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라비

아랍어를 공통어로 사용하는 이슬람교 문화내에서 발전된 철학이 아라비아 철학이다. 아라비아 철학은 반드시 아라비아인의 철학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인종면에서 볼 때 아라비아인 철학자는 유명한 킨디 정도이다. 그 외는 모두 이란인 ·터키인 ·유대인이다.

알파라비도 이들 가운데 속하는 터키인(투르크인)이다.

( 과거 카자흐스탄의 지폐의 앞면에는 알파라비의 초상이 그려져 있었다. )

그러나 그들은 이슬람교의 통일하에 아랍어라는 공통어를 사용하고 풍속 ·습관이 같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인종의 공감이 형성되어 아라비아 철학이라는 하나의 독자적인 영역이 형성되었다. 아라비아 철학은 주로 7세기 후반부터 13세기에 걸쳐서 한편으로 그리스의 철학사상을 받아들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슬람교의 테제와 조화시키면서 발달한 독특한 철학이다. 철학을 아랍어로 팔사파(falsafa)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어 필로소피아(philosophia)에서 유래된 외래학문임을 나타낸다.

이 아라비아 철학은 12세기 이래 유럽에 계승되어 스콜라 철학을 비롯, 여러 유럽 사상의 기초가 되었으며 이들에게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기원은 5~7세기에 걸쳐 비잔틴의 동방정교회에서 쫓겨난 네스토리우스파()와 단성론자() 등 이단 그리스도교도들이 그리스 사상을 시리아 지방으로 전파한 데서 시작된다. 여기서 니시비스, 에데사, 준디 셔프르를 중심으로 수많은 철학서, 특히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저작과 폴퓨리오스나 알렉산드로스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서 등이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7세기 전반, 이슬람이 시리아 지방을 정복하기 이전에 이미 서(西)아시아는 헬레니즘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리아 헬레니즘이 바로 다른 아라비아어 문화와 마찬가지로 뒤에 아라비아 철학을 꽃피게 한 토양을 마련한 것이다.

632년 무함마드가 죽고 정통() 칼리프 4대의 시대가 이어지는데, 661년에 제4대 칼리프인 아리 일족을 멸망시킨 시리아 총독 무아위아가 우마이야왕조()를 세우기에 이르자 드디어 그리스 사상, 특히 J.다마스케누스의 그리스도교 신학에서 영향을 받아 신학적 기초가 전혀 없던 이슬람교가 그 철학적 기초를 문제삼게 되었다. 이 때 그리스적 합리주의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무타질라(Mu’tazila)파가 등장하여 《코란:Koran》이 신과 동등하게 영원하다는 사실을 부정하여 신()의 섭리의 절대성에 반대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여 스스로 ‘통일과 정의의 사람’이라고 불렀다. 통일이란 신의 유일성(따라서 코란의 종속성)을 주장하는 것이며, 정의란 인간의 책임의 근거로서 의지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이 와실 이븐 아타 등으로 시작되는 무타질라파에서의 그리스 사상과의 접촉은 일반적인 시리아 헬레니즘을 배경으로 한 역시 간접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750년에 아바스왕조()가 성립된 이후부터 그리스 원전()에 대한 직접적인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아라비아 사상은 다음 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첫째는 이른바 ‘철학자(:failasūf)’의 계보로 그리스 철학서를 직접 연구하는 새로운 유형의 학자를 의미한다. 킨디,알파라비, 이븐 시나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정통신학(:kalām)’의 계보로 아쉬아리, 가잘리 등의 흐름이 그것이다. 셋째는 아라비아의 신비주의 수피즘(ūfīya)으로 잘라루딘 루미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좁은 뜻에서의 ‘아라비아 철학’을 대표하는 것은 ‘철학자’ 계보이다. 이 계보에서는 한결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신플라톤적인 입장에서 파악하고 발전시켰다. 그 원인은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 플로티노스의 저작 《엔네아데스 Enneades》의 일부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으로 오전되기도 하고 프로클로스의 《신학원리()》 요약()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론()》이 된 사실에도 있지만 아무튼 거기에 하나의 독특한 철학적 조류가 생겼다. 둘째의 ‘정통신학’은 이와 같은 그리스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한 ‘철학자’들을 이단()이라 하여 배척하고 《코란》을 자의()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종래의 신학자와 같이 침묵하지 않고 스스로 철학적 개념이나 방법을 사용하여 ‘철학자’와 논쟁하기를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논쟁하는 사람(mutakallim)’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아쉬아리는 신의 절대성을 특이한 원자론으로 옹호하고, 가잘리는 기적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데 대한 오류를 증명하려고 하여 자연적 원인의 개념을 분석하지만 그것은 D.흄의 인과율()을 생각하게 한다. 셋째의 수피즘은 일면으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철학자’들처럼 오로지 이성적 토론으로 기울지 않고 오히려 금욕적 고행을 실천함으로써 자기의 신앙을 깊이하려 하고 다른 일면으로는 외적인 행위의 덕()을 중시하는 ‘정통신학’에 대하여 오히려 내적인 종교적 경건을 주시한다. 가잘리는 어떤 의미에서 ‘정통신학’과 수피즘의 접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잘리의 신랄한 ‘철학자’ 비판에 의하여 동방에서는 ‘철학자’의 전통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 후 이 계통은 에스파냐의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유지, 발전되었다.

그것은 이븐 바자, 이븐 투파일을 거쳐 이븐 루슈드에서 정점에 도달하는데 그는 가잘리의 《철학의 파괴》에 대하여 《파괴의 파괴》라는 저작으로 응답하고, 역사상 가장 정밀한 아리스토텔레스 주석()을 완성하여 아라비아 철학의 합리주의를 마지막으로 빛냈다. 이와 같은 아라비아 철학자의 지적 노력은 12세기 이후 서유럽에서 적극적으로 흡수 ·소화되어 서유럽의 진정한 출발점인 이른바 ‘12세기 르네상스’를 탄생시키게 된다. 종래에는 아라비아의 철학이나 사상을 서유럽이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관점에서만 보는 경향이 있었으나 앞으로는 오히려 서유럽 사상이 아라비아에 어떻게 의존하느냐 하는 관점에서 많은 것을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