한 셀주크인은 코냐(Konya)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으니, 이를 가리켜 ‘룸 셀주크(Rum Seljuq)’ 왕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셀주크족의 남하와 함께 열려버린 민족 이동의 문호는 쉽게 닫히지 않았다.
셀주크인이 바그다드를 점령한 뒤에도 중앙아시아의 오구즈계 투르크 유목민은 계속해서 남하하였고, 기마무장집단인 이들의 유입은 셀주크왕조로서도 불안한 요인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조 측에서는 이들로 하여금 제국의 영내를 통과하여 서쪽 변경으로 가서 거기서 비잔틴과의 ‘성전’을 수행하도록 유도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잠재적 위험성을 외부로 발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당시 그들을 ‘성전사(아랍어로는 ghazi)’라고 부른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소아시아 반도 서부와 북부에는 투르크 부족집단을 이끄는 ‘베이(bey)’라고 칭해지던 수령이 다스리는 군소왕국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후일 오스만제국을 건설하게 된 집단도 바로 이 같은 변경의 소왕국에서 시작했다.

▲ 투르크어 사전에 삽입된 세계지도. 위가 동쪽, 아래가 서쪽.

셀주크의 뒤를 이어 이슬람권을 제패한 호레즘 역시 투르크인이 세운 국가였다. 셀주크가 1141년 카트완(Qatwan)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급격하게 쇠퇴하기 시작하자, 셀주크 술탄의 노예였던 아누쉬 테긴(Anush Tegin)이라는 인물이 자기가 속한 호레즘인을 규합하여 아랄해 부근에 왕국을 세웠다. 호레즘은 13세기 초 셀주크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이슬람권 전체를 장악하였으며, 그 군주는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전통적 계승자를 자임하면서 스스로 ‘샤(shah)’라는 칭호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이던 호레즘은 동방에서 출현한 새로운 세력, 즉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의 공격을 받고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호레즘이 무너진 뒤 이슬람권의 상당부분은 몽골제국의 지배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로써 투르크인의 주도권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이슬람권에서는 몽골인이 굴복시키지 못한 두 지역이 있었는데 하나는 인도 북부의 델리를 중심으로 유지되던 정권이고, 또 하나는 이집트의 카이로를 중심으로 세워진 정권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몽골의 기마군단을 막아낸 이 두 세력이 모두 투르크 노예 출신 장군에 의해 건설된 왕조였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맘룩왕조는 명칭 자체가 ‘맘룩’, 즉 노예를 뜻했고 인도 북부의 왕조에 대해서도 영어로는 ‘노예왕조(slave dynasty)’라고 부른다.

뿐만 아니라 14세기 중반 몽골제국이 무너진 뒤 곧바로 서아시아 본토에서도 투르크인의 정치군사적 헤게모니가 회복되었다. 서아시아 전체를 정복하고 중국을 향해 원정을 떠나다가 사망한 티무르는 원래 사마르칸트 부근을 무대로 활동하던 투르크 유목부족의 수령이었다. 티무르가 건설한 제국이 약화될 때 아나톨리아 고원을 중심으로 흥기한 오스만 세력 역시 투르크 부족민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과거 셀주크 시대에 비잔틴 변경 지역에서 ‘성전’을 벌이던 군사집단이 서서히 다른 세력을 병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쌓기 시작했고, 마침내 1453년 오스만제국의 술탄인 메흐멧(Mehmet)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킴으로써 아시아·유럽·아프리카 3대륙에 걸친 대제국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앙유라시아의 투르크 유목민은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생활만 하던 무지한 야만인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오히려 그들은 이슬람 세계의 심장부로 들어가 그 주도권을 장악함으로써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

제왕의 서(Shah-name)

1010년에 피르도시가 35년에 걸쳐 집필하여 완성한 6만행에 가까운 장편 서사시이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내용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전설시대에 관한 이야기로 최초의 ‘인간’인 가유마르스에서부터 시작하여 이란민족의 전설적 영웅들이 등장한다. 특히 투란의 영웅 ‘아프라시압’과 대결하고 그를 꺾는 루스탐(Rustam)이란 영웅의 활약이 강조되어 있다. 후반부는 엄밀하게 역사적 사실과 일치하지는 않지만 이란 역사상 실존했던 왕조의 군주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알렉산더도 ‘시칸다르’라는 이름으로 이란의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제왕의 서’는 이란민족뿐만 아니라 인류가 공유해야 할 문화유산이기 때문에 외국의 중요한 언어로는 모두 번역되어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조만간 많은 사람에게 읽힐 날이 올 것이다.

 

(12) 중화 질서의 붕괴와 다원체제의 동아시아
당 멸망 후 수세 몰린 중국 ‘中華’ 포기
거란·여진 등에 조공 바치며 ‘평화’ 얻어
송나라, 신흥세력 거란과 굴욕적 ‘전연의 맹’ 맺고 형제 인정
거란 멸망시키고 급성장한 여진엔 ‘신하의 예’ 맹세까지
당 이후 오대십국, 요, 송, 금, 고려
각각 ‘中華’ 자처
몽골 등장 이전까지
유라시아 동부, 다원체제로

 

▲ 거란인이 말을 끌고 가는 모습의 벽화. 내몽골 적봉시 출토.
 오늘날 외국인들이 ‘중국’을 칭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단어는 ‘차이나(China)’이다. 물론 이 말이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 이름인 진(秦·Chin)에서 유래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과거에 ‘차이나’만큼이나 널리 사용되었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또 다른 중국 명칭이 있는데, 바로 ‘키타이(Kitai)’가 그것이다.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의 주민들은 아직도 중국을 ‘키타이’라고 부르고 있고, 대만의 항공사 이름인 캐세이퍼시픽(Cathay Pacific)의 Cathay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이 ‘키타이’라는 말은 사실 북방 유목민족의 명칭인 거란(契丹)을 옮긴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거란’이라고 읽고 있지만, 원래 이 민족의 이름은 ‘키탄(Qitan)’ 혹은 ‘키타이(Qitai)’로 발음되었고, 중국사에서는 요(遼)라는 나라를 세운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서 한족(漢族)도 아닌 북방민족 거란이 중국을 부르는 명칭이 된 것일까. 그것은 당제국의 멸망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에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질서가 붕괴된 것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흔히 ‘개원(開元)의 치(治)’라고 회자되는 당나라 현종 대(代)의 영화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잠시 정신이 반짝 맑아지는 것과 같은 현상이었다. 몽골 초원을 질주하던 돌궐 유목민들의 무릎을 꿇게 한 뒤 중앙아시아를 거머쥐고, 나아가 동방의 일대 세력인 고구려까지 넘어뜨려 한반도를 넘보던 당제국의 위용은 태종(626~649년)과 고종(650~683년)의 시대를 뒤로 하면서 서서히 빛을 잃고 있었다. 측천무후는 천하를 호령하던 일대의 여걸이었음이 분명하지만 고비사막 북방에서 재흥하여 맹위를 떨치던 돌궐제국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현종의 긴 치세(712~756년)는 백성들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 주었지만, 후일 중국의 고질적인 문제가 되는 절도사(節度使)라는 군벌집단이 등장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양귀비의 최후를 재촉한 안록산의 반란은 현종대의 태평의 실체가 무엇인지 여지없이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안록산과 사사명이 주도했던 반란(755~763년)은 위구르와 같은 외부 지원군에 의해서 간신히 진압되었지만, 8세기 후반부터 당제국은 태종대의 위용도 현종대의 영화도 상실한 채 일종의 관성의 힘으로 생존을 지속하는 범용한 왕조로 변모하고 말았다. 그 관성의 힘도 875년이 되면서 소금 밀매업자인 황소(黃巢)와 왕선지(王仙芝)의 반란으로 끊어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왕조의 잔명은 904년 마지막 황제가 주전충(朱全忠)에 의해 살해될 때까지 30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중국사에서는 이때부터 960년 조광윤(趙匡胤)이 송(宋)나라를 건국할 때까지 약 반세기를 가리켜 ‘오대십국(五代十國)’이라 부른다. 이것은 화북 지방에 양(梁)·당(唐)·진(晉)·한(漢)·주(周)라는 다섯 개의 왕조가 교대로 흥망하고, 이와 동시에 사천과 남부 지역에 10개의 군소 왕국들이 병립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대단한 혼란기임에는 틀림없지만 한나라가 무너진 뒤 찾아온 남북조 시대에 비하면 분열의 기간은 훨씬 짧았고, 반세기 만에 송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중화의 질서를 되찾은 것처럼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중국 중심의 왕조사관이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다.

황소의 반란군이 낙양과 장안을 함락했을 때 사천으로 ‘몽진(蒙塵)’을 떠난 당나라 황제는 당시 하동(河東)절도사였던 이극용(李克用)이라는 인물에게 진압을 부탁했다. 그는 휘하 군대를 이끌고 883년에는 산서 지방에서 남하하여 장안을 탈환하였다. 그러자 황실은 그를 견제하기 위해 반란군의 항장(降將)인 주전충을 변주(?州), 즉 개봉의 절도사로 임명하였고, 화북의 패권을 두고 두 사람은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주전충과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이극용은 908년 사망할 때 아들 이존욱(李存)에게 ‘세 개의 화살’을 건네주었다고 한다. 하나는 유주(幽州·현재의 베이징)의 절도사인 유인공(劉仁恭), 하나는 거란의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또 하나는 후량의 주전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셋을 반드시 멸하라는 유촉이었다. 이존욱은 부친의 유언대로 유주를 함락하고 후량도 멸하여 923년에는 당나라의 정통을 잇는다는 뜻에서 ‘당(唐)’이라는 왕조를 칭하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북방의 신흥세력인 거란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거란인 도금마스크. 내몽골 출토.
 거란은 원래 요하(遼河)의 상류인 시라무렌(潢河) 유역에서 유목하던 몽골 계통의 부족이다. 630년경 당 태종이 돌궐을 무너뜨린 뒤 거란족을 통제하기 위해 송막도독부(松漠都督府)라는 것을 두었는데 7세기 말 돌궐의 재흥과 함께 정세는 급변하였다. 황실로부터 이씨 성을 사여 받고 송막도독에 임명되었던 이진충(李盡忠)은 스스로 무상가한(無上可汗), 즉 ‘지고한 카간’이라고 칭하며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것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꿈은 200년이 지난 뒤 야율아보기에 의한 거란제국의 출현으로 실현되었다.

학자들의 추정에 의하면 거란족은 말(馬)을 토템으로 하는 씨족과 소(牛)를 토템으로 하는 씨족으로 이루어졌고, 전자는 ‘야율(耶律)’씨로 후자는 ‘소(蕭)’씨로 불렸으며, 상호 혼인으로 결합되었다. 따라서 ‘야율아보기’란 말씨족 출신으로 아보기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을 뜻한다. 후일 지어진 이야기이겠지만 그의 어머니가 태양이 뱃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출생했으며, 9척 장신의 거구에 300근짜리 활을 당기는 괴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여러 차례의 약탈전에서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한 그는 드디어 907년 ‘탱그리 카간(天皇帝)’을 칭하며 제위에 올랐다. 이제까지 카간은 3년을 만기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는 교대제가 시행되어 왔는데 그가 연임을 하자 부족 내부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이를 진압하는 데에 성공한 그는 3회 연임을 한 뒤 마침내 916년 교대제에서 종신제로 이행하는 2차 즉위식을 치른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섰다.

그는 먼저 현재의 베이징지방으로 내려가 이존욱의 군대와 일전을 벌였고 서북방의 초원을 원정하여 몽골계 부족들을 정벌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두려운 상대는 동북의 강국 발해였다. 926년 그는 전군을 이끌고 송화강의 지류인 목단강(牧丹江) 상류에 위치한 발해의 수도 홀한성(忽汗城)으로 향했다. 그러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발해는 제대로 된 결전도 치르지 못한 채 항복하고 말았다. 아보기의 뒤를 이은 태종 야율요골(耶律堯骨)은 936년 화북으로 내려가 석경당(石敬?)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후당을 무너뜨리고 대신 후진(後晉)을 세우고, 그 대가로 장성 남쪽의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할양받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거란은 내몽골 초원을 근거지로 삼아 북방의 몽골과 만주는 물론, 인구와 물자가 풍부한 화북 지방의 일부까지 석권함으로써 제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지게 된 것이다.


▲ 차를 준비하는 모습의 벽화. 중국 하북성 선화 11세기 묘.

그러나 중국 북부의 상황은 쉽사리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조공을 바칠 것을 거부한 후진은 거란에 의해 멸망했고, 그 뒤를 이어 후한(後漢)과 후주(後周) 역시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송나라였다. 송의 건국자인 조광윤은 원래 후주의 총사령관이었다. 북방에서 거란의 조종을 받은 군대가 침입해 오자,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개봉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진교역(陳橋驛)에 도착했을 때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군대를 돌려 어린 황제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것이다.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아니라 ‘진교 회군’이라 할 만한 사건이다. 태조 조광윤과 후계자인 그의 동생 태종 조광의(趙匡義)는 비록 남부 지방에 산재한 군소왕국들을 병합하여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기는 했지만, 북방의 강호 거란에 대해서만큼은 수세에 몰린 채 어쩔 수 없었다.

1004년 거란의 성종(聖宗)은 대군을 몰아 남하하기 시작했고 송의 진종(眞宗)은 이를 맞아 북상했다. 양측의 군대는 수도 개봉 동북쪽에 있는 전주(州)에서 대치했다. 송으로서는 거란을 상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망은 지극히 암울했다. 그러나 성종은 보급물자의 부족을 우려하여 장기대치국면을 피하기를 원했고, 결국 송 측에서 제시한 화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체결된 것이 역사상 유명한 ‘전연(淵)의 맹’이었다. 그 내용은 양측이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국경은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며, 송은 거란에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량의 세폐(歲幣)를 준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돈으로 평화를 산 셈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전연체제’가 북송이 멸망할 때까지 1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의 조약이 이처럼 오랜 생명력을 갖기도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이 조약에 의해 형성된 국제관계 속에서 거란과 송나라 모두 안정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서하문자로 된 불경.

그러나 이같은 평화와 번영의 이면에 숨어있는 이념적 의미는 매우 중대하다. 전통적으로 중원의 왕조는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천하질서를 표방해 왔다. “제국은 이웃을 모르는 존재”라는 말처럼 황제에게는 동등한 벗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나 이제 거란의 카간은 송의 황제와 동격으로 인정되었음이 만천하에 공포된 것이다. 이로써 더 이상 중화 질서는 존재하지 않게 된 셈이다. 물론 과거에도 중원왕조보다 더 강한 이웃이 있을 때가 있었다. 당 중기의 위구르가 그러했지만, 그래도 당의 황제는 위구르의 카간에게 책봉(冊封)을 내려주면서 중화 질서의 외면적 형식은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전연체제’는 그러한 형식을 허물어 버린 것이다. 송과 거란은 그저 동등한 이웃일 뿐이었고, 이 시대를 다룬 어떤 책의 제목처럼 ‘중국은 동등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China among equals)’에 불과하게 되었다.

전연의 맹이 맺어지던 바로 그 시기에 하서지방, 즉 현재 영하회족(寧夏回族) 자치구에서는 새로운 세력이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티베트 계통에 속하는 탕구트족이었는데, 1032년 이들의 지도자였던 이원호(李元昊)는 중국식 성을 버리고 토착어로 된 새로운 성을 취하고 스스로 천자(天子)를 칭하였다. 또한 그는 송나라에 대해서도 자국을 대하(大夏)라고 부르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고 대등한 관계를 고집하였다. 이원호는 여러 차례 변경을 공격했고 마침내 1044년 막대한 양의 비단과 은을 받기로 하고 그 대신 외교문서에서는 칭제(稱帝)하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이것이 소위 ‘경력(慶曆)의 화의’인데, 이로써 송은 거란에게 무너진 자존심을 조금은 위로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애써 지키려고 했던 자존심은 여진족의 출현과 함께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완안부(完顔部) 출신의 아쿠타(阿骨打)라는 인물에 의해 통합된 여진족은 그때까지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거란 기마군단을 1114년 영강주(寧江州)의 전투에서 초토화시켰다. 아쿠타 자신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1122년 거란제국을 멸망시키고 1127년에는 송의 수도인 개봉까지 함락했다는 사실이다. 불과 10여년 만에 멸시의 대상이던 변경의 부족에서 중원을 호령하는 주인으로 변신한 것이다. 송 황실은 남쪽으로 도망쳐 지금의 항주를 새로운 도읍으로 삼았지만, 여전히 노도처럼 밀려드는 여진족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궁지에 몰린 남송은 1142년 굴욕적인 화의를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①회수(淮水)를 국경으로 삼는다. ②송은 금에게 신하의 예를 취한다. ③송은 금에게 매년 25만필의 비단과 25만량의 은을 ‘세공(歲貢)’으로 바친다.

이처럼 중원의 황제가‘이적’의 군장에게 신례(臣禮)를 취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현실이 되고 말았다. 9세기 말 당의 붕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 중화 질서는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져 버렸다. 그 후 오대십국, 요, 송, 서하, 금, 고려, 안남 등은 모두 각자의 독자적인 세계 안에서‘중화’를 자처했고, 이들 사이의 역학관계는 수시로 변하는 현실정치 속에서 결정되었다. 유라시아 동부지역에 진정한 의미의 ‘다원체제’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체제는 몽골에 의해 금, 서하, 남송이 차례로 무너지고 고려도 복속하게 됨으로써 13세기 후반이 되면 최종적으로 사라지게 된다. 당제국의 붕괴와 함께 시작된 분열기에 태동한‘다원체제’가 40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몽골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계체제에 자리를 넘겨주게 된 것이다. ▒

이극용과 주전충

이극용은 원래 투르크 계통에 속하는 사타(沙陀)부족의 수령이었다. 황실로부터 이성(李姓)을 하사 받았으며, 한쪽 눈이 작아서 ‘외눈박이 용(獨眼龍)’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 휘하의 정예군단은 항상 검은 갑옷으로 무장하여 ‘아군(鴉軍)’, 즉 ‘까마귀군’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으며, 사납고 잔인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한편 주전충의 본명은 주온(朱溫)이었는데, 황소의 반란군에서 당조(唐朝)로 투항한 뒤 “오로지 충성하라”는 뜻에서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사여 받아 주전충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황제를 죽인 것은 물론 아들 9명까지 살해하여 황실의 씨를 말린 것도 부족해서 귀족들까지 몰살시켜, 그 시신을 백마(白馬·현재 하남성 골현(滑縣) 부근)라는 곳에서 황하의 탁류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것이 소위 ‘백마의 화(禍)’로 알려진 사건이다. 그러고 나서 옛날 전국시대 위나라의 수도 대량(大梁)이 있던 개봉을 수도로 정하고 왕조를 개창했으니, 이것이 소위 ‘후량(後粱)’이라 알려진 것이다. 이처럼 오대십국의 대혼란기는 낭자한 유혈극으로 막이 오르게 되었다.

 

(13) 칭기즈칸과 몽골 세계제국의 등장
동·서양 쥐고흔든 첫 세계제국 출현
칭기즈칸, 1206년 몽골 유목민 통일하고 초원 밖으로
교역 위한 원정전쟁이 세계 정복전쟁으로 확대
후계자 우구데이- 뭉케- 쿠빌라이로 이어지며
유라시아 대륙과 해상까지 휩쓸고 세계역사 바꿔

 

▲ 칭기즈칸 청동상(像) (photo 조선일보 DB)
 몽골제국의 출현은 세계 역사상 대단히 경이로운 현상이다. 유럽의 한 역사가는 “사냥과 목축으로 살아가던 미개하고 가난하며 수적으로도 얼마 되지 않던 민족이 어떻게 해서 무한한 인적 자원을 갖고 있던 아시아의 강력한 문명국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한 적이 있다.

물론 당시 몽골인이 그렇게 ‘미개’했는가 하는 문제는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적으로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대집회(쿠릴타이)를 열어 ‘몽골국(Mongol Ulus)’의 탄생을 선포했을 때, 휘하에 들어온 유목민을 모두 천호(千戶)로 편성하였는데 그 총수는 95개였다. 만약 1호를 평균 5명으로 계산한다면 당시 칭기즈칸이 지휘한 몽골인은 남녀노소 다 합해봐야 50만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같은 시기 중국의 인구는 북쪽의 금나라와 남쪽의 송나라를 모두 합해서 이미 1억명을 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산술적 계산으로도 1 대 200이라는 비율이 나오는데, 1당 100이 아니라 1당 200의 기적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먼저 그들의 출현을 목격하고 그들과 싸우면서 그 힘을 실감한 당대 사람들도 우리와 같은 의문을 가졌음에 틀림없다. 우선 갑작스럽게 출현한 이들이 지닌 여러 가지 특징, 과거에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미지의 집단이라는 신비성, 전쟁 시 적에게 가하는 엄청난 파괴력, 그와 함께 수반되는 잔인함…. 몽골의 또 다른 명칭이었던 ‘타타르(達·Tatar)’가 라틴어에서 ‘지옥’을 뜻하는 ‘타르타르(Tartar)’와 비슷한 발음이었기 때문에 유럽인에게는 그 이름 자체가 이미 지옥의 사자, 악의 화신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했다. 혹은 신이 인간의 타락을 징벌하기 위해서 보낸 도구, 즉 일찍이 훈족의 아틸라를 가리켜 부르던 ‘신의 채찍(Flagellum Dei)’이 다시 나타난 것처럼 여기기도 했다.


 물론 오늘날의 학자들이 이러한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몽골 세계제국의 출현을 설명함에 곤혹스러움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다. 여러 가지 가설이 제시되었다. 우선 ‘기마전술의 탁월함’이 꼽힌다. 총과 화약이 널리 사용되기 전에는 기마전이 가장 신속하고 위력 있는 공격방법이었고, 다른 누구보다 유목민이 그것을 잘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 즉 ‘어찌해서 그 전에는 그러한 대대적인 정복이 일어나지 않았는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것이 몽골 지도층의 탁월한 능력, 특히 칭기즈칸의 리더십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부하들을 포용하고 그들로부터 헌신적인 봉사를 이끌어내는 탁월한 인간적 친화력, 군대를 조직하고 규율을 부여하며 실전에서 치밀한 작전을 통해 전쟁을 승리로 끌고 가는 전략적 능력까지 갖춘 인물로 평가되었다. 말하자면 ‘야만의 어둠’을 뚫고 빛나는 탁월한 ‘천재성’인 셈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의 역할을 과도하게 평가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된 한 책의 저자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업적을 미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자무식의 노예가 오로지 자신의 탁월한 개성과 카리스마와 결단력을 바탕으로 북미 대륙을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시키고 미합중국을 창건했으며, 알파벳 문자를 창제하고 헌법을 기초했고, 보편적인 종교의 자유를 실현하고 새로운 방식의 전쟁술을 도입했으며, 군대를 이끌고 캐나다에서 브라질까지 진군했고,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포괄하는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 교역을 활성화시켰다.” 이 같은 단정은 전형적인 영웅사관의 발로가 아닐 수 없으며 많은 사람의 동의를 쉽게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칭기즈칸에 대해 우리가 갖는 대표적 오해의 하나는 그가 ‘세계정복자’였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세계를 정복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초원의 유목민으로 태어났으며 유목민으로 죽었다. 그의 세계관 속에서 초원이 아닌 다른 지역은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었고 그런 곳을 지배하고 호령할 생각도 별로 없었다. 아직 그의 정확한 출생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1227년에 사망한 것은 확실하며 대략 65세 전후가 아니었나 추측된다.

 

▲ 몽골제국 건국 800주년을 맞아 지난해 7월 몽골 울란바토르에서 열린 나담축제의 한 장면. (photo 조선일보 DB)

그의 인생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어려서 아버지가 독살된 뒤 부르칸 칼둔 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면서 온갖 고난을 경험한 유소년기, 부르테라는 여자와 혼인한 뒤 케레이트 부족의 수령 옹칸의 휘하에 들어가 자신의 세력을 키우다가 다른 부족을 하나씩 굴복시키고 마침내 초원의 맹주로 우뚝 서게 되는 청장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1206년 건국 이후 남쪽의 서하(西夏)와 금나라, 서쪽의 호레즘을 원정하며 제국의 기틀을 닦은 노년기.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대부분 초원에서 벌어졌고 거기서 우러나온 체험이 그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형성하고 결정했다. 타타르 부족에 독살 당한 부친의 최후는 그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혈수(血讐)의 원칙을 골수에 사무치게 했고, 부친이 사망한 뒤 의지할 곳 없는 그의 일족을 야멸차게 버리고 가버린 타이치우트 씨족의 배신행위는 동족에 대한 불신을 그에게 심어주었다. 반면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변함없는 의리와 충성으로 그의 ‘황금의 목숨’을 지켜주던 부하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주군과 종사(從士) 사이에 존재하는 절대적 신뢰감을 알게 되었고, 초원의 패권을 두고 최후까지 자신과 경쟁한 죽마고우 자무카의 죽음에서 권력 투쟁의 비정함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메르키트나 타타르와 같이 집요하게 저항하던 부족을 굴복시킨 뒤 수레바퀴의 축보다 키가 더 큰 사람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한 잔혹함, 몽골 통일 후 만호·천호·백호·십호를 조직하여 무질서하고 자립적인 유목민을 명령 한마디에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전쟁기계’로 전환시킨 조직력, 제국의 군대를 지휘하는 최고의 사령관에 동족을 배제한 채 자신에게 충성한 막우들을 기용한 포용력 등은 모두 그 같은 초원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었다.

1206년 그는 드디어 눈길을 초원 밖으로 돌렸다. 남쪽으로는 조상 대대로 주군 노릇을 해온 여진족의 금나라가 있었고, 서쪽에는 이슬람권의 신흥 강국 호레즘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들과 전쟁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초원의 맹주로 만족할 수 있었다. 다만 이제 막 건설된 몽골국의 원활한 경영을 위해서는 이들 나라와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초원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물자를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공급 받을 필요가 있었다. 후일 칭기즈칸이 금나라를 치고 호레즘을 원정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그런 나라들을 정복하여 멸망시키고 지배하려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상호체결한 조약을 무시하거나 교역을 위해 파견한 상인단을 살해했기 때문에 그것을 응징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정복하고 통치할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적국들이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을 계속하자 응징과 보복의 강도는 더욱 높아갈 수밖에 없었다.

응징전에서 정복전으로 본격적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상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우구데이(재위 1229~1241)의 시대부터다. 금나라가 조약 이행을 거부하고 수도를 옮겨서 황하라는 물의 장벽을 이용해 항전을 결정하자 우구데이도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구데이는 1230년 군대를 삼분하여 북중국으로 밀고 내려갔고, 섬서·하남 등지를 공략한 뒤 1233년에는 개봉을 함락하였다. 금의 마지막 황제는 다음 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러나 몽골과 연합한 남송이 대가를 요구하며 개봉과 낙양을 점령하자 몽골은 다시 남송과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또한 우구데이는 1234년 큰형 주치의 아들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몽골군 15만명을 편성하여 서방원정을 단행, 러시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세계 정복은 제4대 칸인 뭉케(1251~1259)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으로 재개되었다. 그는 먼저 이슬람권의 압바스조를 치고 나아가 시아파에 속하는 소위 ‘암살자단’을 제거하기 위해 자기 동생인 훌레구를 파견하였다. 그는 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마침내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하고 서아시아에 몽골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런데 당시 가장 난적은 남송이었다. 왜냐하면 강과 운하와 호수가 많은 회하(淮河) 이남에서 강력한 수군을 보유한 남송을 굴복시키려면 몽골의 기마병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고려 왕실이 강화도로 피신했을 때 몽골군이 그것을 어쩌지 못하고 30년을 허비한 것을 생각한다면 ‘바다 같이’ 넓은 양자강의 저지효과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1257년 뭉케는 군대를 나누어 자신이 직접 중앙군을 지휘하고 사천 방면으로 들어갔고, 동생 쿠빌라이에게 좌익군을 맡겨 회하를 건너서 양자강 연안의 악주(鄂州)에 가도록 했다. 그러나 여름에도 쉬지 않고 공격을 강행하던 뭉케는 1259년 여름 사천의 조어산(釣魚山)에서 전염병으로 급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남송 경략의 대업은 그의 계승자인 쿠빌라이(1260~1294)의 몫이 되었다. 그의 시대에 몽골군은 일대 변신을 보였다. 초원의 기마군대가 견고한 성채를 함락하는 공성술을 결합하게 된 것이다. 양자강의 지류인 한수(漢水) 유역의 쌍둥이 도시인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던 몽골군은 1273년 새로운 병기를 도입했다. ‘회회포(回回砲)’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중동의 무슬림이 만든 거대한 투석기였다. 바위덩어리가 700~800m 날아 한수를 건너 성벽을 내리치면서 부수어 나갔고 결국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그러나 몽골군의 변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양양의 함락과 함께 투항한 남송의 수군을 흡수하면서 점차 양자강을 제압하게 되었고, 남송이 무너진 뒤에는 거기에 있던 해군을 받아들였다. 비록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일본과 남중국해 지역에 대한 원정은 해군으로서 몽골군대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대몽골 울루스’, 즉 몽골제국은 초원의 유목국가에서 출발하여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과 해상까지 장악하는 세계제국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 칭기즈칸의 돌. 칭기즈칸의 조카 이숭게가 서방원정에서 귀환하는 도중에 열린 활쏘기 대회에서 우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제 다시 원래의 의문으로 되돌아가자. 어떻게 해서 초원 한구석의 ‘미개한’ 몽골인이 이런 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단순히 기마군대의 힘 혹은 칭기즈칸의 천재성에 의한 것이 아님은 분명해졌을 것이다.

물론 출발은 거기부터였다. 그러나 그들은 놀라운 학습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지역과의 전쟁 과정에서 빠른 속도로 하나씩 배워갔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그들은 처음부터 가진 것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새로운 것에 대해 개방적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라고 고집하며 다른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 새로운 집단, 새로운 이념을 어려움 없이 받아들여 소화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다.

‘대몽골 울루스’의 군대가 기마전은 물론이지만 공성전, 나아가 수상전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또 몽골 군대의 일부를 구성하며 정복전에 동참한 수많은 다양한 집단의 존재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그것은 몽골의 정복전이 결코 몽골인만의 성취가 아니라, 몽골을 핵심으로 하는 대통합력의 추동이었음을 입증한다. 몽골제국의 지배층을 구성하던 ‘색목인(色目人)’이라는 집단이 그 점을 단적으로 말해주는데,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 그 말이 바로 몽골제국의 핵심적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몽골제국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제국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나치즘이 표방하던 게르만 민족우월주의나 유대인이 내세우는 배타적 선민의식은 존재하지 않았다. 몽골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영원한 텡그리’로부터 힘(k?ch?n)을 부여 받았다고 믿었지만, 그것이 곧 몽골지상주의나 텡그리지상주의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일족의 정치적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가운데 다양한 집단과 문화가 공존하는 다원주의적 질서였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질서를 바탕으로 팍스 몽골리카가 실현된 것이다. ▒



바투의 서방원정군

각 집안의 큰아들만 징발해서 편성했다고 하여 ‘장자원정군’으로 알려진 이 군대의 총사령관은 칭기즈칸의 큰아들인 주치의 장자 바투였다. 원정군은 유라시아 초원을 가로질러 볼가강에 이르렀고, 그 부근에서 유목하던 불가르와 킵차크인을 격파하고, 1237년에는 ‘루씨(Rus’)’의 땅, 즉 러시아로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는 여러 공국으로 나뉘어져 서로 유기적인 협력체제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몽골군의 침공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다. 콜롬나,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등의 도시가 차례로 유린되었고, 1240년 겨울에는 수도 키에프가 함락되었다. 도시 전체가 잿더미로 바뀌는 참상과 함께 죽은 사람들을 위해 “울어줄 눈도 남지 않았다”고 할 정도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몽골군은 다음 해에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헝가리를 공격했고, 폴란드로 들어간 선봉대는 리그니츠 벌판에서 2만명의 폴란드와 독일 기사단을 괴멸시켰다. 이렇게 해서 몽골군은 전군을 집결하여 서유럽으로 진입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이를 저지할 세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유럽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그러나 1242년 여름 몽골군은 모든 작전을 중지하고 철군을 시작했다. 그것은 동쪽 멀리 몽골고원에서 그들의 대칸인 우구데이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누가 후계자가 되느냐는 초미의 관심사를 두고 한가롭게 전쟁을 계속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14) 팍스 몽골리카의 성립과 동서 문화교류의 확대
팍스 몽골리카의 동맥은 말(馬)을 이용한 글로벌 네트워크

13~14세기 인류 역사 최대의 동서남북 교류 이뤄져
상인 우대정책 펴고 자본출자 등 국제무역 적극 지원
아랍 상인도 맹활약… 한반도까지 오가며 교역활동

종교인 관용정책 힘입어 선교활동 활발… 중국에 기독교 확산
마르코 폴로·이븐 바투타 등 여행가들 잇달아 여행기 남겨

 

▲ 내몽골에서 발견된 패자. 패자를 제시하면 역참에서 음식 등을 서비스 받을 수 있었다.
 몽골세계제국은 결코 많은 사람의 축복과 환호 속에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전투에 동원된 병사들이 사망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전쟁과 무관한 수많은 민간인이 살육되었다. 당시 중국 측 문헌에는 ‘도성(屠城)’이라는 표현이 자주 보이는데, 그것은 문자 그대로 도시와 그 주민을 도륙하는 것이다.

사정은 중동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연결되는 실크로드 연도에 위치해 번영하던 도시들은 몽골군이 몰고 온 파괴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니샤푸르에서는 170만명이 죽음을 당했고, 메르브에서는 100만명 정도, 발흐에서는 70만명 정도가 도살되었다는 이슬람 측 기록이 과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사실 무근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글로 옮기기에도 잔혹한 일화가 수없이 전해지고 있는데, 일부 학자의 해석에 따르면 몽골군이 적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심리전’을 활용한 결과라고 한다.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서 묘사한 역참

“각 지방으로 가는 주요 도로변에 25마일이나 30마일마다 이 역참이 설치되어 있다. 이 역참에서 전령은 명령을 기다리며 대기 중인 삼사백 마리의 말을 볼 수 있다. (중략) 이러한 방식으로 대군주의 전령은 온 사방으로 파견되며, 그들은 하루 거리마다 숙박소와 말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지상의 어떤 사람, 어떤 국왕, 어떤 황제도 느낄 수 없는 최대의 자부심과 최상의 웅장함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분은 그가 이들 역참에 특별히 자신의 전령이 쓸 수 있도록 20만 마리 이상의 말을 배치해 놓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말했듯이 멋진 가구들이 갖추어진 숙사도 1만곳 이상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제국의 위용이 갖추어져 갔고 몽골인도 도시와 사람을 무절제하게 파괴하는 것이 결코 이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들이 수행한 전쟁이 다른 시대, 다른 민족이 벌인 전쟁에 비해 특별히 더 잔인하다고 할 것도 없게 되었다.

예를 들어 쿠빌라이가 보낸 원정군이 남송의 수도 항주를 함락할 때에는 문자 그대로 무혈입성이었고, 점령한 뒤 아무런 파괴도 살육도 일어나지 않았다. 절대로 주민을 죽이지 말고 도시의 건물을 파괴하지도 말라는 쿠빌라이의 엄격한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몽골인도 드디어 인간과 도시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자신들이 건설하고 있는 제국에 중요한 자산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제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면서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보호자로 역할을 선회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소위 학자들이 말하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는 ‘몽골의 평화’라는 뜻으로 팍스 로마나(Pax Romana)라는 말을 원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하는 까닭이 몽골제국시대에 전쟁이 종식되고 정치적 평화를 구가했기 때문은 아니다. 몽골이 유라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에도 크고 작은 전쟁이 제국의 내부에서 몽골인끼리 혹은 제국의 변경에서 다른 국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팍스 몽골리카는 13~14세기 몽골인 주도하의 유라시아 국제질서, 즉 각 지역 간 교류와 대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그 결과 각 문명 상호 간 이해의 폭이 비약적으로 넓어진 결과를 낳게 한, 그러한 정치질서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몽골제국이 표방한 이념과 정책은 동서 간 인적·물적 교류의 진작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 예로 역참제(驛站制)를 들 수 있다. 몽골인이 ‘잠(jam)’이라고 부르던 역참은 제국 전역을 연결하는 조밀하고 광역적인 교통의 네트워크였다. 물론 몽골인이 이러한 역참제를 처음 실시한 것은 아니지만 그 중요성이 특별히 강조되었고, 현대 중국어에서 ‘역, 정거장’을 뜻하는 ‘짠(站)’이라는 단어가 몽골어 ‘잠’에서 유래한 것도 이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13세기 페르시아의 역사가 주베이니(Juvayni)가 저술한 ‘세계정복자의 역사’라는 책에는 이미 칭기즈칸의 시대에 정보와 물자의 원활한 전달을 위해서 역참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계승자인 우구데이의 치세에는 영토가 더욱 확장되면서 수도 카라코룸과 원근 각지를 연결하는 역참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 그래서 그는 북중국에서 카라코룸에 이르는 역도에 70리마다 역참을 하나씩 두어 모두 37개의 참을 두었으며, 다시 카라코룸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지방으로 연결되는 역참을 설치했다. 그는 자신이 자부하는 치적 네 가지 가운데 하나로 이 역참제의 확대를 꼽을 정도였다.

몽골 지배하의 중국에서 역참제는 더욱 발전하게 된다. 수도 대도(大都·현 베이징)를 중심으로 사통팔달의 역도가 전국을 연결했고, 동으로는 고려와 만주, 서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이란과 러시아에 이르는 교통로상에 역참을 두었으며, 남쪽으로는 안남과 버마로까지 연결되었다. 당시 중국에 있던 역참만 1500군데라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마르코 폴로 역시 페르시아·투르크인의 발음에 따라 ‘얌(iamb)’이라고 불린 역참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역참은 내륙의 교통로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강남지방이나 해안지방에는 수참(水站)과 해참(海站)을 둬 말이나 수레가 아니라 선박을 비치했으며, 북방의 추운 지방에는 구참(狗站)을 설치해 눈썰매와 그것을 끄는 개가 준비되었다.

 

▲ 1906년 중국 복건성 천주에서 발견된 원대 기독교도의 묘비.

이 같은 역참은 원칙상 공무를 수행하는 사람만 이용할 수 있었으며 ‘패자(牌子)’라는 것을 제시해야 했다. 패자에도 여러 종류가 있었으니 재료와 모양이 서로 달랐다. 어떤 패자를 소지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역참에서 제공되는 음식과 서비스에 차이가 있었다. 내몽골에서 발견된 패자에는 파스파 문자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있다. “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카안의 이름은 신성하도다. 경배하지 않는 자는 죽임을 당할 것이다!”

몽골시대의 글로벌 네트워크인 역참을 이용하여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가 이루어졌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상인은 몽골 권력층과 손잡고 그들의 막대한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수행했다. 당시 그들은 ‘오르톡(ortoq·斡脫)’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이는 투르크어로 ‘동업자’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들은 패자를 발급 받아 국가에서 관리하는 역참시설을 이용하면서 내륙과 해상을 통한 국제무역을 수행했다. 중국 전통적 왕조의 한족 지배층과는 달리 몽골인은 상인을 우대했고 그들의 국제무역을 적극 지원했다. 심지어 국가가 자본을 출자해 해외에 선박을 보내 무역하게 한 뒤 그 이익을 나누어 갖는 소위 ‘관본선(官本船)’ 제도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들 상인 중에는 당시 ‘회회(回回)’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무슬림의 활동이 특히 돋보였다. 이들의 활동범위가 한반도까지 미쳤음은 고려 가요에 ‘쌍화점’을 경영하는 ‘회회아비’의 존재가 말해주고 있다.

상인들 못지않게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 사람이 선교사였다. 몽골제국은 종교인에 대해서는 특히 관용의 정책을 취하여 각 종교의 지도자에게 면세 혜택까지 부여할 정도였다. 페르시아나 중국 측 기록에도 남아있듯이 이슬람·기독교·유대교·유교·불교·도교의 사제나 승려가 그러한 혜택을 누렸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여태까지 국가의 탄압을 받던 소수 교단이 활력을 얻게 되었다. 중국과 중동에서 기독교의 교세 팽창이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네스토리우스교단은 이미 몽골인 사이에 어느 정도 퍼져 있었지만 이제는 가톨릭 교단도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동방을 처음으로 방문한 서구의 가톨릭 선교사는 카르피니 출신의 요한(John of Plano Carpini)이라는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였다. 그는 교황 인노센트 4세가 1245년 친서를 내려 자신의 특사로 파견한 인물이었는데, 파견 목적은 몽골인이 과연 유럽을 정복할 의도가 있는지를 확인하고 가능하면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킬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는 귀환한 뒤 ‘몽골인의 역사(Ystoria Mongalorum)’라는 저술을 남겼다. 이 글에서 요한은 몽골인의 영역과 기후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하여 생김새와 생활습관, 종교적 신앙, 그들의 역사, 사회와 군대의 조직, 전쟁 방법, 정복된 지역에 대한 설명 등을 매우 조리있고 포괄적인 내용으로 전달하고 있다. 한국을 ‘카울리(Kauli)’라는 이름으로 서구에 처음 소개한 것도 그의 글이었다.

그로부터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253년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루브룩 출신의 윌리엄(William of Rubruck)이 몽골인을 개종해야겠다는 개인적 열정으로 프랑스의 국왕 루이 9세의 허락을 얻어 몽골을 방문하였다. 물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돌아온 뒤에 ‘여행기(Itinerarium)’를 남겼는데, 이것은 요한의 글처럼 공식적인 보고서가 아니었기 때문에 훨씬 더 다양하고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중세 유럽의 여행기 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히고 있다.

이후로도 선교사의 발길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1293년에는 이탈리아 몬테코르비노 출신의 요한(John of Montecorvino)이라는 선교사몽골제국의 여름 수도인 칸발릭(Qanbaliq·현재 내몽골 소재)에 도착하였다. 그는 1328~1331년 무렵 중국에서 사망할 때까지 25년 이상을 그곳에 머물렀다. 중국 측 기록에는 그의 활동이 잘 드러나 있지 않으나 그가 고향으로 보낸 두 통의 편지가 그간의 사정을 전해준다.


▲ 몽골의 칸이 수도사 요한을 통해서 교황에게 보낸 친서.

그는 웅구트라는 부족의 수령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고 그 도읍지에 교회를 세웠으며, 칸발릭에 주재하면서 ‘동방을 관할하는 대주교’로 임명됐다. 또한 그는 교황청에 요청하여 7인의 사제를 중국으로 파견케 하고, 그들을 칸발릭과 천주에 주재시키며 선교활동에 종사케 했다. 그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활동한 사람으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인 포르데노네의 오도릭(Odoric of Pordenone)이 있었다. 그는 1318년 콘스탄티노플을 출발하여 중동을 거쳐 인도양을 항해한 뒤 1324년 중국에 도착했다. 항주(杭州·절강성)·복주(福州·복건성)·천주(泉州·복건성) 등을 방문한 그는 특히 천주에서 프란체스코수도회가 운영하는 거대한 교회당을 보기도 했다. 1328년까지 중국에 머문 그는 내몽골을 지나는 육로를 거쳐 1330년 귀국했다.

물론 유럽에서 선교사만 온 것은 아니었다. 마르코 폴로 일가는 원래 상인이었고 교역의 목적으로 동방을 찾아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용케도 그의 ‘동방견문록’이라는 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잘 알게 된 것이지만, 우리가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수많은 유럽 상인이 몽골제국 각지에서 활동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또한 인적 교류가 서에서 동으로만 향한 것도 아니었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상업이나 선교 혹은 순례의 목적으로 여행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 예가 랍반 사우마(Rabban Sauma)라는 인물이다.

그는 원래 내몽골 지방에 살던 웅구트 부족 출신인데, 이 부족은 투르크-몽골인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다. 13세기 후반 그는 같은 부족에 속하는 마르코스라는 젊은이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떠났는데, 우여곡절 끝에 1281년 마르코스가 네스토리우스교단을 총괄하는 ‘총주교’로 선출되었다. 당시 서아시아를 지배하던 몽골인은 유럽과 정치·군사적 연맹을 모색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도인 랍반 사우마를 칸의 특사로 임명하여 유럽으로 파견하였다. 그는 교황청을 방문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국왕을 알현했으며, 자신이 보고 들은 내용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우리는 이슬람권이 낳은 걸출한 여행가 이븐 바투타를 빼놓을 수 없다. 1304년 모로코에서 출생한 그는 21세의 나이로 성지순례를 시작했고, 그로부터 약 30년간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쳐 12만㎞를 여행하였으며 저 유명한 ‘여행기(Rihla)’를 남겼다. 그는 인도 북부의 델리를 방문했을 때 술탄의 특사로 임명돼 몽골 지배하의 중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여행기에서 각지의 민족과 문화를 소개하고 지배층과 통치방식, 귀족층의 사치와 비리를 지적했으며, 통화와 환율 같은 교역의 관심사에서부터 의식주와 생활습관, 각 지역에서 전해지는 여러 가지 일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다.

13~14세기 몽골 주도하의 유라시아는 인류 역사상 공전의 대교류, 즉 인적 왕래, 종교의 전파, 상품의 확산이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하고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유럽에 마르코 폴로가 있었다면, 중동에는 이븐 바투타가 있었고, 동아시아에는 랍반 사우마가 있었다. 교류는 일방통행이 아니라 동서남북으로 상호교차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팍스 몽골리카’의 실체였다. 유라시아의 여러 민족은 1세기에 걸쳐 ‘팍스 몽골리카’라는 용광로 속에 던져져 공통의 경험을 하였고, 그것이 끝난 뒤 그들의 눈에 펼쳐진 세계는 더 이상 옛날과 같은 세계가 아니었다. ▒

 

(15) 동방기독교의 확산과 쇠퇴
로마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파
7세기부터 초원 구석구석 기독교 전파

중국 보호받으며 교회 짓고 신도 확보… 요·금때도 교세 확장
신장 카쉬가르·천산산맥·내몽골 오지까지 대주교 파견 선교활동

몽골제국 귀족의 후원 속에 발전하다 몽골 붕괴와 함께 급격한 쇠퇴
흑사병으로 맥 끊기며 15세기 이후 동방기독교 중국에서 자취 감춰

 

▲ 경주 출토 마리아상(통일신라시대로 추정)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수도 후흐호트에서 서쪽으로 난 고속도로를 따라 150㎞를 달리면 파오터우(包頭)라는 곳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음산산맥을 넘어 180㎞ 정도 올라가면 다마오(達茂)라는 곳에 도착한다. 원래 이곳의 이름은 몽골어로 ‘다르칸 마우밍간’. 이 단어들의 앞머리 글자들을 떼어내서 만든 한자식 명칭이 ‘다마오’이다. 그런데 그곳에 위치한 조그만 문물관리소 앞마당에는 놀랍게도 십자가가 새겨진 비석들이 줄비하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내몽골의 궁벽한 초원 한구석에 이런 유물이 남아 있는 것일까. 이 비석들의 주인은 지금으로부터 700~800년 전 몽골제국시대에 이곳에 살던 ‘웅구트(onggut)’라는 유목민의 왕족이다. 그들은 마테오 리치가 동아시아에 기독교의 복음을 전파하기 300년 전에 이미 기독교를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 연유를 탐색해보면 배후에는 가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제3의 기독교, 즉 ‘네스토리우스교단(Nestorian Church)’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동방기독교 한 교파의 놀라운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 교단은 원래 5세기 전반에 살았던 네스토리우스라는 사람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patriarch)를 역임한 인물이다. 초기 기독교회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이냐를 두고 큰 논쟁이 벌어졌는데, 325년 개최된 니케아종교회의에서 예수는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하는 ‘양성론(兩性論)’이 채택된 바 있다. 네스토리우스 역시 이 주장에 찬동했다. 그러나 그는 당시 교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또 교회에서도 인정하던 또 다른 주장, 즉 마리아를 신의 어머니(theotokos)로 보는 ‘신모설(神母說)’에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마리아는 ‘인간’ 예수의 어머니일 뿐이지 어떻게 ‘신의 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많은 사람에게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교회 내부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대립하던 알렉산드리아학파의 키릴(Cyril)은 그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고 ‘단성론(單性論)’을 추종한다는 비난을 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431년 에페수스에서 종교회의가 열렸다. 네스토리우스파가 미처 참석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파행적으로 진행된 회의에서 그는 이단으로 낙인 찍혀 파문을 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동로마제국의 영내에 남아 있지 못하고 동방의 새로운 땅, 즉 페르시아 지방으로 이주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지금 중국의 서안(西安)에 가면 고대의 유명한 비석들을 모아놓은 ‘비림(碑林)’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 전시된 수많은 비문 가운데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것이다. 781년에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가 3m가 넘고 폭이 1.5m, 두께가 30여㎝에 이른다. 머리 부분은 두 마리의 용이 대칭으로 감싸고 있는데, 그 사이에 십자가를 새겨 넣고 그것을 구름과 연꽃 무늬의 대좌(臺座)로 받치게 했다. 그 아래로 ‘대진경교유행중국비’라는 글자가 세 줄로 나뉘어 새겨져 있다. 본문은 모두 1870여개의 한자로 되어 있고, 40여 단어의 시리아문이 붙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사제 60여명의 이름이 한자와 시리아 문자로 동시에 적혀 있다. 문자 그대로 대진(로마)의 경교가 중국에 전파된 경위를 기록한 비문으로, 당나라 때인 781년 경정(景淨)이라는 이름의 ‘경교승(景敎僧)’, 즉 네스토리우스파 사제가 지은 것이다. 이 비석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00년대 초반이었고 처음에는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것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진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그 뒤 여러 학자의 상세한 연구와 고증에 의해 경교란 동방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교단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해서 중국에 전래된 기독교는 9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곳곳에 ‘대진사(大秦寺)’ 혹은 ‘십자사(十字寺)’라는 이름의 교회를 짓고 적지 않은 신도를 확보하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뒤 벌어진 두 차례의 재난은 그들의 노력을 완전히 물거품으로 만들고 말았다. 하나는 불교를 비롯하여 외래 종교들이 대대적인 탄압을 받은, 소위 ‘회창(會昌)의 법난(法難)’(845년)이라 불리는 종교탄압으로 이때 많은 기독교 사제가 강제로 환속되었다. 또 하나는 9세기 말 터진 황소(黃巢)의 난인데 대도시를 점령한 반란군이 기독교 신도를 모두 죽여버리는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이 두 재난이 중국의 기독교에 얼마나 큰 타격을 주었는지, 그로부터 100년 뒤에 쓰인 한 아랍인의 책에는 중국 본토에 기독교도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으며 교회는 모두 폐허가 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중국에서의 이러한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중앙유라시아 초원 곳곳에는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많은 개종자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유적도 다수 발견되었다. 예를 들어 천산산맥 북방의 세미레치에라는 지방에서 기독교도들의 묘석이 수백 기(基) 발견되었는데, 그 중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조사해도 9세기부터 14세기에까지 이어지고 있어 그곳의 기독교 공동체는 거의 500년 동안 존속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공동체는 14세기 중반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마는데, 그 원인은 흑사병의 창궐로 인해서 주민 대부분이 사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현재 중국 서북방 신장(新疆)의 카쉬가르와 같은 오아시스 도시에도 바그다드의 네스토리우스교단 본부에서 임명된 대주교들이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벌였다. 투르판에서 발견된 벽화들은 기독교도의 존재를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경건한 모습으로 앞을 응시하는 경교도 여인. 황토색 겉옷 속에 땅에 끌릴 정도로 긴 흰색 속옷이 보이고, 그 아래로 앞부분이 위로 추켜올라간 신발이 이색적이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세 명의 신도와 사제를 그린 것도 있는데, 사제의 얼굴 묘사와 헤어스타일은 그가 몽골리안 계통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처럼 기독교는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여 유라시아 초원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탄압에 의해 교도가 거의 사라진 중국으로 다시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네스토리우스교단의 중국 재전래를 입증하는 유물도 발견되었다. 오늘날 베이징 서남쪽 교외의 팡산(房山)에 있는 ‘십자사(十字寺)’라는 절에서 발견된 십자가가 좋은 예이다. 커다란 대리석 덩어리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고 주위에 시리아 문자로 “너희들은 이것을 보고 희망을 품으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아울러 두 개의 석당(石幢)도 발견되었는데, 아마 대리석 십자가를 그 위에 올려놓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석당 가운데 하나에는 960년에 만들어졌다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어, 요나라 때 기독교가 이 지역에 퍼졌음을 확인시켜 준다.

 

▲ 중앙아시아 세미레치에 지방에서 발견된십자가 비석.(13~14세기)
 

또한 원대 초기에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낸 마월합내(馬月合乃)라는 사람의 조상에 관한 기록에서 금나라 때 기독교도의 존재도 알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금나라 태종(1123~1135년)이 하루는 꿈에서 사냥을 나갔다가 금빛 나는 어떤 사람이 태양을 안고 가는 것을 보았는데, 꿈에서 깬 태종이 신하들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때 위구르인들이 교회당에 있던 화상(畵像)을 갖다 바치니 바로 그가 꿈에서 본 그 사람이었다. 감격한 태종은 위구르인들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살도록 하니, 마월합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일가를 이끌고 천산(天山)으로 옮겨와 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천산’은 신장지역의 천산이 아니라 웅구트족이 살던 내몽골의 음산을 가리킨다. 또한 마월합내라는 이름은 기실 ‘마르 요하나(Mar Yohana)’를 나타낸 것이다. 기독교의 동방 전파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도 이와 관련된 유물이 있다는 보고가 있다.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된 성모상과 십자가가 그것인데, 모두 돌로 되어 있고 1956년 경주에서 발견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유물들의 출토 경위가 분명치 않아 과연 신라시대에 속하는 것인지 혹은 네스토리우스교와 관련된 것인지에 관한 보다 확실한 사실은 차후 연구과제이다.

아무튼 동방기독교가 7세기 전반부터 14세기 후반까지 유라시아의 중앙부는 물론 동아시아 지역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이처럼 광범위하게 존재한 동방기독교도의 존재에 대해서 중세 유럽인들이 막연하게나마 알고 있던 것이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를 말해주는 흥미로운 사례가 소위 ‘사제왕(司祭王) 요한의 전설(The Legend of Prester John)’이다. 동방 어디엔가 거대한 기독교 왕국을 다스리는 ‘요한’이라는 이름의 사제왕이 있어, 그가 용맹한 기독교 군대를 이끌고 와서 팔레스타인에서 십자군을 괴롭히고 있는 사라센인들을 쳐부수고 성지를 탈환해 줄 것이라는 설화이다. 사제왕 요한의 설화는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성경에 나오는 아기 예수의 탄생과 연결된다. ‘마태복음’에는 별을 보고 예수 탄생을 알게 된 세 명의 동방박사(Magi)가 각자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고 돌아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경을 지고의 권위로 받아들인 중세 서구인들은 이 이야기에 각종의 상상과 허구를 보태어 동방박사를 동방의 임금으로까지 격상시켰던 것이다.


▲ 종려 주일을 기념하는 네스토리우스파 사제와 신도들.(투르판 출토)

설화는 또 다른 설화를 낳게 마련이다. 1165년경에는 사제왕 요한이 보냈다는 편지 한 통이 유럽에 출현해 각지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이 편지는 비잔틴의 황제에게 보내진 것인데, 거기서 사제왕 요한은 자신을 바벨탑이 있는 곳에서부터 해가 뜨는 곳까지 세 개의 인도를 지배하는 임금이라고 소개한 뒤 자기가 직접 군대를 끌고 가 그리스도의 대적을 쳐부수고 예루살렘의 성묘를 탈환하겠다고 호언했다. 실제로 그런 인물이 존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유럽인들은 마침내 칭기즈칸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출현하여 서쪽으로 군대를 끌고 와서 호레즘을 정벌하고 곳곳에서 이슬람 세력을 격파했을 때, 그가 바로 대망의 사제왕 요한이 아닌가 하는 환상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13세기 전반 몽골 군대가 볼가강을 건너 키에프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고 폴란드의 리그니츠에서 기독교도 연합군을 괴멸시키고 말았을 때 그들은 결국 사제왕 요한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동방기독교는 몽골제국의 귀족들 사이에서 다수의 추종자를 확보했고 그들의 후원을 받으며 크게 발전해갔다. 특히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인 톨루이의 부인은 아주 독실한 신자로 유명했고, 그 영향을 받은 중국과 이란의 통치자들은 기독교에 대해서 우호적인 정책을 견지했다. 따라서 몽골 지배층 일부의 이슬람과 불교로의 개종, 그리고 나아가 제국의 붕괴는 네스토리우스교단에 치명적 타격을 가했으며, 14세기 중반 갑작스럽게 창궐한 흑사병은 그렇지 않아도 쇠약해진 교단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15세기 이후 동방기독교도는 중국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명나라 말기인 16세기에 중국을 찾아온 마테오 리치(利瑪竇)는 기독교도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 부처를 닮은 예수상.(투르판 출토)

초원에서도 기독교가 쇠퇴하고 신자가 사라진 것은 사실이지만 십자가의 성스러운 의미만은 완전히 잊혀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전반 내몽골에 살던 ‘에르쿠트(Erkut)’라는 이름의 부족민은 장례를 치를 때 죽은 사람의 두 팔을 좌우로 벌린 다음 손바닥을 펴서 위로 향하게 한 뒤 두 손을 머리 뒤로 가지런히 모으게 했다. 그리고는 두 발은 붙인 상태로 곧바로 내뻗게 하여, 죽은 사람의 모습이 마치 십자가를 닮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을 닫기 전에 십자가 모양의 조그만 휘장(徽章)을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 휘장은 웅구트족이 남긴 비석에 새겨진 십자가와 흡사한 모습이지만 그 중심에 만(卍)자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 달라서 불교의 영향을 생각게 하는데, 이러한 휘장을 두고 흔히 ‘오르도스의 십자가’라고 부른다. 부족의 이름인 ‘에르쿠트’는 사실 시리아어로 기독교도를 뜻한다. 그 후에는 아예 에르쿠트족의 종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으니 이로써 중앙유라시아를 무대로 펼쳐진 동방기독교의 오랜 역사가 피날레를 고하고 만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불교나 이슬람교 같은 종교가 중앙유라시아를 매개로 하여 동방으로 전파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가 이미 7세기부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래되어 교회를 건설하고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동방기독교는 이제까지 서구기독교단을 중심으로 서술된 교회사에서 도외시되고 잊혀진 존재일 수밖에 없었지만, 앞으로 기독교 발전의 균형 잡힌 이해를 위해서는 물론 중앙유라시아를 통한 동서 문명교류의 실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탐구해야 할 주제이다. ▒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내용

이 비문은 ‘아라가(阿羅訶)’의 천지창조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아라가’는 곧 ‘알라하’ 혹은 ‘알로하’를 옮긴 말이니,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아의 또 다른 이름 ‘엘로힘’이나 이슬람교에서 절대신을 칭하는 ‘알라’와 어원을 같이하는 말이다. 이어 사탄(娑彈)의 유혹에 의해 인간이 타락하게 된 경위를 적고, 메시아(彌施訶)가 인간의 육신을 입어 동정녀(室女)의 몸에서 태어나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된 이야기를 설명한다. 나아가 당태종 정관(貞觀) 9년, 즉 635년에 아라본(阿羅本)이라는 대주교(大德)가 이끄는 선교단이 중국에 파견된 이래 황제들의 은덕에 힘입어 얼마나 번창하게 되었는가를 서술하고 있다. 비문 마지막에는 “현재 법주(法主)인 승 영서(寧恕)가 동방의 경교도를 관할하고 있다”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에서 ‘영서’라는 인물은 바그다드에 있던 네스토리우스교단 본부의 총주교인 하난 이쇼(Hanan Isho·재위 774~780년)의 이름 가운데 ‘이쇼’를 옮긴 것이다.

 

(16) 몽골제국이 남긴 최대 유산은 세계사의 탄생
동·서양이 비로소 세계사에 눈을 뜨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신세계 소개하며 유럽인 세계관 바꿔
몽골은 14세기 초에 인류 최초의 세계사 책인 ‘집사’ 펴내기도
‘동방견문록’에 심취한 콜럼버스, 인도 찾다 신대륙 발견
1402년 조선시대 지도에 아프리카 처음 등장

 

▲ 콜럼버스의 기함 산타마리아호(모형).
 1324년 마르코 폴로가 고향 베네치아(영어명 베니스)에서 숨을 거둘 때 그의 임종을 지켜보기 위해 모인 친구들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이제까지 한 이야기들 가운데 진실된 것이 얼마나 있겠는가? 잘못하면 죽어서 지옥에 갈지도 모르니 어서 회개하게나!” 그러나 마르코 폴로의 대답은 단호했다. “나는 이제껏 내가 본 것 가운데 아직 반도 다 이야기하지 못했어.” 사실 마르코 폴로의 별명은 ‘백만’을 뜻하는 ‘일 밀리오네(I l Milione)’였다. 이것은 그가 백만장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입만 벌리면 ‘백만, 백만’했기 때문에, 말하자면 ‘허풍쟁이, 떠벌이’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린 것이다. 그가 남긴 ‘동방견문록’에는 이처럼 사실과는 거리가 먼 과장이나 환상적으로 꾸며진 이야기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자료들을 꼼꼼하게 비교연구한 학자들은 그가 말한 내용의 대부분이 정확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13세기 후반 중국인의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긴요한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그의 임종 때 일화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중세 유럽인들이 유럽 이외의 바깥세상에 대해 그만큼 무지했다는 점을 방증해주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13~14세기 유럽인의 세계관을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은 역할을 한 것이다.

베네치아 출신의 상인으로 콘스탄티노플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니콜로 폴로와 마페오 폴로라는 형제, 그리고 니콜로의 아들 마르코는 몽골 지배하의 동아시아를 방문해 그곳에서 무려 17년간 머물다가 다시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마르코 폴로는 그 뒤 지중해의 패권을 둘러싸고 베네치아와 제노바(영어명 제노아) 사이에 벌어진 해전에 참가했다가 포로로 잡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피사 출신의 작가 루스티켈로를 만나 자신이 세계 각지를 다니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구술해서 완성한 것이 ‘동방견문록’인 것이다. 이 책은 원래 이탈리아 방언이 강하게 섞인 프랑스어로 쓰였으며 원제목은 ‘세계의 서술(Divisament dou Monde)’이었다. 그런데 서구와 미국에서는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동방견문록’이라 칭하였는데, 우리는 일본식 명칭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글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에 기초했으면서도 서술의 순서나 체재를 보면 결코 ‘여행기’나 ‘견문록’이라고 하기 어렵고, 유럽과 지중해 연안을 제외한 나머지 ‘세계’에 대한 ‘체계적 서술’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원래 제목인 ‘세계의 서술’은 책의 내용과 성격을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몽골제국의 마지막 법전인‘지정조격’(단례 부분).
 유럽에서 ‘동방견문록’은 성경 다음 가는 베스트셀러였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의 글이 남긴 영향은 정말로 지대하였다. 그의 글에 묘사된 ‘카타이(Cathay)’라는 나라는 유럽인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그곳은 온갖 재화와 물산이 넘쳐나고 위대한 군주 쿠빌라이가 지배하는 무한히 넓은 왕국이었고 캄발룩(Cambaluc·대도·베이징), 자나두(Xanadu·상도·원나라의 여름 수도·현 네이멍구자치구 소재), 자이툰(Zaitun·천주·푸젠성 소재)과 같은 도시는 이탈리아 상인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그 뒤 수많은 상인과 선교사가 ‘카타이’를 찾으러 나섰는데,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콜럼버스였다. 그는 평소 마르코 폴로의 글을 접하고 읽으면서 흥미로운 대목이 있으면 그 옆에 특별히 메모를 남길 정도로 탐독했다. 마르코 폴로는 몽골의 대칸이 지배하는 영역이 대인도, 중인도, 소인도 등 ‘세 개의 인도’로 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콜럼버스는 페르디난드 국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친서를 받아 1492년 이 ‘인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은 콜럼버스의 ‘인도’가 우리의 ‘인도’와는 완전히 다른 실체였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다. 아무튼 그가 휴대한 친서의 수신인은 ‘인도’를 지배하는 몽골의 ‘그랑 칸’, 즉 ‘위대한 칸’이었다. 그는 자기가 기착한 곳이 대칸이 통치하는 대륙에서 아주 가까운 섬이며, 근처에는 은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된 ‘지팡구’, 즉 일본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이 유럽인의 지리 지식과 세계관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1375년 지중해 서부의 마요르카(Mallorca)라는 섬에서 제작된 카탈루니아 지도(Catalan Atlas)로, 이것은 유럽 최초의 ‘근대적’ 지도로 유명하다. 이 지도에는 ‘동방견문록’에 의해 처음 알려지게 된 지명들이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지도의 원래 제목이 라틴어로 ‘세계의 지도(Mapa Mondi)’라 붙여진 것도 ‘동방견문록’의 원제목인 ‘세계의 서술’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모두 8장으로 이루어진 이 지도는 동방 세계에 4장을 할애하였다. 동방 세계에 대한 유럽인의 지리 지식이 얼마나 풍부해지고 사실적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이제까지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소위 ‘OT지도’라는 중세적 지도와 비교해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이처럼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에서 카탈루니아 지도 제작에 이르기까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남긴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있다.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로 ‘동방견문록’과 같은 책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몽골제국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유라시아 여러 지역 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미증유의 문화적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런 현상들은 애당초 불가능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팍스 몽골리카’, 즉 몽골의 세계 지배가 없었다면 유럽의 근대가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상당히 지체되었거나 혹은 유럽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유럽이 한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자기가 속해 있는 지역과 문화의 협소함을 극복하고 세계 전체를 시야에 넣는 넓은 관점을 획득한 것이 유럽인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럽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 ‘세계’와 ‘세계사’에 대한 이러한 인식의 전환을 잘 보여주는 예가 14세기 초 서아시아에서 편찬된 ‘집사(集史·Jami at-tavarikh)’라는 책이다. 이것은 원래 가잔 칸(1295~1304년)이라는 몽골군주의 지시에 의해 당시 재상이던 라시드 앗 딘(Rashid ad-Din)이 찬술한 것이다. 그는 먼저 몽골인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게 되었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칭기즈칸의 조상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와 그의 후손이 수행한 정복전과 통치의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것이 바로 ‘집사’의 제1부를 이루게 된 ‘몽골제국사’이다. 그런데 가잔 칸이 죽고 그 뒤를 이은 울제이투 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어느 시대에도 세계 전역의 모든 사람과 인류의 갖가지 계층에 대한 정황과 설명을 담고 있는 역사서는 집필되지 않았다. … 이 시대에는 지상의 여러 지방과 나라가 칭기즈칸 일족의 칙령을 받들고 있다. 또한 키타이(북중국), 마친(남중국), 인도, 카쉬미르, 티베트, 위구르 및 기타 투르크 종족, 아랍, 프랑크 등과 같은 여러 민족의 현자와 점성가·학자·역사가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군주의 어전에 모여 있다”고 강조하면서 지구상에 있는 세계 각 민족의 역사와 지리도 저술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라시드 앗 딘은 제2부 ‘세계민족사’와 제3부 ‘세계지리지’를 편찬하였고, 이를 모두 합해서 ‘집사’라고 부른 것이다.


그때까지 역사상 이 같은 규모와 비전으로 집필된 역사서는 없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미 몽골이 세계제국을 건설하는 과정을 서술하는 제1부가 ‘세계사’적인 스케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지만, 제2부에서 이러한 시야는 더욱 확대되어 페르시아 고대제국과 이슬람 출현 이후 칼리프들의 역사는 물론 중국인·투르크인·유대인·프랑크인·인도인의 역사가 별도로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그 일례로 중국사를 들어보면, 전설상의 인물 반고(盤古)에서 시작해 복희·신농·황제를 거쳐 중국의 역대 36개 왕조와 최후로 몽골에 의해 멸망한 금나라의 역사까지 설명되어 있다. 그가 집필한 중국사 부분은 당시 중국에서 입수한 저서를 근거로 한 것이었기 때문에, 같은 시대에 중국에서 읽혀지던 것과 동일한 질과 수준의 글이 페르시아어로도 번역된 것이다. 이 같은 사정은 단지 중국사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사의 서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혼일강리도 / 라시드 앗 딘이 편찬한 역사서‘집사’의 표지(이스탄불 사본).
 

‘세계’의 발견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1402년에 바로 우리나라에서 그려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지도이다. 이것은 권근(權近)과 김사형(金士衡) 등이 원대의 이택민(李澤民)이 제작한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와 청준(淸濬)의 ‘역대제왕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합하여 만든 것인데, 현재 원본은 존재하지 않고 두 종류의 복사본만 일본에 소장되어 있다. 지도 중앙에는 중국이 크게 자리잡고 있고 그 동쪽 아래쪽으로 한반도가 실제보다 더 크게 그려져 있는 반면 일본은 작고 왜곡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또한 중국의 서쪽으로는 인도, 아라비아, 유럽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역사상 처음으로 아프리카 대륙 전체가 지도에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지도는 세계의 중심으로서 ‘중국=중화’를 가운데에 위치시키고 그 옆에 적지 않은 크기의 ‘조선=소중화’를 배치함으로써 전통적으로 뿌리깊은 화이관(華夷觀)에 입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대한 묘사에서 사실성이 억압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유럽과 아프리카 같은 지역의 전모가 드러날 수 있게 된 것은 13~14세기 몽골시대에 문명 간 교류와 대화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몽골제국의 마지막 법전인 ‘지정조격(至正條格)’의 세계 유일본이 경주에서 발견된 것도 바로 이 같은 긴밀한 문화적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처럼 몽골제국의 출현은 그 전에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구대륙의 여러 문명지역을 통합하였다. 전쟁과 정복은 수많은 군대와 주민을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고 그 결과 민족적 혼합과 문화적 혼효(混淆)가 일어났다. 일단 정복의 태풍이 가라앉자 몽골인은 제국의 통치와 행정을 위해 여러 장치를 만들어냈다. 원활한 교통을 위해 역참제를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운영했고, 이러한 교통시설을 기반으로 국제 상인들이 주축이 된 활발한 경제활동이 추진되었으며, 또 기독교와 이슬람교 선교사들이 각지로 오가며 자기들의 종교를 전파했다. 심지어 병균도 같이 이동하면서 흑사병 같은 대재앙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 카탈루니아 지도. 북중국을 가리키는 CATAYO 라는 글이 보인다.

이러한 교류는 13~14세기 유라시아의 각 문명권에 있던 사람들의 의식에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문명들에 더 이상 고립이 허용되지 않았고, 타 문명에 대한 무의미한 오해나 근거 없는 환상도 설 땅을 잃어버렸다. 외부 세계에 대해 극히 무지하던 서구인의 지식이 얼마나 폭발적으로 팽창했는가는 카르피니, 루브룩, 마르코 폴로의 글들이 웅변해주고 있고, 그것은 결국 콜럼버스 같은 인물의 모험과 대항해의 시대로까지 연결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서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른 문명의 역사와 민족에 대해 서구보다 더 심도 있고, 의미 있는 이해가 몽골제국 본령 안에서 이루어졌다. 14세기 초에 저술된 라시드 앗 딘의 ‘집사’는 그 규모의 팽대함, 기획의 방대함에서 전례가 없을 정도였고, 주요한 모든 민족과 지역의 역사를 포괄하고 나아가 세계 전역의 지리지까지 기록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집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인류 최초의 ‘세계사’였다고 말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몽골시대에 유라시아 각 문명에 공통적으로 일어난 변화, 즉 ‘세계사의 탄생’을 말해주는 것이다. ▒


‘지정조격’의 발견과 출판

‘지정조격(至正條格)’은 1345년 말에 완성되어 그 다음 해 봄에 반포된 원나라 최후의 법전이다. ‘지정’이란 마지막 황제인 토곤 테무르(順帝·1333~1367년)가 사용한 연호(1341~1367년)이고, ‘조격’이란 법적·행정적 결정이 담긴 조문과 규정을 뜻한다. 이 법전은 반포된 지 20년 만에 원이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섰기 때문에 폐지되었고 중국에서도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2002년 경주의 손씨(孫氏) 종가에서 원나라 때 간행된 ‘지정조격’의 잔권(殘卷)이 발견된 것이다. 조선 세종 때 승문원 박사를 역임한 손사성(孫士晟)이 소장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존하는 세계 유일본이다. ‘지정조격’의 텍스트는 원대의 다른 법전과 마찬가지로 몽골어 직역체(直譯體)와 이문체(吏文體)가 섞여 있어 고전 한문과는 매우 다르며 상당히 난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국내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방점이 찍히고 주석이 달린 교주본(校註本)과 영인본(影印本)이 출간되어, 세계 학계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7) 유럽 문명 짓밟은 ‘정복자’ 티무르 사마르칸트를 ‘세계문명의 중심’으로
촌락에 이슬람 최대도시인 ‘카이로’‘바그다드’이름 붙이고
‘비비 하늠’모스크 등 거대한 건축물 건설, 이슬람 최고 문화도시로

북쪽의 우즈베크, 서쪽의 이란‘사바피’에 밀려 동남쪽으로
후예 바부르, 인도 정복하고 무굴제국 창건 고도의 문명 이어가

 

▲ 티무르의 사마르칸트 입성 장면.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에 비해 ‘티무르’라는 이름은 썩 널리 알려져 있는 것 같지 않다. 하지만 티무르가 정복을 위해 보낸 시간과 다녔던 지역을 보면 칭기즈칸의 패업(覇業)은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이다. 사실 칭기즈칸은 생애의 대부분을 몽골 초원의 통일로 보냈고, 그가 참가했던 대외원정은 세 군데, 즉 서하·금나라·호레즘뿐이었다. 그러나 1336년에 출생한 티무르는 1369년 중앙아시아의 유목부족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뒤, 1405년에 중국을 치러 가다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40년을 유라시아 사방 각지를 원정하고 정복하는 데 몰두했다. 칭기즈칸이 ‘세계정복’의 문을 열었고 실제로 그것을 완수한 것은 그의 후손들이었다면, 티무르는 자신의 일대에서 ‘세계정복’의 과업이 다 끝나버렸고 그의 후손들은 가만히 앉아서 과실을 향유했을 뿐이었다.


스페인의 카스티유 국왕이 파견한 클라비호(Clavijo)라는 사신이 1412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하여 티무르를 만났다. 그리고 그의 보고를 통해서 티무르의 진면목이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만, 사실 티무르의 이름은 이미 그 전부터 유럽에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떨게 했던 동방의 군주들이 모두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기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지배하던 몽골계 킵착 칸국의 군주 톡타미시(Toqtamish)는 원래 티무르의 지원으로 권좌에 올랐지만 칸이 된 뒤에 티무르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자 티무르는 1391년 볼가 강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그를 격파하고 킵착 칸국의 수도였던 사라이(Saray)를 폐허로 만들었다. 러시아의 많은 역사학자들은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것이 러시아인들의 애국적 투쟁 즉 ‘키에프인들의 피’ 때문이었다고 해석하지만, 사실은 티무르의 원정으로 인해 킵착 칸국이 결정적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티무르는 서구를 위협하던 또 하나의 대국을 강타했다. 1402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바야지드 1세가 이끄는 군대를 앙카라 부근에서 격파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바야지드는 포로가 되고 결국 1년 뒤 적국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유럽에서 티무르의 명성을 한마디로 말해주는 것이 1587~1588년에 영국의 작가 말로(Christopher Marlowe)가 쓴 ‘탬벌레인(Tamburlaine)’이라는 희곡이다. 줄거리는 주인공 탬벌레인이 페르시아 제국과 터키와 아프리카를 정복하고, 마침내 자신이 신보다 더 위대하다고 외치며 ‘꾸란’을 불태우는데, 오히려 그것이 그의 저주가 되어 다음 해에 사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희곡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하던 당시 영국의 지적 분위기와 부합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정복자’ 티무르는 아주 적합한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탬벌레인’이라는 이름은 페르시아어로 ‘티무리 랑(Timur-i lang)’, 즉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말을 부정확하게 옮긴 것이다. 그가 젊었을 때 한쪽 다리에 화살을 맞아 근육이 수축되어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여진 것이다. 1941년 학자들이 사마르칸트에 있는 티무르의 무덤 구리 미르(Gur-i Mir)를 열어서 그의 시신을 조사했다. 특히 게라시모프(M. M. Gerasimov)라는 소련 학자는 티무르의 해골을 근거로 그의 얼굴을 복원했으며 생전에 절름발이였다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티무르의 무덤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전해져 오던 전설이 있었다. 그것은 누구라도 티무르의 무덤을 열면 그 나라에 파멸이 닥치리라는 것인데, 정말 그의 무덤이 개봉된 사흘 뒤에 독일의 소련 침공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 유물을 기초로 복원된 티무르 흉상.
 

이처럼 칭기즈칸을 무색케 할 정도였던 희대의 정복자 티무르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자기 스스로를 ‘칸(khan)’이라고 부를 수 없었던 것이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등장한 이래 그의 후손이 아니면 누구도 ‘칸’을 칭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유라시아 전 지역에 통용되는 불문율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티무르조차도 칭기즈칸의 후손 가운데 하나를 허수아비 칸으로 내세우고, 자신은 칭기즈칸 일족의 여자와 혼인한 뒤 ‘구레겐(g?regen)’, 즉 부마(駙馬)라는 칭호로 만족해야 했다.


티무르의 최종 목표는 몽골세계제국을 자신의 힘으로 재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몽골제국은 이미 분열되고 약화되어 옛날과 같은 영광은 오래전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가 유라시아 각지를 원정했던 까닭도 바로 사라진 제국의 영광을 부활시키려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몽골제국의 본부가 있었던 중국을 자신의 최종 목표로 삼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1405년 그는 총동원령을 내려 군대를 소집하고 드디어 중국원정을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은 명나라의 영락제(1402~1424년)가 통치하고 있었다. 물론 영락제는 몽골에 대한 5차례 친정(親征), 환관 정화의 인도양 원정 등으로 중국사에서도 보기 드문 공격적인 군주였지만, 집권 초기의 상황은 상당히 불안했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였던 건문제를 시해하고 즉위했기 때문에 그의 집권에 대해 내부의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다. 이런 처지의 영락제가 수십 년 동안 원정을 통해서 단련된 티무르의 기마군단을 막아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고 북상하던 티무르가 시르다리아 강가에 위치한 오트라르(Otrar)라는 변경도시에서 갑자기 사망하고 말았고, 이로써 중국은 끔찍한 참화를 면하게 된 것이다.

티무르의 정복전은 엄청난 파괴와 살육을 수반했다. 도시는 페허로 변해버리고 높은 미나렛(이슬람 사원의 첨탑)이 있었던 곳에는 수만 명의 해골로 이루어진 탑이 쌓였다. 그 파괴의 정도는 칭기즈칸 시대를 능가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그를 문명의 ‘도살자(butcher)’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가 파괴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건설자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수도로 삼은 사마르칸트는 세계 각지에서 끌어모은 기술자들과 재물로 화려하게 장식되기 시작했다. 말로의 희곡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내 고향 사마르칸트는 대륙의 가장 먼 곳까지 유명해지리라. 그곳에 나의 왕궁이 세워질 터인데, 그 빛나는 탑으로 인해 하늘이 무색해지고 트로이의 탑이 떨치는 명성도 지옥으로 떨어지리라.’

 

 

그는 사마르칸트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고, 도시 주변에 있는 촌락들에 당시 이슬람권 최대의 도시인 ‘카이로’‘다마스쿠스’‘바그다드’‘시라즈’ 등의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에는 거대한 건축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대표적인 것이 자신의 무덤인 구리 미르, 그리고 부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하는 비비 하늠(Bibi Khanim) 모스크이다. 이 건축물들은 단지 무덤이나 모스크의 용도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었다. 사원, 학교, 수도원, 묘지, 병원, 호텔 등이 연결된 일련의 콤플렉스 빌딩이었다.

티무르의 후손들은 조상의 군사적 천재성은 물려받지 못했지만, 건축을 장려하고 예술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는 티무르를 능가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지금도 사마르칸트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레기스탄’이라는 중앙광장이다. 혹자는 베니스의 산 마르코 광장을 빼놓고는 중세 어느 곳에서도 사마르칸트의 레기스탄 광장에 견줄 만한 곳을 찾아볼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그곳에는 세 개의 커다란 건축물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울룩 벡’ ‘시리 도르’ ‘틸라 카리’라는 이름의 세 마드라사가 그것이다.

마드라사는 ‘신학교’를 뜻하기 때문에 이들 건물이 신학교이자 동시에 모스크의 용도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울룩 벡 마드라사의 건설자인 울룩 벡(1449년 사망)은 티무르의 손자였는데, 1428년 그곳에 반경 36m의 천문관측대를 건설하였다. 1437년 그는 자신의 관측을 토대로 1년의 길이를 계산했는데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정확하게 58초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으로, 이 기록은 후일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경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학문의 세계에 몰두하느라 정치는 뒷전이었고 결국 자기 아들에 의해 살해되는 운명을 맞고 말았다.


▲ 폐허로 남아 있는 비비 하늠 모스크.

사마르칸트는 티무르의 수도였지만 그가 사망한 뒤에는 오늘날 아프간의 헤라트로 도읍이 옮겨졌다. 그곳은 처음에 티무르의 막내아들이자 후계자인 샤루흐(Shah Rukh·1447년 사망)가 다스렸고, 1469년부터 1506년까지는 후세인 바이카라(Husayn Bayqarah)라는 인물이 통치하면서 일약 이슬람권 최고의 문화도시가 되었다. 그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각지에서 시인, 화가, 종교인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란과 터키 문학사에서도 이름이 높은 자미(Jami·1414~1492년)와 나바이(Navai·1441~1501년), 세밀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비흐자드(Bihzad·1450~1535년) 등은 당대의 가장 대표적 인물이었다. 이를테면 15세기 후반의 헤라트는 전쟁과 혼란의 한가운데에 홀로 남겨진 안식처이자 오아시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도시의 안정과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500년을 전후하여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의 국제정세가 급격하게 요동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나타났는데, 하나는 북쪽의 초원에서 ‘우즈베크’라는 새로운 유목민 집단의 남하이고, 또 하나는 이란 서북부 지방에서 ‘사파비(Safavi)’라는 신비주의 교단을 핵심으로 하는 세력의 출현이었다. 이들은 각각 중앙아시아와 이란을 장악한 뒤 이슬람권의 패권을 두고 쟁패를 벌이게 되었다. 결국 북쪽과 서쪽에서 가해지는 압력에 견디지 못한 티무르의 후예들은 사마르칸트와 헤라트를 버리고 동남쪽으로 밀려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바부르(Babur·1483~1530년)였으니 그가 바로 인도를 정복하고 무굴제국을 창건한 주인공이었던 것이다. ‘무굴’이라는 명칭도 사실 따지고 보면 ‘몽골’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바부르를 비롯한 티무르의 후손들은 자기들이 ‘몽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주위의 이란이나 인도의 주민들은 여전히 그들을 ‘야만적’인 유목민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바부르와 그의 후손들은 정복자로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죽느냐 사느냐 목숨이 걸린 전투를 밥 먹듯이 치르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여 비망록을 남겼는데, 그것을 당시의 문학어인 페르시아어가 아니라 자신의 모국어인 투르크어로 기록했다. ‘바부르 나마(Babur Nam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글은 지금까지 중세 투르크 문학의 금자탑으로 여겨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도를 통치한 그의 계승자들, 예를 들어 아크바르(치세 1556~1605년)와 자항기르(치세 1605~1627년)와 샤 자한(1628~1658년) 같은 사람도 모두 고도의 문학적 수준을 자랑하는 글을 집필하거나 타지마할과 같은 위대한 건축물을 세운 것을 보면, 문화의 보호자로서 티무르 일족의 면모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명맥을 이어갔던 것을 알 수 있다. ▒


 

▲ 축성 장면을 그린 비흐자드의 세밀화.
비비 하늠 모스크의 전설

비비 하늠 모스크의 건축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건물이 한창 지어지는 도중에 티무르는 인도로 원정을 떠났고, 건축가 한 사람이 비비 하늠을 너무 사모한 나머지 건물을 지을 생각은 하지 않고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비비 하늠이 예쁘게 색칠한 40개의 계란을 그에게 갖다 주면서 색깔은 달라도 맛은 다 마찬가지라고 하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공사에 전념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자 얼마 지난 뒤 그 건축가는 40개의 호리병을 갖고 와서 내놓았는데 그 가운데 39개에는 물이, 나머지 한 개에는 포도주가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비비 하늠이여! 이들은 모두 똑같이 보이지만 나를 취하게 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페르시아 출신 장인이 비비 하늠과 사랑했다가 티무르에게 들통이 나서 미나렛 꼭대기까지 올라간 뒤 거기서 뛰어내려 도망쳤다고 하기도 한다. 109m×167m의 장방형의 큰 규모에 입구 현관의 높이만 30m에 이르는 거대한 건축물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그럴싸한 일화들도 지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진으로 인해 대부분이 무너져 원래의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18) 무슬림들의 마음을 지배한 신비주의 교단의 성자들
이슬람의 눈부신 확장은 신비주의자‘수피’들이 이룬 기적

사치사회에 대한 반동으로 금욕과 고행 외치는 수피즘 등장
무슬림들의 지지 받으며 세력 확장하고 대중운동으로 발전

기존 율법교단과 충돌하며 독자교단 형성, 다양한 형태로 발전
병자치유 등 ‘기적’행하며 이교도의 땅으로 가 이슬람 전파

 

▲ 메카 성지순례에서 아라파트산에 운집한 참배객들.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있었던 인질 피랍사건으로 전국이 호되게 홍역을 앓았다. 이 사건은 정치적 관점에서 볼 때 테러집단의 불법적 인질극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과 충돌이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문명의 충돌’을 운운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상 이 두 종교가 얼마나 자주 부딪쳤고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는가는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도대체 현재 지구상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을 신봉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특정 종교의 신도 수는 어느 기관에서 제시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차가 날 수 있기 때문에 예민한 문제이긴 하지만, 교단과는 무관한 비교적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브리태니커 2003년판 연감에 근거한다면 전 세계 기독교도는 20억명, 무슬림은 12억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전세계 인구를 60억명이라고 할 때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기독교,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이슬람을 믿는 셈이다. 현재까지는 기독교의 수적 우위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지만, 이슬람의 놀라운 팽창률과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한 기독교도의 증가율을 감안하면, 앞으로 반세기 이내에 양자 사이의 관계가 역전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슬람의 이러한 놀라운 팽창이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이라는 식의 강압과 협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분명히 밝혀졌다. 과거 그같은 오해의 이면에 종교적인, 특히 서구의 기독교적 편견이 작용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같은 편견은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기독교의 정도(正道)에서 일탈한 사이비 종교 정도로 생각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늘날 국제정치에서의 대결적 구도로 말미암아 아직도 대중적으로는 이같은 편견이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슬람에 대한 기존 시각을 모두 오리엔탈리즘적이라고 비판하는 태도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다가 자칫 객관적 균형감각을 잃고, 이슬람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부정적 측면마저도 옹호하는 입장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과거 이슬람의 팽창을 가져온 것이 ‘칼’의 위력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이었을까. 이슬람의 성공은 여러 지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원인도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다양하고 복잡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슬람이 단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영혼에 호소하는 ‘종교’라고 한다면, 그것이 만약 사람들의 신앙적 갈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어떤 영적인(spiritual)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힘은 결코 율법(shariah)에서 나올 수는 없었다. 이슬람의 율법은 어느 종교보다도 체계적이고 정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율법은 도덕적 기준으로 사회를 규율하고 유지하는 기능을 갖고 있을 뿐, 신자들 개개인의 종교적 열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런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수피(sufi)’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신비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대자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구도자적 모습을 통해서 무슬림의 종교적 지향점을 제시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억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는 민중봉기에 앞장서기도 하고, 때로는 이교도에 대한 ‘성전’을 외치다가 ‘순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은 어떤 역사적 맥락 속에서 생겨났으며, 이슬람의 팽창에는 어떤 역할을 한 것일까.


‘수피’라는 말은 원래 아랍어에서 ‘양모로 짠 거친 겉옷’을 뜻하는 ‘타사우프(tassa wuf)’라는 단어에서 기원했다. 즉 세속적 사치나 명리를 초개처럼 버리고 오로지 절대자 신과의 합일을 위한 길에 자신을 헌신하는 구도자를 가리켰다. 처음에는 개인적 현상으로 시작된 것이 점차 종교적 운동으로 확대되고 나중에는 거대한 교단으로까지 발전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총칭하여 학자들은 ‘수피즘(Sufism)’이라고 부른다. 후일 수피즘이 이슬람권으로 널리 퍼진 뒤 유명한 수피들의 생애나 일화를 모아놓은 ‘성자전’이 많이 씌어졌는데, 거기에는 초기 수피들의 면모가 잘 묘사되어 있다. 이들은 금욕과 고통이 오히려 자신을 신에게로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자리에서는 거적때기로 몸을 덮고 벽돌로 베개를 삼는 것을 기뻐했으며, 입고 다니는 옷에 이가 우글거리는 것을 오히려 행복으로 여겼던 것이다. 심지어 신발조차도 신으로 가는 길을 차단하는 ‘베일’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금욕과 고행은 방법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들의 궁극적 목적은 ‘신과의 합일’이었고 이것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절대적 사랑을 가장 잘 표현했던 초기의 수피가 8세기 이라크 지방의 바스라에 살던 라비아(Rabia)라는 여자였다. 그녀는 대낮에도 거리에서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손에는 물통을 들고 다녔다고 한다. 사람들이 그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이 불로 천국을 태우고 이 물로 지옥불을 꺼서 이 두 개의 베일을 모두 없애고 싶다. 그러면 나는 천국에 대한 희망에서도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서도 아닌, 오로지 사랑하는 마음에서 신을 경배할 수 있지 않겠는가?” 봄이 되면 그녀는 정원에 피어난 아름다운 꽃을 보지 않으려고 창문을 꼭꼭 닫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오로지 봄과 꽃을 창조한 신을 묵상하는 일에 몰두했다고 한다.


초기 수피들의 이러한 언행은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을 잘 보여주었고 또 후일 수많은 수피의 모범이 되었다. 수피와 신의 관계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의 관계로 인식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을 위해 자신을 ‘소멸’시킴으로써 그 안에서 ‘영원’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수피 시인들은 나방과 촛불의 비유를 곧잘 인용했다. 즉 촛불을 향해 뛰어들어 자신의 몸을 태우는 나방처럼 신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없애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신과의 합일’에 도달하는 것이다.

▲ 이란 동북부의 도시 마쉬하드에 있는 시아파 성자(聖者) 이맘 레자의 성묘로 들어가는 입구.
 

이처럼 이슬람 신비주의의 출현은 칼리프의 지위가 세속군주로 변모하고 정복지역의 확장과 함께 엄청난 부가 유입되면서 사치를 구가하던 사회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 출현했다. 세속을 초월한 구도자로서 그들은 수많은 무슬림의 지지를 받아 점점 더 많은 추종자를 얻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시대가 지나면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났고 그들은 마침내 세속적·종교적 질서에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기존 체제와 수피즘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했으니,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알 할라지(al-Hallaj)의 처형이었다. 그는 “나는 진리다(Ana al-Haqq)”라는 유명한 말을 함으로써 신성모독죄에 걸려 922년 바그다드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은 수피였다. 그의 전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하루는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제자가 찾아와 ‘사랑이 무엇입니까?’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는 ‘너는 내일, 그리고 모레, 그리고 그 다음날 그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날 형리들은 그의 손발을 잘랐고, 이튿날에는 그를 형틀에 매달았으며, 마지막 날에는 그의 머리를 자르고 시신을 태운 뒤 그 재를 바람에 날려버렸다.”

할라지의 ‘순교’는 신비주의와 율법적 교단의 대립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당시 이슬람 사회가 겪고 있던 분열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무슬림 공동체를 이끌고 가는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무슬림의 깊은 신앙적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율법학자들, 신과의 합일을 외치며 고행과 빈곤의 생활을 실천함으로써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지만 국가로부터 언제나 질시를 받는 수피들. 무슬림 사회는 이 이원적 대립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요청되던 양자의 화해는 바로 가잘리(Ghazzali·1111년 사망)라는 탁월한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그는 이미 젊어서 율법과 신학에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바그다드에 있던 최고의 신학대학에 교수로 취임했지만, 곧 영적 파탄에 직면하게 되면서 모두가 부러워하던 교수직을 던져버렸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며 수련을 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가 찾은 해답은 수피의 길이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수많은 저작을 통해서 알렸는데, 특히 대표작 ‘종교학의 부흥’을 통해 율법과 수피즘의 성공적 결합을 설파했다.


이처럼 소수의 영적 운동에 의해 시작된 수피즘이 학자단의 공인을 받게 되면서 서서히 독자적 교단을 형성해 갔다. 이렇게 해서 12~13세기가 되면 유명한 장로(셰이흐)를 ‘사부’로 모시는 ‘제자’들이 조직되었고, 교단의 세력을 확대할 때에는 교주가 임명하는 대리인을 각 지역에 파견하여 지부를 설치하였다. 교단의 장로가 죽으면 그가 지명한 제자가 뒤를 잇는 식으로 ‘사슬(silsila)’을 이루었고, 후대에 가면 한 가족 내에서 세습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러한 교단에는 도시의 수공업자와 상인, 농촌의 농민도 광범위하게 참여했고, 이들의 헌금에 의해 교단이 운영되고 확장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교단의 형성은 수피즘을 일종의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게 되었다.

수피교단은 여러 지역에 다양한 형태로 출현했다. 교단은 창시자가 주창한 구도의 방법이나 사상에 따라 나뉘게 되었으며 또한 창시자의 지역·문화·계층적 특징이 반영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어떤 교단은 보다 지배층과 가까워 정치적 참여현상이 두드러지는가 하면, 어떤 교단은 신비한 체험이나 기이한 행동을 강조해 날뱀을 먹거나 칼이나 창으로 몸을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음을 보이기도 했다.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명상적인 시를 읊는 의식을 행하는 교단도 있었다.

▲ 무아지경에서 회전하면서 영적인 고양(高揚)을 느끼게 하는 메블레비야 교단의 독특한 의식.
 

이들은 엄격한 교리나 율법보다는 개인적 신앙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교도들이 율법에 어긋나는 고유한 관습을 버리지 않고도 이슬람으로 개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13세기 몽골제국의 출현과 함께 압바스 왕조가 무너지고 이슬람권에서의 정치적 통일성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슬람이 더욱 활발하게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같은 신비주의 교단과 거기에 속한 수피들의 활동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7세기 전반 무하마드가 출현한 직후 맹렬한 팽창과 비교하여 13~14세기에 보인 이같은 경향을 ‘제2의 물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신비주의 교단의 수피들은 스스로를 신과 동행하는 사람, 즉 ‘신의 벗’이라고 하며 여러 가지 ‘이적(異跡)’을 행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성자전을 읽어보면 이러한 이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죽은 자를 살리는 것, 시간을 늘이거나 줄이는 것, 바다를 가르고 물 위를 걷는 것, 하늘을 나는 것,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내는 것, 예언하는 능력 등이 그것이다. 이런 기적들이 과연 사실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문제는 많은 무슬림이 어려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고 또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었다는 데에 있다. 또한 이러한 ‘성자’들이 이교도의 땅으로 가서 ‘이적’을 통해서 병자를 치유하고 사막에 물을 끌어오며 문명의 이기(利器)를 소개해 줌으로써 이슬람의 경계를 확장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성자가 죽어서 묻힌 곳은 ‘성묘(聖墓)’가 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을 참배하고 기도를 올리며 자신의 희망을 빌었던 것이다. 성묘가 거기에 묻힌 성자의 특별한 능력을 보존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은 뒤 자신도 성자 옆에 묻혀 그의 축복과 중개로 천국에 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오늘날 유라시아의 초원과 사막과 오아시스에 무수하게 산재해 있는 ‘성묘’들은 바로 이슬람의 확장이 ‘칼’이 아니라 신비주의 교단에 속했던 ‘성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임을 보여주는 산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란 북부 비스탐 출신의 수피 아부 야지드(Abu Yazid)의 일화

그의 언행은 이해할 수 없는 비유와 기행으로 가득한데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서 ‘신과의 합일’을 설명하고 있다. “부정(否定)은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이다. 나는 사흘간 부정을 했고 나흘 만에 그것을 끝내버렸다. 첫날 나는 이 세상을 버렸고, 둘째 날 나는 저 세상을 버렸으며, 셋째 날 나는 신을 제외한 모든 것을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넷째 날 내 안에는 신을 제외한 어떠한 것도 남지 않게 되었다. 나는 너무나 심한 열망 속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그때 나를 향한 목소리를 들었다. ‘오, 아부 야지드여! 너는 나하고만 홀로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그것이야말로 제가 바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네가 나를 찾았구나! 네가 나를 찾았구나!’”

 

(19)] 몽골의 부흥과 달라이 라마
칭기즈칸 후예, 티베트 불교와 손잡고 ‘부활의 기도’

군주권 강화와 분열된 부족민 규합 위해 정신적 지주 필요
티베트 겔룩파 수장을 달라이 라마로 추대하고 불교 확대 정책

남북종단 불교 벨트 형성, 이슬람 세력 저지용 방벽 역할
몽골·티베트 막강 커넥션 과시하며 정치·군사적 영향력 행사

 

▲ 에르데니 조 사원 경내에 있는 티베트식 불탑.
 

1368년 여름, 지난 1세기 동안 중국을 지배하던 몽골제국은 마침내 그 최후를 맞이하였다. 주원장(朱元璋)이 이끄는 25만명의 반란군이 곧 수도로 진입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지막 황제 토곤 테무르는 급하게 북쪽으로 피란길에 올랐다. 수도인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고북구(古北口)라는 곳을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 그의 눈에는 저 멀리 대도의 모습이 뽀얀 안개 속에 아스라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순간 도읍지를 잃은 설움이 밀려들면서 사태를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자신의 어리석음에 가슴을 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갖가지 보석으로 정성스럽고 아름답게
완성된 나의 대도여!…
따스하고 아름다운 나의 대도여!
붉은 토끼띠의 해에 잃어버린
나의 가련한 대도.
이른 아침 높은 곳에 오르면 보이던
너의 아름다운 연무(煙霧).
나는 울면서 떠날 수밖에 없었노라.…
아홉 가지 보석으로 완성된
나의 대도성이여.…
내가 겨울을 보냈던 나의 가련한 대도,
이제 중국인이 모두 차지했구나.


토곤 테무르는 몽골 황제들의 여름수도가 있던 상도(上都)로 향했으나 애통한 마음으로 화병을 얻었는지 그곳에서 곧 사망하고 말았고, 그를 호종(護從)하던 비빈과 귀족들은 뒤이어 추격해온 명나라 군대에 졸지에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인지 황태자만은 용케 탈출에 성공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의 광활한 초원으로 가서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도모하게 되었으니, 그가 바로 토곤 테무르와 고려 여인 기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아유시리다라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인들은 중국을 상실하고 초원에 남아 나라의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지만 황제의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대신 유목민 집단을 지휘하던 수령들이 발호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실력자들은 ‘타이시(tayisi·太師)’라는 칭호를 내세운 채, 허울뿐인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388년 칭기즈칸의 적통을 잇는 황제마저 피살된 뒤, 몽골인들은 동부와 서부로 나뉘어 서로 대립했을 뿐만 아니라 각각 그 안에서도 서로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황금씨족’이라고 불리던 칭기즈칸 일족의 권위는 거의 불가침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막강한 권신들조차 스스로 칸(khan)을 칭하지는 못했고 명목상일지언정 칭기즈칸의 후손을 칸으로 세울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 17세기 후반에 나온 ‘에르데니인 톱치’(일명 몽골원류)라는 책에 기록된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
 

아무튼 우리는 이제까지 14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역사를 설명할 때 중국인의 관점을 아주 충실하게 반영해왔다. 즉 몽골인들이 중국에 세운 ‘원나라’는 1368년에 망하고 그 후 그들은 분열과 혼란 속에서 침체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칭기즈칸과 쿠빌라이로 상징되는 ‘대몽골’의 영광은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몽골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한문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몽골어로 된 자료를 읽어보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우리가 막연히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도 무비판적으로 계속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확신하게 된다.


우선 당시의 몽골인들은 몽골제국이 중국의 한 왕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중국이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국의 일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은 중국인이 만리장성 이남을 다시 빼앗았다고 해서 그것을 곧 제국의 ‘멸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영토가 축소된 것뿐이었다. 토곤 테무르의 ‘비가(悲歌)’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것은 망국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가꾸어온 두 수도, 즉 ‘시원하고 멋진 개평 상도’와 ‘따스하고 아름다운 대도’를 상실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어로 된 연대기들은 1368년을 분수령으로 황통이 끊어지고 제국의 명맥이 단절된 것으로 기록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몽골인이 전과 같은 기세를 상실하고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명나라 3대 황제인 영락제는 1410년부터 1424년까지 전후 5차례에 걸쳐 매번 50만명이라는 엄청난 군사를 동원하면서 대원정을 감행했지만 끝내 몽골의 위협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영락제의 과도한 정책으로 인해 중국은 재정적으로 피폐하게 되었고 몽골은 오히려 더욱 군사화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449년에는 중국의 황제가 에센(Esen)에게 포로로 잡히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역사상 ‘토목보(土木堡)의 변(變)’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당시 명나라의 군사적 무력성을 그대로 잘 드러내준다.


15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그동안 부족 수령의 발호로 인해서 약화되었던 칸의 권력이 다시 회복되고 강화되는 추세가 나타났다. 특히 1488년 바투 뭉케라는 인물이 즉위하면서 중앙집권화는 가속화되었다. 그는 재위 37년 동안 고비사막의 남북에 흩어져 있던 여러 부족을 통합한 뒤 휘하의 유목민을 모두 6개의 ‘만호(萬戶)’로 재편하고 그것을 자식들에게 분봉해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몽골 유목민에 대한 칭기즈칸 일족의 지배권이 다시 확립되었다. 그는 스스로를 ‘다얀 칸(Dayan Khan)’이라고 불렀는데 ‘다얀’은 바로 ‘대원(大元)’이라는 발음을 옮긴 것이니, 이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지배한 쿠빌라이 제국의 부활이 바로 자신의 정치적 목적임을 분명히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뒤를 이어서 16세기 전반과 중반에 활동한 알탄 칸(Altan Khan)이라는 인물은 명나라 북변(北邊)에 대해 끊임없는 약탈과 공격을 가했는데, 한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1542년 38개 주현(州縣)을 공격해 20여만명을 살육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1550년에는 토곤 테무르가 쫓겨갔던 바로 그 고북구를 통해서 남하해 명나라의 수도 북경을 포위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이를 두고 ‘경술지변(庚戌之變)’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관광객들이 흔히 보는 북경 외곽의 엄청난 만리장성도 바로 이처럼 계속되는 몽골의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축성된 것이었다.

 

▲ 겔룩파의 창시자인 총카파(1357년생)가 태어난 곳에 세워진 쿰붐사원.(현재 칭하이 성 시닝에 있음)
 

15~16세기 몽골인들이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만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다얀 칸의 노력으로 초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부족 수령들의 세력을 누르고 정치적 통합을 이룩한 칭기즈칸 일족은 유목민의 고질적인 분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들을 통합할 수 있는 어떤 정신적인 지주 혹은 이념 같은 것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적절한 해답을 던져준 것이 바로 티베트 불교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1578년 알탄 칸과 제3대 달라이 라마와의 만남은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원래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경이었고 송첸 감포(620~649년)나 티송 데첸(775~797년)과 같은 군주들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크게 융성했으나 9세기에 접어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1세기 중반 인도의 고승 아티샤의 도래와 함께 다시 흥륭했고, 14세기에는 기존의 모든 경전과 논설을 번역한 칸주르(Kanjur)와 탄주르(Tanjur)가 완성되고, 각 사원과 스승을 중심으로 여러 개의 종파가 형성되었다. 무엇보다도 주목되는 것은 총카파(1357~1419년)에 의해 개창된 겔룩파(Gelugpa)라는 개혁교단이었는데, 황모파(黃帽派)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진 이 교단은 느슨해진 사원과 승려의 규율을 강화하고 지니치게 밀교적인 해석을 경계하였다.

1578년 티베트 고원 북부에 위치한 청해(靑海) 부근에서 알탄 칸과 만난 달라이 라마는 바로 이 겔룩파 교단의 수장이었다. 그의 본명은 소남 갸초. 겔룩파의 교세가 빠른 속도로 신장되고 있기는 했으나 아직도 확실한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소남 갸초는 알탄 칸과 같은 강력한 세속군주의 지원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알탄 칸 역시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군주권을 강화하고 분열적인 부족장들을 규합하기 위한 이념을 필요로 했다. 청해에서의 회견은 바로 이 두 사람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알탄 칸은 소남 갸초에게 몽골어로 ‘바다와 같이 넓다’는 의미를 지닌 ‘달라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주었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잘 아는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을 뜻하는 티베트어이다. 소남 갸초는 자기에 앞선 두 명의 스승에게 동일한 칭호를 추존했고 자신은 제3대가 되었다. 달라이 라마라는 지위의 계승은 불교의 ‘전생(轉生)’이라는 교리를 전제로 가능한 것이니, 윤회를 거듭하는 다른 모든 생명처럼 달라이 라마도 죽으면 새 생명을 입어 어린아이로 태어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생존해 있는 14대 달라이 라마는 소남 갸초의 11번째 환생인 셈이다.


아무튼 1578년 이후 몽골 유목민 사회는 빠른 속도로 티베트 불교로 개종해갔다. 물론 불교는 그 전에 전래되었고 군주들의 보호를 받으며 육성되긴 했지만 16세기 후반 이후 비로소 거의 모든 몽골인이 불교도로 바뀌게 된 것이다. 1585년에는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가 있던 카라코룸에 에르데니 조(Erdeni Dzo)라는 거대한 사원이 건설되었다. 17세기 중반에는 동서 몽골의 대표적인 수령들이 한자리에 모여 회의를 열어, 몽골의 모든 귀족가문이 적어도 아들 하나는 라마승으로 출가시키기로 합의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변화는 몽골인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티베트에서도 겔룩파는 다른 교단을 누르고 절대적 우위를 확보했다.


16세기 후반에 일어난 이 사건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무엇보다도 먼저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의 몽골 초원에서 티베트 고원으로, 즉 북에서 남으로 종단하는 거대한 불교 벨트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이슬람 세력의 동방 진출을 저지하는 방벽 역할을 하면서 이슬람이 몽골과 만주 지방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한 가지 의미는 몽골·티베트 커넥션의 형성이다. 이 커넥션의 초보적인 형태는 이미 몽골제국이 출현한 13세기에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 뒤 사실상 명맥조차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제 칭기즈칸 일족의 정치·군사적 후원으로 겔룩파의 헤게모니와 달라이 라마 제도가 확립되면서 이 커넥션은 그들에게 통합력을 가져다 주었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유라시아에서 다른 어떤 민족도 넘보기 힘든 막강한 정치·군사·종교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제국을 건설한 만주족이 당면한 가장 큰 문제도 바로 어떻게 하면 이 거대한 커넥션을 끊느냐 하는 것이었다. 청제국이 마주해야 했던 도전인 셈이다. 그러나 청제국은 그 도전을 극복함으로써 중국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보는 ‘중화인민공화국’은 바로 그 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고 있는 것이다. ▒
 


 

토목보의 변

대군 이끈 명나라 황제, 몽골족 쫓다 생포 당해


에센은 원래 서몽골에 속하는 부족의 수령이었는데 동서 몽골 전체를 통합한 뒤 중국 북변에 대한 약탈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1449년 여름 산서성 대동(大同)이라는 곳을 공격했고 이에 맞서서 명나라 조정은 대군을 파견하였다. 당시 군사적인 지식이 거의 없던 왕진(王振)이라는 환관의 부추김을 받아 직접 군대를 지휘하고 나선 정통제(正統帝)는 거짓으로 도주하던 에센을 추격하러 가다가 오히려 역습을 받아 토목보(土木堡)라는 곳에서 포위되어 생포되고 말았다. 에센조차 기대치 않던 놀라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는 중국 측으로부터 거대한 보상을 기대하고 협상을 벌였으나 명나라 조정은 정통제의 동생을 황제로 앉히고 오히려 협상 자체를 거부하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말하자면 대어를 낚아놓고 입맛만 다신 채 젓가락도 대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결국 에센은 별다른 대가도 받지 못한 채 정통제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외교적 실책으로 인해 가뜩이나 불만에 차 있던 몽골인들은 에센이 칭기즈칸의 후예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칸’을 칭하자 그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고 그를 축출해버렸다. 중국의 황제를 생포한 에센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몰락을 자초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아니할 수 없다.

 

(20)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진 러시아의 동방 진출
러시아 “모피를 확보하라” 시비르강 넘어 東으로 東으로

몽골 지배 굴욕 벗고 1582년 시베리아 진출 길 열어
60년 만에 오호츠크해까지 영토 확장, 유럽 모피시장 장악

러시아의 무자비한 약탈에 맞서 아무르족 중국에 지원 요청
조선도 효종 때 두 차례 원정군 파견해 ‘나선(러시아)정벌’

東몽골 격파하고 급부상한 ‘준가르’ 출현으로 중앙유라시아 세력 재편
중국,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맺고 준가르와 명운 건 전쟁

 

▲ 예르막의 시베리아 정복을 묘사한 그림. 바실리 수리코프 1895년작.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박물관 소장.)
 

러시아의 영토는 1700만㎢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다. 캐나다가 2위이며, 면적이 엇비슷한 중국과 미국이 그 뒤를 잇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상당수의 나라가 독립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여전히 1위를 고수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시베리아’라는 거대한 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582년 예르막(Yermak)이 이끄는 800여명의 코사크인이 우랄산맥 부근을 흐르는 시비르(Sibir)강을 건너 시베리아 진출의 길을 열어젖힌 사건은 러시아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오랜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가 드디어 ‘타타르의 멍에’를 벗어던지고 본격적인 ‘동방 진출’을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시베리아’라는 이름도 실은 이 ‘시비르’라는 강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당시 모스크바 정부의 특별한 양해 아래 시베리아 지방과 모피무역에 종사하던 스트로가노프(Stroganov) 가문은 독자적인 민병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예르막도 그 아래에서 일하던 일종의 용병대장이었다. 그는 원래 돈강과 볼가강 유역에서 약탈을 하며 지내던 코사크인의 ‘두목(ataman)’이었는데, 1582년 시비르강을 건너 시비르 칸국의 쿠춤 칸(Kuchum Khan)을 격파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로부터 불과 2~3년 뒤 그는 토볼강가에서 몽골군에 의해 포위되어 피살되고 말았지만 바실리 수리코프의 그림에서 드러나듯이 후일 그는 민담과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시작된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은 1649년 마침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오호츠크해에 도달할 때까지 부단히 계속되었고, 이에 따라 러시아의 영토도 엄청나게 넓어져 갔다. 대략 1300만 ㎢로 추산되는 시베리아는 러시아 전 영토의 4분의 3에 해당한다. 시비르강을 넘어선 뒤 오호츠크해에 도달할 때까지 60~70년 동안 매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반도만한 영토를 하나씩 확보한 셈이었다.


그렇다면 러시아인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시베리아로 진출했으며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신속하게 뻗어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이 시베리아로 나간 까닭은 한마디로 말해서 모피였다. 담비, 수달, 밍크 같은 동물의 모피는 혹독한 겨울을 견뎌내야 하는 러시아인은 물론 유럽 귀족들에게도 인기가 높아 비싼 가격으로 팔려나갔다. 후일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 대륙으로 진출해 그곳의 모피를 들여올 때까지 러시아는 유럽의 모피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으며, ‘부드러운 금’이라고 불리던 모피를 통한 국가의 재정수입은 1589년 3.75%, 1605년에는 11%에 달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베리아 진출이 본격화됨에 따라 모피 공급의 원천인 동물들은 빠른 속도로 고갈되어 갔고 새로운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 동쪽으로 동쪽으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현지 주민들로부터 모피를 일종의 세금처럼 받았고 이를 ‘야사크(yasak)’라고 불렀다. 원래 ‘야사크’라는 말은 몽골어의‘법령’을 뜻하는 ‘자사크(jasaq)’에서 유래했는데 16세기 이후 시베리아에서는 ‘모피세’와 동의어로 사용된 것이다.


러시아인의 시베리아 진출에 큰 도움을 준 것은 그곳의 독특한 수로체계(水路體系)였다. 혹독하기로 이름난 시베리아의 겨울에 사람들의 활동이 어려우리라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사실 여름의 시베리아도 이동하기에는 결코 만만치 않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진창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평한 시베리아 대평원에는 크고 작은 강줄기가 마치 바둑판처럼 얽혀 있다. 큰 강들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흘러 북빙양으로 들어가고, 그 사이로 작은 강들이 동서로 흐르면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수로를 이용해 여름에는 배를 타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강 위로 썰매를 타고 이동했던 것이다.


시베리아 지도를 보면 토볼스크, 톰스크, 예니세이스크, 셀렝긴스크, 이르쿠츠크 등 크고 중요한 도시들이 모두 강의 이름을 딴 것도 바로 이러한 사정 때문이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대체로 강과 강이 만나는 교차점에 목책(木柵)으로 지어진 성채인 ‘오스트로그(ostrog)’라는 것에서 기원하였다. 당시 러시아 본토에서 가난한 농민, 범법자 또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 등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동쪽으로 이주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에는 여전히 몽골-타타르 계통의 부족이 흩어져 있고 이들은 이주민을 대상으로 자주 약탈을 자행하였다. 러시아 정부로서는 약탈을 막고 이주민들을 보호하는 최소한의 군대와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에 ‘보에보다(voevoda)’라 불리던 군관을 파견하여 오스트로그를 거점으로 지배력을 장악해나갔던 것이다. 이처럼 초기 러시아의 시베리아 지배는 군사식민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1587년에는 토볼스크가 세워지고, 1604년에는 톰스크, 1619년 예니세이스크, 1652년 이르쿠츠크, 1632년 레나강 유역에 야쿠츠크가 건설되고, 마침내 1649년에는 오호츠크에 도달한 것이다. 당시 러시아인에게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춥고 척박한 환경에서 어떻게 식량을 확보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야쿠츠크를 일종의 사령부로 삼아 일련의 탐사대를 아무르강 유역으로 파견했다. 1643년에는 포야르코프(V.Poyarkov)가 132명의 대원을 이끌고 탐사에 나섰는데, 1645년 귀환한 뒤 살인을 자행하고 인육을 먹었다는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었고 자신도 그 같은 혐의를 부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식량이 떨어진 극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이었겠지만, 현지인 사이에서는 식인종이 출현했다는 소문까지 퍼졌으니 사실 무근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셈이다. 뒤이어 1648년에는 하바로프(E.Khabarov)의 탐사가 이루어졌는데, 이때 그는 아무르강 상류에 있던 현지민을 공격하여 약탈과 방화와 살해를 자행해 악명을 떨쳤다. 오늘날 극동의 도시 하바로프스크는 바로 이 잔혹한 탐험대장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1653년에는 스테파노프(O.Stepanov) 탐험대가 파견되어 숭가리, 우수리 등의 강을 오가면서 모피세와 식량을 거두어가기 시작했다. 이처럼 러시아인들의 갑작스런 출현은 아무르 지방의 현지인에게는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고, 궁지에 몰린 그들은 중국에 지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중국에는 왕조 교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변이 막 종료되었다. 1644년 한족의 왕조인 명나라가 망하고 만주족이 건설한 ‘대청(大淸·Daicing)’이 중국의 새로운 주인이 된 것이다. 이제 막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고 중원에 들어온 만주족은 중국을 정리하기에도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저 멀리 아무르강 유역까지 많은 군대를 보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에 대한 원병 요청은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서 원정군을 파견하게 된다. 1654년에는 변급(邊)을 사령으로 한 150명, 그리고 1658년에는 신유(申瀏)가 이끄는 262명 소총수의 파견이 있었다. 특히 1658년 6월 10일(음력) 조선과 만주 연합군은 아무르강의 지류인 숭가리강(松花江)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스테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승리를 거둠으로써 비록 잠시 동안이나마 러시아의 진출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전투의 경과는 신유가 남긴 ‘북정일기(北征日記)’라는 글에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사건은 당시 ‘나선정벌’이라 불렸고 지금도 이런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나찰(羅刹)’, 조선에서는 ‘나선(羅禪)’이라는 글자로 표기된 단어는 ‘루스(Rus)’라는 말을 옮긴 것으로 ‘나선정벌’은 ‘러시아 정벌’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파병의 규모도 그렇거니와 러시아 본토가 아니라 분쟁지역인 아무르강 유역에 일종의 원군으로 파견된 것인데, 이를 두고 ‘러시아 정벌’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은 과장된 표현이 아닐까 싶다. 필자는 그냥 조선시대의 ‘아무르 파병’ 정도로 부르면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무튼 러시아인의 아무르 진출은 수십 년 뒤에 재개되었고, 1680년대 초에는 알바진(Albazin)이라는 곳에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이주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은 그동안 아무르강 유역에서 러시아인의 활동이 종래 약탈적 탐험과 조사에서 이제 본격적인 식민적 지배로 전환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농경지 1000헥타르가 개간되고, 20여개의 부락이 만들어졌으며, 성인남자만 800여명에 수많은 부녀자가 거주하게 되었다. 알바진에 관한 보고를 받은 강희제(康熙帝·재위 1661~1722)는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만주족의 발원지인 동북지역 전체가 위험해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군사적 대응책을 취하였다.


▲ 시베리아 진출의 거점 도시 토볼스크의 모습.
 

1685년 그는 만주족 출신의 장군인 펑춘(朋春)과 랑탄(郞坦)의 지휘하에 기병 1000명을 포함한 4000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여기에 노무자 1200명, 대형포 30문, 소형포 15문, 소총 100정의 화력을 동원하여 알바진 공격을 감행하였다. 수적으로 열세였던 러시아군은 견디지 못하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희제의 특별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만주군은 알바진 부근에 있던 경작지를 파괴하지 않은 채 승리에 도취해 그냥 귀환하고 말았다. 그렇지 않아도 식량이 귀한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인들이 그것을 그냥 둘 리는 만무였다. 가을이 되어 곡식이 무르익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들은 다시 알바진으로 돌아와 폐허가 된 성채를 보수하고 거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희제는 할 수 없이 2차 원정을 지시했고 1686년 알바진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이미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던 러시아인을 몰아낼 수는 없었고, 전투는 교착상태에 빠지고 만다.

그런데 당시 중앙유라시아의 국제 정세는 강희제로 하여금 알바진 전투를 계속할 수 없게 만드는 긴박한 상황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그것은 몽골에서 청나라가 두려워할 만한 새로운 유목세력, 즉 ‘준가르(Junghar)’가 출현한 것이다. 이들은 파미르고원 북방에서부터 알타이산맥에 걸치는 지역, 다시 말해 몽골고원의 가장 서쪽에 거주하던 유목집단이었는데 동부 지역의 몽골인과는 방언상의 차이가 있을 뿐 언어는 동일하였지만 정치적으로는 심각한 대립관계였다. 양측의 관계는 1688년 준가르의 새로운 지도자 갈단(Galdan)이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감행하면서 파탄을 맞게 되었다. 갈단의 침공에 속수무책이 된 동몽골 사람들은 고비사막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제 고비사막 북방의 초원 전체는 갈단이라는 인물의 수중에 들어갔고 청나라는 이 막강한 신흥 유목제국을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후반 중앙유라시아의 정세는 청제국, 러시아, 준가르(몽골)라는 3자 구도로 재편되었다. 그런데 청은 러시아와 알바진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고, 준가르와 러시아는 사신들을 파견하면서 외교관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 1550년대에 몽골계 칸국들을 무너뜨리고 러시아의 동방 진출을 시작한 이반 4세(1530~1584)의 초상화.
 

강희제는 이런 상황이 가져올 파국적 결과를 정확하게 간파하였다. 만약 러시아와 준가르가 연합할 경우 청나라는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고립되어 버리고, 만주족의 지배에 반감을 갖고 있던 한족까지 반란을 일으킬 경우 왕조의 운명이 위태롭게 되리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 러시아로서는 청나라에 등을 돌리고 선뜻 준가르와 동맹을 맺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으니, 바로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교역을 위해서 이미 명나라가 망하기 전부터 접촉을 시도해왔다. 청이 들어선 뒤에도 1656년 바이코프(F.Baikov)를 파견했는데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670년에는 밀로바노프(Milovanov)가 사신으로 와서 강희제를 직접 만나 교역 의사를 전달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들이 ‘아라사(俄羅斯)’라는 나라에서 온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말은 ‘오로스(Oros)’에서 나온 것이다. 러시아인의 통역을 맡은 몽골인들이 ‘로스(Ros)’라는 단어의 처음에 있는 r발음을 잘 못했기 때문에 모음을 하나 더 추가해서 지어낸 것이었다. 강희제는 이때 비로소 알바진에 있는 ‘나찰(나선)’과 북경에 온 ‘아라사’가 같은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여기서 일석삼조의 외교적 방책을 생각해내었다. 즉 러시아 측에 교역을 허가해주는 대신, 아무르강 유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인을 귀환시키고, 나아가 러시아와 준가르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의 이러한 아이디어는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689년 청나라와 러시아 양측이 체결한 조약이 바로 네르친스크조약이었다. 이로써 강희제는 러시아를 중립화하는 데 일단 성공하고, 북방의 강적인 준가르와 제국의 명운을 건 싸움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대결은 유라시아 대륙 전체의 운명을 바꾸어놓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



신유의 ‘북정일기’에 묘사된 전투 장면


‘10일 아침 일찍 열벌마을을 출발해 흑룡강 어귀를 지나 20여리를 내려갔을 때 드디어 적의 선단과 맞닥뜨렸다. 우리는 적선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선들은 곧 돛대를 세우고 10여리를 후퇴하여 강가에 배를 모아 포진한 후 적병들은 판옥에 올라서서 아군의 동정을 일일이 살펴보고 있었다. 우리 전선이 번갈아 들락거리면서 적선과의 거리가 한 마장쯤이나 접근했을 때 일제히 대포를 쏘며 공격을 개시하자 적선들도 대포로 응수해 치열한 공방전을 거듭했다. 이때 후영ㆍ전위ㆍ중군의 모든 전선이 한꺼번에 쳐들어가 활과 총포를 무수히 쏘았다. 적병들이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총탄과 화살이 빗발치듯 떨어지니 배 위에서 총을 쏘던 적병들은 드디어 지탱할 수 없어서 모두 배 속으로 들어가 숨기도 하고, 혹은 배를 버리고 강가의 풀숲으로 도망치기도 하였다.’

 

(21)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청제국과 러시아
만주족에서 중원의 주인이 된 淸

서몽골 통합하고 급부상한 갈단 고립시키려 러와 역사적 조약
중앙유라시아 분할의 출발점… 21세기까지 영향 미쳐

만주·몽골·티베트 포함한 다민족·다문화·다인종 제국으로
몽골제국 사회군사조직인 천호제 본뜬 ‘팔기제’ 도입

 

▲ 책상에 앉아있는 젊은 강희제의 모습.(베이징 고궁박물원 소장)
 

1689년 8월 27일, 러시아와 청나라의 대표단이 네르친스크(Nerchinsk)라는 변경도시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1727년 캬흐타(Kiakhta) 조약에 의해 보완되면서 러·청 양국의 외교적인 기본틀로 기능하였다. 그런데 러시아와 청, 이 두 세력이 네르친스크에서 만난 것은 16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부단하게 진행된 유라시아 대륙의 분할과정, 즉 러시아가 대륙의 서쪽에서 흥기하여 시베리아로 진출하다가 마침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고, 만주족이 대륙의 동쪽 끝에서 일어나 중국을 정복하고 몽골을 비롯한 내륙으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인 것이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단순히 러·청 양국의 국경 설정과 교역조건에 관한 내용을 담은 단순한 문서가 아니라 21세기 오늘까지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 즉 ‘중앙유라시아의 분할’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의미를 보다 거시적인 시각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청이라는 두 제국의 탄생과 팽창 과정, 나아가 제3의 세력인 몽골의 동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만주족의 등장과 팽창에 대해서, 다음 주에는 몽골족의 동향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다.


명대 말기 동북 변경의 만주지역에는 퉁구스어를 사용하는 집단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우리나라와 중국 측 자료에는 ‘여진(女眞)’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주르첸(Jurchen)’이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며, 이들은 과거 몽골제국에 의해 멸망한 금(金)나라를 건국한 민족이다. 당시 중국인은 변경의 여진인을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 및 문화적 발전 정도에 따라 크게 세 부류로 나누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건주(建州)여진, 그 북쪽에 해서(海西)여진, 가장 먼 곳의 야인(野人)여진이 그들이다. 건주여진은 중국이나 조선의 변경과 비교적 가까웠고, 해서여진은 초원과 접하여 몽골인과 접촉이 많았으며, 가장 멀리 떨어진 삼림지대에 살던 야인여진은 주로 수렵을 생업으로 삼으며 살아가던 집단이다.


청제국의 기틀은 놓은 사람은 누르하치(Nurhaci·1559~1626년)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건주여진 출신의 수령으로 여진 집단에 대한 내적 패권은 물론 주변 몽골부족에 대한 지배권까지 확립하였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정통성을 과거 중국의 북부를 지배한 금나라에서 찾으면서 나라의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칭했으나 이 명칭은 그의 후계자인 홍타이지(Khongtaiji·1592~1643년)에 의해 ‘대청(大淸·Daicing)’으로 바뀌었다. 홍타이지는 ‘여진’이라는 이름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신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명칭을 채용했으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여러 차례 중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요동지방의 웅관(雄關)인 산해관(山海關)을 돌파하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홍타이지의 뒤를 이은 순치제(順治帝·재위 1643~1661년)는 불과 여섯 살의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에 국사는 섭정들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고의 실력자는 그의 숙부 도르곤이었다. 마침 그때 만주족에게 산해관을 돌파할 천재일우의 기회가 찾아왔다. 중국 남부에서 반란이 격화되고 이자성(李自成)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상하면서 수도가 함락되자, 위협을 느낀 산해관의 사령관 오삼계(吳三桂)가 1644년 스스로 청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자청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만주족 팔기군은 활짝 열린 산해관의 문을 통해서 북중국으로 쇄도해 들어갔고, 오삼계와 함께 이자성을 물리치고 드디어 중원의 주인이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1644년의 이 사건을 ‘입관(入關)’이라 부른다. 물론 문자 그대로 풀자면 이 말은 산해관을 통해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의미에 불과하지만, 동북방의 만주인들이 세운 청나라가 드디어 중국으로 들어와 ‘중국식 왕조’로 전환에 성공했음을 상징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어왔다. 마치 과거 몽골제국의 쿠빌라이가 1260년 카라코룸에 있던 수도를 북경 지역으로 옮기고 ‘중통(中統)’이라는 중국식 연호를 세운 것을 두고, 유목적인 몽골제국에서 중국식 왕조 원(元)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는 상징적인 계기로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만주의 황제들은 한족이 쌓아올린 전통적인 중국 문화의 위대한 수호자로 묘사되었고, 황제를 위시한 최고 지배층은 물론 만주족이었지만 국가의 통치를 위해서 만한병용책(滿漢倂用策)을 썼고, 마침내 19세기 중반 태평천국의 난이 끝난 뒤에는 황제를 제외한 최고위 집권층마저 한인으로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1644년의 ‘입관’은 청나라가 드디어 한, 당, 송, 원, 명의 뒤를 잇는 중국의 왕조가 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인 셈이다.


그러나 ‘대청(Daicing)’이라는 나라는 결코 ‘중국’의 왕조라고만 하기는 어렵다. 18세기 중반이 되면 청나라는 중국은 물론 중앙아시아, 티베트, 몽골, 만주를 포괄하는 대제국으로 발전했고 과거 명나라의 영역이던 소위 ‘본래의 중국(Proper China)’은 그 일부에 불과하게 되었다. 청나라의 군주는 한족의 지배자인 ‘황제(皇帝)’이자 동시에 만주족과 몽골족을 지배하는 ‘카간(Qaghan)’이었고, 나아가 티베트의 불교도들을 보호하는 세속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Chakravartin)’이었던 것이다. 현재 대다수 학자는 청나라를 다민족·다문화·다언어의 제국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신경향을 가리켜 ‘새로운 청대사(New Qing History)’라는 이름까지 사용한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청나라의 이 같은 ‘다중성’이 소위 ‘입관’하고 나서 중국·티베트·신강·몽골을 지배하게 된 뒤에 형성된 것이 아니라 ‘입관’하기 전, 즉 누르하치에서 홍타이지에 이르는 시기에 거의 그 원형이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와 문화 방면에서 몽골의 영향력은 거의 압도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만주어로 ‘수령’을 뜻하는 ‘버일러(beile)’를 칭하던 누르하치는 1607년 주변 몽골부족을 복속시킨 뒤 ‘한(han)’을 칭함으로써 과거 몽골제국으로 소급되는 중앙유라시아 전통의 군주권을 표방하기 시작했고, 1635년 홍타이지는 몽골의 군주였던 릭단 칸(Lighdan Khan)이라는 인물을 격파하고 원나라의 국새(國璽)를 받게 되는데, 그는 이것을 ‘천명’이 자기에게로 옮겨온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가 ‘후금’이라는 국호를 ‘대청’으로 바꾼 것도 바로 이 사건이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족 통치자들의 주변에는 ‘박시(baksi·중국어 ‘博士’라는 말에서 기원)’라는 칭호로 불린 다수의 문관이 포진돼 국가의 문서행정은 물론 통치 일반에 관한 광범위한 자문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만주와 몽골, 중국과 조선 등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동시에 체득한 사람들이었으니, 다민족·다언어 국가인 청제국의 지향과 잘 부합되는 인물이었다. 한 학자는 이런 부류의 사람을 ‘경계인(境界人·transfrontiermen)’이라고도 불렀다. 무엇보다 초기 만주인들에게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게 한 조직으로 청나라 말기까지 지속된 팔기(八旗)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 역시 몽골제국 시대의 천호제(千戶制)로 소급되는 몽골 유목사회의 사회군사조직을 본뜬 것이다.

 

▲ 러·청의 변경도시 네르친스크를 묘사한 동판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순치제는 비록 중원의 지배자가 되긴 했지만 섭정왕들에 의해 휘둘리다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1661년 강희제의 즉위와 함께 청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대팽창을 시작한다. 1654년 출생한 그 역시 여덟 살의 나이에 즉위하여 섭정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만, 1669년부터 친정(親政)을 시작한 이후 1722년 사망할 때까지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2년이라는 재위를 누린 황제가 되었다. 그의 치세에 삼번(三藩)의 난(1673~1678년)이 진압되고 대만에 근거를 두던 정성공(鄭成功)의 세력이 평정되는 등 중국 지배는 요지부동의 기반 위에 서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외적인 팽창도 놀라웠다. 특히 러시아와의 충돌 및 협상, 그리고 몽골세력의 평정이 가장 대표적인 업적이다.

현재 우리가 몽골인을 나눌 때 보통 내몽골과 외몽골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러한 용례는 사실상 만주인에 의해 도입된 것이다. 즉 먼저 청나라에 복속한 고비사막 이남의 몽골인을 ‘내몽골’이라 부르고, 다음에 복속한 고비사막 이북의 몽골인을 ‘외몽골’이라고 부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몽골인의 기본적인 구분은 이처럼 만주와의 정치적 관계에 기초해서 남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알타이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의 칭기즈칸 후예에 의해 통치되는 ‘동몽골’과 서쪽의 비(非)칭기즈칸 계열이 지배자로 있는 ‘서몽골’로 나뉘는 것이었다. 강희제가 즉위할 무렵 청나라는 동몽골 중에서도 고비사막 이남의 내몽골인만을 복속시켰을 뿐, 나머지 몽골인은 교역을 위해서 ‘공납’을 바치는 시늉만 하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제 겨우 중국을 장악하는 데 성공한 청조의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여전히 두려운 기마유목민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우려는 1687년 말 드디어 현실로 나타나고 말았다. 티베트 달라이 라마의 지원을 받는 갈단(Galdan)이라는 인물이 서몽골을 통합한 뒤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시작한 것이다. 과거 몽골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에 세워진 대사원 에르데니 주우(Erdeni Juu)는 파괴되었고, 갈단이 이끄는 ‘준가르(Junghar)’ 기마군의 공격에 겁을 먹은 동몽골의 귀족과 유목민 수만 명은 고비사막을 넘어서 청나라 변경에 와서 보호를 요청하기 시작했다. 당시 청나라는 러시아와 아무르 강가에서 전투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몽골 방면에서는 평화가 유지되기를 희망했다.

이에 강희제는 달라이 라마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달라이 라마가 보낸 대리인과 황제의 특사 그리고 이해당사자인 몽골의 수령들이 ‘쿠리엔 벨치르(K?riyen Belchir)’라는 곳에 모이게 되었다. 그러나 협상은 파탄을 맞고 말았고, 갈단은 강희제에게 도망간 동몽골 지배자들을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이제 강희제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만약 그가 그들을 넘겨줄 경우 갈단은 동서몽골을 모두 통합하고 거대한 유목제국을 건설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청나라로서는 끔찍한 악몽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강희제에게는 전쟁의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 그는 먼저 러시아와 서몽골의 관계를 떼어놓아야 했고, 따라서 하루 속히 아무르 지역에서의 전투를 종식시키고 러시아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체결된 것이 바로 네르친스크 조약이다.


▲ 당빌(d’Anville)의 지도 가운데 외몽골 할하 부분.
협상의 대표로 만주 측에서는 송고투(Songgotu)를, 러시아 측에서는 골로빈(Golovin)을 파견하였다. 양측 통역은 중국에 주재하던 제주이트(예수회·가톨릭의 남자 수도회) 선교사 두 사람, 즉 제르비용(Gerbillon)과 페레이라(Pereira)였다. 양측의 가장 첨예한 대립은 아무르강 너머에 있는 알바진과 같은 지역의 영유권이었는데, 러시아 측은 무주지 선점의 원칙을 주장한 반면 청 측은 원주민과의 조공관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결국 러시아는 아무르강 너머의 지역을 포기하고 알바진에서 철수했다. 후일 골로빈의 회고록에 의하면 네르친스크 주변을 포위한 청군의 군사적 위협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러시아는 중국과의 교역권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조약문은 완성되었고 제주이트 선교사들이 통역을 했기 때문에 중립적 언어인 라틴어 조약문이 정본이 되었고, 이를 기초로 만주어, 러시아어, 몽골어 번역문이 만들어져서 교환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문은 이 4종의 정본·부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희제 시대 청제국의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네르친스크 조약은 중앙유라시아로 팽창을 계속하던 러시아와 청나라가 마주치면서 불가피하게 생겨난 결과다. 그러나 이로써 러시아의 손을 묶어놓은 강희제는 본격적으로 준가르의 갈단을 상대할 수 있게 되었고, 갈단에 대한 그의 승리는 결국 고비사막 이북의 외몽골이 청제국의 판도 안으로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1691년 5~6월 강희제와 동몽골의 왕공(王公)들이 내몽골 초원에 모두 모여 충성과 동맹을 서약한 소위 ‘돌론 노르(Dolon Nor)의 회맹(會盟)’은 유목세력으로서의 몽골의 쇠퇴를 알리는 조종(弔鐘)이기도 하였다. ▒


팔기제

팔기제(八旗制)는 1601년 누르하치에 의해 처음 실시되었는데, 가장 하부조직은 만주어로 ‘화살’을 뜻하는 ‘니루(niru·佐領)’이며 300명의 병사 및 그 가족으로 이루어졌다. 5개의 니루가 모여서 1개의 ‘잘란(jalan·參領)’을, 5개의 잘란이 모여서 1개의 ‘구사(gusa·固山)’를 구성한다. 모두 8개의 구사가 있었으며, 각각의 구사에게 색깔로 구별이 되는 깃발을 부여했기 때문에 이들을 ‘팔기’라고 부른 것이다. 하나의 구사(기) 안에 25개의 니루가 속했으므로 7500명의 병력인 셈이고, 이것이 모두 8개가 있었다면 6만명의 팔기병이 편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초기에 만주인으로 구성된 핵심적인 군사집단에 불과했고, 후일 몽골인과 한인(漢人)이 복속하게 되면서 그들로 구성된 팔기(몽골팔기와 한인팔기)도 편성되었다. 따라서 마치 블록 쌓기를 하듯이 구사의 수는 계속 늘어났고 전체 병력도 증가했지만 여전히 ‘팔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8개의 다른 깃발을 가진 구조 속에 편제되었던 것이다.

 

(22)] 최후의 유목국가 준가르의 운명
淸 강희제, 준가르 고립시키려 4차례나 직접 북방 원정
막대한 병력 투입하고도 성과 없어… 전쟁사 편찬해 미화·왜곡
준가르, 전후 50년간 번성하다가 내란으로 파멸의 길에
1757년 건륭제, 준가르 복속시키고 철저한 말살정책
볼가강변 이주한 토르구트족 불러들여 유라시아 평정 과시

 

▲ 만주 팔기병의 모습. 준가르에 대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760년 만들어진 화첩에 수록.
 

기원전 7세기 스키타이인들이 흑해 북쪽에 제국을 건설한 이래 중앙유라시아의 초원지역에는 수많은 유목국가가 흥망을 거듭했다. 과거에는 그저 변경 지역에 살면서 약탈을 일삼는 ‘야만인’ 정도로만 묘사되어 왔던 이들의 국가가 세계사의 전개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이제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보이는 주목할 만한 현상은 점점 더 많은 학자가 유라시아 역사에서 초원제국이 지닌 ‘중심성’ 혹은 ‘핵심성’에 주목하고 그들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스키타이와 흉노가 출현한 이래 이처럼 면면히 계속되어온 유목국가의 전통이 18세기 중반 준가르(Junghar)를 마지막으로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만다. ‘최후의 유목국가’라는 심상치 않은 별명으로 불리는 준가르. 그들은 도대체 누구였고 어떻게 해서 역사의 무대에서 최후를 맞게 된 것일까.


‘준가르’라는 이름은 몽골어로 ‘좌익(je’?n ghar)’을 의미한다. 왜 이런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 연유는 분명치 않으나, 이들은 알타이산맥 서쪽의 준가리아 분지와 천산산맥 북방의 초원을 근거지로 유목생활을 하던 ‘오이라트(Oirat)’라는 통칭으로 불리던 서몽골 집단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었다. 17세기에 들어와 서몽골 각 부족 사이에서 분쟁이 격화되기 시작했다. 현재 그 원인을 분명히 확인하기는 어려우나 아마 기후의 격변, 유목인구의 증가, 초목지의 부족 등이 지적되고 있다. 아무튼 내적 갈등이 심해지면서 일부 부족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호쇼트(Khoshot)라는 부족은 청해(靑海) 지방으로 내려간 반면, 토르구트(Torghut) 부족은 저 멀리 볼가강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 가운데 1670년대에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준가르 부족의 수령 갈단(Galdan)이었다. 그는 원래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밑에서 승려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본국에서 부친이 사망한 뒤 이복형제들이 자기 친형을 죽이고 부족장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라이 라마의 허락을 받고 돌아가 형제들을 죽이고 준가르의 패권을 장악한 인물이다. 이후 그는 오이라트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나아가 1680년경에는 오늘날의 신강(新疆)지방까지 장악하면서, 드디어 유목제국의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과거 중앙유라시아 초원의 유목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일단 국가가 건설되면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재화가 필요했는데, 취약하고 단순한 유목경제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하나는 실크로드 무역을 장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중국으로 가는 길’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신강 지방의 점령은 갈단에게 이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가져다준 셈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가지, 즉 중국으로 가는 통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몽골 초원의 본령에 있던 동몽골 부족들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내 그 기회는 1687년 동몽골 세력의 내분과 함께 찾아왔다. 당시 동몽골에서는 좌익(=서부)의 자삭투 칸(Jasaghtu Khan)과 우익(=동부)의 투시예투 칸(T?siyet? Khan)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는데, 갈단의 동생이 이들 사이의 분쟁에 휘말려 살해되는 사건이 터진 것이다. 갈단은 복수를 명분으로 1687~1688년 동몽골에 대한 대대적 침공을 감행했고, 궁지에 몰린 투시예투 칸, 불교 교단의 수장으로 일종의 ‘몽골의 달라이 라마’ 격이었던 젭춘담바(Jebchundamba) 등 동몽골의 귀족들은 대거 남하하여 청나라의 강희제에게 구조를 요청하게 된 것이다.


몽골고원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을 막으려고 했던 강희제는 중재를 시도했지만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드디어 갈단과의 일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갈단이 러시아와 연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일단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러시아를 중립시켜 놓은 다음, 갈단을 치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수립하고 드디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친정(親征)’에 나섰다. 강희제는 1690년부터 1697년까지 모두 4차례에 걸쳐서 친정을 감행했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가 갈단을 제압하기 위해서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세운 기록은 명나라의 영락제가 몽골을 치기 위해 5차례 친정한 것에 버금가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친정이 갖는 역사적 의미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를 이끌고 사막을 건너 초원을 전전하는 동안 북경에 남겨둔 아들에게 쓴 만주어 편지들에서 자신의 아버지다운 인간적 면모와 함께 황제로서의 책임감과 통치철학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것이다.


강희제와 갈단의 대결과정은 ‘친정평정삭막방략(親征平定朔漠方略)’이라는 거대한 편찬물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전쟁이 끝난 뒤 강희제의 지시에 의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인데, ‘황제의 친정으로 북방을 평정한 기록’이라는 그 제목이 시사하듯이 황제의 ‘성무(聖武)’를 기록하고 선전하기 위해서 편찬된 것이었다. 후일 옹정제와 건륭제도 이를 본떠 유사한 기록물들을 편찬했으니 드디어 ‘방략’은 청대 특유의 역사기록 장르가 되었다. 따라서 이 기록에 근거한 연구들에서 갈단 행동의 ‘부당함’과 강희제 대응의 ‘정당성’과 아울러 작전의 ‘치밀성’이 강조된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갈단 측의 기록이 없는 상황에서 ‘방략’에 기록된 내용을 비판적으로 소화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청 측의 자료들을 가만히 읽어보면 강희제가 기울인 노력, 즉 4차례의 친정과 막대한 병력·물자의 투입에 비해 그 성과는 터무니없이 미미했으며, 오히려 그런 미미한 성과를 아전인수격 해석과 과장으로 포장함으로써 ‘역사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예를 들어 1차 원정의 결과 벌어진 울란 부퉁(Ulan Butung)의 전투에서는 비록 청군이 약간의 우세를 보이긴 했으나 확실한 승부가 나지 않은 채 양측 모두 퇴각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또한 제2차 원정에서 벌어진 자우 모두(Jau Modo)의 전투에서는 서로군(西路軍)이 겨우 갈단의 후방을 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역시 그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제3차 원정은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고, 제4차 원정은 갈단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특히 흥미로운 사실은 이 마지막 친정은 갈단이 1697년 음력 3월 13일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도 모른 채 진행되었고, 청조는 이같은 수치스러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그의 사망을 원정이 끝난 뒤인 음력 윤3월 13일로 조작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갈단의 ‘부당성’과 황제의 친정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갈단이 ‘자살’한 것으로 꾸몄다. 물론 사실과는 전혀 다른 얘기이다

 

▲ 건륭제의 초상화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
 

갈단의 패배와 죽음을 가져온 것은 청나라 군사작전의 성공 때문이라기보다는 준가르 내부의 반란 때문이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가 동몽골을 침공했을 때 준가르 본거지에 있던 그의 조카 체왕 랍탄(Chewang Rabtan)이 반기를 들었고, 이로 인해 갈단은 졸지에 본거지를 상실하고 소수의 추종세력만을 이끌고 초원을 방황하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지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 가서는 수백 명의 기병만이 그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청군은 그런 갈단을 잡기 위해 황제가 4차례에 걸쳐 친정까지 감행하고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투입했지만 성과는 시원치 않았다. ‘삭막방략’을 읽어보면 강희제의 놀라운 무공으로 인해 갈단과 함께 준가르도 ‘패망’한 듯한 인상을 받게 되지만, 사실상 갈단은 이미 체왕 랍탄의 권력장악으로 준가르에서는 완전히 소외된 지방세력으로 전락한 인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준가르는 갈단이 사망한 뒤에도 건재하였다. 오히려 체왕 랍탄과 갈단 체링(Galdan Chering)과 같은 군주들의 지배 아래에서 번영을 계속하였다. 그들은 청나라와의 군사적 대결을 피하고 외교사절을 교환하면서 가능하면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아울러 유목경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중국 및 러시아와 교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특히 타림분지 지역에 살던 무슬림(현재의 위구르인)을 대대적으로 이주시켜 천산 북방의 일리강 계곡, 즉 오늘날 우룸치 부근을 개간하고 정착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몽골어로 ‘씨뿌리는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타란치(Taranchi)’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포로로 잡힌 유럽인, 중국인, 만주인들을 활용하여 직물과 종이를 제작하는 공장을 세웠다.


그러나 1746년 갈단 체링의 사망과 함께 준가르는 갑작스러운 파멸을 맞게 된다. 갈단 체링의 아들들 사이에 분쟁이 격화되고 여기에 여러 부족장이 개입하면서 사태는 더욱 악화되어갔다. 이같은 분쟁에서 밀려난 아무르사나(Amursana)라는 인물이 청나라 변경으로 와서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게 되었고, 건륭제는 이를 받아들여 아무르사나를 앞장세우고 군대를 파견하여 준가르의 근거지가 있던 일리 계곡을 점령하였다. 이어 4명의 부족장을 각각 ‘칸’으로 임명하는 일종의 분할통치책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청의 도움을 받아 준가르를 장악한 뒤 유일한 칸이 되리라고 예상했던 아무르사나는 이같은 분할통치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청조에 대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대해서 건륭제는 1757년 조혜(兆惠)라는 장군을 파견하여 아무르사나를 격파하고 준가르를 청에 직속시켜 버렸던 것이다. 아무르사나는 청군의 추적을 피해 러시아 영내로 도망갔지만, 이미 천연두를 앓고 있던 그는 토볼스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최후의 유목국가인 준가르의 멸망은 일종의 ‘인종청소’와 유사한 끔찍한 비극과 함께 막을 내렸다. 1842년 위원(魏源)이 지은 ‘성무기(聖武記)’라는 글에 의하면 준가르인들 가운데 10분의 4는 천연두로 사망하고, 10분의 3은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으며, 10분의 2는 카자흐스탄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결국 전 인구의 10분의 1만 원래 고향에 남게 된 셈이다. 건륭제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앞으로 국가의 공문서나 어떤 형식으로도 ‘준가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였다. 게다가 1세기 전 볼가강으로 이주해 갔던 토르구트 부족민을 불러들여 준가르인들이 살던 곳에 정착시키기로 했으니, 가히 준가르 말살책의 극치라고 아니할 수 없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날로 심한 압력에 시달리던 토르쿠트 부족민들은 건륭제의 초청을 받아들여서 자신들의 옛 고향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다. 1771년 1월 15만명이 넘는 유목민이 얼어붙은 초원을 가로질러 천산 북방의 초원으로 향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동하는 동안 카자흐족의 약탈, 추위와 기아 등으로 인해 준가르에 도착한 것은 절반도 안 되는 5만~7만명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고난을 무릅쓰고 ‘대장정’을 감행한 까닭은 고향에서 자유롭게 유목하며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맞이한 것은 약속과는 달리 엄격한 청나라 군관들이었고 토르구트인들은 대청황제의 새로운 ‘신민(臣民)’이 되어 살아갈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건륭제는 토르구트의 귀환이야말로 중앙유라시아 평정이 ‘하늘의 뜻’임을 입증하는 사건이라고 선전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토르구트전부귀순기(土爾扈特全部歸順記)’와 ‘토르구트부민구휼기(優恤土爾扈特部衆記)’라는 두 개의 비문을 지었다. 건륭제는 이를 만주어·몽골어·티베트어·한어 등 4개의 언어로 번역하고 새겨서, 한 쌍은 준가르와 토르구트인들을 직접 통치하던 일리 장군(일리 지역에 파견된 장군)의 주둔지 혜원성(惠遠城) 북문 안쪽에 있는 만수궁(萬壽宮) 앞에 세우고, 또 한 쌍은 열하(熱河)에 있던 피서산장(避暑山莊)의 보타종승묘(普陀宗乘廟) 안에 세우도록 하였다. 그 정치적 의미는 명백하다. 일리는 준가르와 토르구트 같은 서몽골인들을 현장에서 지배하는 총사령부가 위치한 곳이고, 피서산장은 황제가 여름을 보내며 몽골·만주·티베트·조선 등지에서 오는 귀족과 사신을 접견하는 곳이었으니 대륙 서쪽 끝에 살던 토르구트인들도 대청제국 황제의 덕을 흠모하여 자진해서 귀순해왔음을 과시하려는 것이었다. 일리에 있던 비석은 후일 파괴되고 말았지만, 열하에 있는 거대한 비석은 지금도 관광객에게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토르구트 귀순비는 지난 2000년간 유라시아 초원을 누비고 다녔던 유목민의 최후를 알리는 동시에, 농경민과 유목민 사이의 남북관계가 최종적으로 역전되는 순간을 포착한 기념물인 것이다. ▒
다음은 ‘대중국의 탄생’입니다.



스웨덴 장교 레나트

준가르에 17년 동안 포로로 붙잡혀
대포·인쇄술 전하고 지도 제작에도 참여

요한 구스타프 레나트(J.G.Renat)는 원래 스웨덴의 포병장교였다. 그는 1711년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벌어진 폴타바(Poltava) 전투에서 다른 스웨덴 군인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는데, 후일 시베리아 지역에 조사차 파견되었다가 1716년 준가르에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17년 동안 포로로 살았지만 준가르의 군주인 갈단 체링과 매우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를 도와 대포와 탄환을 제작하는 작업장을 세우고 책을 인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준가리아 지도 제작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귀환할 때는 갈단 체링이 그에게 준 2장의 지도를 갖고 갔다. 이 지도들은 현재 스웨덴의 웁살라대학 캐롤리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필자는 최근 그 사진을 실제로 보고 촬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지도는 상세하고도 정확했으며 지명들은 모두 몽골어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지도는 준가르의 문화적·과학적 수준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지만, 유목민으로서 이동생활을 하던 갈단 체링이 낙타 100마리에 책을 가득 싣고 다녔다는 일화도 유목민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관념과는 다른 준가르 유목민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23) ‘대중국’의 탄생
淸은 중국·몽골·티베트의 연합국가
강희·옹정·건륭제 3대에 걸쳐 정복전쟁, 중앙 유라시아까지 영토 확장
총 면적 한반도 54배로 명나라 때의 3배 규모인 거대중국 만들어
몽골·티베트·신강 주민, 중국을 지배자가 아닌 제국의 일원으로 생각
고위관리에 한족은 배제하고 별도 통치, 한어 외 4개 언어도 공용어로
 

▲ 달라이 라마가 거주하던 티베트의 포탈라 궁.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는 약 950만㎢에 달한다. 이 방대한 지역 안에는 전체 인구의 90% 이상을 점유하는 한족(漢族)을 제외하고도 55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제국’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남북한 다 합해서 22만㎢밖에 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는 부럽기도 하지만 실로 두렵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중국이 우리에게는 항상 ‘대국’처럼 보였던 것도 결코 착시현상은 아니었다. 오늘날 ‘사대주의’라고 우리가 맹렬하게 비판하는 조상들의 중국에 대한 태도 역시 자존심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0~3000년의 역사를 훑어보면 중국이 항상 이런 정도의 ‘제국’의 사이즈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보다 큰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그런 엄청난 규모는 아니었다. 멀리 올라갈 것도 없이 명나라(1368~1644년)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 영토는 400만㎢를 넘지 않았으니 지금의 절반도 안 되는 셈이다. 과거 한(漢)이나 송(宋)과 같은 왕조도 명나라보다 적으면 적었지 더 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 거대한 제국의 영토는 언제 생겨난 것인가. 그것은 바로 17~18세기, 즉 청나라 중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18세기 후반이 되어 청제국의 영토는 거의 1300만㎢를 육박하게 되었으니, 이는 명나라의 영토를 세 배 이상으로 불린 것이었다. 이 청제국의 영토 가운데 ‘외몽골’이 독립해서 떨어져 나갔을 뿐, 나머지 대부분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바로 오늘의 중국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늘날 중화인민공화국이 표방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는 사실상 따지고 보면 청제국의 유산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 청조에 대한 인상은 지극히 부정적이었다. 한때 지중해를 석권하고 빈의 성문을 두드렸던 막강한 오스만 제국이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유럽의 병자’로 불렸던 것처럼, 아편전쟁 이후 서구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다가 결국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한 청조는 무기력과 부패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재 중국에서는 ‘대청제국’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청조는 ‘이민족’인 만주인이 중국을 ‘정복’해서 건설한 정권이나 외세에 찌든 무력한 왕조가 아니라, 중국민족이 건설한 위대한 왕조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생겨난 민족적 자부심의 고양과 무관하지 않으나, 자칫 과거와 같은 ‘대(大)중화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한(漢)·송(宋)·명(明)과 같이 한족이 건설한 왕조가 지배할 때에는 영토가 비교적 소규모였지만, 몽골족의 원(元)이나 만주족의 청(淸)과 같이 이민족이 건설한 왕조가 통치할 때에는 규모가 갑자기 확장되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중국’과 ‘소중국’이 번갈아 가면서 나타났던 셈이다. 당(唐)도 ‘대중국’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사실 그 건국집단은 학계에서 이미 오래전부터 ‘관롱집단(關集團)’이라는 특수한 명칭으로 알려져 있듯이 이민족과 한족의 혼혈인이었다.


이처럼 이민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건설한 왕조들은 이제까지 ‘정복왕조’라는 이름으로 흔히 불려왔다. 그러나 이 표현은 다분히 중국중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복왕조’라고 말하는 순간 그것은 곧 바로 중국의 왕조사 맥락 속에 들어와 버리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원조’와 ‘청조’는 중국사의 일부가 될 뿐, 독자성을 지니면서도 중국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몽골제국’이나 ‘만주제국’의 이미지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제국의 역사는 중앙유라시아라는 새로운 컨텍스트(맥락) 속에서 해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7~18세기에 청제국이 이룩한 성취는 바로 이같은 중앙유라시아적 맥락이 아니면 올바로 이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강희·옹정·건륭, 이 3대 황제의 시대에 확보된 영토가 내몽골·외몽골·티베트·신강 등 모두 중앙유라시아 지역이었고, 만주의 황제들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다양한 민족집단을 지배할 때 표방한 이념 역시 중앙유라시아의 정치적 전통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과정에 대해 설명하면서, 가장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모피 획득이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다시 말해 러시아인의 동진을 촉발시킨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 요인이었다. 그러나 청제국의 경우는 달랐다. 무엇보다도 정치·군사적 측면이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청이 내·외몽골과 티베트와 신강을 정복하게 된 까닭도 이들 지역이 정치·군사적으로 분리되기 어려운 ‘하나의 패키지’와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몽골인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티베트를 장악해야 했고, 몽골을 정복하고 나니 신강이 일종의 ‘덤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파미르 고원의 서쪽은 이 패키지 안에 들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만주 팔기병의 말발굽은 파미르 기슭에서 멈추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골-티베트-신강이라는 트라이앵글의 구조, 즉 서로 분리되기 어려운 역사·지리적 연관성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


 
 

몽골-티베트 커넥션은 이미 13세기 몽골의 대칸 쿠빌라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유교나 불교, 기독교와 이슬람 등 모든 종교에 대해 대체로 관용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티베트 불교에 많이 경도되어 파스파(Pags-pa)라는 젊은 승려를 초치해 와서 ‘국사(國師)’라는 거창한 호칭을 주고, 티베트에 대한 성속(聖俗)의 지배권은 물론 제국 안의 불교 교단에 대한 관할권까지 부여하였다. 그리고 쿠빌라이 자신은 불교를 보호하는 세속의 군주,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차크라바르틴)을 자칭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그후로도 계속되다가 1368년몽골이 중국의 영토를 상실한 뒤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다가 16세기 후반 알탄 칸(Altan Khan)이란 인물이 소남 갸초라는 승려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헌정하고, 자신은 쿠빌라이의 뒤를 이어 불교 교단의 보호자임을 자임함으로써 몽골-티베트 커넥션은 부활하게 되었다.


소남 갸초의 뒤를 이어 달라이 라마(제4대)가 된 인물은 알탄 칸의 손자였다. 뿐만 아니라 많은 몽골 귀족이 티베트로 가서 승려 수업을 받기도 하고, 티베트에서 승려들이 몽골로 와서 이동식 사원을 세우고 경전을 가르쳤으니 양측의 긴밀한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자야 판디타이다.


강희제가 17세기 말 서몽골 준가르의 갈단과 대결하는 과정에서 직면했던 문제가 바로 티베트와의 커넥션이었다. 왜냐하면 제5대 달라이 라마가 1682년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섭정으로 있던 인물이 그의 죽음을 은폐하고 계속해서 갈단을 지지하는 것처럼 위장했기 때문이다. 섭정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한 지 15년이 지난 1697년, 즉 갈단이 죽은 후에야 비로소 그같은 사실을 공포했다. 강희제로서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는 티베트를 장악하지 않고는 몽골인들을 승복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후 서몽골 준가르와 청제국의 만주 황제들 사이에서는 몽골-티베트인의 종교적 지도자이자 상징적 구심점인 달라이 라마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1720년 마침내 강희제는 당시 청해 부근의 쿰붐 사원에 있던 제7대 달라이 라마를 손에 넣고, 청군으로 하여금 그를 호송하여 라싸로 진입시킴으로써 티베트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 자금성에 있는 비석. ‘관원들은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내용이 한자, 만주, 몽골, 티베트, 오이라트, 위구르 등 여섯 종류 문자로 새겨져 있다.
 

몽골-티베트-신강의 고리 가운데 마지막 부분인 신강은 최후의 유목국가인 준가르가 정복되면서 제국의 강역 안으로 편입되었다. 오늘날은 ‘신장위구르자치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지역은 사실상 준가르인이 유목하던 초원과 그들의 지배를 받던 타림분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타림분지는 천산산맥과 곤륜산맥 사이에 둘러싸인 매우 건조한 지대로서, 그곳에 산재한 오아시스에는 농경을 위주로 생활하지만 실크로드를 통한 원거리 교역에도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민들은 원래 인도-이란 계통이었지만 대략 기원후 10세기를 전후해서 투르크 계통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곳의 오아시스 도시들은 지리적 특성상 대규모 국가를 건설하는 데 한계가 있어, 북방에 사는 유목민들의 지배를 받는 경우가 많았는데, 청이 정복하기 전에도 준가르가 거의 반세기 이상 이곳을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18세기 중반 준가르가 패망한 뒤 그 지배를 받던 타림분지가 청제국의 판도로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물론 저항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오아시스 주민들은 모두 무슬림이었고 그들의 종교적·세속적 지도자로서 ‘호자(khoja·스승)’라고 불리던 집단이 있었는데, 이들이 자신들의 전통적 지배권을 주장하면서 청군의 진입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준가르에도 대항할 수 없었던 그들이 청제국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호자 형제’로 알려진 부르한 앗 딘(Burhan ad-Din)과 호자 자한(Khoja Jahan)은 파미르 산중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살해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새로 편입된 서부지역은 ‘새로운 강역’이라는 뜻에서 ‘신강(新疆)’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그것이 오늘날의 지명이 되었다.


이미 누르하치 시대부터 내몽골의 부족들을 복속하기 시작한 만주인들은 그 뒤를 이은 홍타이지의 시대에 내몽골 전역을 장악하고, 강희제 때에는 외몽골과 티베트를 편입시켰으며, 마침내 건륭제에 이르러 서몽골과 신강을 점령함으로써 청제국의 판도를 완성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만주인의 제국 운영방식은 전통적 한인왕조와 크게 달랐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제국의 강역에 새로이 편입된 이들 지역은 한족의 영토인 ‘중국’의 일부가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이 청제국을 구성하는 일부일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청제국은 중국을 위시하여 만주, 내·외몽골, 티베트, 신강으로 구성된 집합체였던 것이다.


만주족 군주들은 이렇게 다양한 지역과 주민들에 대한 통치의 정통성을 중국의 전통적 유교이념에서만 구하지 않았다. 물론 한족에게 그들은 천명을 부여받은 ‘황제’로 비쳐졌고 또 그렇게 행동하였다. 그러나 몽골인에게는 과거 대몽골 제국 군주들의 정통성을 계승한 ‘대칸’이었고, 티베트인에게는 불법(佛法)을 보호하는 세속군주인 ‘전륜성왕’을 자임했던 것이다. 신강의 무슬림에 대한 입장은 보다 미묘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만주족 군주들은 불교도였지 무슬림이 아니었기 때문에 ‘술탄’이 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몽골제국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무슬림에게도 만주의 군주들은 ‘대칸’으로 인정되었다.


▲ 신강의 카슈가르에 있는 호자 아팍크(1694년 사망)의 성묘(聖墓). 호자 형제는 그의 후손이다.
 

또한 이들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도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었다. 한족의 거주지역, 즉 좁은 의미의 중국에 대해서는 성(省)에서 주(州)·현(縣)으로 내려가는 전통적 지방행정제도가 적용되고 만주족과 한족이 동시에 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들은 성으로 편입되지 않았고, 한족은 철저하게 배제된 상태에서 만주족이나 몽골족 팔기 출신들에 의해서만 통치를 받았다. 만주는 물론이지만 몽골, 티베트, 신강 어디에서도 한족이 장관으로 임명된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 지역은 한족 거주지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별도의 방식에 의해 관리·운영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공용언어로는 만주어·몽골어·한어(漢語)·티베트어·위구르어의 다섯 가지가 공히 인정되었고, 이에 따라 각 지역의 보고서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로 작성되었다. 이러한 다언어 운영실태를 잘 보여주는 예가 국가에 의해 편찬된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이라는 책인데, 이것은 이들 5종 언어의 대조어휘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1911년 청제국이 붕괴되었을 때, 몽골과 티베트와 신강 지역의 주민들이 모두 독자적 국가의 수립을 추진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까지 자기들이 속했던 대청제국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한족의 지배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한족은 그들과 똑같이 제국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족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에게 청제국은 중국의 왕조였고 그 강역은 중국의 영토였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처럼 한족과 비(非)한족은 청제국이라는 공통의 역사적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극명하게 대립되는 역사관을 가졌다. 그리고 이러한 차이가 결국 20세기 전반에 벌어진 수많은 갈등과 비극의 근본적 원인을 이루게 된 것이다. ▒
 


 
티베트 승려가 된 서몽골의 자야 판디타(1599~1662)

서몽골 귀족의 자제였던 그는 1616년 티베트로 가서 승려가 되어 22년간 수업을 한 뒤 제5대 달라이 라마에 의해 1638년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후 그는 25년간 몽골 각지를 여행하면서 귀족들과 친분을 맺고 티베트와의 연결관계를 강화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648년 그는 이제까지 몽골인들이 사용하던 문자를 개조하여 ‘토도 비칙`(todo bichig·분명한 문자)’을 만들었고, 이 문자를 이용하여 200부가 넘는 다수의 불경을 몽골어로 번역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번역으로는 ‘금광명경(Altan Gerel)’이 꼽힌다. 그는 또한 정치·외교 방면에도 깊이 개입하여 1640년에는 동서 몽골의 수령들이 모두 참석하는 대회의를 주선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분쟁해소와 평화유지, 대외적으로는 외적에 대한 공동의 대처 등을 합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4)]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

타슈켄트 거점 삼아 南으로 20년 만에 중앙아시아 정복 완성
시베리아 동진의 눈부신 성공에 비해 중앙아시아 남진은 좌절의 연속
1860년대 타슈켄트 점령해 방위선 구축… 부하라 등 차례로 점령
북방과 남방 세력 각축·실크로드 통한 동서 교류 역사는 막 내려
유라시아 내륙 러·청에 의해 분할… 2000년 역사의 물줄기 바꿔

▲ ‘전쟁터에서’. 1873년 베레샤긴(V. Vereshchagin) 작. (모스크바 트레자코프 미술관 소장.)
 

1853년 7월 28일 러시아군은 4일간의 치열한 공격 끝에 시르다리아 강 중류에 위치한 조그만 성채 악크 메체트(Aq Mechet)를 점령했다. 원래 현지어로 ‘백색의 사원(寺院)’이라는 뜻을 지닌 이 성채(城砦)는 점령군 사령관의 이름을 따서 페트로프스크(Petrovsk)로 바뀌었고, 소비에트 시기에는 키질 오르다(Qizil Orda·현재 카자흐공화국령), 즉 ‘붉은 군영(軍營)’으로 다시 바뀌었다.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처럼 정치적 격변에 따라 그 명칭이 수난을 받은 곳이 지구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악크 메체트를 점령함으로써 카자흐스탄 초원 가장 남쪽에 거점을 확보한 셈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앙아시아를 향한 러시아의 전략적 위치는 여전히 불안정하고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북쪽에서부터 시작하여 카자흐스탄의 광막한 초원을 가로질러서 시르다리아에 안착한 시르다리아 라인(Syr Darya Line)과 동북쪽의 시베리아에서 시작하여 천산(天山) 북방의 알마티(Almaty·당시 이름은 Verny)에서 끝난 시베리아 라인(Siberia Line)이 서로 만나지 못한 상태로, 남쪽의 방어 라인은 그대로 취약하게 열린 채 남아 있었던 것이다.


19세기 중반 시르다리아 이남의 투르키스탄은 세 개의 ‘칸국’, 즉 칸(khan)이 지배하는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가장 북쪽에 호칸드(Khoqand) 칸국, 남쪽에 부하라(Bukhara) 칸국, 그리고 서남쪽 아래에 위치한 히바(Khiva) 칸국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에서 특히 호칸드와 부하라는 러시아 변경지역을 약탈하거나 혹은 러시아제국에 ‘복속’되어 있던 카자흐 부족민들을 부추겼기 때문에 러시아와는 적대적 관계에 있었고, 이러한 상황은 러시아의 중앙아시아에 대한 전략적 입장에 심각한 문제를 노출하고 있었다. 호칸드의 변경도시인 악크 메체트를 점령한 것도 카자흐스탄에 대한 그들의 약탈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렇지만 러시아는 투르키스탄으로 본격적으로 남하하기에는 주저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중앙아시아를 경략하려 했던 과거 러시아의 노력들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시베리아로의 ‘동진’이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중앙아시아로의 ‘남진’은 그야말로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최초의 시도는 1717년 표트르 대제에 의해서 감행되었다. 그는 아랄해 남쪽에 위치한 히바 칸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3500명의 원정군을 편성하여 카스피해 동부 연안의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출발시켰다. 그러나 러시아 군대는 사막을 건너는 데 필요한 물자 수송문제와 현지민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해 거의 몰살을 당하고 극히 일부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이 실패는 러시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고 상당 기간 중앙아시아로의 진출은 저지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중앙아시아로의 성공적 진출을 위해서 먼저 카자흐스탄을 확실하게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마침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당시 카자흐족은 크게 세 개의 부족연맹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러시아에 복속할 것을 청해온 것이다. 즉 1731년에는 소부(小部·Kishi Juz)와 중부(中部·Orta Juz)가, 그리고 1734~1737년에는 대부(大部·Ulugh Juz)가 황제의 신하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물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쪽에 있던 유목국가 준가르의 위협, 카자흐 지배층의 내분, 그리고 1720년대에 일어난 ‘대기근’ 등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카자흐인들의 이러한 요청을 러시아 제국에 대한 ‘자발적인 복속’의 의사로 간주하고 그들이 황제의 ‘신민(臣民)’이 된 것이라고 규정하였다.


물론 카자흐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것은 카자흐인들이 궁지에 몰려 잠시 러시아 측에 도움을 요청한 것뿐이지 결코 정치적으로 영구적 종속을 희망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소위 ‘자발적 복속’이 있은 뒤에도 카자흐인들은 러시아의 상인들을 약탈하거나 러시아 정부에 대해서도 공공연하게 적대적인 행동을 했는데, 이것은 카자흐인들로서는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1770년 러시아를 뒤흔든 푸가체프(E. Pugachev)의 반란을 카자흐인들이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이제 러시아 정부는 카자흐에 대해서 종래와 같은 정책을 계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보다 직접적 방식으로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러시아는 카자흐의 칸들을 부족민으로부터 떼어놓아 오렌부르그로 이주시킨 뒤 거기서 연금을 받으며 살도록 했다. 비록 귀족대접을 받으며 호의호식하긴 했지만 부족민으로부터 유리된 칸들은 그저 허수아비였고 러시아 정부의 연금생활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19세기 전반에는 ‘칸’이라는 지위 자체를 폐지시키고, 카자흐의 수령들로 하여금 러시아 황제의 ‘신하’임을 명시한 협약에 서명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리고 이제까지 외무성에서 카자흐인들의 문제를 취급해오던 것을 재무성이나 관련 군구(軍區)로 이관시킴으로써 행정적으로도 카자흐의 독자성을 없애버리고 내지(內地)로의 편입을 완성시켰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인의 ‘반란’은 끊이지 않았다. 여기에 러시아의 팽창에 반발하는 중앙아시아의 칸국들도 그들을 직접적으로 지원하고 러시아의 대상단(隊商團)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 예가 1836~1846년에 일어난 카심울리(Kasimuli)의 ‘반란’과 히바 칸국의 공개적 지원이었다. 러시아는 히바를 응징하기 위해 1839~1840년 대규모 원정군을 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무참하게 괴멸되어 표트르 시대에 당했던 것 이상으로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이제 러시아는 카자흐스탄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고 투르키스탄 칸국들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보다 남쪽으로 내려가 확실한 거점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으니, 그 거점은 다름아닌 타슈켄트였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제정세로 볼 때 러시아의 타슈켄트 점령은 단순히 군사적인 작전으로만 끝날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영국의 반발 가능성이었다. 즉 중앙아시아의 세 칸국의 남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미 인도를 식민지로 장악하고 있던 대영제국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은 인도에서 자국의 이해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군사적 모험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인도의 앞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를 러시아가 석권하는 것은 영국으로서는 결코 강 건너 불과 같은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인도를 정복한 대부분의 세력들이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아프간을 거쳐서 들어왔다는 것은 역사가 입증하는 바이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던 러시아 정부, 특히 외무성 관리들은 가능하면 무모한 확장을 자제하고 영국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중앙아시아 현지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장군들의 생각은 달랐다. 전략적으로 볼 때 악크 메체트의 점령은 여전히 문제의 해결이라고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궁극적인 해결책은 중앙아시아를 향해 뻗어 있는 두 개의 전략 라인을 연결하는 것밖에는 없었는데 그것은 곧 타슈켄트 공략을 의미했다. 그러나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로부터 그것을 허락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만 러시아중앙정부 역시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시를 하지 않았을 뿐 암묵적으로는 남진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현지 사령관들에게 주어진 선택은 단 하나뿐이었다. 즉 일을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었다. 일단 러시아의 깃발이 올라가면 황제도 그것을 다시 내리라고 명령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공하면 훈장감이지만 실패하면 불명예 제대를 각오해야 했다.

▲ 알림 쿨리의 전기 중 그의 사망과 타슈켄트 함락에 관한 내용. / 투르키스탄 성 총독 카우프만 장군(1818~1882년)

1858년 오렌부르그 합참본부에 사령관으로 부임한 미하일 체르니아에프(M.G.Cherniaev)는 바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864년 악크 메체트를 출발해서 시르다리아를 따라 내려가면서 아울리에 아타(Aulie Ata)와 침켄트(Chimkent)라는 두 도시를 차례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아울리에 아타는 과거 고선지 장군이 아랍군과 전투를 벌인 탈라스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탈라스’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이 두 도시를 점령한 그는 이제 중앙아시아 방어선을 완성시킬 최종 목적지 타슈켄트를 향해 내려갔다. 그러나 타슈켄트는 호칸드 칸국으로서도 결코 내어줄 수 없는 곳이었다. 러시아·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 남부를 연결하고 나아가 청제국 지배하의 신강(新疆)과 중앙아시아와의 교역을 중개하는 전략적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이미 수도 호칸드를 능가하고 있었다. 체르니아에프의 1차 타슈켄트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도 호칸드 칸국 측의 완강한 저항에 봉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소왕국이 러시아 제국의 공세를 막아낸다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었다.


체르니아에프 장군은 그 다음해 타슈켄트를 향해 다시 내려갔다. 1865년 6월 15일 아침 3000명 정도의 병력이 투입된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당시 칸국의 실권자인 알림 쿨리(Alim Quli)가 직접 와서 방어전을 독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민들은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러시아의 군대를 막아낸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최악의 사태를 각오하고 있었다. 전투는 예상대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알림 쿨리가 어디에선가 날아온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호칸드 칸국의 전열은 일거에 무너졌고, 사태가 돌이킬 수 없게 되었음을 직감한 지휘관들과 방어군은 몰래 성을 빠져나가 도주해 버렸다. 결국 6월 17일 도시의 원로들이 체르니아에프 장군을 찾아가 항복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체르니아에프는 ‘타슈켄트의 사자(獅子·Lev Tashkenta)’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타슈켄트 점령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방위선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러시아의 남진이 중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타슈켄트가 점령되는 와중에 부하라 칸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호칸드 칸국의 남부 도시들을 점령해버렸고, 이로 인해 러시아와 부하라의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러시아는 오렌부르그에 있던 부하라 상인들을 모두 구금했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부하라도 당시 부하라를 방문 중이던 러시아의 사절단을 구속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문제를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1867년 호칸드 칸국을 없애버리고 러시아의 행정구역 안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 해에 ‘투르키스탄 성(省·guverniia)’이 설치되고 초대 총독에 카우프만(von Kaufmann) 장군이 임명되었다. 그는 체르니아에프에 이어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을 완성시킨 인물이었고, 현지인들 사이에서는 ‘절반의 황제(Yarim Padishah)’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한 권력의 소유자였다. 1868년 그는 부하라 칸국의 주요 도시인 사마르칸트를 점령하고 조약을 체결했는데, 칸국의 독립은 인정되었지만 사실상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항에서 부하라의 칸이 러시아의 황제에게 ‘보호’ 받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로써 부하라는 러시아의 ‘보호국’이 된 것이다. 카우프만은 1873년 마침내 중앙아시아의 마지막 칸국인 히바를 점령하고 그 군주로 하여금 러시아 황제의 ‘순종하는 신하’임을 인정하는 조약에 서명케 했던 것이다. 그리고 1884년 유목민족인 투르크멘족의 근거지인 메르브(Merv)를 점령함으로써 드디어 러시아의 남진은 끝나게 된다.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이 과연 ‘불가피’한 일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지만 매우 복합적인 여러 요소들이 동시에 작용한 것임은 분명하다. 즉 안전한 국경을 확보하기 위한 갈망, 불안정한 주변국으로부터 나오는 도발, 중앙아시아에서 영국으로부터 밀려날지 모른다는 우려, 동시에 외교적 지렛대나 경제적 이익 혹은 군사적 영광에 대한 유혹 등이 끼어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보다 약 100년 전 청나라의 건륭제가 준가르를 붕괴시키고 신강을 점령했고 이제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모두 장악함으로써, 유라시아의 내륙지역 전체가 러·청 두 제국에 의해 분할되고 국경이 최종적으로 닫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지난 2000년간 지속되어 온 역사의 수레바퀴, 즉 하나는 북방의 유목세력과 남쪽 농경세력 간의 각축, 또 하나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동서교류라는 배경을 갖고 전개되던 역사의 패턴은 멈추게 되었고, 중앙유라시아는 이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20세기라는 격랑을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
 


▲ 타슈켄트 점령 후 1865년 6월 기념촬영한 러시아 군인들.
‘타슈켄트의 황금열쇠’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1865년 6월 30일 타슈켄트의 귀족대표들은 12개의 성문을 여는 황금열쇠를 갖고, 거기에서 80㎞ 동북방에 떨어진 곳에 있던 체르니아에프의 군영을 찾아가서 그에게 헌정했다고 한다. 12개의 황금열쇠에는 각 성문의 이름과 열쇠가 만들어진 날짜가 새겨져 있었는데, 처음에는 페테르스부르크의 전쟁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그 뒤 1933년 타슈켄트로 반환되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아직도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지만 나머지는 국립은행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한 일화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과장과 왜곡이라는 포장과 함께 유포된 것으로, 다분히 승리자를 미화하고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점령을 정당화하려는 심리적 작용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25)] 소비에트 혁명과 중앙아시아

소련, 무슬림 단일국가 출현 막으려 카자흐스탄 등 5개‘스탄’으로 분할
볼셰비키는 중앙아시아 무슬림 세력을 혁명 파트너로 삼았다가 소비에트 정권 수립 후엔‘민족주의적 공산주의 배척’명분 탄압

▲ 소련에 의해 멸망한 부하라 칸국의 마지막 군주 무함마드 알림 칸(1880~1944). 1911년 촬영. 미 의회도서관 소장.
 

오늘날 우즈베키스탄이 독립하기 전, 즉 과거 소비에트 연방을 구성하는 일원이었던 ‘우즈베키스탄 사회주의공화국’으로 존재할 당시 사람들이 부르던 ‘국가(國歌)’는 다음과 같은 가사로 시작되었다.


앗살람! 러시아 형제여,
그대는 위대한 민족!
불멸의 수령,
우리의 레닌 동지에게 영광 있으라!
자유를 위한 투쟁의 길에서
우리는 전진했으니,
소비에트 나라에서
우즈베크는 영광을 얻었도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우리 애국가의 가사를 생각해본다면, 도대체 한 나라의 국가라고 하기도 어려운 내용이 아닐 수 없다. 누가 보아도 ‘큰 형(Big Brother)’ 러시아에게 노골적으로 아부하는 듯한 국가는 당시 우즈베크 민족의 처지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지만, 이런 식의 가사는 우즈베크뿐만 아니라 타지크와 투르크멘 등 중앙아시아 다른 공화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우즈베크가 1991년 독립한 직후 가사를 갈아치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가사만 바뀌고 곡조는 옛날 그대로이니, 이는 러시아 지배의 역사적 유산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에는 소위 ‘스탄(‘-stan’은 원래 이란어에서 ‘…의 땅, 지방’을 뜻하는 접미사)’을 돌림자로 갖는 5개의 공화국(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기스스탄·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이 독립해 있는데, 소비에트 시대가 남긴 가장 큰 역사적 유산은 바로 이 같은 민족의 분할이다. 즉 이 지역이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에 편입될 당시에는 그렇게 분명히 나뉘어 존재하지 않던 민족이 소비에트 체제를 거치면서 5개의 독자적 민족으로 형성되고 오늘날과 같이 각자 독립된 국가를 갖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은 20세기 전반 볼셰비키 혁명이 터지고 소비에트 체제가 확립되는 와중에 중앙아시아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20세기 초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중앙아시아에서는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은 크리미아 출신의 타타르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Ismail Gasprinsky·1851~1914)였는데, 그는 소위 서구식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전통적 이슬람 교육방식을 지양하고 새로운 내용의 커리큘럼으로 이루어진 교육을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와 의견을 같이 했던 지식인들은 소위 ‘자디디즘(Jadidism)’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계몽운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일어나던 범(汎)투르크주의·범이슬람주의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들이 부하라를 중심으로 봉건적 관습의 타파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피트라트(Abdarrauf Fitrat·1886~1938)를 비롯한 이들은 소위 ‘부하라 청년단(Young Bukharans)’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의 목소리와 노력은 제정 러시아의 식민통치자들에 의해 견제를 받거나 러시아의 보호국으로 남아있던 부하라 칸국의 지배층에 의해 탄압을 받았고, 결국 이렇게 절망한 중앙아시아의 지식인들은 개혁이 아니라 사회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대안을 모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바로 그때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혁명이 터졌고 제정 러시아가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새로 수립된 임시정부는 중앙아시아의 민족적·문화적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 러시아 제국의 식민주의적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 영내의 무슬림(이슬람교도)대표들은 그해 5월 회의를 열고 범이슬람주의와 범투르크주의를 공식적으로 채택해 러시아 민족과의 차별성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런 가운데 10월에 다시 볼셰비키 혁명이 터졌고, 임시정부 측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지지를 필요로 했던 그들은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다.

적군과 백군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결국 무슬림들도 양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러시아와의 타협을 거부한 채 게릴라식 투쟁방식을 택했던 ‘바스마치’ 운동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민족문제에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보였던 적군(赤軍) 측에 가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볼셰비키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은 결국 같은 배를 타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다른 목표를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결별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즉 계급과 민족, 양자 가운데에서 어느 것이 더 우선시되어야 하는가를 두고 양측은 전혀 타협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즉 무슬림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민족문제, 즉 민족의 자결과 번영이라는 지상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다.

그들이 사회주의를 택한 것은 민족 해방을 위한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을 동원하고 조직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일찍이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 보다 많은 민족주의자와 제휴할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겉으로는 민족주의자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지만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혁명가들은 사실상 “겉으로는 사회주의자이지만 속으로는 민족주의자”였던 것이다

레닌은 백군(白軍)과의 투쟁과정에서 이 같은 민족주의 진영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지시에 따라 스탈린은 1917년 ‘민족문제 인민위원회(Narkomnat)’라는 조직을 만들어 위원장이 되었다. 그루지야 출신이었기 때문에 민족문제의 유용성과 위험성을 동시에 잘 알고 있던 그는 많은 무슬림에게 일단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개방적이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무슬림들도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세력이야말로 중앙아시아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하고 적군에 적극 가담했던 것이다.

▲ 중앙아시아 무슬림의 대표였던 술탄 갈리에프.
당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주장을 가장 집약적으로 대표했던 술탄 갈리에프(Sultan Galiev·1892~1940)라는 인물도 처음에는 스탈린과 매우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그를 돕고 있었다. 우랄산맥 남쪽 바슈키르 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영내의 많은 무슬림이 혁명에 가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장은 공산주의·민족주의·이슬람, 이 3자를 결합한 것으로서 오늘날 ‘술탄 갈리에프주의’라고 명명되어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물론 그의 사상은 소비에트 체제하에서 거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 이념적 유효성은 잃고 말았지만,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들이 근대 세계 속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자신들의 미래에 관한 체계적 비전으로 제시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시대적 표상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술탄 갈리에프의 주장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은 ‘프롤레타리아 민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레닌의 제국주의론에서 도출된 개념이다. 즉 레닌의 이론은 자본주의 국가 간 식민지 쟁탈전으로 인해 계급투쟁의 양상은 국제화되고, 이에 따라 전 세계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양분되며, 혁명은 그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일어나 제국주의의 연관고리가 분쇄된다는 것이었다. 이는 종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형성이 미약한 것으로 여겨지던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야 할 필연성과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론이었다. 그러나 술탄 갈리에프는 이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전 세계가 ‘가진 민족’과 ‘못 가진 민족’으로 양분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예를 들어 영국·독일·프랑스의 중산층은 중앙아시아의 부유층보다도 더 부유한 것이 현실이며, 기본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성숙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회 내적인 계급 갈등보다 약소민족에 대한 우세민족의 집단적 착취가 더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전 세계는 ‘프롤레타리아 민족·국가’와 ‘비(非)프롤레타리아 민족·국가’로 양분되어 있고, 따라서 혁명은 바로 ‘민족해방’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민족 해방이 성공하면 민족 내부의 계급문제는 자연적으로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고, 민족 해방을 통해 ‘계급 없는 사회’가 아니라 ‘계급 없는 민족’을 이룩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그는 민족을 혁명의 기본단위이자 출발점으로 설정했는데, 민족은 공통의 역사와 전통을 갖는 단위이고 중앙아시아에서 각 집단이 공유한 그러한 전통은 바로 이슬람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의 이상은 원시 이슬람의 정신에 이미 구현되어 있고, 그 실현의 구체적 현장도 이슬람의 ‘움마(umma·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인정하되 그 광신성과 미혹성에 대해서는 경계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결국 이슬람을 공통의 유산으로 갖는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이 연합해 해방을 성취함으로써 ‘투란(Turan) 공화국’을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술탄 갈리에프와 그의 동료들이 ‘민족생활’이라는 잡지를 통해서 주장한 이러한 내용은 결국 소련 영내, 특히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모든 무슬림을 하나로 묶는 ‘투란민족’을 상정하고 그 정치적·문화적 독립을 주장한 셈이었다. ‘투란’은 ‘투르크’의 또 다른 명칭이니, 결국 공산주의를 표방하기는 하되 독립된 투르크인들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소련 집권층과의 입장 차이는 너무나 분명했고, 이것은 마침내 1924년에 극명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해에 열린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스탈린의 맹렬한 비난에 뒤이어 술탄 갈리에프는 이탈과 반역의 죄목으로 비판 받고 당적을 박탈당했고, 이어 호자에프(Fayzullah Khojaev), 리스쿨로프(Turur Ryskulov) 등 다른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이 뒤따랐다. 이러한 비판, 숙청, 처형은 1937~1938년경 절정에 이르렀다. 

물론 이 시기에는 스탈린 개인 숭배가 강화되면서 수많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도 체포·처형되었다. 그러나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스탈린 개인의 우상화와는 별도로 소련 공산당의 기본 입장이 강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특히 1920년대는 소련공산당이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의 ‘포위’로부터 극도의 위기의식을 느끼던 시기였고, 그 같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혁명의 수출보다는 내적 안정이 필요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계급 주도하의 혁명보다는 우선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주축이 된 반(反)제국주의 운동을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 천명되었고, 터키의 케말 아타투르크, 중국의 장제스, 이란의 레자 샤 등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무슬림 민족주의자들은 이 같은 노선을 비판하면서 이들 후진지역에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혁명의 수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무슬림에 대한 탄압은 술탄 갈리에프와 같은 정치가뿐만 아니라 작가, 예술가, 학자로까지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이슬람 자체에 대한 박해도 병행되어 1942년경 중앙아시아에서 모스크의 수는 2만6000개에서 1312개로 급감했다. 이렇게 해서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에 무슬림 민족주의적 공산주의는 완전히 뿌리 뽑히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후루시초프에 의해 일부 인사에 대한 복권 조치가 이뤄지긴 했지만, 그들의 이념은 이미 동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황이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 당국은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단일 민족·국가의 출현을 막기 위해 소위 ‘민족분할(natsional’noe razmezhevanie)’ 작업에 들어갔다. 이 결정이 술탄 갈리에프의 숙청이 있었던 1924년 공산당대회에서 이루어졌던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렇게 해서 1924년에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이 만들어지고, 1929년에는 타지키스탄이, 1936년에는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이 성립되었으며, 1937년에는 각 사회주의공화국의 헌법이 채택되면서 드디어 ‘분할’ 작업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부족적 차이가 민족의 차이로 바뀌었고, 서로 다른 방언이 이제는 독자적 언어로 인정 받게 되었다. 더구나 투르크인들의 내적 결속을 견제하는 쐐기를 박기 위해 동부 이란어를 사용하는 타지크인들을 별도로 독립시켜 공화국으로 만든 것은 당시의 현실과는 전혀 무관한, 그야말로 로마제국이 즐겨 사용하던 ‘분할통치(divide et impera)’의 정신에 충실한 정치적 결정이었던 것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한 뒤 탄생한 5개의 ‘스탄’ 공화국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의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민족자결을 주장하던 목소리가 강제로 침묵되고 대신 소비에트 정권에 의해 시행된 민족분할적 식민정책의 잔재가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의 국가들이 직면한 오늘의 문제와 미래의 비전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올바로 인식하고 소비에트 시대가 남겨준 유산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극복하는 데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 바스마치 운동의 지도자 엔베르파샤)1881~1922)
 

바스마치 운동

제정 러시아에 저항한 무슬림의 독립운동

바스마치 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1916년 여름, 제정 러시아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된 중앙아시아 무슬림들의 독립운동을 가리키는 러시아어이다. 러시아 측에서 이를 비하해 ‘도적, 강도’ 등을 뜻하는 바스마치(basmachi)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917년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이 연속해서 터지고 백군과 적군 사이에 내전이 치열하게 진행되는 동안, 이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상당한 군사력을 확보하고 독자적 활동공간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 지도층은 호자에프와 같은 자디디즘 계열의 지식인에서부터 무함마드 알림과 같은 부하라의 군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복잡했기 때문에 결속력은 비교적 취약했다. 내전이 끝나갈 무렵인 1921년에는 터키에서 국방장관까지 지낸 엔베르 파샤(Enver Pasha)가 이 운동에 가담해 무장세력을 재조직하여 투쟁을 이끌었으나 1922년 적군의 반격에 의해 피살되고 말았다. 그 뒤 바스마치 운동은 게릴라식 저항의 형태를 띠다가 사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