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봄....의약 분업
2000년 4월 2일 주일
이젠 두꺼운 양복이나 외투를 입고 나갈 수 없습니다. 4월 2일....부활 주일이 들어 있는 생명의 달, 첫 주일날...이제는 뭔가
무겁다고 느껴지는 양복을 세탁해서 정리하기로 하고 가벼운 옷을 골라 입고 교회로 향합니다. 오전 예배 전 연습하기 위해 모이는
성가 대원들의 옷차림도 빨간 색, 노란 색, 화사한 색으로 수 놓고 있습니다. 성가대 연습을 하고 난 뒤에도 바로 본당에 들어가지
않고 웬지 뭔가를 기다리듯 교육관 안에서 두리번 거리며 창문 밖을 한 참이나 보고 난 뒤에야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이유는
뭘까요? 나른한 오후 시간, 분반 성경 공부 때문에 본당에 모여 있어야 할 중고등학생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따뜻한 봄햇살을
맞으며 야외 수업을 하려고 인근의 꽂이 화사하게 핀 정원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입니다. 제가 있는 도개공 아파트
어귀에도, 본가가 있는 부민동 임시 수도 기념관 앞에도 목련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고 벚꽂도 흐드러지게 피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보이는 산 빛깔도 더 연두색을 띤 푸른 색을 뽐내고 있고 불어 오는 바람도 살갗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지나갑니다. 만물이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새로운 계절이 접어 들었음을 알립니다. 비록 황사가 날아오고 거친 바람이 불어도 어김없이 하나님은 새 봄을
주셨습니다.
오후 예배가 마친 뒤(서부산교회 오후 예배는 2시 30분입니다) 유치부,유년부,중고등부 교사들과 목사님, 전도사님 이렇게 17명이 차에 나눠 타고 양산군 웅상읍에 있는 부전교회 기도원으로 향했습니다. 물론 저와 선화도 교사 자질 향상을 위한 교사 세미나에 중고등부와 유치부 교사 자격으로 참여했습니다. 전형적인 농촌 속의 현대식 건물로 지어진 이 기도원은 전에도 교사회에서 와 본 곳이라 익숙한 곳입니다. 기도원 안은 현대식 시설로 뭐 하나 불편하게 없는데다가 기도원 앞 마당에는 농구 골대, 족구장, 야외 풀장(혹은 원형 극장) 이 들어와 있는 중고등부나 대학부 수련회 하기 딱 알맞은 곳인데 주변은 산과 나무로 둘러싸고 있고 한 쪽에는 누렁이와 백구(개의 일종임) 세 마리가 물끄러미 쳐다 보고 있는 곳입니다.우린 1시간동안 열심히 차를 몰아 이곳으로 올 수 있었고 도착예배를 드린 뒤 기도원에서 주시는 식사를 맛있게 먹고 앞 마당으로 나가 남녀를 총망라해 두 팀으로 나눈 뒤 농구 경기를 했습니다.(원래 목적은 교사 세미나입니다) 자매가 공을 잡으면 자매만 수비를 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을 채택해 14-13으로 경기가 마칠 때까지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고 이후 밤 10시가 다 될 때까지 주일학교을 어떻게 하면 생동감있게 만들 수 있을까를 두고 강의를 듣고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교사 세미나도 중요했지만 대지가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한 이 때, 들과 산으로 나가 새로운 기운을 느끼고 온 것이 참 좋았습니다.
2000년 4월 3일 월요일
요즘 저의 하루 일과는 7시에 시작됩니다. 7시부터 병원 본관 3층 세미나 실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부산시내 내과 전공의 4년차들입니다. 모두 60명 가량인데 이른 아침부터 모여 슬라이드를 보며 공부를 합니다. 부산대학교병원 내과의 경우에는 전공의 4년차 9월부터는 일체의 병원 활동을 중단한 채 모여 다가올 전문의 시험을 위해 공부만 하게 되며 지금도 우린 4년차 의국(공부방이라고도 불림)에 이미 들어왔고 제 책상도 놓여져 있습니다. 아침부터 하는 슬라이드 공부는 전문의 2차 시험이 슬라이드 시험에 대비하기 위함입니다. 2차 시험은 몇 장의 슬라이드를 미리 보여 주고 그 슬라이드에 해당하는 질병에 대한 물음이 나오는 형식인데 시험 문제가 되는 슬라이드 들은 각 병원에서 출제 위원들에게 1년에 두 차례 미리 올리게 되고 우린 전국에 있는 병원들이 지난 몇 년 간 올린 약 3천장의 슬라이드들을 통틀어 아침마다 보고 있습니다. 물론 필기 시험을 대비한 공부도 꾸준히 해야 하기에 요즘은 별로 틈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중대한 일이 생겼습니다. 지난 30일...전국의 의원급 기관과 전공의들이 파업하고
종합병원에서 원외 처방전을 발행하기로 결정했다가 김대중 대통령과 의사단체 대표들간의
면담이 있은 후 철회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복지부와 협의를 하는 과정에서 의사들의
입장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것은 여전하였고 마침내 전국의 의원급 병의원들이 다시 휴업을
하게 되고 전공의들도 4월 6일부터 8일까지 파업을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에 정부에서
시행하려는 의약분업을 바라보는 저의 입장은 이렇습니다. 첫째, 의약분업은 좋은 제도이고
빨리 정착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 의약분업의 취지가 약물의 오남용을 막는 것임을 생각할 때 이번
의약분업안에는 의사 처방없이 약국에서 팔 수 있는 약제의 종류를 선진국 수준으로 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전문의약품(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구입할 수 있는 약제)의 비율이 70%정도 됩니다. 이번에 합의된 내용은 60%에도
못 미칩니다. 게다가 환자들이 아주 자주 찾는 약제들이 일반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의약 분업의 중요한
취지인 약물의 오남용은 도저히 막을 수 없습니다. 약물의 분류에는 의사의 의견이 최우선 반영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의사가
처방한 약제가 없는 경우 약사가 다른 약으로 대체하는 이른 바 대체 조제의 경우에도 약제의 효능이 똑같다고 입증된 경우에만
(약효 동등성 검사) 허용되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 의약분업 안에는 약사의 임의 조제를 금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법에
명시되어 있더라도 하위 법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무런 강제적 구속력이 없습니다. 현재도 많은 약국에는 소위 카운터 맨
이라는 사람들이 약사 행세를 하면서 약을 팔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구체적인 하위 법규가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은 상태에서 막상
7월이 되어 의약분업을 시행하게 되었을 때 약국에서 지금처럼 약을 사러 온 사람에게 약을 함부로 준다면 그것을 어떻게 막겠으며
그 책임은 누가 지게 됩니까?
의료법상 의료인은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의사, 한의사, 간호사, 조산사 바로 이 네 부류입니다. 약사는 의료인이 아닙니다. 약을 다루는 전문가이지만 병에 대해 공부한 사람은 아닙니다. 약을 먹어야 하는 환자의 생리,해부,병리,약리,조직에 대해 공부하고 질병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공부한 사람이 의사입니다. 약은 질환의 원인과 경과에 대해 추적할 수 있고 필요한 검사로 환자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는 의사의 책임 아래 투여 되어야 합니다. 동네 약국에서 약을 지어 주고는 있지만 약을 받는 사람들의 혈청검사나 심전도 검사를 시행한 적이 없고 다른 기관에 그 약이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대한 고려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약국에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많은 의사들이 걱정하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사실 의료 수가 현실화도 중요합니다. 의사도 사람이고 나이 35세나 되어야 제대로 제대로 의사 노릇을 하는 현실에서 가정을 세우고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선 돈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좀 가난하면 어떻습니까? 자신의 일에 만족할 수 있고 자긍심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만족하며 사회속에서 주어진 나의 길을 묵묵히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의사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능력이자 의무인 환자에게 필요한 약을 처방하는 권리에 대해 정부나 다른 단체들이 제한하려는 데 기인된 것입니다.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실이며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사안인 것입니다.
의료의 시행 주체는 의사입니다. 그렇다면 의원과 병원에서 많은 환자를 보게
되는 의료진이 그렇게 반대하는 의약분업 안이 있다면 억지로 그것을 시행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 좀 더 긍정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 순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 의사들의 분위기는 잘못된 의료행정을 보고 있을 수
없으며 모두가 다 실정법 위반으로 구속된다 하더라도 이번에는 정확하게
우리들의 뜻을 밝혀야 한다는 것으로 모아지고 있습니다. 오는 4월 6일부터
8일까지 저도 병원안에서의 진료 활동을 중단합니다. 물론 응급실이나 입원
환자를 보살피는 담당 선생님들의 일부는 환자를 위해 계속 병원에서
근무하겠지만 최소한의 인원을 뺀 나머지 인원은 서울로 올라가 잘못된
의약분업을 바로 잡으려는 저희들의 뜻을 보이기로 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맘 그지 없습니다. 저 역시 열심히 환자를 진료하고 내시경을
하고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싶습니다. 제게 있어서는 혹시 의료 수가가
현실화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받아 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노력만큼 대가를 받지는 않더라도 의사의 처방 없이 약국에서 마음대로 팔 수
있는 약을 늘리려는 기도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저와 같은 기독 의사들의 단체인 한국 누가회에서 공식 채택한 의약분업에 대한 입장입니다. 지난 1999년 12월 4일 한국 누가회 학술 윤리부 주최, 밝은 의료사회를 위한 누가들의 모임(밝누모) 주관으로 누가(기독 의사를 지칭하는 말, 성경에 나오는 누가 라는 인물은 의사였음) 들을 위한 의약분업 토론회가 있었습니다. 여러 토의를 통해 의약 분업에 대한 밝누모의 입장을 채택할 수 있었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이사회에서 통과 되었습니다.
의약분업에 대한 밝누모의 입장
한국 누가회는 의료 사회에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언하고 실천함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 의,치,한의사와 기독 의,치,한의대생으로 구성된 초교파적인 신앙공동체입니다. 지금 논란 중인 의약분업은 단지 세속적인 문제로만 치부해 버릴 수 없는, 기독 의사들도 결코 비켜갈 수 없는 중요한 문제로서 이에 대한 누가회의 신앙적 관심과 행동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는 우리는 이제껏 침묵하였습니다. 우리의 침묵은 분명 누가회의 정신과 양립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지난 기간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관심과 행동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왜소화하였다는 사실을 회개합니다. 그리고 이제라도 누가회의 정신을 온전히 구현하는데 나서고자 합니다. 이에 의약분업과 관련한 누가들의 입장을 아래와 같이 표명합니다. |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약분업은 예정대로 2000년 7월에 시행되어야 합니다. 의약분업은 의약품 오남용으로부터 국민건강을 지켜내고 리베이트와 같은 잘못된 관행을 극복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도입니다. 따라서 현재 제기되고 있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의약 분업 자체가 취소되거나 연기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전체적 판도에서 조망할 때 의약분업의 장점이 단점을 상쇄하기 때문입니다. |
의보 수가의 적정화는 의약분업의 성공을 위한 필수적 요건입니다. 우리는 올바른 개혁을 위해선 일정한 대가의 지불이 필요함을 인정합니다. 한편으로 개혁의 성공을 위해서는 가능한 한 대가를 최소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약분업 역시 기본적인 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사 집단을 포함한 각 집단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작금의 의사집단 내에서의 의약분업에 대한 반발의 움직임은 지나친 대가의 지불에 대한 위기 의식에서 상당부분 기인한 바 이에 대한 보건 당국의 적극적인 배려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11월 15일 발표된 약가 인하와 의보 수가 인상은 의사 집단의 위기 의식이라는 불씨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약품의 실거래가 적용이 엄격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차액이 합리적인 방식으로 의보수가, 특히 진찰료에 반영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과잉진료나 비급여 대상의 증가 등 편법을 이용한 의보 수가의 보상 노력이 지속될 것이며 그 폐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이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의료의 파행적 모습을 극복하고 의약분업의 성공을 위해서도 의보수가의 현실화가 필수적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자 합니다. 아울러 처방료와 조제료의 적정한 산정을 통해 각 집단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최소화할 수 있기를 보건당국에 촉구합니다. |
불법 임의 조제 금지는 의약분업의 성공을 위한 핵심적 내용입니다. 이것은 '시민단체 합의안' 마련 당시 의협-약사회-보건당국-시민단체 내에서 인식의 공유를 이루었던 부분으로 이에 대한 논란과 의구심이 확산되고 있는 것은 의약품 오남용 금지라는 의약 분업의 근본 취지나 이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 의사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는 불신의 근거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법조문에 대한 충분한 검토는 물론이고 국민들의 약국 이용관행이 부추길 불법 임의 조제의 유혹을 감시하고 개선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할 것입니다. |
보건 의료 재정의 확충은 의약분업의 성공을 위한 기본적 토대입니다. 의약분업을 비롯하여 앞으로 제기될 많은 의료 개혁의 과제에는 의료 비용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뒤따를 것입니다. 지금처럼 4% 대에 머물고 있는 보건 복지 예산으로 국민복지와 건강을 건전하게 보장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희망입니다. |
우리는 의약분업의 성공적 정착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의약분업이 궁극적으로 국민들의 건강을 신장시킬 획기적인 제도있을 알리는데 앞장설 것과 의약 분업이 잘 정착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합니다. 또한 약사들과의 협동을 전제로 한 분업의 진면목이 살아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국민 여러분께도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수많은 약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약은 꼭 필요한 약만 써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의약품에 대한 현재의 손쉬운 접근이 제한될 필요가 있습니다. 국민 여러분도 의약분업으로 인해 야기될 일정한 불편에도 불구하고 이를 능라하고도 남음이 있는 건강상의 이익을 고려하여 적극 협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우리는 보다 나은 의료 문화와 진료 여건의 조성을 위하여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나치게 낮게 책정된 의보수가가 리베이트, 과잉진료, 비급여 대상의 확대 등 바람직하지 못한 의료 문화를 온존시킨 구조적, 제도적 토양이었음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화가 하나님과 환자 앞에 결코 떳떳할 수 없는 죄악임을 고백하며 우리 또한 이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했음을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이에 새롭게 결단합니다. 의약분업 이후에도 여러 형태의 불건전한 의료문화가 완전히 척결되지는 않을 수 있지만 우리는 신앙 양심과 배치되는 어떠한 형태의 유혹도 단호히 배격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진료실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진정한 치유와 사랑의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배전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
누가들의 세계 2000.1,2 중에서